※ 본 자료는 2010년 05월 14일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과 현대문학작가론 수업에 쓰인 발제문입니다. 발표는 저 외에 두 명의 학우와 함께 진행했고, 그 학우들이 쓴 부분은 대부분 삭제했습니다. 

타워, SF로 현실을 말하는 방법

“우리 노동을 그렇게 하자!

우리 재미를 위한 혁명을 하자!”

- T.H.로렌스


(발표자 이름은 생략)


목차


1. 들어가며                                                                          

2. 작가 소개                                                                         

가. 약력                                                                           

나. 『타워』의 줄거리                                                              

3. 작가론 - 누가, 왜 배명훈을 읽는가?                                                

가. 배명훈은 왜 SF 작가인가?                                                      

나. SF라는 장르의 목적                                                            

4. 작품 분석                                                                         

5. 배명훈의 ‘빈스토크’                                                                

가. 타워의 의미                                                                    

나. 타워의 권력이 돌아가는 방식                                                    

다.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인가                                                        

라. 타워의 주인에게 묻는다                                                         

6. 다중의 자율성에 거는 희망                                                         

7. 참고 자료                                                                         



1. 들어가며


배명훈의 『타워』는 쉽게 읽힌다는 의미에서 이번 수업 시간에 소개되었던 작품 중에서 가장 환영받는 작품이었을 것이다. 빈스토크라고 하는 가상의, 그러나 현실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무대에서 딱히 불편하지 않게 유쾌하게 진행되는 풍자와 유머들은 높은 점수를 줄만하다.

본 발표에서는 배명훈이 소설 창작에 SF 기법이 사용된 맥락과 배명훈이 가상의 무대 건설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바에 중점을 두어 살펴보고자 한다.


2. 작가 소개


가. 약력


1978년 부산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우수논문상 수상). 그 어떤 창작 모임과도 연결되지 않은 채 혼자 글을 써오다가 학부 재학 중이던 2004년에 제출한 「테러리스트」가 ‘대학문학상’을 받으면서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이 당시 자신이 썼던 작품 중에서 가장 문단문학에 가까운듯한 작품을 냈는데도 심사평에서 SF 운운하는 것을 보고 비로소 자신의 소설이 SF와 연결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2005년 '스마트D'로 '제2회 과학기술창작문예' 단편 부문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SF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 당시 수상자 모임을 통해 SF 소설가 및 번역가인 정소연을 통해 ‘환상문학웹진 거울’을 소개받았으며, 이 웹진의 필진으로 활동하게 된게 주요한 영향을 끼쳤다.

이후 환상문학웹진 거울을 비롯한 여러 인터넷 지면과 동인지를 통해 꾸준히 작품을 발표해왔다. 2007년에는 공동 단편집 『누군가를 만났어』를 통해 메이저 출간에도 본격적으로 끼게 된다. 잡지 『판타스틱』 등에 단편을 수록한 바 있다. 첫 소설집으로 연작소설집 『타워』를 출간했으며 현재는 장편 소설 집필 중. 「에스콰이어」2007년 1월호 "The Newest: 2007년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중문화 예술의 첨병 14인"에 선정되었으며, 단편 {안녕, 인공존재}로 제1회 문학동네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나. 『타워』의 줄거리


(생략)


3. 작가론 - 누가, 왜 배명훈을 읽는가?


가. 배명훈은 왜 SF 작가인가?


약력에서도 확인되듯 배명훈은 그의 독자들에게 주로 SF 작가로 소개되었고, 그의 소설 또한 SF라는 틀 안에서 읽혀왔다. 작가 자신이 SF팬덤 내부에서 활동하면서도 스스로의 작품을 소위 ‘장르 소설’이라는 테두리로 이야기하려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상당히 특이한 요소라 할만하다. 따라서 배명훈의 소설을 SF라고 규정할 때, 『타워』는 대단히 기묘한 위치를 얻게 된다. 배명훈을 SF작가로 만든 것은 배명훈이 아니라 그 독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한국의 SF 독자들이 ‘한국 SF 작가’들에 대해 대체로 냉소로 일관해온 것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라 할만하다. 80년대 초반부터 해외 원서를 구해다 읽으며 자생한 SF 독자들이 한국 작가를 ‘제대로 된’ SF 작가로 인정하는 경우는 대단히 드물었으며, 특히 문단 쪽에서 “SF적 상상력”을 차용하여 썼다는 작품들은 외려 SF독자들로부터 “그들은 SF를 모른다”며 조소를 당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각주:1] 그 정도의 폐쇄성을 보이던 SF 독자들이 한 작가를 문단 쪽과 한 마음이 되어 지지한다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라 할만하다. 배명훈과 같은 작가들이 문단과 기존 SF 팬덤 양측의 관심을 모으는 현 상황은 상당히 유념해볼만하다. 배명훈이 문단과 SF 팬덤의 경계지역에 서 있으며, 이들을 매개할만한 위치에 서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나. SF라는 장르의 목적


SF라는 장르에 대해 정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SF 독자들끼리도 SF란 장르가 무엇인가에 대한 견해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본토라 할만한 미국에서조차도 작가들이 “SF란 SF팬들이 ‘이건 SF야’라고 가리키는 것들”(프레드릭 폴), “SF란 우리가 SF라고 부르는 것”(데먼 나이트), 심지어는 “SF라고 출판되는 모든 책은 SF다”(노먼 스핀라드)라고까지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SF란 무엇이다-라고 말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각주:2] 다만 SF의 하위 분류 방식에 대해서는 대체로 합의되는 바는 있다. 크게는 두 가지로 나눈다.

첫 번째는 ‘오락물’로서의 SF이다. 영화 《스타워즈》와 같은 우주 활극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흔히 SF라고 하면 이러한 경향의 작품을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정작 SF계 내부에서는 이러한 작품들을 SF로 인정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현재까지도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상태다. 미국의 하드 SF 작가 테드 창이 《스타워즈》류의 작품을 "우주선과 레이저가 등장하지만 핵심은 500년 전, 또는 1000년 전 쯤에 모험 이야기"라고 평가하면서 SF가 아니라고 주장한 것은 이러한 경향을 대표한다.

두 번째는 ‘문학’으로서의 SF이다. SF가 결국은 문학이며 문학의 본질을 실현하는 장르라는 점에 주목하는 셈이다. 전자와의 차이점은 SF를 통해 ‘경이감’(Sence of Wonder)이라는 감성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경이감이란 SF 독자들이 SF를 읽음으로서 세계가 종전과는 다르게 보이게 되는 순간, 기존에는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감각·감성을 자각하게 되었을 때 느끼는 ‘충격’을 이야기한다. 랑시에르가 ‘문학의 정치’라는 개념을 통해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이게 하며, 킁킁대는 동물로 취급되었던 사람을 말하는 존재로 만든다.”[각주:3]고 주장했던 것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물론 ‘경이감’에 대한 추구는 비단 SF만의 것이 아니다. 그 점에 대하여 SF는 SF만의 경이감이 ‘과학적 상상력’에서 비롯되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즉 과학이 세계를 사유하는 방식에 따라 세계를 해석하고, 거기에서 비롯된 상상력을 통해 경이감을 불러일으킨다면 그것이 훌륭한 SF 소설이라는 것이다. 물론 핵심은 여전히 ‘과학적 상상력’이 아니라 ‘경이감’이다. 유전자 복제나 우주여행 같은 자연과학적 소재를 끌어다 쓴다 해도 그것이 현재의 독자들에게 세계 인식의 변화, ‘경이감’을 안겨주지 못한다면 그 작품은 훌륭한 SF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 ‘문학적 SF'를 지지하는 작가/독자들의 입장이다. SF 또한 현재의 독자들에게 현재에 대한 이야기를 이야기하기 위한 문학양식이라는 것이다.[각주:4]

『타워』또한 마찬가지다. 이 작품이 SF라고 해서 이 작품이 얼마나 참신한 무대를 마련했는가, 얼마나 기발한 상상력을 보였느냐에 주목하는 것은 그다지 권장할만한 독법이 아니다. 빈스토크 타워가 정확히 몇 층짜리 건물인가, 현실에서도 구현 가능한 건물인가 따위의 문제는 이 소설에서 굉장히 사소한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그 대신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상은 빈스토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거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4. 작품 분석


사람들을 억압하는 완강한 권력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권력의 중심에 누가 있는지 알 수 없고 때문에 저항할 대상도 분명하지 않은, 빈스토크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통해 배명훈은 그 불명확한 대상이 주는 억압에 저항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지금부터는 각각의 이야기에서 나타나는 우리 사회의 모습과 각 이야기에서 찾아낼 수 있는 권력에 대한 대응법을 중심으로 작품을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생략)


5. 배명훈의 ‘빈스토크’


가. 타워의 의미


『타워』의 무대인 빈스토크에서 빚어지는 군상은 우리가 사는 사회의 모습과 닮아있다. 그러나 『타워』의 무대인 ‘빈스토크’를 곧 한국 사회의 풍자를 위한 수단으로 이해하는 것도 온전히 타당해보이지는 않는다. 어떤 식으로건 모든 소설은 현실에 대한 은유를 담기 마련이다. ‘빈스토크’라는 무대 자체는 한국 사회일 수도 있고 미국일 수도 있으며 또 다른 어떤 나라일 수도 있다.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사회에 시사하는 바를 읽어낼 뿐이다. 타워는 넓게는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세계의 모습 그 자체를, 좁게는 한국 사회를 대변하는 공간이다. 개개인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와 그 내부의 권력관계를 지닌 사회라면 타워와 비슷한 양상을 띠게 마련이다. '타워'라는 모호한 제목 또한 그러한 점을 상징하는 듯 보인다.


나. 타워의 권력이 돌아가는 방식


물론 작품에서는 빈스토크 상류층의 볼썽사나운 모습이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동원 박사 세 사람」에는 지도자층(시장과 정박사)의 성적 타락 및 돌고 도는 양주 선물을 통한 애매하고 미묘한 뇌물 문제 등이 나타나고 있다. 「자연 예찬」에는 언론인 및 지식인들의 비양심적인 침묵 및 청탁 비리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다. 코스모마피아에 대한 선제공격 및 민간 지역에 대한 무차별 폭격 등 국제적 만행을 저지르면서도 의회는 책임을 회피하고, 용역 업체의 직업군인의 생명권은 방기된다. 바벨탑 아닌 바벨탑, 선한 사람이 최소 열 사람 이상 거주하고 있음으로 인해 신으로부터 멸망을 유예 받은 소돔과 고모라처럼 취급되던 공간(「샤리아에 부합하는」)이 바로 빈스토크 타워의 현재다.

시장이나 시의회를 비롯한 권력 상층부에 대한 작가의 시선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 그들은 국가를 대표하고 국가를 책임져야 할 존재들임에도 국가의 안위에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타워를 떠나려 하는, 한마디로 국가에 대한 권리만을 보장받을 할 뿐 책임은 지지 않는 존재들로 묘사된다. (시장 전용 엘리베이터의 존재 「엘리베이터 기동 연습」, ‘무슨 문제만 생겼다 하면 제일 먼저 달아나버릴 인간들’ 「샤리아에 부합하는」, 시위대 승리 후엔 이미 지구 반대편에 가 있던 시장 「광장의 아미타불」)


“최 행정관님. 도대체 누가 최종 명령을 내렸죠?”

최신학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답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최종 명령권자는 당연히 의회였다. 상대인 코스모마피아가 국가는 아니므로 의회에서 선전포고를 의결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늘 병력이 주둔해 있던 지역에서 벌어진 일이라 새로 파병 절차를 밟지도 않았다. 하지만 작전 개시 이면에는 분명히 정치권의 광범위한 승인 혹은 압력이 있었고, 보나마나 그 뒤에는 인공위성 관련 기업들의 어마어마한 이권 문제가 개입되어 있었을 것이다.

(중략)

질문에 답해야 할 사람들이 질문을 던지는 위치에 몸을 숨기려 하기 때문이었다.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책임을 지지 않기로 한 날. 그렇게 심판의 날이 다가왔다. (「샤리아에 부합하는」, 타워 189-190p)


그러나 소설 속에서 묘사되는 모습들은 대부분 우리가 상류층에 대하여 이미 알고 있었거나 혹은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습들의 재현이다. 우리는 상류층이 마땅히 사회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에 있고 그에 대한 권리를 누리면서도 정작 책임을 지지 않는 사태에 대해 분노한다. ‘윗것들이 윗것답게 행동하지 않는다’라는 인식으로 요약될텐데, 이러한 인식에서는 배명훈 또한 독자들의 인식 수준에서 크게 앞서 나가지 않는다. 독자들과 눈높이를 같이하는 것이다. 그러나 배명훈의 문제의식은 그러한 눈높이 맞추기, 권력에 대한 냉소적 풍자 수준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의 시선은 시스템을 돌아가게 하는 구조, 시스템의 전체로 향한다.

권력의 사용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것은 비단 권력 상층부만이 아니다. 관료제 내의 중간 관리자들을 통해서도 보여진다. 중간 관리자들, 혹은 말단 직원들은 상부에서 내려오는 명령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며 기계적으로 일을 진행시킨다. 「엘리베이터 기동 연습」의 주인공은 이유도 모른 채 상부의 명령에 따라 520층으로 군 병력을 이동시키면서 자신을 기계에 비유한다. 「광장의 아미타불」에 등장하는 주인공 역시 기마경비대에서 일하면서 시위대를 진압하는 폭력 행사 - 코끼리, 최루탄을 섞은 물 폭탄 등등 - 에 거리낌 없이 참여한다.

권력에 참여하지 않는 일반 시민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작중에서 ‘현대 도시인이라면 누구나’ 가진 것으로 묘사되는 먼지는 현대 시민들 또한 시스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시스템의 부조리에 대해 이야기해야 함에도 자신의 ‘먼지’ 때문에 침묵하고, 결과적으로는 부조리의 안정적인 고착화에 기여한다.


현대 도시인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존재의 흔적. 초고층 문명의 사회계약은 누구든 털면 먼지가 나기 때문에 서로 털지 않는게 합리적이라는 암묵적 합의 위에서 이루어졌음. 그러나 이 사회계약이 법률상 책임까지 면제해주지는 못함. 예) 그러자 시 정부에서는 비판하는 사람들을 불러다가 먼지를 털었다.(「자연예찬」중에서)[각주:5]


요컨대 시스템의 억압은 무능하고 부패했으며 무책임하기까지 한 권력 상층부에 의해서만 행해지지 않는다. 시스템의 약자들조차도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각자의 방식에 따라 시스템을 지탱한다. 문제는 그 시스템 전체에 대한 책임을 가진 자가 아무도 없다는 점이다. 결국 타워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그 소유주가 뚜렷하지 않은 권력이다.


시위대는 아미타브의 이름을 부르면서 컨테이너 가건물같이 생긴 방어선을 뚫고 정부 청사 쪽으로 몰려 들어갔어. 대승이었지. 하지만 그러면 뭐해. 빈스토크에 그런 난리가 날 때마다 늘 그랬듯이 시장은 그때쯤 지구 반대편에 가 있었는걸. 전략적으로는 별 의미 없는 승리였어. 전술적으로는 완승이었지만. 시위대가 그 싸움을 통해서 얻어낼 수 있는 건 별로 없었거든.(p.184)


전근대의 왕조 사회나 독재 국가에서라면 시위대의 싸움에 저런 낮은 평가를 내리지는 못할 것이다. 그 무렵에는 책임을 물어야 하는 대상이 명확했다. 모든 권력은 중앙의 1인자에게 책임이 집중되었고, 그가 잘못했기 때문에 - 혹은 사악하기 때문에 - 시스템의 억압이 지속된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폭군이나 독재자의 목을 치는 희생 제의를 통해 국가는 정화되고 새로운 생명력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빈스토크와 같은 대의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그러한 책임 전가가 불가능하다. 사회 모순은 이제 더 이상 권력 상층부만의 책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위대가 정부에 그 책임을 물으려 하는 한, 그들의 투쟁은 정부 청사 진입 여부와 관계없이 늘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요행히 시장을 사로잡는데 성공해서 정부를 전복하는데 성공한다 해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대의 민주주의 자체가 유지되는 한 시장과 시의회는 몇 번이고 다시 구성될 테고, 그 권력 상층부를 지탱하는 관료제 조직 또한 재건될 것이다. 결국 그들은 시스템을 통제할 수 없을 것이다. 빈스토크의, 그리고 우리 사회의 문제는 더 이상 어느 누구만의 책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러한 판단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들 중 그 누구도 시스템이 부여하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현실 인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아니 이미 우리도 시스템의 일부이다. 이러한 냉소적인 묘사들은 2000년대 작가들에 대한 정혜경의 지적을 떠올리게 한다.


최근 작가들의 사유 속에는 그 누구도 자본주의적 네트워크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깊은 허무주의가 깔려 있다. 이 허무주의는 현실 도피의 결과가 아니라 현실을 직시한데서 생겨났다는 점에서 타당하다.[각주:6]

 

그러나 배명훈은 정혜경이 말하는 ‘최근 작가들’과 같은 허무주의로 향하지 않는다. 시위대의 성과를 ‘전략적으로는 별 의미 없는 승리’였다고 평가하지만 한편으로는 시스템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그려낸다. 「자연예찬」에서는 개인적 비리가 노출될 것을 감수하고서 결국 사회 비판을 하고 마는 작가를, 「타클라마칸 배달사고」에서는 경위야 어떻든 사막에 떨어진 조난자를 구해내는 네티즌들을, 「샤리아에 부합하는」에서는 수색영장을 받아내지 못하자 직접 난동을 부려서라도 빈스토크를 구해내려 하는 공무원이 나온다. 자기가 사랑하는 공간의 문제를 더 이상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스스로 책임지려 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누구나 ‘먼지’를 가졌기에 시스템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그 먼지를 가진 사람들이 뭐든 하지 않으면 세상은 아름다워지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려 한다.


라. 타워의 주인에게 묻는다


왜 시장이나 시의회가 책임지지 않는 문제를 시민들이 책임져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누리는 이 공동체의 주인이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빈스토크 타워의 주인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최고 권력자인 시장이라고 단정 지을 수도 있겠다. 타워의 권력 장의 중심에는 시장이 있으며, 의회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시장은 권력만 있을 뿐 책임-주인의식-을 지려 하지 않기 때문에 실제적 주인이 아니다.

당위적으로는, 타워에 사는 주민들 개개인이 실질적인 주인이 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것은 시민들이 투표권을 통해 타워에 대한 권력을 행사하는 존재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작중에 나오는 빈스토크 시민들이야말로 빈스토크라는 무대, 공동체에 대한 애정을 느끼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주인됨은 주인의식, 다시 말해 공동체에 대한 애정과 책임의식을 가지지 않은 사람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권리다.

빈스토크 시민들이 보여주는 공동체에 대한 애정은 국가가 부여하는 ‘애국심’이나 권력욕 따위와는 무관한 영역에서 발휘된다. 오히려 빈스토크 시민들은 국가의 존재에 대해 냉소적이거나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 대신 빈스토크 시민들의 내면에 가득찬 것은 그들이 일상생활을 하고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무대, 빈스토크라는 세계 그 자체에 대한 애정이다. 타워를 제2의 바벨탑이라고, 빈스토크를 소돔과 고모라로 보았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조차도 결국에는 타워를 멸망시키기 위한 폭탄을 기폭시키지 않았던 것에는 이들의 신앙이 약화되어서도, 빈스토크 정부에 회유되어서도 아니다. 이웃에 대한 애정이 이념과 종교조차 초월한 것이다.

따라서 빈스토크 타워의 실제적 주인은 마땅히 타워에 대해 주인 의식, 주권 의식을 지닌 개인 혹은 집단이라야 한다. 타워를 ‘아름답게 만들 책임을 가진 사람’은 바로 타워라는 무대와 그 무대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애정을 느끼는 사람들 자신들이다. 배명훈은 그러한 개개인들에게 호소하고자 한다. 작중의 표현을 빌린다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책임’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 당신들이 정말로 이 세계를 사랑하고, 시스템이 문제라고 여긴다면 단순히 앉아있기만 해서는 안된다고 이야기하고자 한다. 더 이상 시스템의 문제를 부패한 권력층에게만 묻는 대신, 스스로의 책임을 회피하는 대신 직접 시스템을 개선하기 위해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먼지’를 신경쓰면서 자신의 책임을 방기한다면 시스템의 억압은 계속되기 마련이라는 것이 배명훈의 소설에서 전달되는 메시지다.

그는 여섯 개의 장을 관통하면서 수평파들의 폭탄 테러며 시민들의 반전 시위는 수박 겉핥기 식으로 언급만 한 채 대부분을 개개인들 각자의 판단과 양심적 행동에 맡긴다. 정부의 통제나 간섭 없이 자율적이고도 효율적으로 돌아가는 운영 체제는 대부분 시민들 개개인의 연합과 협력에 의한 것이다. 그것도 열의나 구호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개인화된 시민들 각자의 ‘개인적 기호에 따른 판단’에 의한 것이다.

「타클라마칸 배달 사고」에는 타워의 우편 시스템에 대한 묘사가 이루어진다. 정부가 운영하는 엘리베이터에 의한 우편배달이 훨씬 비싸기 때문에 타워의 시민들은 대부분 파란 우편함을 이용하는데, 이 우편함에 편지를 가져다 놓으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우편배달의 업무를 이행한다. ‘익명 사회에서 익명 사람들끼리만 통하는 나름의 신뢰’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빈스토크는 개인을 신뢰한다.’

같은 장에서, 용역 회사 직원에 대해 정부가 구출을 방기하고 있을 때 힘을 발휘하는 것은 전 세계 곳곳에 있는 개개인들이었다. 사람들은 약간의 홍보만으로도 자발적으로 사이트에 접속해 실종된 민소를 찾는다. 그런데 그들의 이러한 선택은 선동적인 구호에 의한 것도, 민소에 대한 인류애에 의한 것도 아니다. 그저 기분 내키는 대로의 개인적 취사선택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재미’는 결국 국가가 포기했던 구성원을 구해냈다. 그게 바로 국경과는 무관하게 움직이는 제 나름의 공동체의 힘이다.


병수는 잠이 확 달아났다.

“왜? 지금 이 시간에 이만 칠천 명이 어딨어? 한밤중에.”

“아, 어디 보자. 빈스토크에서 육천 명 조금 넘고, 우리나라에서 오천 명쯤 되고, 나머지는 다른 나라에서 접속했어요.”

“왜?”

“왜는 무슨 왜요? 그냥 찾는 거지.”

“그러니까 걔들이 왜? 뭔가 오류 생긴 거 아니야?”

“오류 같은 거 없어요. 뭐가 있어야 오류가 나죠. 사진하나 달랑인데. 은수 씨가 빈스토크에 돌린 편지가 번역이 돼서 외국으로 갔어요. 그래서 그냥 찾는 거예요, 그냥. 이유가 필요한가? 원래 인터넷에서 하는 일이 그렇잖아요. 그냥 해요, 그냥.”(「타클라마칸 배달 사고」, 타워 109p)


이밖에도 청탁 뇌물 수수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양심적으로 글을 쓰는 작가 K, 무비판적으로 명령을 수용해 군을 이동시켰다가 520층 폭발 후 후회하는 남자 주인공 등을 통해 작가는 개개인의 선택에 대해 계속해서 ‘보여준다.’ 결국 마지막 순간 타워를 지켜내는 것은 샤흐리반 및 열다섯 군데의 가게 주인들의 선택이었다. 열다섯 사람 개개인의 선택은 타워의 멸망을 유예시킨다. 이를 통해 짐작하건데, 작가가 거대한 시스템을 혁파하는 방법으로 제시하는 것은 ‘개인의 정치’다. 개개인이 시스템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에 대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거나 행동하는 것, 그것만이 시민 개개인이 마땅히 지니고 행사해야 할 권력을 소유하고 시스템을 통제하는 방법이다.


(생략)


「타워」는 익명성이 다분한 대중에게 희망을 건다. 이는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아우또노미아의 ‘다중의 자율성’과 맥락을 같이 한다. 민족 국가의 강화나 국가 권력 장악이라는 주권 형식 안에서의 혁명 전략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언제나 같은 패턴의 반복이 거듭될 뿐이다.(독재자 다음의 독재자, 결함 다음의 같은 결함의 탄생) 국민 국가적 주권 형식 안에 권리를 양도하는 네이션=스테이트의 강화가 아니라 양도할 수 없는 자율성의 개화로서 민주주의를 구성해야 하는 것이다.

 「타워」는 여섯 장에 걸쳐서 권력이라는 것의 불합리성, 부실함, 허점에 대해 보여준다. 권력과, 권력에 의해 운영되는 사회적 시스템은 이러한 허약함으로 인해 단 한곳의 빈틈으로도 쉽사리 무너질 수 있을 만큼 불안정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배명훈은 바로 이러한 권력-시스템적 허약함을 인지하고, 다중의 자율성이 이 빈틈을 노려 언제든지 시스템을 전복시킬 수 있다는 데 희망을 두었다고 볼 수 있다. 작가 K, 엘리베이터 기동 팀의 관리자, 아미타브를 맡은 용역 경비대원, 샤흐리반과 열 다섯명의 가게 주인들, 민소를 찾아 밤새도록 사진을 뒤진 전 세계 네티즌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율적 결정과 그로 인한 결과를 통해 ‘개인의 자율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시스템에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 스스로가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다.


6. 다중의 자율성에 거는 희망


배명훈의 소설에서는 적나라한 풍자도, ‘혁명’에 대한 의지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권력의 압제에 따른 절망 또한 없다. 이 점에서는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하 ‘난쏘공’)과 상당히 다른 면을 보인다. 기존의 한국 문단이 보여왔던 리얼리즘에서 벗어난 기법을 사용하여 옳지 못한 현실에 대해 그리고자 했다는 점에서 두 소설은 매우 닮았다. 그러나 그 기법의 활용법에 대해서는 두 소설이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난쏘공』의 ‘행복구 낙원동’은 풍자는 있으되 유머는 가능하지 않은 공간이었다. 낙원동 주민들에게 있어 시스템의 억압은 너무나도 압도적이었기에, 도저히 그들을 상대로 웃어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행복구 낙원동은 이름과는 달리 절망만이 가득한 곳이다. 지식인 지섭은 시스템적 문제를 언급하며 노동자를 계몽하는 지식인과 시스템 자체를 바꾸기 위해 노동 운동에 나설 것을 촉구한다. 지섭과 같은 지식인층의 계몽에 각성한 난쟁이의 자식들은 노동조합을 만들어 시위에 나서지만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한다.[각주:7] 난쟁이의 첫째 아들이 사형당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난쏘공』에 희망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방식으로 저항하고 투쟁하건 간에 절대로 변하지 않는 사회적 시스템이 굳건하게 버티고 있을 뿐이다.

반면에 『타워』의 ‘빈스토크 타워’는 풍자와 유머가 모두 가능한 공간이다. 배명훈의 유머러스한 말솜씨는 체제의 강고함을 묘사하면서도 체제의 허술함 또한 함께 보여준다. 빈스토크는 무책임한 권력이 터무니없는 힘을 휘두르는 공간이지만, 동시에 ‘무책임’의 허술함 속에 지탱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타워』는 ‘권력장’이라는 개념을 통해 권력이 움직이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하고(「동원박사 세 사람」) 권력이 굉장히 엉성한 임기응변으로 움직이기도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엘리베이터 기동연습」) 즉, 소설은 현실의 모습을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현실을 억압하는 시스템의 구조에 대해 파악하고자 한다. 권력의 구조를 파악하면 그 사회의 주인들이 자기 현실을 보다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는 믿음, 거기에서 비롯된 희망이 빈스토크 타워를 지탱하는 힘이다.

배명훈은 전근대적 공동체의 상실과 개인의 파편화를 비관하지 않는다. 그런 비관은 굳이 소설을 통해서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가능하다. 소설을 읽기 이전에 현대인 누구나 지독하게 실감하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 상황 자체는 이미 돌이킬 수 없다. 그러나 상황을 절망하고, ‘세상을 이따위로 만든 누군가(남)’을 조롱한다고 해서 상황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익명 사회에서는 익명의 사람들끼리만 통하는 나름의 신뢰”(p.82)의 한계는 분명하지만, 우리의 조건이 이렇다면 변화는 이 조건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래서 배명훈이 꺼낸 카드가 바로 ‘웃음’이다. "조롱과 비웃음은 억압적 권위를 겨냥하는 무기이면서 만인을 유쾌하게 만“[각주:8]든다. 유머를 통해 권력이 지닌 권위를 벗겨내고 권력의 구조와 허위를 폭로한다.[각주:9]

배명훈이 웃음을 활용하는 방식은 바흐친이 주창한 ‘카니발’의 개념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카니발이란 “대화와 공동체의 의식이며 사람들을 해방시키고 함께 참여케 함으로써 공동생활에 참여하도록 만든다. 폭력적 파괴의 형태인 혁명과 달리 카니발은 대화 속에서 이루어지며 반항의 유쾌한 몸짓이다.”[각주:10]라고 주장했다. 바흐친은 웃음의 장인 축제를 통해 모인 사람들이 체제와 억압에 대해 - ‘사유’하는 대신 - 비웃음으로서 그 권위를 추락시키는 것, 그리고 그렇게 모인 사람들끼리 하나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웃음’의 기능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바흐친의 시대에 비해 훨씬 파편화되고 시스템의 억압 또한 보다 막강해진 우리네 시대에 바흐친이 기대했던 것과 같은 카니발이 이루어질 수는 없다. 지금의 우리 사회는 어떤 정체성을 공유하는 하나의 공동체 사회라기보다는 익명성 아래 침묵하는 개개인들의 군체에 가깝다. 거기에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익명 사회에서는 익명의 사람들끼리만 통하는 나름의 신뢰’ 정도 밖에, 혹은 한국이라는 거대한 사회 아래에서 만들어지는 여러 군소 공동체 관계 뿐이다. 어차피 시스템 전체에 대한 저항이 불가능하다면, 개인에게 뭔가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면 그 정도 선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이야기해주면 될 뿐이다. 즉, 신랄하게 풍자하고 비꼬지만 행동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타워』에서 드러나는 배명훈 식 화법이다.


7. 참고 자료


민유기,「폭력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과 2008년 촛불신화의 역사적 의미」,『실천문학』2008년겨울호.

배명훈, 『타워』, 오멜라스, 2009.

연합뉴스, <네그리 : 제국, 다중, 그리고 아우또노미아>, 2003, 10, 02

자하, 「독점 인터뷰 - 작가 배명훈을 만나다 2/2」, 『환상문학웹진 거울』 73호, 2009.

자크 랑시에르, 유재홍 역, 『문학의 정치』, 인간사랑, 2009.

정혜경, 「백수들의 위험한 수다」, 『문학과 사회 2005년 여름호』, 문학과지성사, 2005.

정화열, 박현모 역, 『몸의 정치』, 민음사, 2000.

  1. 배명훈 이전에 SF 독자들에게 인정받던 한국 SF 작가는 『비명을 찾아서』의 복거일과 듀나(이영수) 정도가 거의 유이했다. 그러나 이들은 SF작가이기 이전에 지독한 (해외) SF 독자였으며, SF 독자들의 외서 취향과 맞는 면이 많았다. 예컨대 듀나는 하이텔 과학소설동호회 시절부터 창작과 번역으로 유명했고, 복거일 또한 미군기지에서 흘러나온 SF를 읽으며 성장했다. [본문으로]
  2. 특히 국내에서는 ‘공상과학소설’이라는 용어(Fantasy & Science Fiction의 오역. 원래는 두 장르를 한데 묶어 부르던 이름이다)가 널리 퍼지면서 혼란이 더욱 가중된 감이 없잖아 있다. [본문으로]
  3. 자크 랑시에르, 유재홍 역, 『문학의 정치』, 인간사랑, 2009, 12p [본문으로]
  4. 이러한 점을 강조하다 보니 1960년대 이후 미국에서 이른바 뉴웨이브 운동이 제기되기도 했다. 대체로 좌파 성향의 작가들이 주도했던 뉴웨이브 진영은 종전의 SF가 주로 ‘자연과학적 상상력’을 추구해온 반면 인문과학이나 사회과학을 통해서도 ‘SF적 경이감’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때 이후로 페미니즘이나 좌우갈등, 인종차별주의 등을 이야기하는 작품들이 활발히 창작되었다. [본문으로]
  5. 배명훈, 「부록-타워 개념어 사전」, 『타워』, 오멜라스, 2009, 264p. [본문으로]
  6. 정혜경, 「백수들의 위험한 수다」, 『문학과 사회 2005년 여름호』, 문학과지성사, 2005, 174p. [본문으로]
  7. 이 시위대의 실패는 「광장의 아미타불」에서 등장하는 타워 시위대를 연상시킨다. [본문으로]
  8. 민유기, 「폭력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과 2008년 촛불신화의 역사적 의미」, 『실천문학』 2008년 겨울호, 340쪽. [본문으로]
  9. 자하 “근데 또 보통 정치풍자 하는 분들은 글이 재미없거든요. 이야기가 없어요. 껍질만 있어요.” 명훈 “알라딘에 실은 인터뷰에 썼는데, 그냥 500층, 600층 이렇게 백 단위로 딱 떨어지면 풍자하긴 더 좋은데, 그럼 대안을 못 만든다는 거죠. 비웃기는 더 좋아요, 백 단위로 떨어지는 상징적인 숫자면. 근데 그 안에 사람을 살게 만들어야 하니까, 나는. 그래야…… 비판하고 나서 어쩔 건데? 하는 문제가 나오니까. 그래서 그걸 쓴 것 같고.” 자하, 「독점 인터뷰 - 작가 배명훈을 만나다 2/2」, 환상문학웹진 거울 73호, 2009. [본문으로]
  10. 정화열, 박현모 역, 『몸의 정치』, 2000, 81p.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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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들에게 고하라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이영도 외 9인 (해토, 2009년)
상세보기


시험 공부가 잘 되지 않으니 기분전환 삼아 서평이라도 써야겠다. 전체적으로는 판갤에 올렸던 글(링크)이 기반이다. 

-

이영도「별뜨기에 관하여
이영도의 SF 소설을 읽고는 한번도 만족해본 적이 없다. SF계의 클리셰들을 많이 가져다 쓴 티가 나서... (그나마 듀나처럼 클리셰를 잘 써먹으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고.)《헤인 연대기》의 '연맹'을 연상시키는 조직에다가 앤시블까지 등장하던데, 이건 아무리 봐도 어슐러 K. 르 귄의 영향이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이영도가 SF쪽에서는 아직 자기 색을 모찾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듀나 「죽은 자들에게 고하라
표제작. 듀나 이름값이 아니면 그리 나쁘지 않은 단편이기야 한데... 마이크 레스닉의 「늙은 신들의 죽음」과 비슷하게 흘러가려나 싶더니 결말이 조금 어처구니 없게 끝나서 기분이 상했었다. 우주인 중 한 명은 굳이 필요하지 않았다는 생각도 든다. 아마 다른 한 명을 위한 캐릭터였으리라. 자기가 어떤 계획을 세우고 실행했는지 독자들에게 알려줘야 하는데, 독백이라면 영 꼴이 이상하니까.

임태운「채널
재미없다. 대사도 그렇고 문장도 그렇고... 임태운 소설의 재미는 별 것 아닌 플롯을 재치있는 대사와 설명으로 맛깔나게 버무린다는 건데 이렇게 건성이어서야 곤란하다. 작가에겐 대단히 미안한 말이지만 대강 쓴 느낌이라 해야 하나. 전체적으로 좀 다듬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데커드' 형사는... 필립 딕일까, 로봇수사대 K캅스일까?
 
송경아「하나를 위한 하루
스토리야 별 것 없고 캐릭터에 기대는 소설인데... 핵심 인물 중 하나인 '형'의 성격이 그닥 일관되질 못하다. 권위적인듯 했다가 다정하고, 군림하는 듯 하다가도 그렇지 않고... 캐릭터의 성격이 변한다는게 아니라 그냥 튄다는 이야기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전반부는 정말 괜찮은데 후반부가 별로. 엔딩도 거기서 끝맺어질 시점은 아니었다. 기왕 쓸 거라면 차라리 더 길게 이어가는게 나았을 텐데.

설인효「진짜 죽음
총체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상황 설정, 캐릭터들의 행동 양상, 결말 맺는 방식 등등... 임태운의 단편 이상으로 안일한 작품이다. 이 책 읽을 분들은 그냥 건너 뛰라고까지 말하고 싶다.

노기욱「소울메이트
'과학이 당신의 사랑까지 해결해드리겠다!' 처음부터 이런 식의 프레이즈가 나오는 작품은 대개 결말도 결정되기 마련. 과연 기계에 대한 인간의 우월성을 확인하면서 끝난다. 나야 이런 결말을 그다지 싫어하지는 않지만 그 결말을 끌어내는 방식은 좀 더 정교해야 했다.

판갤에서 이 단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더니 누군가가 이 단편의 기반이 된 너비아니 씨의 엽편을 보여주었는데, 그 엽편 쪽의 완성도가 더 높았다. 좀 어거지로 끼어든다 싶었던 마지막 부분도 이 엽편에 실린 문단을 그대로 실으려다 보니 그리 되었던 모양. 또 너비아니씨는 '내 작품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동치성이라는 이름의 캐릭터가 한번쯤 나왔어야 했다'고 했는데,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다.

김보영「0과 1 사이
같은 앤솔러지에 실린 작품 중 가히 최고 걸작. 이 작품이 실렸다는 것만으로도 이 앤솔러지는 값을 한다. 커트 보네거트나 테드 창이 이미 비슷한 소재로 작품을 내긴 했지만, 그들의 소설에 견주어도 꿀리지 않는 훌륭한 작품이다. 그렇게 압도적인 비교 대상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이런 작품을 썼다는 것 자체가 경이적인 일이다.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문장들로 가득찬 좋은 작품.
 
'나는 아이들에게 너희 때가 좋았다는 말을 하지 않을 거야.
그 시절이 좋았다는 말을 하지 않겠다고
너희 나이 때엔 다 그런 거라는 말도, 누구나 겪는 일이라는 말도 하지 않겠어. 내게 그 말을 '하지 않는' 어른이 아무도 없다면, 그럴 수 있는 어른이 이 세상에 남아 있지 않다면, 내가 나이를 먹고 그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 되겠어. 그 말에 담긴 무심함과 비겁함을, 어리석음을 아는 어른이 되겠어.
- 김보영「0과 1 사이」 中

이런 위로를 듣고서 어떻게 울지 않을 수 있겠는가.

김몽 「차이니스 와이너리
괜찮은 작품이긴 한데... 뒷심이 많이 부족하다. 주인공이 귀국한 후를 좀 더 상세하게 풀었다면 어땠을까 싶다. 잘 나가다가 갑자기 급하게 끝맺어버린 느낌이다. 마감에 쫓기기라도 했던 걸까?

김선우「양치기의 달
고백하건데, 김선우의 소설은 단 한번도 만족스럽게 읽은 적이 없다. 그래도 이 소설은 그나마 괜찮은 편이었지만. 외계 행성에서의 탐험을 다룬 소설에서는 독자가 실존하지도 않는 그 세계에 관심 가질만한 이유를 부여해야 하기 마련이다. 어슐러 K. 르 귄의 『로캐넌의 세계』가 걸작이란 소릴 듣는 건 그런 작업을 아주 성공적으로 해냈기 때문이고. 그런데 이 소설이 그런 작업에 성공했는지는 상당히 미지수. 한마디로 거기 사는 사람들이 어떤 인종인지 별로 궁금하지 않다. 주인공도 영 매력적이지 않고. 생판 처음 만난 소녀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사랑'이라는 걸 어떻게 그리 쉽게 확신하는지 모르겠다. 나중에 주인공이 절망하는 장면을 그리기 위해 끼워맞춘 장면인듯 싶다. 그래서야 설득력은 떨어지고, 공감도 되지 않는다.

백상준「우주복」
처음 보는 작가이긴 한데... 나쁘진 않다. 다만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는 『로캐넌의 세계』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물론 표절이라고 말할 정도는 아니지만 썩 독창적이라고 하지는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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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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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소식이 올라왔다. 1주일 전엔가 거울에서 정소연님이 문지문화원 사이에서 '사회문학으로서의 과학소설'이라는 제목의 강의를 준비 중이시라는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그 강의의 정식 수업안이 올라온 거다. 강의명이 '과학소설과 소수자'로 바뀔 수도 있다고 하셨는데, 결국 원제대로 확정된 모양이다.

문지문화원 측에서 제공하는 강사 약력은 좀 간략한 감이 없잖아 있다. 궁금한 분은 북시 위키의 정소연님 항목 참조.(링크)

강의에서 다루는 작품들 자체는 읽어본 적도 없는게 거의 대부분이지만, 주제 자체는 무척 흥미롭다. 별다른 일이 없다면 한 학기 정도 수강해볼 생각이다. 유료 강의만 아니라면 후배들이라도 끌고 가봄직 한데...

장소는 아마도 신촌에 위치한 문지문화원일 듯.








사회문학으로서의 과학소설 - SF와 마이너리티
강사: 정소연
기간: 매주 목요일 19:00~21:00
시간: 09년 9월 17일부터 9회
대상: 일반
수강료: 170,000원
강좌 소개


사회의 이슈를 반영하는 기제로서 과학소설이 어떠한 특유의 도구들을 사용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과학소설이 보다 효과적으로 현실의 문제에 접근할 수 있었는가를 매 수업마다 대표작을 함께 읽고 검토하며 이해하는 수업입니다. 쥘 베른에서부터 시작하는 SF 개론을 극복하고,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동시대 문학으로서 SF를 이해하기 위한 강좌입니다.

* 참고사항
- 매 강의마다 정해져 있는 주 텍스트를 반드시 읽고 들어오셔야 합니다.
- 주 텍스트는 개강 전에 변경될 수 있습니다.
- 10월 22일(목) 수업은 휴강입니다.


강사 소개


정소연

SF 번역가이자 소설가. 제2회 과학기술창작문예와 제48회 서울대학교 대학문학상 가작을 수상했다.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 『어둠의 속도』, 『화성 아이, 지구 입양기』 등을 번역했고, 『잃어버린 개념을 찾아서』, 『한국환상문학단편선』, 『U, ROBOT』 등에 작품을 실었다.


강의 계획


1강. SF 개론
- 현대 영미 SF 사조 개괄
- SF가 갖는 소수성과 SF에서의 소수자
- 현대 영미 SF의 흐름을 시대순으로 개괄하며 각 시대의 주요 작품과 작가에 대해 함께 알아봅니다. 또한 SF 사조의 큰 틀 안에서 소수자에 대한 시선이 어떻게 바뀌어 왔는지 살펴봅니다.

2강. SF와 아동
- 올슨 스콧 카드, 『엔더의 게임』 : 과학소설에서 아동은 어떻게 주체가 되는가?
- ‘SF는 어린아이들의 장르’라는 선입견은 사실 오래 된 것이 아닙니다. ‘박사님’들의 사고실험 중심이었던 SF는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전환기를 맞게 됩니다. 대표적인 작품인 『엔더의 게임』을 통해 이러한 혁신을 이해해 봅니다.

3강. SF와 젠더
- 어슐러 르 귄, 『어둠의 왼손』 : 과학소설에서 젠더는 어떻게 외계성을 극복하는가?
- 어슐러 르 귄, 조안나 러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와 같은 SF 작가들은 젠더라는 이슈를 SF라는 틀을 통해 새롭게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반영한 대표적 걸작인 『어둠의 왼손』을 함께 검토해 봅니다.

4강. SF와 장애
- 엘리자베스 문, 『어둠의 속도』 : 과학소설은 장애를 어떻게 재해석하는가?
- 초기 SF에서 장애는 초인성과 연관되거나 전혀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대로 오면서 장애를 등장인물의 특징 중 하나로 자연스럽게 반영하거나, 장애 그 자체를 SF가 고민할 주제로 생각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5강. SF와 초인
- 시어도어 스터전, 『인간을 넘어서』 : 과학소설은 인간의 한계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 SF에서 초인은 『프랑켄슈타인』까지 거슬러 갈 만큼 뿌리 깊은 주제입니다. SF가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한계를 극복의 대상 또는 이해의 대상으로 보는 시각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6강. SF와 빈곤
- 어슐러 르 귄, 『빼앗긴 자들』 : 맑시즘은 과학소설의 유토피아 전통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 맑시즘과 네오 맑시즘은 SF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많은 작가들이 다양한 경제구조를 생각해 내 외계 또는 미래 세계로 그려냈습니다. SF의 세계관에 맑시즘이 끼친 영향을 알아봅니다.

7강. SF와 인종
- 닐 스티븐슨, 『다이아몬드 시대』 : 영미 과학소설이 갖는 인종적 한계는 무엇인가?
-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SF작가는 백인입니다. 유명한 흑인 작가들의 대표작은 거의 번역되지 않았습니다. 영미권에서도 이러한 인종의 불균형은 큰 논란거리인 바, 과학소설계의 인종논쟁을 살펴봅니다.


8강. SF와 한국
- 배명훈, 『타워』 : 한국적 과학소설이란 어떻게 가능한가?
- 최근 한국 SF 단편집이 활발히 출판되고 있고, 출간 예정인 장편소설들도 있습니다. 한국 SF의 변화와 가능성을 생각해 봅니다.

9강. SF와 미래
- 21세기 영미과학소설의 변화와 미래 : 주제의 확장과 이중소수자(minor minority)
- 강좌 정리
Posted by 최진석
TAG sf, 정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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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벤트 당일 전까지만 해도 여러 SF 팬덤 게시판에서 이야기가 되었던 듯 한데, 어찌된 일인지 후기 하나 올라오는 게 없다. 지난 번의『U, ROBOT』저자 간담회(이하 작가 간담회) 때도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곤 하나 이 정도로 반응이 없어서야 주최측 입장에서 보면 퍽 심심한 일이 아닐까 싶다.

다만 나 역시 썩 길게 쓸만한 행사는 아니었다고 생각하는지라, 단평 위주로 쓰려 한다.

  1. 비 때문에 행사 자체가 다소 지연되었다. 세 분의 주빈이 모두 도착하기까지는 약 1시간 정도가 걸렸는데, 그 동안 방문객들은 거의 방치되어있다시피했다. 지난 작가 간담회 때와는 달리 혼자 온 이들이 많았던 탓에 분위기도 서먹서먹. 운영진 일부는 안면 있는 몇몇 방문객들과의 잡담에 여념이 없으시던데, 다른 방문객들에게도 신경을 써주시는게 어땟을까 싶다.

  2. 참석자 수는 지난 작가 간담회에 비해서는 다소 적은 편이었다. 그 때야 주빈인 작가들이 다섯 분이나 왔고, 이번에는 번역자 세 분만 왔을 뿐이니 딴에는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정소연 씨가 '번역자에 대한 관심은 문학에 대한 더 많은 애정을 요한다'고 했던 것과 관계가 있을지 모르겠고. 그렇지만 당연히 보일 걸 ㅏ생각했던 이들이 오지않았던 데는 - 개인적인 사정이긴 하지만 - 조금 놀랐다.

  3. 운영진의 진행 능력은 지난번보다 많이 나아졌다. 일전의 간담회 때는 주최측이 중요한 질문들을 독점하려 한다는 인상을 상당히 많이 받았었는데, 이번에는 비교적 질문권을 독자들에게 많이 넘긴 것도 주목할만한 요소.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런 성격의 행사에서 진행자는 사회자로서의 자신과 질문자로서의 자신을 분리할 필요가 있다. 이 외에 이번에도 캠코더와 카메라가 동원되었는데, 앞으로 나올 SF&판타지 도서관 회지에 인터뷰 관련 내용이 실릴 거라 한다. (지난 작가 간담회도 마찬가지.) 그렇다곤 해도 영상은 남을 텐데 그걸 공개해줄 순 없을까 궁금하다.

  4. 세 명의 역자들에게 추천작을 물으면 하나같이 자신이 가장 최근에 번역한 작품들을 뽑았다. 번역하는 그때 그때마다 그 작품에 애착이 가기 때문이라나. 그 때문인지 질문자들의 질문도 대부분 최근작(ex: 송경아님에게는 렘의 『사이버리아드』에 대해 묻는 식)에 쏠렸는데, 다소 아쉽기야 하다. 특히 김상훈님은 워낙 많은 작품들을 번역하셔서 끌어낼 만한 이야기들이 많았을 텐데.

  5. 이하는 세 분의 역자들에 대한 인상평. 대단한 것은 아니다.

    • 송경아 : 세 분의 역자 중에서는 비교적 판타지 쪽에 많은 애정을 두어온 분이다. 워터가이드에서도 고양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셨고... 다만 이번 행사에서는 SF쪽의 이야기를 주로 하셨다.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SF 팬덤이라는 사실을 의식하신 듯. 판타지 번역에 대한 질문을 한두 가지 던져볼까 하다가 그냥 삼켜버렸다. 뒷풀이 자리에서라도 물으려 했는데 내가 뒷풀이를 가지 않는 바람에 생략. 질문에 대답하던 와중에 스스로를 생계형 번역자, 김상훈님을 취미형 번역자(맞나?), 정소연님을 지사(志士)형 번역자로 분류하셨던 게 꽤 재미있었다.
    • 김상훈 : 웹상에서는 다소 냉담한 기운이 느껴지는 중년이라는 느낌이었는데, 실제로 뵈니 꽤 활달하고 입담이 좋은 분이었다. 지난 작가 간담회 때 오셨던 곽재식님 이상이다. 공동 이벤트가 아니라 단독 이벤트, 간담회가 아닌 강연회를 열어도 혼자 몇시간쯤은 기세 좋게 이야기하실 듯한 분위기. 진행 때문에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잘라야 했던게 아쉬울 정도였다. 번역에 대한 가장 큰 동기는 '사리사욕'이라 대답.
    • 정소연 : 거울 기획 기사로 나온 인터뷰의 소제목에서 정소연님을 부른 호칭이 '맑고 아름다운 소녀'였다. 나중에 기사를 찾아 읽으며 좀 과한 표현이 아닌가 싶었는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확실히 소녀적 감성을 지닌 분이다. 인터뷰나 블로그에서는 종종 내비쳤던, 사회과학에 대한 관심과 문학 활동과의 연결 지점에 대해 물었어야 했는데 그 때는 생각나지 않는 바람에... 사실 정소연님은 본인 홈페이지에 Q&A란(링크)을 열어놓기도 해서, 진짜배기 팬이라면 평소 그 쪽을 이용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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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초, 『퍼언 연대기』를 읽던 무렵에 읽었던 책이니 사실은 꽤 전에 읽은 책이다. 마땅히 감상을 정리하지 못한 까닭에 비공개 상태로 해놓고서 간간히 한 두 작품의 단평을 추가하곤 해온 정도다. 그렇다고 쓸만한 평가가 이루어진 것 같지도 않지만... 커그에서 테드 창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길래 내친김에 몇 자 덧붙여서 내놓는다.

  1. 바빌론의 탑」 (Tower of Babylon)
    바빌론의 탑 건설기. 기독교인이라면 꽤나 관심 가질만하겠으나, 나로서는 그저 그랬던 작품이다. 물론 탑에 대한 묘사 등, 작품으로서의 완성도는 제법 괜찮은 편이지만 그 이상의 공감은 느끼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2. 이해」 (Understand)
    테드 창 식의 이능력배틀물이라 보면 될까? 호쾌하고 스피디한 전개가 재미있었던 작품이다. 이수영도 그렇지만 기본적인 실력이 있는 작가는 어느 장르에서건 제 진가를 발휘하기 마련이다.

  3. 영으로 나누면」 (Division by Zero)
    수학 전공자들이라면 꽤 좋아하겠지만 수능 이후로 수학을 완전히 놨던 나로서는 그저 좌절의 대상일 뿐. '천재의 좌절'은 내가 좋아하는 소재이지만, 묘사되는 재능을 이해할 수 없어서야 아무 소용이 없다.

  4. 네 인생의 이야기」 (Story of Your Life)
    이 단편집에 실린 작품들 중에서도 압도적인 걸작이다. 내가 편집자였어도 이 작품을 표제작으로 올려놓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언어학 전공자에게 읽히면 색다른 감상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하긴 하지만, 그보다 나를 감탄케 했던 건 이 작품에서 테드 창이 주인공의 정서를 전달하는 솜씨였다. 1인칭과 3인칭을 번갈아 사용해가며 정교하게 절제된 슬픔을 끼워넣는 수완은 정말 혀를 내두르게 한다.

    '뻔한 이야기이기에' 외려 완성미가 돋보이는 단편이란 것도 놀랍다. 모든 소설이 다 그렇지만 '뻔함'이라는 건 단편의 독 아니던가. 그런 걸 외려 장점으로 삼아버린 재주란 참... 김보영의 단편 「0과 1 사이」(링크)는 이 작품을 읽은 후 쓴게 아닌가 싶을 정도. 사실 이건 일전의 『U, ROBOT』 작가 간담회 때 직접 물어보려다가 괜한 오해를 주고 받게 될까 싶어 관뒀었다.

  5. 일흔두 글자」 (Seventy-Two Letters)
    골렘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바빌론의 탑」을 읽을 대도 그랬지만 과연 이게 SF가 맞는지 고민하게 만들었던품이기도 하고.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판갤의 베로스란 작자에게만큼은 절대 읽히고 싶지 않은 작품.

  6. 인류과학의 진화」(The Evolution of Human Science)
    이게 소설이긴 한 건가? 단편보다 더 짧은 엽편이라는 장르도 있다고는 하지만 이건 대체...

  7. 지옥은 신의 부재」 (Hell Is the Absence of God)
    천사 강림으로 인한 신의 은총이 죄다 신도들에게 신체적·정신적 변화를 - 신심 깊은 장애인으로 만들어버리거나 반대로 장애를 낫게하는 등 - 이끌어낸다는 이야기. 기적에 매달리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성인 컴플렉스'라는 단어로 나를 뜨끔하게 했던 작품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4월 4일자 근황에서도 다룬 바 있으니 딱히 언급하진 않겠다)

    결말은 제목 그대로라 딱히 예상하고 말 것도 없었다. 다만 이영도가 「행복의 근원」이라는 단편에서 '행복의 근원은 불행'이라고 주장했던게 생각나서 조금 재미있었다는 정도. 궁금해할 사람들을 위해 덧붙여두자면, 발표 자체는 「지옥은 신의 부재」 쪽이 3년 정도 이르지만 번역본을 기준으로 하면 「행복의 근원」 쪽이 9개월 정도 이르다.

  8.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소고 - 다큐멘터리」 (Liking What You See: A Documentary)
    김상훈 씨는 애초에 이 단편의 제목을 '얼짱신드롬 - 다큐멘터리'로 번역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이 중단편집이 처음 번역되서 나올 무렵에야 얼짱이라는 '신조어'가 한창 유행일 때였으니까 그런 생각을 했을 법도 하지만, 지금 와서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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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에 올라온 기사 보러가기

지난해 11월 초 거울 편집장님에게서 거울 필진으로 활동해보지 않겠냐는 제의를 받았었다. 제의를 수락했던 것도 그 무렵. 그러니까 저 서평은 스카웃(?) 제의를 받은지 장장 6개월만에 내놓은 결과인 셈이다. 어느 정도는 불가피하기도 했다. (작품이 부족해서건 내가 부족해서건) 서평으로 보낼만한 다른 책을 도무지 찾지 못한데다 2월에서야 《타임 패트롤》시리즈를 다 읽었으니까.

허나 그 뒤로도 두 달을 더 놀 정도의 가치가 있었냐고 묻는다면, 물론 그건 아니다. 기왕 이렇게 보낼 글이라면 차라리 2월 초에 보내는게 좋았으리라. 어쩌면 2권을 읽고 난 시점에서 - 서평 이벤트로 소모해버리는 대신 - 2권만을 중점으로 다룬 원고를 보내는게 나았을지도 모르겠고. 

아래는 거울에 보낸 서평에서는 빼버린 단평들이다. 사실 기사가 올라오자마자 소식을 올렸어야 정상일 텐데, 이 단평들을 정리하다 보니 며칠 늦어버렸다.



타임 패트롤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폴 앤더슨 (행복한책읽기, 2008년)
상세보기

타임 패트롤Time Patrol」(1955)
시리즈의 첫 작품. 같은 시리즈에서 사용되는 세계관이나 시간 여행에 대한 설명을 해주는 글이기도 하다. 그 자체로는 큰 인상을 주지 않지만 시리즈 전체로 보면 이런 작품이 하나쯤은 꼭 필요하다. 즉, 그 자체만 놓고 보면 재미는 별로 없다. 다만 셜로키언이라면 맨스 에버라드와 그의 동료가 빅토리아 시대 영국으로 갔다가 만난 탐정을 보고 실소할 수밖에 없으리라. 정확히 이름이 나오는 건 아니라 읽을 때도 설마 했지만, 역시나 셜록 홈즈에 대한 오마쥬 격으로 등장시켰던 듯 하다. 작가가 셜록 홈즈 팬클럽 회원이었다 하니, 거의 확신범.

왕과 나Brave to be a King」(1959)
키루스 대왕 시절의 페르시아 제국을 배경으로 한 단편. 2권에 수록된 「오딘의 비애」만큼이나 타임 패러독스를 크게 활용한 작품이다. 타임 패트롤 소속의 역사학자가 고대 페르시아로 넘어갔는데 어찌어찌 하다 보니 키루스 대왕이 되어버렸더라... 하는 이야기. 사실 썩 편한 심정으로 읽었던 작품은 아니다. 이 단편의 주인공이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키루스 대왕 시대에서 벗어나 원래 아내의 품으로 돌아간 뒤에도 더이상 만나지 못하게 된 섹스 파트너를 생각하는 지저분한 사내의 비극에 공감하기란 영... 차라리 반쯤악역으로 등장하는 페르시아 귀족의 처지가 더 애처로웠다. 글쎄. 문제의 '키루스 대왕'이 그의 시간대에서는 14년간 고대 페르시아에 머물며 그 삶에 적응해야 했다는 걸 감안해야 할까?

지브롤터 폭포에서Gibraltar Falls」(1975)
시간 여행을 소재로 한 연애물. 단편의 주인공인 노무라의 심리 묘사가 제법 근사하긴 하지만... 다소 중량감 떨어지는 소품에 가깝다. 시리즈의 주인공인 맨스 에버라드가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오딘의 비애」를 위한 실험작 쯤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정도. 「사악한 게임」에 이어 15년 만에 나온 단편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당시 이 단편을 접한 팬들이 얼마나 맥빠져 했을지 짐작할만 하다. 그 점만 아니라면 꽤 빼어난 단편인데.

사악한 게임The Only Game in Town」(1960)
유럽인이 아메리카 대륙을 지배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지키기 위해 타임 패트롤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갔던 중국인들을 저지한다는 내용의 단편이다. 요컨대 역사의 개변을 막기 위해 활동하는 타임 패트롤이 역사의 개변을 직접 만들어낸다는 글이기도 하다. 거울에 보낸 서평에서도 비슷하게 언급하긴 했지만, 2,3세계권 국가의 독자들이라면 영 탐탁찮게 읽었을만한 작품. 주인공인 맨스 에버라드는 중국인들의 문명이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전달되어서 유럽인이 개입되지 않는 강대국이 생겨나기라도 하면 어떻하겠냐며 나바호 인디언 동료를 설득하는데, 글쎄다. 읽던 당시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그게 뭐 어쨌다고" 하는 심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현대 미국인 독자 입장에서야 그게 대재앙일지 몰라도 우리네야 그런 심정에 공감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더욱이 맨스 에버라드를 비롯한 타임 패트롤의 입장은 그렇게 함으로서 훗날 아메리카 지역에서 일어나게 되는 온갖 학살을 지원한다는 말도 되고. 직접적인 참여는 아니지만 방관과는 또 다른, 간접적 지지가 아닌가. 작가가 미국 중서부 지역에서 태어난 보수주의자라는 걸 다시 한 번 생각케 한 단편이다.

델렌다 에스트Delenda Est」(1955)
'2차 포에니 전쟁에서 스피키오가 한니발을 물리치지 못했다면?'이라는 의문에 대한 단편이다. 다른 작품에서는 그저 가설을 설명하는 선에서 끝내는게 일반적이지만 이 단편은 정말 그렇게 역사가 바뀌어버린 상황에서, 타임 패트롤 대원들이 우리가 아는 역사로 되돌려놓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20세기에도 켈트 문화가 주류를 이루는 세계란 흥미로웠지만, 작품의 길이에 비하면 밀도가 다소 떨어지는 편이지 싶다. 「사악한 게임」과 비교한다면 정치적으로는 덜 불공정할지언정 재미 자체는 영 그렇더라는 이야기다.

바다의 별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폴 앤더슨 (행복한책읽기,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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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딘의 비애The Sorrow of Odin the Goth」(1983)
북유럽 신화의 오딘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분명 자신이 쓰려 하는 장르와 활용하려 하는 소재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선행될 때만이 나올 수 있는 걸작이다. 뜻밖에도 변변찮은 상 하나 받지 못했다는게 안타까울 따름. 《타임 패트롤》 시리즈 안에서 본다면 「왕과 나」와 여러 가지 의미에서 거의 대척점에 서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중편에 대해서는 예전에 거울에서 이야기한 바 있으니 이하 생략. 그 글을 쓸 때와는 현재 내 사정이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작품에 대한 평가만큼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링크)

바다의 별Star of the Sea」(1991)
표제작이긴 하나, 「오딘의 비애」를 먼저 본 사람들 입장에서는 좀 성에 안찰 수밖에 없겠다. 전체적으로 보면 「오딘의 비애」의 여성용 버전이라는 느낌이 강한지라... 

상아와 원숭이와 공작새: 타임패트롤 시리즈 3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폴 앤더슨 (행복한책읽기, 2008년)
상세보기

상아와 원숭이와 공작새Ivory, and Apes, and Peacocks」(1985)
솔로몬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지만, 정작 솔로몬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델렌다 에스트」 시절만 해도 어떻게든 역사적 인물(즉 스피키오 아프리카누스)을 등장시키더니 이 때쯤 되면 역사적 위인을 등장시켜야 한다는 압박감도 떨쳐낸게 아닐지. 물론 솔로몬 시대라는게 서구에서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민감한 소재라는 것도 감안해야겠고. 당대의 예루살렘과 티레 시와의 관계를 설명해주는 부분은 재미있게 읽었고, 맨스 에버라드가 만난 소년도 눈에 듸는 캐릭터였다만 사실 시간여행물로서 괜찮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굳이 점수를 주자면 B+ 정도의 느낌?

몸값의 해The Year of the Ransom」(1988)
스페인인 피사로가 잉카 왕을 잡고 인질극을 벌일 때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 다른 단편들에서도 간간히 역사 개변을 시도하며 악역으로 출연했던 '고양주의자'들이 재출연하지만 스페인인 기사가 눈부신(?) 활약을 펼치는 통에 이 단편에서의 비중은 낮다. 잘쳐줘봐야 중간보스급이고 실상은 '쟈코' 역일 뿐. 만일 타임 패트롤 시리즈가 영화화된다면 「몸값의 해」가 가장 먼저 손꼽힐 테고, 포스터에는 맨스 에버라드와 이 기사의 사진이 가장 크게 나오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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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 전쯤 작성해뒀던 평을 뒤늦게나마 올린다. 가능한한 읽자마자 올리는 것이 책의 예의겠지만, 판평대를 진행하는 도중에 그 심사 대상의 평을 올린다는 것은 그다지 적절치 않은 행동이었으리라. 그것이 호평이건 악평이건. 끝나고서 하는 말이지만, <바람의 열두 방향>이 대상을 수상한 작품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여름달님 말씀대로, 재미있기는 한데 영 지루하다. 아니, 정확한 표현으로는 '손에 잡히질 않는다'고  해야 하리라. 작품 수준도 괜찮고, 번역도 깔끔하다 여기면서도(읽을 때는 몰랐는데, 알고보니 이바닥에서 보기 드물게 신뢰받는 역자 중 하나란다) 영 내키질 않아 쉬어가며 4일만에 겨우 읽었으니... 이런 책이 이리도 안읽힐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다. 작품의 수준이 반드시 가독성을 보장해주지는 않는 것일까?

근래에 하도 책더미에 묻혀 살았던 탓에 머리에 쥐가 나 있었던 걸까? 마지막 단편을 다 읽었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이 "이제 지라르를 읽을 수 있겠구나!" 였던 걸 보면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아마, 판평대 때문에 책을 억지로 읽어야 했던 사정 때문이 아니었을까. 다치바나 다카시가 책을 빨리 읽으려면 '그 책을  서둘러 읽지 않으면 안될 환경을 조성해 스스로를 몰아붙이라'고 이야기했던게 생각나는데, 그것도 역시 사람 나름인 모양이다. 좋은 책도 의무로 읽으려면 영 못 읽어내는 걸 보니...

 아래는 단편집에 실린 작품에 대한 단평.
 
 

  1. 샘 레이의 목걸이 : '신선놀음 하다 보니 도끼 자루 썩었네' 류의 시간여행물. 서사도 <술이기(述異記>에 실려 있다는 그 고사과 별 차이가 없다. <로캐넌의 세계>의 애독자라면 그 작품의 발단이 되었다는 사실에 흥미로워 하겠지만, 작품 자체로는 그저 그렇다는 이야기. 헌데 이 경우는 고대 중국인들의 상상력에 감탄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르귄의 상상력을 탓해야 하는 것일까?
     
  2. 파리의 4월 : 역시 시간여행물이지만 <샘 레이의 목걸이>에 비해서는 상당히 유쾌한 작품. 타임머신을 통해 먼 과거와 먼 미래의 인물과 사귄다는 상상은, 꽤 흔한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근사한 공상이다. 단편집에 실린 시간여행물 중에서는 드물게 유쾌한 색채를 띄고 있는 작품인데, 아마 이것은 주인공이 '원래 세계에서 별로 존중받지 못하던' 인물이라는 것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3. 명인들 : 제목에서 얼핏, 헤세의 <유리알 유희>를 떠올리게 했던 작품. 이 작품도 '예술가 소설군'에 들어갈 수 있는 작품이니 크게 달리 해석한건 아니리라. '예술가는 억압과 통제 너머에 있는 진리를 꿈꾼다'는 주제가 반복되고 있다. 이 책에서 시간여행 다음으로 가장 즐겨 쓰이는 소재다. 보통 작가들이 이런 장르에서 자신을 투영하는 경우가 많은 걸 보면 이런 작품들에서  르귄의 속마음을 짐작해볼 법도 한데, 생각보다 쉽지 않다그 결론이 일관되지 않아 르귄이 무얼 말하고 싶어하는지  파악하기가 썩 쉽지 않다.
     
  4. 어둠상자 : 어둠이 왕에게서 왕자로 계승되는 것을 보면 '어둠'이란 권력자 사이에서 대물림되기 마련인 어떤 상처 같은 것을 상징하는 것 같은데, 정확치는 않다. 영웅 서사시에서 영웅 앞에 으레 등장하곤 하는 정신적 장애물 같은 것이 아닐까. 극복해낸다면 '왕'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해주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몰락을 가져다줄 그런.
     
  5. 해제의 주문 : <샘 레이의 목걸이>와 마찬가지로 작자의 다른 작품과 연결지을 수 있다는 데서 더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는 작품. 굳이 카테고리를 부여한다면 '성장물' 정도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6. 이름의 법칙 : 역시 다른 작품과 연결지을 수 있다는데서 더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는 작품. 고유명사를 의역하는 시도가 돋보였던 작품. 르귄의 작품에서는 '진짜 이름'이라는게 상당히 중요한 요소로 나온다는데, 르귄은 'Underhill'에 대한 번역으로 '언더힐'과 '언덕아래' 중 어느 쪽에 손을 들어줄까? 톨킨이라면 후자 쪽이 확실하지만.
     
  7. 겨울의 왕 : 시간여행물. 시간 여행이 행인지 불행이었는지 확실치 않다. 아르가벤 왕에게 있어 그것은 강제된 여행이면서도, '왕이 아닌 아르가벤'을 발견할 수 있게 해준 좋은 기회였을 테니. (이것은 이 단편집에 실린 시간여행물중에서 시간여행이 '자아상실'이 아닌 '자아 발견'을 위해 사용된 거의 유일한 예다) 빠른 귀국을 하며 아르가벤 왕이 느겼을 감정은 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한편으로, 이 작품은 내 자신에 잠재된 성편견을 깨우쳐준 '유익한' 작품이기도 하다. 무의 식중에 등장인물들에 '성별'을 넣어 상상하다가, 역자 후기를 읽고서야 그들에게 성별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당혹감이란.
     
  8. 멋진 여행 : 마약...을 소재로 한 글인데, 사실 별로 관심 가는 부분이 아니었다. 도통 글을 이해하기 어려웠다는 점도 있어서 그냥 넘거버렸던 작품.
     
  9. 아홉 생명 : (작자의 말에 따르면) '클론'에 대해 다룬 하드 SF. <플레이보이 SF 걸작선>(황금가지)을 통해 본 적이 있는 작품인데, 당시 그 책을 상당히 지루하게 읽었던지라 그냥 새로 읽는 작품처럼 읽었다. 작중에서 묘사되는 클론들은 인간보다는 차라리 개미같은 군집 생명체를 연상시키던데, 그렇다면 '아홉 생명'이라는 제목도 살짝은 어폐가 있는게 아닐까?
     
  10. 물건들 : 넓게 보면 이것 또한 '예술가 소설군'에 집어넣을 수 있지 않을까. 결정적 도약은 남의 손에 맡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 마음에 안들긴 해도.
     
  11. 머리로의 여행 : 이것도 시간여행물이라 할 수 있을까? 아마 그럴 것이다. 이 단편집에 담긴 시간여행물이 전제하고 있는 것은 '지난 세계와의 단절'이기 때문이다. 그로 인한 '자아 상실'을 그리고 있는 것도 다른 시간여행물들과의 특징과 일치한다. 생각해보면 시간여행에 대한 르귄의 태도는 <파리의 4월>이나 <겨울의 왕>만 제외하면 대체로 부정적인 편인데, 아마 시간 여행으로 인한 '자아 상실'을,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역자 후기를 보니 루이스 캐롤의 <거울 나라의 앨리스>와 비슷한 부분을 찾았다고 하는데, 나중에 한 번 알아봐야겠다)
     
  12.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 : 시간여행물. 다른 작품들이 대부분 그렇듯 시종 어두운 분위기였는데, 유독 뒷맛이 씁쓸했던 작품이다. <파리의 4월>과는 달리 '원래세계로의 복귀'가 불가능하기 때문일까? 주인공의 '선택'이 차라리 '강요'된 것에 가깝게 보였던 것도 그 때문이리라. 어찌보면 <파리의 4월>과 유사한 결론을 맺은 셈이지만, 그 색채는 전혀 다른 것 또한.
     
  13. 땅속의 별들 : 죽은 뒤에야 가치를 인정받았던 예술가들(특히 필립 K. 딕)을 생각하게 했던 작품. 독자된 입장에서는 '명작'을 발굴해내는 것이 더 기쁜 일이겠지만 과연 예술가들 또한 그리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14. 시야 : 다소 삐뚤어진 예술가물? "우자들은 언제나 선각자를 이해하지 못하노라~" 라고 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15. 길의 방향 : 주인공 나무에게 선생님이 있다면 물리학 점수는 0점을 주지 않을까? :) 어린 시절에 간혹 하곤 했던 상상이지만, 그걸 또 작품으로 보니 재미있다. 어린 딸에게서 영감을 얻었다는 <어둠 상자>보다도 훨씬 동화에 가까운 작품이다.
     
  16.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 방금 목차를 다시 확인하기 전까지 <희생양>이라는 제목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민망스런 일이긴 해도, 그다지 이상하다 할 것은 없는 일이다. 사실인즉슨, 이 작품은 온전히 '희생양'이란 개념을 설명하기 위한 우화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프랭크 오코너의 <나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설명하기 위한 우화나 다름없는 것처럼.
     
  17. 혁명 전날 : 작가에 대한 정보를 알지 못했다면, 나는 이 작품을 좌파 출신 - 혹은 좌파에서 전향한 - 작가의 정치적 히스테리가 녹아난 작품으로 여겼을 것이다. (실은 지금도 의심하고 있다) 자신의 신념에 가장 투철했던 자가 결국 자기 신념으로부터 소외받고 있는 현장은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마르크스가 살아서 스탈린 치하의 소련을 봤다면 이 작품의 주인공과 비슷한 심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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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마뉴 황제의 전설』  (0) 2007/11/19
Posted by 최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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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12월 1일부터 시작했던 원고 접수를 어제 부로 마감했습니다. 12월 10일, 별밤님의 <내 이름은 콘래드>(로저 젤라즈니, 1965) 서평이 접수된 것을 시작으로 총 21편이 접수되었습니다. 접수된 작품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목을 클릭하면 판갈(www.fangal.org)에 개재되어 있는 해당 게시물로, 이름을 클릭하면 작자의 개인 블로그로 날아갑니다.


[로맨스] 이지환, 화홍 & 정은궐, 해를품은달 - 과객
       
[무협] 김용, 소오강호 - 예니체리
[무협] 김용, 연성결 - Blues

[서사시] 라마야나 - 예니체리 
[서사시] 마하바라타 - 예니체리  
[서사시] 판차탄트라 - 예니체리

[역사] 김상현, 정약용 살인사건 - Blues
[역사] 엘리자베스 코스토바, 히스토리언 - 예니체리

[판타지] 고든 R. 딕슨, 드래곤과 조지 - 예니체리
[판타지] 다나카 요시키, 창룡전 - 예니체리
[판타지] 미카게 에이지, 카미스 레이나는 여기에 있다 - 9번 환자
[판타지] 미하엘 엔데, 모모 - 예니체리
[판타지] 존 밀턴, 실낙원 - 예니체리

[SF] 로저 젤라즈니, 내이름은 콘래드(1965) - 별밤
[SF] 로저 젤라즈니, 신들의 사회(1967) - 별밤
[SF] 베르나르 베르베르, 파피용 - Srinberk
[SF] 스뜨루가츠끼 형제, 세상이 끝날때까지 아직 10억년이나 남았다 - 재건
[SF] 어슐러 K. 르귄, 바람의 열두 방향 - qui-gon
[SF] 어슐러 K. 르귄, 어둠의 왼손(1969) - 별밤
[SF] 쥘 베른, 쥘베른 컬렉션 - 눈사태
[SF] 코니 윌리스, 개는 말할 것도 없고 - Blues




판평대(판타지 비평 대회)에 대해서는 판갤의 공고문(http://gall.dcinside.com/list.php?id=fantasy&no=302627&page=1)을 확인해주세요.
Posted by 최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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