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워, SF로 현실을 말하는 방법
“우리 노동을 그렇게 하자!
우리 재미를 위한 혁명을 하자!”
- T.H.로렌스
(발표자 이름은 생략)
목차
1. 들어가며
2. 작가 소개
가. 약력
나. 『타워』의 줄거리
3. 작가론 - 누가, 왜 배명훈을 읽는가?
가. 배명훈은 왜 SF 작가인가?
나. SF라는 장르의 목적
4. 작품 분석
5. 배명훈의 ‘빈스토크’
가. 타워의 의미
나. 타워의 권력이 돌아가는 방식
다.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인가
라. 타워의 주인에게 묻는다
6. 다중의 자율성에 거는 희망
7. 참고 자료
배명훈의 『타워』는 쉽게 읽힌다는 의미에서 이번 수업 시간에 소개되었던 작품 중에서 가장 환영받는 작품이었을 것이다. 빈스토크라고 하는 가상의, 그러나 현실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무대에서 딱히 불편하지 않게 유쾌하게 진행되는 풍자와 유머들은 높은 점수를 줄만하다.
본 발표에서는 배명훈이 소설 창작에 SF 기법이 사용된 맥락과 배명훈이 가상의 무대 건설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바에 중점을 두어 살펴보고자 한다.
1978년 부산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우수논문상 수상). 그 어떤 창작 모임과도 연결되지 않은 채 혼자 글을 써오다가 학부 재학 중이던 2004년에 제출한 「테러리스트」가 ‘대학문학상’을 받으면서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이 당시 자신이 썼던 작품 중에서 가장 문단문학에 가까운듯한 작품을 냈는데도 심사평에서 SF 운운하는 것을 보고 비로소 자신의 소설이 SF와 연결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2005년 '스마트D'로 '제2회 과학기술창작문예' 단편 부문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SF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 당시 수상자 모임을 통해 SF 소설가 및 번역가인 정소연을 통해 ‘환상문학웹진 거울’을 소개받았으며, 이 웹진의 필진으로 활동하게 된게 주요한 영향을 끼쳤다.
이후 환상문학웹진 거울을 비롯한 여러 인터넷 지면과 동인지를 통해 꾸준히 작품을 발표해왔다. 2007년에는 공동 단편집 『누군가를 만났어』를 통해 메이저 출간에도 본격적으로 끼게 된다. 잡지 『판타스틱』 등에 단편을 수록한 바 있다. 첫 소설집으로 연작소설집 『타워』를 출간했으며 현재는 장편 소설 집필 중. 「에스콰이어」2007년 1월호 "The Newest: 2007년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중문화 예술의 첨병 14인"에 선정되었으며, 단편 {안녕, 인공존재}로 제1회 문학동네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생략)
약력에서도 확인되듯 배명훈은 그의 독자들에게 주로 SF 작가로 소개되었고, 그의 소설 또한 SF라는 틀 안에서 읽혀왔다. 작가 자신이 SF팬덤 내부에서 활동하면서도 스스로의 작품을 소위 ‘장르 소설’이라는 테두리로 이야기하려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상당히 특이한 요소라 할만하다. 따라서 배명훈의 소설을 SF라고 규정할 때, 『타워』는 대단히 기묘한 위치를 얻게 된다. 배명훈을 SF작가로 만든 것은 배명훈이 아니라 그 독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한국의 SF 독자들이 ‘한국 SF 작가’들에 대해 대체로 냉소로 일관해온 것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라 할만하다. 80년대 초반부터 해외 원서를 구해다 읽으며 자생한 SF 독자들이 한국 작가를 ‘제대로 된’ SF 작가로 인정하는 경우는 대단히 드물었으며, 특히 문단 쪽에서 “SF적 상상력”을 차용하여 썼다는 작품들은 외려 SF독자들로부터 “그들은 SF를 모른다”며 조소를 당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1 그 정도의 폐쇄성을 보이던 SF 독자들이 한 작가를 문단 쪽과 한 마음이 되어 지지한다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라 할만하다. 배명훈과 같은 작가들이 문단과 기존 SF 팬덤 양측의 관심을 모으는 현 상황은 상당히 유념해볼만하다. 배명훈이 문단과 SF 팬덤의 경계지역에 서 있으며, 이들을 매개할만한 위치에 서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SF라는 장르에 대해 정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SF 독자들끼리도 SF란 장르가 무엇인가에 대한 견해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본토라 할만한 미국에서조차도 작가들이 “SF란 SF팬들이 ‘이건 SF야’라고 가리키는 것들”(프레드릭 폴), “SF란 우리가 SF라고 부르는 것”(데먼 나이트), 심지어는 “SF라고 출판되는 모든 책은 SF다”(노먼 스핀라드)라고까지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SF란 무엇이다-라고 말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2 다만 SF의 하위 분류 방식에 대해서는 대체로 합의되는 바는 있다. 크게는 두 가지로 나눈다.
첫 번째는 ‘오락물’로서의 SF이다. 영화 《스타워즈》와 같은 우주 활극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흔히 SF라고 하면 이러한 경향의 작품을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정작 SF계 내부에서는 이러한 작품들을 SF로 인정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현재까지도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상태다. 미국의 하드 SF 작가 테드 창이 《스타워즈》류의 작품을 "우주선과 레이저가 등장하지만 핵심은 500년 전, 또는 1000년 전 쯤에 모험 이야기"라고 평가하면서 SF가 아니라고 주장한 것은 이러한 경향을 대표한다.
두 번째는 ‘문학’으로서의 SF이다. SF가 결국은 문학이며 문학의 본질을 실현하는 장르라는 점에 주목하는 셈이다. 전자와의 차이점은 SF를 통해 ‘경이감’(Sence of Wonder)이라는 감성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경이감이란 SF 독자들이 SF를 읽음으로서 세계가 종전과는 다르게 보이게 되는 순간, 기존에는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감각·감성을 자각하게 되었을 때 느끼는 ‘충격’을 이야기한다. 랑시에르가 ‘문학의 정치’라는 개념을 통해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이게 하며, 킁킁대는 동물로 취급되었던 사람을 말하는 존재로 만든다.”3고 주장했던 것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물론 ‘경이감’에 대한 추구는 비단 SF만의 것이 아니다. 그 점에 대하여 SF는 SF만의 경이감이 ‘과학적 상상력’에서 비롯되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즉 과학이 세계를 사유하는 방식에 따라 세계를 해석하고, 거기에서 비롯된 상상력을 통해 경이감을 불러일으킨다면 그것이 훌륭한 SF 소설이라는 것이다. 물론 핵심은 여전히 ‘과학적 상상력’이 아니라 ‘경이감’이다. 유전자 복제나 우주여행 같은 자연과학적 소재를 끌어다 쓴다 해도 그것이 현재의 독자들에게 세계 인식의 변화, ‘경이감’을 안겨주지 못한다면 그 작품은 훌륭한 SF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 ‘문학적 SF'를 지지하는 작가/독자들의 입장이다. SF 또한 현재의 독자들에게 현재에 대한 이야기를 이야기하기 위한 문학양식이라는 것이다.4
『타워』또한 마찬가지다. 이 작품이 SF라고 해서 이 작품이 얼마나 참신한 무대를 마련했는가, 얼마나 기발한 상상력을 보였느냐에 주목하는 것은 그다지 권장할만한 독법이 아니다. 빈스토크 타워가 정확히 몇 층짜리 건물인가, 현실에서도 구현 가능한 건물인가 따위의 문제는 이 소설에서 굉장히 사소한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그 대신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상은 빈스토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거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사람들을 억압하는 완강한 권력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권력의 중심에 누가 있는지 알 수 없고 때문에 저항할 대상도 분명하지 않은, 빈스토크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통해 배명훈은 그 불명확한 대상이 주는 억압에 저항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지금부터는 각각의 이야기에서 나타나는 우리 사회의 모습과 각 이야기에서 찾아낼 수 있는 권력에 대한 대응법을 중심으로 작품을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생략)
『타워』의 무대인 빈스토크에서 빚어지는 군상은 우리가 사는 사회의 모습과 닮아있다. 그러나 『타워』의 무대인 ‘빈스토크’를 곧 한국 사회의 풍자를 위한 수단으로 이해하는 것도 온전히 타당해보이지는 않는다. 어떤 식으로건 모든 소설은 현실에 대한 은유를 담기 마련이다. ‘빈스토크’라는 무대 자체는 한국 사회일 수도 있고 미국일 수도 있으며 또 다른 어떤 나라일 수도 있다.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사회에 시사하는 바를 읽어낼 뿐이다. 타워는 넓게는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세계의 모습 그 자체를, 좁게는 한국 사회를 대변하는 공간이다. 개개인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와 그 내부의 권력관계를 지닌 사회라면 타워와 비슷한 양상을 띠게 마련이다. '타워'라는 모호한 제목 또한 그러한 점을 상징하는 듯 보인다.
물론 작품에서는 빈스토크 상류층의 볼썽사나운 모습이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동원 박사 세 사람」에는 지도자층(시장과 정박사)의 성적 타락 및 돌고 도는 양주 선물을 통한 애매하고 미묘한 뇌물 문제 등이 나타나고 있다. 「자연 예찬」에는 언론인 및 지식인들의 비양심적인 침묵 및 청탁 비리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다. 코스모마피아에 대한 선제공격 및 민간 지역에 대한 무차별 폭격 등 국제적 만행을 저지르면서도 의회는 책임을 회피하고, 용역 업체의 직업군인의 생명권은 방기된다. 바벨탑 아닌 바벨탑, 선한 사람이 최소 열 사람 이상 거주하고 있음으로 인해 신으로부터 멸망을 유예 받은 소돔과 고모라처럼 취급되던 공간(「샤리아에 부합하는」)이 바로 빈스토크 타워의 현재다.
시장이나 시의회를 비롯한 권력 상층부에 대한 작가의 시선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 그들은 국가를 대표하고 국가를 책임져야 할 존재들임에도 국가의 안위에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타워를 떠나려 하는, 한마디로 국가에 대한 권리만을 보장받을 할 뿐 책임은 지지 않는 존재들로 묘사된다. (시장 전용 엘리베이터의 존재 「엘리베이터 기동 연습」, ‘무슨 문제만 생겼다 하면 제일 먼저 달아나버릴 인간들’ 「샤리아에 부합하는」, 시위대 승리 후엔 이미 지구 반대편에 가 있던 시장 「광장의 아미타불」)
“최 행정관님. 도대체 누가 최종 명령을 내렸죠?”
최신학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답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최종 명령권자는 당연히 의회였다. 상대인 코스모마피아가 국가는 아니므로 의회에서 선전포고를 의결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늘 병력이 주둔해 있던 지역에서 벌어진 일이라 새로 파병 절차를 밟지도 않았다. 하지만 작전 개시 이면에는 분명히 정치권의 광범위한 승인 혹은 압력이 있었고, 보나마나 그 뒤에는 인공위성 관련 기업들의 어마어마한 이권 문제가 개입되어 있었을 것이다.
(중략)
질문에 답해야 할 사람들이 질문을 던지는 위치에 몸을 숨기려 하기 때문이었다.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책임을 지지 않기로 한 날. 그렇게 심판의 날이 다가왔다. (「샤리아에 부합하는」, 타워 189-190p)
그러나 소설 속에서 묘사되는 모습들은 대부분 우리가 상류층에 대하여 이미 알고 있었거나 혹은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습들의 재현이다. 우리는 상류층이 마땅히 사회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에 있고 그에 대한 권리를 누리면서도 정작 책임을 지지 않는 사태에 대해 분노한다. ‘윗것들이 윗것답게 행동하지 않는다’라는 인식으로 요약될텐데, 이러한 인식에서는 배명훈 또한 독자들의 인식 수준에서 크게 앞서 나가지 않는다. 독자들과 눈높이를 같이하는 것이다. 그러나 배명훈의 문제의식은 그러한 눈높이 맞추기, 권력에 대한 냉소적 풍자 수준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의 시선은 시스템을 돌아가게 하는 구조, 시스템의 전체로 향한다.
권력의 사용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것은 비단 권력 상층부만이 아니다. 관료제 내의 중간 관리자들을 통해서도 보여진다. 중간 관리자들, 혹은 말단 직원들은 상부에서 내려오는 명령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며 기계적으로 일을 진행시킨다. 「엘리베이터 기동 연습」의 주인공은 이유도 모른 채 상부의 명령에 따라 520층으로 군 병력을 이동시키면서 자신을 기계에 비유한다. 「광장의 아미타불」에 등장하는 주인공 역시 기마경비대에서 일하면서 시위대를 진압하는 폭력 행사 - 코끼리, 최루탄을 섞은 물 폭탄 등등 - 에 거리낌 없이 참여한다.
권력에 참여하지 않는 일반 시민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작중에서 ‘현대 도시인이라면 누구나’ 가진 것으로 묘사되는 먼지는 현대 시민들 또한 시스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시스템의 부조리에 대해 이야기해야 함에도 자신의 ‘먼지’ 때문에 침묵하고, 결과적으로는 부조리의 안정적인 고착화에 기여한다.
요컨대 시스템의 억압은 무능하고 부패했으며 무책임하기까지 한 권력 상층부에 의해서만 행해지지 않는다. 시스템의 약자들조차도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각자의 방식에 따라 시스템을 지탱한다. 문제는 그 시스템 전체에 대한 책임을 가진 자가 아무도 없다는 점이다. 결국 타워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그 소유주가 뚜렷하지 않은 권력이다.
시위대는 아미타브의 이름을 부르면서 컨테이너 가건물같이 생긴 방어선을 뚫고 정부 청사 쪽으로 몰려 들어갔어. 대승이었지. 하지만 그러면 뭐해. 빈스토크에 그런 난리가 날 때마다 늘 그랬듯이 시장은 그때쯤 지구 반대편에 가 있었는걸. 전략적으로는 별 의미 없는 승리였어. 전술적으로는 완승이었지만. 시위대가 그 싸움을 통해서 얻어낼 수 있는 건 별로 없었거든.(p.184)
전근대의 왕조 사회나 독재 국가에서라면 시위대의 싸움에 저런 낮은 평가를 내리지는 못할 것이다. 그 무렵에는 책임을 물어야 하는 대상이 명확했다. 모든 권력은 중앙의 1인자에게 책임이 집중되었고, 그가 잘못했기 때문에 - 혹은 사악하기 때문에 - 시스템의 억압이 지속된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폭군이나 독재자의 목을 치는 희생 제의를 통해 국가는 정화되고 새로운 생명력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빈스토크와 같은 대의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그러한 책임 전가가 불가능하다. 사회 모순은 이제 더 이상 권력 상층부만의 책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위대가 정부에 그 책임을 물으려 하는 한, 그들의 투쟁은 정부 청사 진입 여부와 관계없이 늘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요행히 시장을 사로잡는데 성공해서 정부를 전복하는데 성공한다 해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대의 민주주의 자체가 유지되는 한 시장과 시의회는 몇 번이고 다시 구성될 테고, 그 권력 상층부를 지탱하는 관료제 조직 또한 재건될 것이다. 결국 그들은 시스템을 통제할 수 없을 것이다. 빈스토크의, 그리고 우리 사회의 문제는 더 이상 어느 누구만의 책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판단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들 중 그 누구도 시스템이 부여하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현실 인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아니 이미 우리도 시스템의 일부이다. 이러한 냉소적인 묘사들은 2000년대 작가들에 대한 정혜경의 지적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배명훈은 정혜경이 말하는 ‘최근 작가들’과 같은 허무주의로 향하지 않는다. 시위대의 성과를 ‘전략적으로는 별 의미 없는 승리’였다고 평가하지만 한편으로는 시스템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그려낸다. 「자연예찬」에서는 개인적 비리가 노출될 것을 감수하고서 결국 사회 비판을 하고 마는 작가를, 「타클라마칸 배달사고」에서는 경위야 어떻든 사막에 떨어진 조난자를 구해내는 네티즌들을, 「샤리아에 부합하는」에서는 수색영장을 받아내지 못하자 직접 난동을 부려서라도 빈스토크를 구해내려 하는 공무원이 나온다. 자기가 사랑하는 공간의 문제를 더 이상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스스로 책임지려 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누구나 ‘먼지’를 가졌기에 시스템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그 먼지를 가진 사람들이 뭐든 하지 않으면 세상은 아름다워지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려 한다.
왜 시장이나 시의회가 책임지지 않는 문제를 시민들이 책임져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누리는 이 공동체의 주인이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빈스토크 타워의 주인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최고 권력자인 시장이라고 단정 지을 수도 있겠다. 타워의 권력 장의 중심에는 시장이 있으며, 의회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시장은 권력만 있을 뿐 책임-주인의식-을 지려 하지 않기 때문에 실제적 주인이 아니다.
당위적으로는, 타워에 사는 주민들 개개인이 실질적인 주인이 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것은 시민들이 투표권을 통해 타워에 대한 권력을 행사하는 존재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작중에 나오는 빈스토크 시민들이야말로 빈스토크라는 무대, 공동체에 대한 애정을 느끼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주인됨은 주인의식, 다시 말해 공동체에 대한 애정과 책임의식을 가지지 않은 사람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권리다.
빈스토크 시민들이 보여주는 공동체에 대한 애정은 국가가 부여하는 ‘애국심’이나 권력욕 따위와는 무관한 영역에서 발휘된다. 오히려 빈스토크 시민들은 국가의 존재에 대해 냉소적이거나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 대신 빈스토크 시민들의 내면에 가득찬 것은 그들이 일상생활을 하고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무대, 빈스토크라는 세계 그 자체에 대한 애정이다. 타워를 제2의 바벨탑이라고, 빈스토크를 소돔과 고모라로 보았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조차도 결국에는 타워를 멸망시키기 위한 폭탄을 기폭시키지 않았던 것에는 이들의 신앙이 약화되어서도, 빈스토크 정부에 회유되어서도 아니다. 이웃에 대한 애정이 이념과 종교조차 초월한 것이다.
따라서 빈스토크 타워의 실제적 주인은 마땅히 타워에 대해 주인 의식, 주권 의식을 지닌 개인 혹은 집단이라야 한다. 타워를 ‘아름답게 만들 책임을 가진 사람’은 바로 타워라는 무대와 그 무대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애정을 느끼는 사람들 자신들이다. 배명훈은 그러한 개개인들에게 호소하고자 한다. 작중의 표현을 빌린다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책임’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 당신들이 정말로 이 세계를 사랑하고, 시스템이 문제라고 여긴다면 단순히 앉아있기만 해서는 안된다고 이야기하고자 한다. 더 이상 시스템의 문제를 부패한 권력층에게만 묻는 대신, 스스로의 책임을 회피하는 대신 직접 시스템을 개선하기 위해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먼지’를 신경쓰면서 자신의 책임을 방기한다면 시스템의 억압은 계속되기 마련이라는 것이 배명훈의 소설에서 전달되는 메시지다.
그는 여섯 개의 장을 관통하면서 수평파들의 폭탄 테러며 시민들의 반전 시위는 수박 겉핥기 식으로 언급만 한 채 대부분을 개개인들 각자의 판단과 양심적 행동에 맡긴다. 정부의 통제나 간섭 없이 자율적이고도 효율적으로 돌아가는 운영 체제는 대부분 시민들 개개인의 연합과 협력에 의한 것이다. 그것도 열의나 구호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개인화된 시민들 각자의 ‘개인적 기호에 따른 판단’에 의한 것이다.
「타클라마칸 배달 사고」에는 타워의 우편 시스템에 대한 묘사가 이루어진다. 정부가 운영하는 엘리베이터에 의한 우편배달이 훨씬 비싸기 때문에 타워의 시민들은 대부분 파란 우편함을 이용하는데, 이 우편함에 편지를 가져다 놓으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우편배달의 업무를 이행한다. ‘익명 사회에서 익명 사람들끼리만 통하는 나름의 신뢰’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빈스토크는 개인을 신뢰한다.’
같은 장에서, 용역 회사 직원에 대해 정부가 구출을 방기하고 있을 때 힘을 발휘하는 것은 전 세계 곳곳에 있는 개개인들이었다. 사람들은 약간의 홍보만으로도 자발적으로 사이트에 접속해 실종된 민소를 찾는다. 그런데 그들의 이러한 선택은 선동적인 구호에 의한 것도, 민소에 대한 인류애에 의한 것도 아니다. 그저 기분 내키는 대로의 개인적 취사선택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재미’는 결국 국가가 포기했던 구성원을 구해냈다. 그게 바로 국경과는 무관하게 움직이는 제 나름의 공동체의 힘이다.
병수는 잠이 확 달아났다.
“왜? 지금 이 시간에 이만 칠천 명이 어딨어? 한밤중에.”
“아, 어디 보자. 빈스토크에서 육천 명 조금 넘고, 우리나라에서 오천 명쯤 되고, 나머지는 다른 나라에서 접속했어요.”
“왜?”
“왜는 무슨 왜요? 그냥 찾는 거지.”
“그러니까 걔들이 왜? 뭔가 오류 생긴 거 아니야?”
“오류 같은 거 없어요. 뭐가 있어야 오류가 나죠. 사진하나 달랑인데. 은수 씨가 빈스토크에 돌린 편지가 번역이 돼서 외국으로 갔어요. 그래서 그냥 찾는 거예요, 그냥. 이유가 필요한가? 원래 인터넷에서 하는 일이 그렇잖아요. 그냥 해요, 그냥.”(「타클라마칸 배달 사고」, 타워 109p)
이밖에도 청탁 뇌물 수수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양심적으로 글을 쓰는 작가 K, 무비판적으로 명령을 수용해 군을 이동시켰다가 520층 폭발 후 후회하는 남자 주인공 등을 통해 작가는 개개인의 선택에 대해 계속해서 ‘보여준다.’ 결국 마지막 순간 타워를 지켜내는 것은 샤흐리반 및 열다섯 군데의 가게 주인들의 선택이었다. 열다섯 사람 개개인의 선택은 타워의 멸망을 유예시킨다. 이를 통해 짐작하건데, 작가가 거대한 시스템을 혁파하는 방법으로 제시하는 것은 ‘개인의 정치’다. 개개인이 시스템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에 대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거나 행동하는 것, 그것만이 시민 개개인이 마땅히 지니고 행사해야 할 권력을 소유하고 시스템을 통제하는 방법이다.
(생략)
「타워」는 익명성이 다분한 대중에게 희망을 건다. 이는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아우또노미아의 ‘다중의 자율성’과 맥락을 같이 한다. 민족 국가의 강화나 국가 권력 장악이라는 주권 형식 안에서의 혁명 전략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언제나 같은 패턴의 반복이 거듭될 뿐이다.(독재자 다음의 독재자, 결함 다음의 같은 결함의 탄생) 국민 국가적 주권 형식 안에 권리를 양도하는 네이션=스테이트의 강화가 아니라 양도할 수 없는 자율성의 개화로서 민주주의를 구성해야 하는 것이다.
「타워」는 여섯 장에 걸쳐서 권력이라는 것의 불합리성, 부실함, 허점에 대해 보여준다. 권력과, 권력에 의해 운영되는 사회적 시스템은 이러한 허약함으로 인해 단 한곳의 빈틈으로도 쉽사리 무너질 수 있을 만큼 불안정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배명훈은 바로 이러한 권력-시스템적 허약함을 인지하고, 다중의 자율성이 이 빈틈을 노려 언제든지 시스템을 전복시킬 수 있다는 데 희망을 두었다고 볼 수 있다. 작가 K, 엘리베이터 기동 팀의 관리자, 아미타브를 맡은 용역 경비대원, 샤흐리반과 열 다섯명의 가게 주인들, 민소를 찾아 밤새도록 사진을 뒤진 전 세계 네티즌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율적 결정과 그로 인한 결과를 통해 ‘개인의 자율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시스템에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 스스로가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다.
배명훈의 소설에서는 적나라한 풍자도, ‘혁명’에 대한 의지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권력의 압제에 따른 절망 또한 없다. 이 점에서는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하 ‘난쏘공’)과 상당히 다른 면을 보인다. 기존의 한국 문단이 보여왔던 리얼리즘에서 벗어난 기법을 사용하여 옳지 못한 현실에 대해 그리고자 했다는 점에서 두 소설은 매우 닮았다. 그러나 그 기법의 활용법에 대해서는 두 소설이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난쏘공』의 ‘행복구 낙원동’은 풍자는 있으되 유머는 가능하지 않은 공간이었다. 낙원동 주민들에게 있어 시스템의 억압은 너무나도 압도적이었기에, 도저히 그들을 상대로 웃어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행복구 낙원동은 이름과는 달리 절망만이 가득한 곳이다. 지식인 지섭은 시스템적 문제를 언급하며 노동자를 계몽하는 지식인과 시스템 자체를 바꾸기 위해 노동 운동에 나설 것을 촉구한다. 지섭과 같은 지식인층의 계몽에 각성한 난쟁이의 자식들은 노동조합을 만들어 시위에 나서지만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한다.7 난쟁이의 첫째 아들이 사형당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난쏘공』에 희망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방식으로 저항하고 투쟁하건 간에 절대로 변하지 않는 사회적 시스템이 굳건하게 버티고 있을 뿐이다.
반면에 『타워』의 ‘빈스토크 타워’는 풍자와 유머가 모두 가능한 공간이다. 배명훈의 유머러스한 말솜씨는 체제의 강고함을 묘사하면서도 체제의 허술함 또한 함께 보여준다. 빈스토크는 무책임한 권력이 터무니없는 힘을 휘두르는 공간이지만, 동시에 ‘무책임’의 허술함 속에 지탱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타워』는 ‘권력장’이라는 개념을 통해 권력이 움직이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하고(「동원박사 세 사람」) 권력이 굉장히 엉성한 임기응변으로 움직이기도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엘리베이터 기동연습」) 즉, 소설은 현실의 모습을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현실을 억압하는 시스템의 구조에 대해 파악하고자 한다. 권력의 구조를 파악하면 그 사회의 주인들이 자기 현실을 보다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는 믿음, 거기에서 비롯된 희망이 빈스토크 타워를 지탱하는 힘이다.
배명훈은 전근대적 공동체의 상실과 개인의 파편화를 비관하지 않는다. 그런 비관은 굳이 소설을 통해서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가능하다. 소설을 읽기 이전에 현대인 누구나 지독하게 실감하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 상황 자체는 이미 돌이킬 수 없다. 그러나 상황을 절망하고, ‘세상을 이따위로 만든 누군가(남)’을 조롱한다고 해서 상황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익명 사회에서는 익명의 사람들끼리만 통하는 나름의 신뢰”(p.82)의 한계는 분명하지만, 우리의 조건이 이렇다면 변화는 이 조건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래서 배명훈이 꺼낸 카드가 바로 ‘웃음’이다. "조롱과 비웃음은 억압적 권위를 겨냥하는 무기이면서 만인을 유쾌하게 만“8든다. 유머를 통해 권력이 지닌 권위를 벗겨내고 권력의 구조와 허위를 폭로한다.9
배명훈이 웃음을 활용하는 방식은 바흐친이 주창한 ‘카니발’의 개념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카니발이란 “대화와 공동체의 의식이며 사람들을 해방시키고 함께 참여케 함으로써 공동생활에 참여하도록 만든다. 폭력적 파괴의 형태인 혁명과 달리 카니발은 대화 속에서 이루어지며 반항의 유쾌한 몸짓이다.”10라고 주장했다. 바흐친은 웃음의 장인 축제를 통해 모인 사람들이 체제와 억압에 대해 - ‘사유’하는 대신 - 비웃음으로서 그 권위를 추락시키는 것, 그리고 그렇게 모인 사람들끼리 하나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웃음’의 기능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바흐친의 시대에 비해 훨씬 파편화되고 시스템의 억압 또한 보다 막강해진 우리네 시대에 바흐친이 기대했던 것과 같은 카니발이 이루어질 수는 없다. 지금의 우리 사회는 어떤 정체성을 공유하는 하나의 공동체 사회라기보다는 익명성 아래 침묵하는 개개인들의 군체에 가깝다. 거기에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익명 사회에서는 익명의 사람들끼리만 통하는 나름의 신뢰’ 정도 밖에, 혹은 한국이라는 거대한 사회 아래에서 만들어지는 여러 군소 공동체 관계 뿐이다. 어차피 시스템 전체에 대한 저항이 불가능하다면, 개인에게 뭔가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면 그 정도 선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이야기해주면 될 뿐이다. 즉, 신랄하게 풍자하고 비꼬지만 행동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타워』에서 드러나는 배명훈 식 화법이다.
민유기,「폭력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과 2008년 촛불신화의 역사적 의미」,『실천문학』2008년겨울호.
배명훈, 『타워』, 오멜라스, 2009.
연합뉴스, <네그리 : 제국, 다중, 그리고 아우또노미아>, 2003, 10, 02
자하, 「독점 인터뷰 - 작가 배명훈을 만나다 2/2」, 『환상문학웹진 거울』 73호, 2009.
자크 랑시에르, 유재홍 역, 『문학의 정치』, 인간사랑, 2009.
정혜경, 「백수들의 위험한 수다」, 『문학과 사회 2005년 여름호』, 문학과지성사, 2005.
정화열, 박현모 역, 『몸의 정치』, 민음사, 2000.
- 배명훈 이전에 SF 독자들에게 인정받던 한국 SF 작가는 『비명을 찾아서』의 복거일과 듀나(이영수) 정도가 거의 유이했다. 그러나 이들은 SF작가이기 이전에 지독한 (해외) SF 독자였으며, SF 독자들의 외서 취향과 맞는 면이 많았다. 예컨대 듀나는 하이텔 과학소설동호회 시절부터 창작과 번역으로 유명했고, 복거일 또한 미군기지에서 흘러나온 SF를 읽으며 성장했다. [본문으로]
- 특히 국내에서는 ‘공상과학소설’이라는 용어(Fantasy & Science Fiction의 오역. 원래는 두 장르를 한데 묶어 부르던 이름이다)가 널리 퍼지면서 혼란이 더욱 가중된 감이 없잖아 있다. [본문으로]
- 자크 랑시에르, 유재홍 역, 『문학의 정치』, 인간사랑, 2009, 12p [본문으로]
- 이러한 점을 강조하다 보니 1960년대 이후 미국에서 이른바 뉴웨이브 운동이 제기되기도 했다. 대체로 좌파 성향의 작가들이 주도했던 뉴웨이브 진영은 종전의 SF가 주로 ‘자연과학적 상상력’을 추구해온 반면 인문과학이나 사회과학을 통해서도 ‘SF적 경이감’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때 이후로 페미니즘이나 좌우갈등, 인종차별주의 등을 이야기하는 작품들이 활발히 창작되었다. [본문으로]
- 배명훈, 「부록-타워 개념어 사전」, 『타워』, 오멜라스, 2009, 264p. [본문으로]
- 정혜경, 「백수들의 위험한 수다」, 『문학과 사회 2005년 여름호』, 문학과지성사, 2005, 174p. [본문으로]
- 이 시위대의 실패는 「광장의 아미타불」에서 등장하는 타워 시위대를 연상시킨다. [본문으로]
- 민유기, 「폭력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과 2008년 촛불신화의 역사적 의미」, 『실천문학』 2008년 겨울호, 340쪽. [본문으로]
- 자하 “근데 또 보통 정치풍자 하는 분들은 글이 재미없거든요. 이야기가 없어요. 껍질만 있어요.” 명훈 “알라딘에 실은 인터뷰에 썼는데, 그냥 500층, 600층 이렇게 백 단위로 딱 떨어지면 풍자하긴 더 좋은데, 그럼 대안을 못 만든다는 거죠. 비웃기는 더 좋아요, 백 단위로 떨어지는 상징적인 숫자면. 근데 그 안에 사람을 살게 만들어야 하니까, 나는. 그래야…… 비판하고 나서 어쩔 건데? 하는 문제가 나오니까. 그래서 그걸 쓴 것 같고.” 자하, 「독점 인터뷰 - 작가 배명훈을 만나다 2/2」, 환상문학웹진 거울 73호, 2009. [본문으로]
- 정화열, 박현모 역, 『몸의 정치』, 2000, 81p.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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