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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8/18 H. P. 러브크래프트
  2. 2010/06/02 찰스 디킨스
  3. 2009/12/13 아서 코난 도일
  4. 2009/12/13 테드 창
  5. 2009/12/13 조지 R. R. 마틴
  6. 2008/09/24 존 르 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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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ard Philips Lovecraft(1890.08.20~1937.03.15)

'빛의 톨킨이 있다면 어둠의 러브크래프트가 있다.' 라고 할 만큼 판타지 문학에 한 획을 그은 작가. 특유의 음울하지만 방대한 설정으로, 톨킨과 함께 판타지 문학의 양대산맥으로 추앙받고 있다.

생전의 러브크래프트는 그다지 저명한 작가라고 할 수 없었지만, 지난 수십 년간의 평가는 점차 상승하여 현재는 20세기 중 가장 영향력 있는 호러 작가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작품은 직간접적으로 광범위한 영향을 미쳐, 종종 애드가 앨런 포와 비교되기도 한다. 스티븐 킹은 러브크래프트를 "고전 호러물에 있어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개업의(the Twentieth Century's greatest practitioner of the classic horror tale)."라고 부르기도 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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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생애

[편집]유년

1890년 8월 20일, 로드 아일랜드 주의 프로비던스 시 엔젤 거리에 있는 가족 집에서 태어났다. (이 집은 1961년에 파괴되었다.) 아버지 윈필드 스콧 러브크래프트는 보석과 귀금속의 외판원이었다. 1893년, 러브크래프트가 3살일 때, 그의 아버지는 업무상 여행 도중 시카고 호텔에서 정신병원에 걸렸다. 러브크래프트의 아버지는 프로비던스로 돌아왔고, 버틀러 병원에 입원하여 여생을 마쳤다. (1898년 사망). 러브크래프트는 일생 내내 그의 아버지가 과로로 인한 "신경 소모"가 촉진한 마비 때문에 죽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러브크래프트의 아버지의 사인이 광증(general paresis of the insane)이라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러브크래프트가 아버지의 병의 상태나 그 원인(원인)에 대해 알고 있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하지만 러브크래프트의 어머니가 유사한 증세를 보이자 "예방"을 위해 극소량의 비소를 처방받았던 듯 하다.

아버지가 죽은 후에 러브크래프트는 그의 어머니, 두 고모, 할아버지에 의해 양육되었다. 어머니 아래에서 자라면서 여섯 살 때 까지 여장을 하며 지냈다. (당시에는 남자아이를 여장해서 키우는 것이 그리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는 설도 있다.) 체격도 좋지 못하고 비쩍 마른 얼굴 등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러브크래프트의 어머니는 러브크래프트의 외모를 추하다(ugly) 평가했다.

하지만 그는 두살 때 시를 암송하고, 여섯살 때 창작 시를 완성한 천재였다. 그의 할아버지는 러브크래프트의 독서를 격려하여 러브크래프트에게 고전문학들을 제공해 주었다. (『아라비안 나이트』, 토마스 불핀치의 우화들,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 등). 그의 할아버지는 러브크래프트에게 자신의 창작 고딕 호러 동화를 들려줌으로서, 러브크래프트가 괴기물에 관심을 갖게 이끌기도 했다. 한편, 러브크래프트의 어머니는 그런 이야기들이 아들을 불량아로 만들까봐 걱정했다고 한다.

유년시절의 러브크래프트는 병치례가 잦았으며, 그 중 몇 가지는 분명히 정신 신체증이었다. 그러나 그가 앓았던 다양한 질환들은 신체적 이유만으로 생겨난 것이다. 과거에는 러브크래프트의 정신병이 선천적이었으리라는 추측이 있었으나 (아버지가 갖고 있던 매독이 그를 임신했던 어머니를 건너 태아 때의 그에게 감염되었다는 가설) 현재는 폐기되어가는 추세다. 건강이 좋지 않은데다가 성격 또한 불규칙적이고 논쟁적이었기 때문에 러브크래프트는 8살 전까지 학교 수업에 거의 참여하지 못했으며, 1년 후 자퇴했다. 러브크래프트는 이 기간동안 독서에 탐닉했고, 화학과 천문학에 매료되었다. 1899년에 러브크래프트는 The Scientific Gazette와 함께 여러 hectographed publications을 소규모로 출판하기 시작했다. 4년 후 러브크래프트는 호프 스트리트 고등학교로 복귀했다.

1904년에는 러브크래프트의 할아버지가 사망했다. 이 사건은 러브크래프트의 인생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할아버지의 유산을 잘못 관리한 탓에 그의 가족들은 곧 재정적 위기에 빠지게 되었으며, 결국 같은 거리에 위치하긴 했지만 좀 더 작은 집으로 이사해야 했다. 러브크래프트는 집이자 출생지인 곳을 잃은 것에 강한 충격을 받았고, 한동안 자살을 고려하기까지 했다.

고등학교 시절 포의 소설이나 불핀치, 기타 고딕 소설들을 탐독하다가 나중에는 신경증으로 인해 고등학교를 중퇴하게 된다. S. T. 조쉬는 자신의 러브크래프트 전기에서 이 쇠약의 주된 원인은 그가 고등 수학 과목의 성적이 부진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고등 수학은 전문 천문학자가 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과목이었다.) 러브크래프트는 브라운 대학에 진학하기를 바랬으나 진학에는 실패했고, 이 때의 실망과 수치감은 훗날 그의 일생을 지배하게 된다.

1908년부터 1913년까지, 러브크래프트는 소설도 조금 쓰긴 했지만 그가 내놓는 작품은 여전히 주로 시였다. 이 기간동안, 러브 크래프트는 은둔 상태로 지냈으며, 어머니를 제외한 어느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았다. 이것은 러브크래프트가 펄프 잡지 The Argosy에 편지를 쓴 때부터 바뀌게 되었다. 이 편지에서 러브크래프트는 출판 작가들이 재미 없는 연애소설이나 쓰는 것에 대해 불평하고 있다. 이 잡지의 편지 칼럼(letters)에서는 이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는데, 이 토론을 눈여겨 본 UAPA(미국 아마추어 출판 협회) 회장 에드워드 다아스는, 러브크래프트에게 협회에 가입할 것을 제안했다. (1914년) UAPA는 러브크래프트에게 활기를 주었으며 러브크래프트가 시와 에세이를 기고하도록 이끌었다. 1917년에는 서신 교환자들의 격려에 힘입어, 「The Tomb」「데이곤」과 같은, 보다 세련된 소설 작품들과 함께 소설 창작에 돌아섰다. 「데이곤」은 러브크래프트의 첫 출판작이었다. (1919년 11월, W. 폴 콕의 The Vagrant에 수록) 이 시기에 러브크래프트는 그의 편지 친구들과의 방대한 관계를 쌓아가기 시작했다. 러브크래프트의 긴 서한들은 그를 이 세기의 가장 위대한 편지 작가 중 하나로 만들어주고 있다. 그와 편지를 나눈 사람 중에는 로버트 블록클락 에쉬튼 스미스로버트 하워드와 같은 이들도 있었다.

1919년에는 오랜 기간 히스테리와 절망으로 고통받은 끝에 러브크래프트의 어머니가 신경 쇠약에 걸렸으며, 러브크래프트의 아버지가 입원했던 버틀러 병원에 입원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러브크래프트에게 자주 편지를 보냈고, 두 모자는 러브크래프트의 어머니가 1921년 5월 21일 사망하기 전까지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사인은 담낭 수술의 합병증. 러브크래프트는 어머니를 잃은 것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

[편집]결혼과 뉴욕 생활

어머니가 죽고 난 몇 주 뒤, 러브크래프트는 보스턴에서 열린 UAPA 컨벤션에 참가했다. 그곳에서 러브크래프트는 소니아 그린을 만났다. 소니아 그린은 우크라이나 유태인 혈통으로, 러브크래프트보다는 7살이 많았다. 그들은 1924년에 결혼했고, 이 커플은 뉴욕 시 브루클린 자치구로 이사했다. 러브크래프트의 고모들은 이 결합을 못마땅해 했다. 러브크래프트가 '장사꾼'과 결혼한 것을 좋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소니아는 모자 가게의 주인이었다). 처음에 러브크래프트는 뉴욕에 매료되었지만 곧 재정적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소니아는 모자 가게를 잃었고, 빈약한 건강 상태 때문에 고생을 해야 했다. 러브크래프트는 이를 돕기 위한 일을 찾는데 실패했고, 결국 소니아는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클리브랜드로 이사해야 했다. 소니아가 떠난 후 러브크래프트는 브루클린의 레드훅 지구에서 혼자 살기 시작했으며 뉴욕에서의 삶을 격렬히 혐오하게 되었다. 더욱이 뉴욕으로 엄청나게 밀려드는 — 특히 비 앵글로 색슨 계통의 — 이민자들 때문에 아무런 일자리도 구할 수 없었다. 이 참담한 실패는 그의 인종차별주의를 부채질했다. 당시의 두려움은 「레드훅의 공포」에 잘 나타나 있다.

초기에는 위어드 테일즈(Weird Tales)나 어스타운딩 스토리(Astounding Story) 같은 싸구려 펄프잡지에 중/단편을 쓰기 시작했으나 1928년 위어드 테일즈에 『크툴루의 부름』(The Call of Cthulhu)을 연재하면서 본격적으로 '크툴루 신화'의 설정을 시작한다.

몇년 간의 별거 후 러브크래프트와 소니아는 이혼에 합의했지만 완전히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러브크래프트는 고모들을 돌보기 위해 프로비던스로 돌아왔다. 이후 그는 소설을 쓰는 일에만 열중하기 시작한다. 러브크래프트가 섹스에는 전혀 무관심한 모습을 보였고, 결혼 생활이 불행했던 것 때문에, 러브크래프트가 무성(無性, asexual)이었을 수도 있다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더욱이 친구였던 로버트 하워드가 게이 취향이었다) 하지만 소니아는 그를 "꽤 훌륭한 연인"이라고 평한걸 보면 단순히 성에 관심이 없었던 것 뿐인듯 하다.

[편집]프로비던스로의 귀향

프로비던스로 돌아온 뒤에는 1933년까지 10 Barnes Street의 넓은 빅토리아 양식 목조 저택에서 거주했다. (이 주소는 『찰스 덱스터 워드의 비밀』에 등장하는 윌레트 박사의 주소로 나오기도 한다) 프로비던스로 돌아온 후 사망하기까지의 이 기간은 러브크래프트의 문학적 활동이 가장 왕성한 시기였다. 이 시기 동안 러브크래프트는 그의 걸작 단편 대부분을 써냈으며, 『찰스 덱스터워드의 비밀』와 『광기의 산맥에서』과 같은 장편 소설을 쓰기도 했다. 러브크래프트는 종종 다른 작가들을 위해 개작하기도 했고 엄청난 양의 대필을 하기도 했다. ("The Mound", "Winged Death", "Imprisoned with the Pharaohs" , "The Diary of Alonzo Typer")

하지만 이 뛰어난 문학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러브크래프트는 점점 궁핍해져 가기만 했다. 러브크래프트는 고모와 함께 더 작고 더 허름한 하숙집으로 옮겨가야 했으며 로버트 E. 하워드의 자살에 충격을 받기도 했다. 그는 만성적인 영양실조에 걸려 있었고, 1936에는 대장암 진단까지 받았다. 이후 그는 죽을 때까지 끊임없는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1937년에는 콩 통조림과 아이스크림만 먹는 등 기괴한 식생활을 보였다. (이유는 가난으로 추정된다.)

1937년 3월 15일, 프로비던스에서 영면.

러브크래프트의 유해는 필립스가의 가족 묘지에 양 부모 사이에 안치되었다. 이것은 팬들 사이에서는 불충분한 것으로 여겨졌고, 그리하여 일련의 팬들이 러브크래프트만의 비석을 사기 위한 돈을 모금했다. 그 묘비에는 러브크래프트의 이름, 탄생일과 사망일, 그리고 그의 사적인 편지에서 인용한 "I AM PROVIDENCE."라는 문장이 새겨졌다.

1997년 10월 13일에는 누군가가 무덤에서 러브크래프트의 유해를 파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러브크래프트의 유해가 새로운 묘 밑에는 없다는 사실을 몰랐던 듯 하다.

Image:러브크래프트 묘지.jpg

[편집]러브크래프트의 작품세계

선입견으로 가지기 쉬운 생각과는 달리 현대에 흔한 경우처럼 생전의 러브크래프트가 자신이 창작한 신화를 정리하여 "설정집"을 쓴 것은 아니고, 오히려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에서 고대신들에 관한 신화가 직접적으로 상세히 묘사되는 소설은 적은 편이다. 러브크래프트의 신화가 정리된 것은 그가 사망한 후의 일이다. 또한 러브크래프트와 친분이 있는 여러 작가들이 교류하며 서로의 창작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정리에는 논란이 많다. 대표적인 경우로 『코난 사가』의 작가 로버트 하워드와 러브크래프트는 펜팔 친구였기 때문에 서로의 세계관에 영향을 준 것이 많다.

크툴후 신화를 축약하자면, 크툴후는 인간도 포유류도 없던 과거 지구를 지배하며 살던 고대신들로, 그 고대신들이 다시 깨어나기 시작하며 인간들에게 공포를 선사한다는 내용이다. 톨킨의 판타지가 여러가지 민족의 신화들을 종합해서 엮어낸 세계관이라고 한다면, 러브크래프트는 정말로 독창적인 신화와 세계관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는 평이다.

그의 소설 속에 잘 언급되는 책인 네크로노미콘(Necronomicon) 이라는 책에 대해 의견이 많은데, 이 책은 '실제로는 없는 책'이다. 즉 러브크래프트가 지어낸 책인데, 러브크래프트의 팬들이 이 책을 써낸 적도 있었다고 한다.(물론 팬들의 창작이 덧붙여져서 여러 종류의 이본이 있다.) 일단 작내의 네크로로미콘은 미친 아랍인 '압둘 알하즈레드'의 원작. 알 아지프의의 번역제목이다.

일군의 러브크래프트 신화작가군에 의해 만들어진 네크로노미콘의 행적 덕분에, 전 세계의 대형 도서관은 연례행사처럼 네크로노미콘에 대한 문의전화를 받는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네크로노미콘의 저자인 미친 아랍인 '압둘 알하즈레드'는 아랍식의 작명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이름이라고 한다. 러브크레프트가 아람어에 대해 잘 몰라서 벌어진 상황.

하지만 러브크래프트의 가치가 재조명 된 것은 러브크래프트 사후 50년가량이 지난 1980년대부터의 일이다. 러브크래프트 자신은 생전에 그렇게 유명세를 떨치지 못했다. 그의 작품들은 Weird Tales와 같은 유명한 펄프 잡지들에 수록되었고, 때때로 잡지의 애독자들로부터 분노에 찬 (outrage) 편지들을 받기도 했지만 독자 대다수는 러브크래프트의 이름에 관심이 없었다. 다만 클라크 애쉬턴 스미스와 어거스트 덜레스와 같은 현대 작가들과 지속적으로 교류를 했을 뿐이다. 이 서신 교환자 그룹은 "러브크래프트 서클"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들은 러브크래프트의 축복과 격려 아래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에 등장한 요소들을 자유롭게 공유하였다. 러브크래프트의 사망 후에도 러브크래프트 서클은 계속되었다.

그 중 어거스트 덜레스의 작업물이 가장 잘 알려져 있는데, 덜레스의 창작에 대해서는 다소 논란거리가 남아 있다. 그가 만든 설정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선(善)한 '선대의 신(Elder Gods)'과 악(惡)한 '바깥 신들(Outer Gods)'·'위대한 옛것들(Great Old Ones)'들이 대립한다는 것이다. 본래 '우주적 중립성'을 지키고 있었던 러브크래프트 소설에 선악 대립 구조를 가져왔던 이 설정은 많은 이들에게 '러브크래프트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거부되어 왔다.

하지만 위대한 옛것들에 적대적이라고 하여 이 존재들이 그런 인간적 개념에서의 선악관(옳고 그름)에 전적으로 합당한 것은 아니다. 선한 신이라고 해도 인류를 벌레처럼 취급하는 것보다는 좀 더 너그럽고 온건하게 대하는 위치에 서있을 뿐이다. 즉 크툴루 신화의 모든 신들은 인간을 대함에 있어 정도차이만 지니고 있을 뿐 인류의 입장에선 아무래도 위협과 공포로 자리매김될 수밖에 없는 본원적으로 적대적 존재들인 것이다.

[편집]러브크래프트의 인종차별주의

러브크래프트는 심각한 백인우월주의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히틀러에 대해 호감을 표한 일기도 있다.) S. T. 조쉬는 "러브크래프트가 인종차별 주의자였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그 당시에는 일반적이었다.'는 식으로 지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러브크래프트는 당대 사람들에 비해서도 훨씬 분명하게 자신의 견해를 주장했다. 또한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에 인종차별주의가 깃들어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라고 적고 있다. 미셸 우엘벡은 자신의 저서에서 러브크래프트의 "인종 혐오"는 러브크래프트가 대작을 쓸 수 있게 해주는 감정적 원동력을 제공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막상 결혼은 유태계 이민자와 한 탓에, 인종에 대한 얘기를 할 때마다 유태계였던 아내가 자신도 유태인이라는걸 계속 말해주어야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혼 파경은 부부 싸움보다는 러브크래프트가 도시 생활을 견디지 못한 것이 주된 이유였고, 이혼 후에도 계속 편지를 나눌 정도의 사이는 유지했다.

L. 스프레이그 디 캠프의 전기에 따르면, 러브크래프트도 말년에 가서는 자신의 견해를 다소 누그러뜨렸다고 한다. 그는 폭력을 '비이성적인 것'이라 하여 혐오했는데, 1930년대에 독일에서 벌어진 반 유태인 폭력 사태에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자신의 작품에 "혐오스러운 에스키모인의 혼혈" 등의 묘사를 할 정도로 타 인종을 혐오했던데다 히틀러를 찬양하기까지 했던 그도, 타인종을 폭력으로 없애버려야 된다고까진 생각하지 않았던 듯 하다.

러브크래프트의 작품들에 보면 늘 다른 인종이나 다른 무언가에 대한 공포, 혐오등이 보인다. 어쩌면 그의 인종차별은 사실 타 인종에 대한 혐오라기보다는 어려서부터 늘 혼자 틀어박혀 살았던지라 생긴, 자신이 잘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다.

[편집]서구의 진보에 대한 러브크래프트의 냉소주의

러브크래프트는 독일의 보수 혁명 이론가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저작을 탐독하기도 했다. 『서구의 몰락』에서 보여주는 근대 서구의 쇠락에 대한 슈펭글러의 비관적 명제는 러브크래프트의 종합적인 반(反)근대적이고 보수적인 세계관 속 중대한 요소를 형성했다. 부패의 순환에 대한 슈펭글러의 발상은 『광기의 산맥에서』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S. T. 조쉬는 러브크래프트의 정치·철학적 관념에 대한 토론의 중심에 슈펭글러가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 외에도 러브크래프트는 문명의 쇠락에 대해 다룬 니체의 저작에 대해서도 정통했다.

러브크래프트는 문명이 보다 야만적이고 원초적인 요소와 맞서 싸우는 문명과 싸운다는 소재를 자주 쓰곤 한다. 이 투쟁은 대부분 개인적인 차원에서 머물러 있다. 그가 창조한 주인공들 대부분은 교양이 있으며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지만 불분명하고 두려운 힘에 의해 점차 무너져가는 역할을 맡고 있다.

[편집]러브크래프티안 호러와 대중문화에서의 크툴후 신화

"크툴후 신화"를 비롯한 러브크래프트의 작품들은, 다른 작가들에 의한 직간접적 변주를 통해 대중문화에 깊은 인상을 남겨왔다. 이른바 '러브크래프트적인' 요소들은 수많은 소설, 영화, 음악, 만화 등에서 발견된다.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사람은 러브크래프트의 친구, 동료, 편지 교환자였던 동시대 작가들이다. (어거스트 덜레스로버트 하워드로버트 블록프리츠 라이버 등) 후대의 수많은 창작자들 또한 러브크래프트의 영향을 받았다. 이 외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이들 또한 무수하다.

[편집]러브크래프트로부터 영향을 받은 작가들

이 외에도 영화감독(존 카페터, 스튜어트 고든, 길레르모 델 토로), 게임 디자이너(샌디 피터슨, 토야마 케이치로), 호러 만화가 (이토 준지), 화가(H.R.기거) 등이 러브크래프트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보르헤스는 러브크래프트의 소설 기법을 흉내낸 단편 「더 많은 것들이 있다」를 쓰기도 했다. 『독서의 역사』의 저자이며, 눈 먼 보르헤스에게 책 읽어주는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던 알베르토 망구엘은 보르헤스가 러브크래프트를 "어찌나 짜증스러워 했는지"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을 대여섯번이나 읽어달라고 하면서도 매번 중도에 포기했고, 급기야 그의 문체를 패러디해서 단편을 쓰기도 했다고 전한다. 보르헤스와는 달리 팬을 자처하는 스티븐 킹도 러브크래프트의 엉성한 문체에 대해 투덜거린 적이 있다.

현대 프랑스 작가 미셸 우엘벡은 러브크래프트의 문학 전기를 썼으며 미국 작가 조이스 캐럴 오츠는 러브크래프트 작품선의 서언을 쓰기도 했다. Library of America는 2005년에 한권짜리 러브크래프트 작품집을 내기도 했다. 이 책에서는 러브크래프트가 정전으로 인정받은 미국 작가로 언급된다. 사실 크툴루 신화와 관련없는 단편 중에도 유명한 것이 있다. 일세를 풍미한 좀비 영화인 좀비오(Reanimator)의 원작이 그것인데, 이름하여 『허버트 웨스트의 소생 실험』(Herbert West-Reanimator)이다.

[편집]번역서

한국에서는 동서문화사가 전 5권인 러브크래프트 전집을 펴냈지만 형편없는 번역으로 인해 별 대접은 못받고 있는 상황이다. 추리 전문가 정태원 씨가 러브크래프트 전집 출간을 위해 여러 출판사를 타진했지만 출판사들이 난색을 표해 출간되지 못했고... 이후 황금가지에서 출간을 준비 중이라는 말만 무성하다가 결국 2009년 8월에 『러브크래프트 전집』 1,2 권이 출간되었다.

[편집]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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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디킨스

도서/인명 2010/06/02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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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es John Huffam Dickens(1812.2.7-1870.6.9)

영국의 소설가. 빅토리아 시대에 활동한 소설가 중 가장 유명하며 가장 인기 있는 작가이다. 영미권에서는 그의 작품이 단 한번도 절판된 적이 없을 정도이다. 올리버 트위스트 등 문학사에 남을만한 캐릭터들을 여럿 창조한 인물이기도 하다. 디킨스의 작품을 각색한 영화와 TV판만 해도 최소한 180편 이상 제작되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그의 생전에 연극으로 각색되었으며, 1913년에는 《The Pickwick Papers》의 무성 영화가 제작되었다.

그의 소설 대부분은 당시의 관행대로 잡지 등 정기간행물에 연재되는 형태로 발표되었다. 당시에는 일단 연재할 소설을 완결지은 후 발표하는 게 일반적인 형태였지만 디킨스는 연재와 집필을 병행하였다고 한다. 이 점은 그의 소설에 독특한 리듬을 부여하였다. 즉 중요한 부분에서 그날의 분량을 끊어버리는, 일종의 클리프헹어기법을 썼던 것이다. 조지 기싱이나 길버트 케이스 체스터튼과 같은 비평가·동료 작가들은 그의 숙련된 산문과 영어권의 문학적 교양에서 퍼올려진 독특한 캐릭터들에 경탄하곤 했다. 한편으로는 헨리 제임스나 버지니아 울프같은 작가들이 그의 감상주의를 문제삼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디킨스의 명성은 자신의 체험에 기초한 사회 하급계층의 생활상과 그들의 애환을 생생히 묘사하는 동시에 적절한 유머를 도입하여 사회의 온갖 모순과 부정을 신랄하게 비판한 데 있다. 그는 소설을 통하여 당대에 필요한 사회 개혁을 호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작가로서 인정을 받아 부유한 생활을 하게 된 뒤에는 동전을 구걸하는 빈민가의 어린이들을 지팡이로 쫓아 버리곤 했으며, 소설을 쓸 때 외에는 사생아를 양산하는데 열중했다고 한다.

찰스 디킨스는 자신의 작품을 대중 앞에서 낭독하기를 즐겨했으며, 사실 말년에 디킨스를 유명하게 만들었던 것도 이런 대중 낭독회였다. 디킨스는 한 작품의 낭독과 몸짓을 연습하는데 적어도 2개월 이상의 시간을 들였다. 그러나 정작 낭독회가 끝나고 들어오는 찬사에는 그저 고개를 한번 까닥이는게 전부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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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포스팅은 북시 위키의 '아서 코난 도일' 항목(http://booksea.pe.kr/index.php/아서_코난_도일) 백업용 문서입니다.



Arthur Conan Doyle (1859.5.22~1030.7.7)

영국의 소설가. 중간 이름이 없고 '아서'가 이름, '코난 도일'이 성이다. 즉 '아서 도일'이나 '아서 C. 도일' 등의 표기는 불가능하다. 그의 중간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는 정확치 않다. 사실 아서 코난 도일의 이름은 그의 생전에도 꽤나 많은 착각을 일으켜서, 생전의 아서 코난 도일은 자신의 성을 제대로 불러달라고 끊임없이 강조하고 다녔다고 한다.

범죄 소설 장르에 혁신을 가져온 『셜록 홈즈』 시리즈가 대표작이며, 이 외에 SF와 모험 소설 장르에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 셜록 홈즈 시리즈로 탐정-추리 소설을 반석에 올려 놓았고, <잃어버린 세계>등의 SF 작들은 이후 다른 SF물들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영화 <킹콩>은 스토리 적으로도 <잃어버린 세계>와 연관이 있으며, 최초의 킹콩영화는 아예 <잃어버린 세계>영화 소품을 그대로 갖다 쓴 영화였다.

사실 작가가 정말로 심혈을 기울였던 분야는 어디까지나 역사 소설이었지만 코난 도일이 쓴 역사 소설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셜록 홈즈』시리즈에 비해 훨씬 박하며, 심지어 말년에 몰두했던 심령 소설에 이르면 아예 대작가의 노망 정도로 치부되는 실정이다.

목차

 [숨기기]

[편집]생애

[편집]유년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 태생. 부모는 모두 아일랜드 인이었다. 아버지는 화가였던 찰스 알타몬트 도일. (훗날 「최후의 인사」에서 셜록 홈즈가 '알타몬트'라는 코드네임을 쓰기도 한다) 화가로서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한 인물이었으며 이 때문에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에 시달렸었다 한다. 그의 그림은 주로 요정에 관련된 판타지 풍의 삽화가 많았다. 그가 사망하기 전에 출간된 『주홍빛 연구』에는 그의 삽화가 실리기도 했다.

아버지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사실 아서 코난 도일의 윗대까지만 이 가문의 성은 '도일'이었다. 아서 코난 도일의 대에 이르러 성 자체가 '코난 도일'로 바뀐 것인데, 왜 그가 이러한 성을 썼는지는 확실치 않다. 일단 출생지의 세인트 메리 대성당에 기록된 세례명은 '아서 이그나티우스 코난'(Arthur Ignatius Conan)이었고 이 뒤에 '도일'이라는 성이 붙었다. 이 때의 코난은 그의 대부였던 마이클 코난에게서 따왔다.

아홉 살이 되던 해에는 로마 가톨릭 예수회의 예비학교를 다녔고, Stonyhurst College에 진학했지만 1875년에 자퇴를 하면서 무신론자로 돌아섰다.

1876년부터 1881년까지는 에딘버러대학교에서 의학을 배웠으며 대학 시절부터 단편들을 쓰기 시작했다. 그가 스무살 이전에 발표한 데뷔작은 Chambers's Edinburgh Journal에 수록되었다. 재학 중 서아프리카 해안 행 항해에 한 배의 선의로 참석하기도 했다. 1885년에 척수로(雌部類)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 졸업후 의사의 자격을 얻자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있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사실상의 가장으로서의 무거운 책임을 지게 되었다. 이 무렵의 찰스 도일은 간질까지 앓았으며 화가로서 성공하지 못한 것에 대한 절망감이 더욱 깊어져 병원에서도 탈출을 시도하려 하기도 했다.

[편집]의사 개업과 셜록 홈즈의 시작

1882년, 대학 동기였던 조지 버드와 함께 플리머스에서 개업을 했지만 조지 버드와의 사이가 나빠지는 바람에 결국 포츠머스의 변두리인 사우드시에서 혼자 병원을 개업하게 된다. 하지만 도무지 환자가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힘든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 환자가 없을 때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다시 창작을 시작하게 된다. 환자가 거의 없는 시간 코난 도일은 글 쓰는데 그 시간을 이용했는데, 사우스시 시절 구입해놓고 한 번도 쓰지 않은 타자기는 제쳐두고 직접 손으로 원고를 썼다. 그 자신의 추산에 의하면 하루 작업량은 대략 3,000단어 정도였다. 어쩌면 좀 과장된 분량일지도 모르지만, 그가 의뢰받은 원고 양을 감안하면 대체로 사실이었을 것이다. 이는 코난 도일이 펜과 잉크만으로 오늘날 작가들이 워드프로세서로 작업하는 속도를 낼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게다가 이 수치에는 글을 쓰기 위해 구상하는 시간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필적이 달라진 것도 아니었다. 여간해서 깔끔한 필적이 달라지는 법이 없으면서도 속필작가인 그는 초인종이 울리는 순간 글쓰기를 멈추었다가 방해의 요인이 사라지면 중단했던 지점에서 다시 글을 쓸 수 있는 부러운 기술의 소유자였다. 게다가 원고에 정정이나 내용 변경이 거의 없는 것으로 봐서 초고가 거의 최종본으로 확정되었다.

제롬 K. 제롬은 이런 기록을 남겼다.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주위에서 웃고 떠드는 동안에도 (코난 도일은) 자기 집 거실 구석에 놓인 작은 책상에 앉아 소설을 쓰곤 했다. 그는 홀로 서재에 박혀 글을 쓰는 것보다는 그 편을 더 좋아했다. 어떤 때는 책상에서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무슨 말을 하곤 했는데, 그것으로 봐서 우리의 대화를 계속 듣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동안에도 펜을 멈추는 법이 없었다."

처음에는 모험, 괴기, 역사소설 등을 썼지만, 출판사로부터 큰 환영을 받은 작품은 없었다. 그러다가 1887년에 셜록 홈즈 시리즈의 첫 작품인 『주홍색 연구』를 발표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코난 도일의 대학 시절 은사인 조셉 벨 교수와, 애드거 앨런 포의 캐릭터인 C. 오거스트 뒤팽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셜록 홈즈와 조셉 벨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조셉 벨의 오랜 친구이자 당시 사모아에서 살던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관심까지 끌었다.

홈즈시리즈의 왓슨은 사실상 작가 자신의 반영이며, 그의 가족사까지도 왓슨의 가족사에 반영되어있다. 실제로 코난도일의 부친이 알콜중독으로 사망한 것 처럼 극증의 왓슨박사도 알콜중독으로 사망한 형이 있고, 심지어는 똑같이 결혼도 두 번한 것으로 되어 있다. 왓슨이 개업 의사를 차리는 것도 작가의 경험이 반영된 것인데, 병원 경영이 좋지 않았던 작가와 달리 왓슨은 잘나가는 개업의가 된 것으로 묘사되어있다. 작가가 대리만족한 상황이라 볼 수 있겠다. 다만 역시 홈즈 옆에는 왓슨이 있어야했던 모양인지 왓슨의 아내가 죽은 이후 왓슨이 좋은 값에 병원을 팔아버리고 홈즈의 옆에와서 예전과 같은 친교관계를 지속하는 식으로 묘사되었다. 덧붙여 그 병원을 산 사람은 대리인이었을 뿐, 실상 병원을 구입한 건 홈즈였다.

하지만 반응은 거의 절망적이었다. 이 무렵 다른 역사소설을 집필 중이던 코난 도일은 급기야 자신의 나아갈 바가 역사문학이라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그러던 중에 코난 도일은 『주홍색 연구』의 속편을 써 달라는 미국 『리핑코트』잡지 편집자의 부탁을 받고 1890년에 『네 사람의 서명』(The Sign of Four)을 발표하는데, 이 작품이 굉장한 호평을 받았다.

한편, 사우드시에 사는 동안에는 Portsmouth Association Football Club 소속의 아마추어 골키퍼 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 때의 이름은 'A.C.스미스'. (이 클럽은 1894년에 해산되었고, 1898년에 설립된 포츠머스 F.C.와는 전혀 무관하다) 또한 꽤 훌륭한 크리켓 선수이기도 해서 1899년부터 1907년까지 크리켓 선수로 뛰기도 했다. 최고 득점은 런던 카운티와의 1902년도 경기에서 거둔 43점. 골프에도 제법 능했다고 한다.

[편집]결혼과 가족

1885년에는 자신의 병원에 입원한 환자의 누이였던 루이자 호킨스와 결혼했다. (환자는 입원 중에 사망) 병원의 매출이 시원치 않았던 까닭에 부유하지는 않지만 나름 행복한 생활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 1897년부터 이미 14세 연하의 지인인 진 엘리자베스 레키라는 여성과 사랑에 빠졌었고, 1906년에 루이자가 결핵으로 사망하자 이듬해에 결혼했다. 다만 루이자와의 결혼 생활 중에는 아내에 대한 신의를 지키기 위해 레키와는 플라토닉한 관계만을 맺었다고 한다.

슬하에는 첫 아내와의 사이에서 낳은 두 자녀와 두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낳은 세 자녀가 있다. 그런데 아서 코난 도일은 오로지 두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만을 편애하였고, 《셜록 홈즈》시리즈로 쌓은 막대한 부는 전처의 자식들에게 한 푼도 물려주지 않았다. 심지어는 학교도 보내주지 않아서, 전처 사이에서 낳은 딸의 경우는 평생을 하녀로 떠돌다 아버지를 원망하며 죽었다.

그런가 하면 두번째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은 그루지야의 니나 미더바니 공주의 두번째 남편이 되거나(셋째), 코난 도일이 사망한 후에는 《셜록 홈즈》시리즈의 인세로도 모자라 추리소설가 존 딕슨 카를 고용하여 후속편을 쓰게 하는 등(넷째와 다섯째) 아버지가 남긴 부를 독차지했다.

[편집]셜록 홈즈의 죽음

1890년에 비엔나에서 안과 공부를 한 후 1891년 3월 런던으로 옮겨 안과병원을 개업햇다. 하지만 역시 매상이 별 볼일 없었고, 자서전에서는 "한 명도 문 앞을 지나가지 않았다"고 쓸 정도였다. 대신 《셜록 홈즈》시리즈 등의 소설들이 인기를 끌자 코난 도일은 아예 저술 쪽에 전념하기로 결심하고는 『스트랜드 매거진』(The Strand Magazine)에 줄줄이 단편소설을 발표해 나간다. 그는 매달 1편씩 1년에 걸쳐 작품들을 연재했다.

코난 도일은 자신은 홈즈로 인기를 얻었고, 또 경제적인 여유도 얻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탐정소설 작가라고 불리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이에 셜록 홈즈 시리즈 집필 초기인 1891년 11월에도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내 셜록 홈즈를 그만 죽여버리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죽이고자 했던 적이 있다. 이 때 코난 도일의 어머니는 "네가 맞다고 느끼는 걸 해야겠지만 대중들은 그걸 달가워하지 않을 거다"라는 답장을 보내며 그를 만류했다. 이 때는 코난 도일도 어머니의 지시에 따랐지만 결국에는 2년 뒤에 발생한 '셜록 홈즈 사망 스캔들'을 통해 어머니의 조언이 탁월한 식견이었음이 드러난다.

1892년에는 처음 발표된 12편의 단편을 모아 『셜록 홈즈의 모험』(The Adventures of Sherlock Holmes)을 출간한다. 사실상 셜록 홈즈의 본격적인 등장은 바로 이때부터라고 볼 수 있다.

1893년에는 알코올 중독이 심해져 수용소에 들어갔던 부친이 사망했다. 이 때부터 부친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움으로 심령연구학회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1893년에는 결국 셜록 홈즈의 숙적인 제임스 모리어티 교수가 등장하는 단편, 「마지막 사건」(The Last Adventure)을 통해 홈즈를 죽여버리기에 이른다. 이유는 역시 그 전부터 애착을 둬 오던 역사 소설의 집필과 당시 결핵에 걸렸던 아내의 요양에 전념하기 위해서였다고 추측된다.

그러나 이에 대한 셜로키언들의 분노는 그야말로 엄청났다. 유럽 전역의 독자들이 아서 코난 도일에게 이를 항의하는 편지를 보내는가 하면 검은 상장(喪章)을 단 런던 시민들이 아서 코난 도일의 집 앞에 모여 "홈즈! 홈즈!"를 연호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심지어 아서 코난 도일이 근처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가 검은 상장을 맨 노부인에게 지팡이로 두들겨맞을 뻔하는가 하면 그의 집에 피묻은 칼날이 배달되기까지 했다. 이런 무시무시한 협박 속에서도 코난 도일은 「마지막 사건」이전의 이야기라는 조건을 달아 장편 『바스커빌 가문의 개』(The Hound of Vaskervilles)를 써가며 무려 9년이나 버텼지만 결국에는 이것이 꼬투리가 되어 '극적으로 살아 돌아온' 홈즈에 대한 이야기인 『빈집의 모험』(The Adventure of Empty House)을 통해 셜록 홈즈를 살려낼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추리문학사 최대의 스캔들 중 하나로 회자되는 이 사건은, 코난 도일이 셜록 홈즈에 대해 갖고 있던 혐오감과 팬들의 집념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한편 코난 도일은 『[[피터 팬』의 작가 제임스 배리와 절친하여 공동으로 오페라 가사 작업을 시도했었다. 배리가 초안을 잡고 완성시킨 1막을 본 코난 도일은 '너무 진부하고 어설퍼서 크게 실망했다.'고 한 후 1막 가사를 새로 쓰고 줄거리를 일부 수정하며, 악보 작곡가인 어니스트 포드와 함께 2막을 썼다.

여학교에 침입했다가 교장에게 쫓겨나는 두 젊은이의 위업을 다룬 이 작품, <제인 애니 또는 선행상> 새롭고 독창적인 영국식 희가극 이었지만, 줄거리는 천박했고 가사는 어울리지 않았으며 음악은 들을 만 했지만 특출나지 않았다. 1893년 5월 13일부터 7주 동안 사보이 극장에서 공연된 그 오페레타는 코난 도일과 배리의 최악의 작품 가운데 하나로 기록되었다. 공연은 완전히 실패했고 비평가들은 무자비하게 작품을 씹어댔다. 아일랜드가 낳은 최강의 명언 제조기 조지 버나드 쇼는 잡지에서 "존경할 만한 두 시민이 공공연하게 범할 수 있는 가장 뻔뻔하고 멍청한 짓거리"라며 씹어 댔는데, 그럴만 한다는 것이 거의 모든 사람들의 평이었다.

1899년 10월 23일 뉴욕 주 북부 버팔로의 스타 극장에서 처음 시연된 연극 《셜록 홈즈》는 미국 전역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영국에는 1902년 1월 30일, 빅토리아 여왕의 상을 마친 에드워드 7세와 알렉산드라 왕비 앞에서 어전 공연으로 초연되었는데, 하필 에드워드 7세는 지독한 셜로키언이었다. 《셜록 홈즈》가 국왕이 끝까지 읽은 유일한 소설이란 소문도 있었다. 에드워드 7세는 연극이 너무 마음에 든 나머지 셜록 홈즈 역의 윌리엄 길레트를 귀빈석으로 초대해 그와 너무 오래도록 사담을 나누는 덕에 관객들은 안절부절 못하다가 짜증을 내기까지 하였다. 공연이 끝나자 길레트와 코난 도일이 막 앞으로 나와 관객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이 연극 초연이 연극사에 기록된 이유는 이 이야기들 뿐만이 아니라 1903년 열네살이 된 찰스 스팬서 채플린이 급사 역할을 맡아서 연기했던 이유도 있었다. 그게 바로 찰리 채플린의 첫번째 무대 연기였다.

[편집]정치적 활동

20세기 초에 남아프리카에서 보어 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영국에 전세계의 비난이 쏟아졌는데, 코난 도일은 이 때 영국 정부의 행실을 옹호하는 팜플렛을 쓰기도 했다. 코난 도일은 1900년 4월 2일 보어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남아프리카 공화국 블룸폰테인에 도착 했는데, 그때 블룸폰테인에는 막 4세가 된 존 로널드 루엘 톨킨, 통칭 J.R.R.톨킨이 살고 있었다. 부친인 아서 톨킨이 블룸폰테인 은행장으로 임명 받은 후 그곳에서 톨킨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코난 도일이 7월 6일까지 블룸폰테인에 있었고 은행을 이용한 기록이 남아 있으니 둘의 조우가 이뤄졌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또한 1900년에는 아예 보어 전쟁에 대한 책까지 썼는데, 1902년에 기사 작위를 받았을 때도 코난 도일은 이것이 자신의 정치적 활동에 대한 보상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수여식 자체에 대해서는 강한 불만감을 드러냈다. 수여식 때 입어야 할 예복이 비쌀 뿐 아니라 '금실 견장과 뿔 달린 모자까지 있어 너무 복잡하다'고 불평한 것이다. 게다가 작위식 자체의 위엄도 전혀 없다며 불평했다.

기사 작위를 받은 뒤에는 국회의원선거에 두 번 출마하기도 했다. 선거에는 모두 낙선했지만 아일랜드에 자치정부를 수립시켜야 한다는 기고는 상당한 반향을 얻는다.

앞서 이야기했듯 코난 도일은 스포츠에도 꽤나 관심이 많았고, 1908년 런던 올림픽에서 마라톤 심판위원을 맡기도 했다. 이 경기는 종래 40km 코스로 진행되던 마라톤이 출발점이 윈저궁으로 바뀌면서 2.195km 늘어난 최초의 경기이기도 했는데, 이 때문인지 선두로 달리던 이탈리아의 피에트리 도란도가 스타디움에 들어오자 완전히 탈진해 쓰러져버렸다(쓰러지기 직전 400m를 무려 10분에 걸쳐서 뛸 정도였다). 그러나 코난 도일을 비롯한 심판진들이 몰려나와 도란도를 부축해 결승선에 골인시켰다. 그들은 인도적인 감정에서 저지른 일이었다고 강변했으나 실은 2위로 추격하던 선수가 미국의 존 헤이즈였기 때문에 양키가 우승하는게 눈꼴시어서 그랬다는게 중론. 당연한 얘기지만 도란도는 실격당했다.

저널리스트 E.D.모렐과 외교관 로저 케이스먼트가 주도한 콩고 자치구 개혁 캠페인에 참여하기도 했다. 1909년에 쓴 긴 팜플렛 「콩고의 범죄」를 통해 이 나라의 공포를 고발한다. 이 때 친해진 모렐과 케이스먼트는 『잃어버린 세계』의 캐릭터들에 반영되기도 했다. 이후 1차 세계 대전 중 모렐이 평화주의운동에 나서면서 그와 결별했다. 로저 케이스먼트가 아일랜드 독립을 주장한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는 조지 버나드 쇼 등과 함께 이를 막으려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편집]심령술

부친 사망 후 보였던 심령학에 대한 관심은 1906년에 첫 부인이 사망한 후 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여러 일가 친척들까지 잃으면서 점점 점점 커지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만 장남 킹슬리, 자신의 형제인 인네스, 두 처남(그 중 한 사람은 신사 도둑이 주인공인 레플스 시리즈로 인기를 끌었던 어니스트 윌리엄 호넝이었다), 두 사촌 등이 사망했다. 이로 인해 원래 영국적 양식의 소유자였던 아서 코난 도일은 미신에 빠져 심령술사를 후원하고, 사후세계가 존재한다는걸 증명하려 애썼다. 그러한 상태로 집필된 소설이 첼린저 교수가 등장하는 『안개의 땅』이다.

코난 도일이 심령론을 신봉할 것을 공언하고 그 선전과 전도에 나선 것은 제 1 차 대전 끝무렵부터였으므로, 영국적 양식의 소유자인 그가 미신적인 세계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은 전쟁중에 장남 킹슬리를 비롯한 많은 친지를 잃고 마음의 균형을 잃은 탓이라는 이야기도 많다.</span>

심지어는 당시 유명 마술사 해리 후디니에게 " 당신의 탈출 기술이 몸을 에테르화하여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냐?"는 헛소리 질문을 하기도 했다. 후디니는 어머니가 사망한 후 1920년대에 시령술사 운동에 대한 가장 유명한 적으로 나섰던 사람으로, 자신의 마술을 통해 심령술사들이 보여주는 심령술이 사실 사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증명하려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후디니는 자신의 기술이 단순한 마술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끝내 코난 도일에게 납득시키지 못했고, 오히려 코난 도일이 후디니를 "당신도 모르는 초자연적 힘을 갖고 있다"며 설득하려 들었다. 그러한 심령에 대한 관심으로 결국 1922년 코팅리 요정사건을 지지하는 글을 발표하였다가 곤욕을 치르게 된다. 1917년 코팅리 지방에 사는 두 소녀가 소위 "요정사진" 다섯 장을 기고한 이 사기사건은 훗날 그 사진들이 잡지에서 오린 그림들이었던 것으로 밝혀졋다.

심령술 분야에 대한 관심은 그의 단편집 중 하나인 『셜록 홈즈의 모험』에까지 반영되었고, 1929년 소련에서는 이 작품이 오컬트주의를 옹호한다는 이유로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다. 물론 스탈린주의가 퇴조하면서부터는 이 조치도 풀렸고, 러시아 배우 바실리 리바노프는 훗날 셜록 홈즈를 연기한 공로로 대영 제국 훈장까지 받았다.

미국의 과학사가인 리처드 밀너는 1912년에 영국에서 발생했던 필트다운인 사건의 범인으로 코난 도일을 지목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1912년 영국 루이스 부근의 필트다운코먼에 있는 바컴 장원의 사력층(沙礫層)에서 유사 이전의 인류로 추정되는 '필트다운인'의 유골이 발견된 사건이었다. 이 유골로 인해 인류의 기원에 대한 논란이 일었으며 40여 년간 유골의 진위를 놓고 학문적 논쟁이 벌어질 정도였다. 결국은 현대인의 두개골 및 유인원(오랑우탄)의 턱뼈를 정교하게 조작한 유골이었음이 밝혀져 관련 논쟁이 일단락되었다. 밀너는 코난 도일이 심령학의 정체를 폭로하곤 했던 현대 과학에 대한 복수로 이와 같은 짓을 저질렀으며, 『잃어버린 세계』에 코난 도일이 이 날조에 참여했음을 보여주는 여러 암호들이 들어있다고 주장했다.

그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두번째 부인의 친정 부근에서 이구아노돈의 화석이 발견된 후 코난 도일이 고생물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이로 인해 『잃어버린 세계』가 탄생되기는 했다.

[편집]죽음

도일은 1928년 69세의 나이로 아프리카에서 유럽까지 돌며 강연하다가 1930년 북유럽의 여행에서 돌아온 후 심장 발작을 일으켰는데 그 뒤 끝내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유언은 아내에게 한 말인 "You are wonderful." 묘지는 햄프셔주 뉴포레스트의 민스테드에 있는 묘지에 마련되었다. 그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STEEL TRUE

BLADE STRAIGHT

ARTHUR CONAN DOYLE

KNIGHT

PATRIOT, PHYSICIAN & MAN OF LETTERS

코난 도일이 적어도 10년 이상 거주했던 런던 남부의 집은 1924년부터 2004년까지 호텔과 레스토랑으로 활용되었다. 현재는 개발업자에게 매각되었는데, 이로 인해 이를 재개발하기 원하는 업자와 이를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코난 도일 팬덤의 싸움으로 인해 현재는 비어있는 상태다.

코난 도일이 마지막으로 거주했던 저택은 코난 도일 사후 더욱 유명해 졌는데 다음과 같은 일 때문이었다. 1960년에 그 집에 새 주인이 된 사람들은 모두 에든버러 의대 출신으로 코난 도일의 후학들이며 그 중 한 사람의 부친은 대학 시절 코난 도일과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이 그 집에서 코난 도일의 귀신이 나온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다락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기도 했으며 콧수염을 기른 키가 큰 노인이 집 안에 나타나기도 했던 것이다. 분명 코난 도일의 모습이었다. 그 유령은 빨간 표지에 까만 고무줄로 묶은 일기책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1961년 여름에 유령 쫓는 의식을 벌이고 나서야 더이상 유령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 직후 도일 집안의 찬 친척의 입을 통해서 코난 도일에게 정말로 빨간 가죽을 씌운 비밀일기가 있었으며 그 일기장이 어디론가 없어진 일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사건으로 인해 코난 도일은 죽어서도 심령술을 증명하기 위해 분투한다는 우스개소리가 돌기도 했다.

1930년 10월 7일,영국 심령협회에서는 영매 아이린 가렛을 초청해 석달 전에 죽은 코난 도일의 영을 불러내기로 했는데, 나오라는 코난 도일은 나오지 않고 당시 영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비행선 R101호 추락사건의 비행선 선장 카마이켈 어윈의 영을 소환해 당시 사건의 진상을 듣게 되었다. 참고로 추락사건은 이 행사의 사흘 전.

[편집]작품

[편집]셜록 홈즈》 시리즈

[편집]챌린저 교수》 시리즈

[편집]기타

그가 썼던 역사소설이나 심령소설, 정치적 팜플렛 등은 번역되지 않았다.

[편집]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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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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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창

도서/인명 2009/12/13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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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d Chiang姜峯楠(1967.10.20~)

미국의 과학소설가. 중국계 이민 2세로 뉴욕 주 포트 제퍼슨 태생이다. 중국계 이민 2세지만 중국어는 전혀 못한다고. 1990년에 데뷔한 이래 겨우 12편의 중단편만을 써왔으면서도 SF 팬덤 전체에 명성을 떨친 작가이다. 주로 하드 SF에 해당하는 작품들을 써왔으며, 《스타워즈》류는 "우주선과 레이저가 등장하지만 핵심은 500년 전, 또는 1000년 전 쯤에 모험 이야기"일 뿐 SF가 아니라는 견해를 표방하였다. 문학적으로 영향을 받은 작가로는 SF작가인 존 크로울리와 진 울프가 있으며, 가장 마음에 드는 작가로는 카렌 조이 포울러와 그렉 이건을 꼽는다. 현재 테드 창은 워싱턴 주 벨뷰에서 작가 생활과 프리랜서 일을 병행하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아서 클라크나 아이작 아시모프 등 유명 SF 작가들의 작품을 읽으며 SF 작가의 꿈을 키웠다. 십대 때부터 브라운대학교(물리학, 컴퓨터공학) 재학 시절까지 꾸준히 습작을 써서 잡지에 투고했지만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한 때는 절필을 고려하였으나 대학을 졸업한 후 심기일전한다는 각오로 참가한 클라리온 워크샵에서 동료 SF 작가들을 만난 후 계속해서 글을 쓰기로 결정했다.

이후 시애틀의 컴퓨터 관련 회사에서 테크니컬 라이터로 취직하여 일하면서 틈틈히 글을 썼고, 결국 1990년에 Omni 잡지에 「바빌론의 탑」(1990)을 게재하면서 데뷔한다. 이 작품은 잡지에 실리자마자 격찬을 받았으며 그해 네뷸러상 최우수 단편상을 수상한다. 데뷔작으로 네뷸러상을 수상한 사례는 그가 처음이었거니와 역대 최연소 수상이기도 했다. 이듬해 발표한 단편 「영으로 나누면」(Division by Zero)는 로커스상 후보에 올랐고, 같은해 발표한 단편 「이해」(Understand)는 아시모프 과학소설잡지의 독자투표상을 수상하는 한편 휴고상과 네뷸러상 후보에 올랐다. 1992년에는 최고의 신인 작가에게 주어지는 존 캠벨상을 수상한다. 그 이후 테드 창은 무려 6년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1998년 드디어 그의 최고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 중편 「네 인생의 이야기」(Story of Your Life)를 발표한다. 이 작품은 호머상휴고상로커스상팁트리상 모두에 후보로 오르는 한편, 네뷸러상과 스터전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린다.

다시 2년 뒤 세계적인 과학 학술지인 네이처에 발표한 논픽션풍의 엽편 "The Evolution of Human Science"(게재시의 제목은 "Catching Crumbs from the Table")는 로커스상 후보에 올랐고, 같은해 발표한 중편 「일흔두 글자」는 휴고상스터전상세계환상문학상 등 무려 다섯 개 상의 후보에 오른 후, 대체역사소설을 대상으로 하는 사이드와이즈상을 수상한다. 그리고 2001년작인 「지옥은 신의 부재」로 마침내 휴고상과 네뷸러상로커스상을 한꺼번에 거머쥐게 된다. 2002년에 Tor를 통해 출간한 단편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로커스상 단편집 부문을 수상한다.

2006년에 발표한 「인류과학의 진화」는 네이쳐지에 게재되었고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은 2007년 네뷸러상/휴고상 수상, 최신작인 「숨결」역시 네뷸러상과 휴고상을 수상했다. 

2009년 7월 18일,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주최한 행사 환상교실의 일환으로 초청받아 방한, '하드 SF - 서사의 논리와 글쓰기의 미학'라는 제목의 강연회를 개최했다. 이후에는 장소를 옮겨 미공개 중편인 〈Life Cycle of Software Objects〉의 낭독 및 사인회도 열렸다.

[편집]참고

가상 인터뷰. 재미로 읽되 낚이지는 말 것. 아울러 이 가상 인터뷰는 김상훈을 통해 테드 창 본인에게도 전달된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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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 Raymond Richard Martin (1948.9.20~)

미국의 소설가, 시나리오 작가. 흔히 '조지 R. R. 마틴'이라 불리며, 영미권의 팬 사이에서는 'GRRM'이라는 약어도 쓰이는 듯 하다. 주로 판타지, 호러, SF 분야에서 활동해온 작가로, 현재 집필 중인 에픽 판타지 《얼음과 불의 노래시리즈로 유명하다.

[편집]생애

미국 뉴저지주 바요네 태생. 어렸을 때부터 책을 무척 좋아했으며 만화책 수집가이기도 했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 《판타스틱 포》코믹스 20호(1963년 11월호)에 독자 투고를 했다가 실리면서 창작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대학에서는 저널리즘을 전공했고, 70년대초에 단편을 쓰기 시작했지만 작가로서의 데뷔가 순탄치는 않았다. 그의 단편 중 하나는 서로 다른 잡지에서 무려 42번이나 거절당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창작을 계속한 결과 1973년에 아날로그 매거진에 실었던 단편 《With Morning Comes Mistfall》이 휴고상과 네뷸러상의 후보에 오르는 성과를 거둔다. 수상에는 양쪽 모두 실패했지만 이를 괘념치는 않았고, "휴고&네뷸러 루저스" 클럽에 끼게 된 것만으로도 크게 만족했다고 한다.

판타지나 호러 계통의 작품으로 명성을 날린 작가이지만 초기작들 상당수는 SF(특히 미래 역사물)였다. 이 외에는 정치-밀리터리 픽션을 쓰기도 했다.

1980년대에는 TV 쪽과 책 편집자로 전업하였다. TV에서는 새 『트윌라잇 존』과 『미녀와 야수』시리즈에서 일하였다. 편집자로서는 로저 젤라즈니 등 여러 작가들이 참여했던 《와일드 카드》시리즈를 관리했으며, 그 자신도 해당 세계관에 몇 가지 설정을 집어넣곤 했다.

1987년에는 그의 중편 《Nightflyeres》가 영화화된다.

1991년에는 잠깐 장편 소설을 쓰려하였는데, 이 작품에서 채택하지 못한 아이디어에다 중세사에 관련된 자신의 교양을 결합하여 《얼음과 불의 노래시리즈를 탄생시키기에 이른다. 이 시리즈는 평단과 대중 양측의 호평을 받으며 승승장구를 거두었고, 급기야 당초 3부작으로 예정했던 조지 마틴은 집필 계획을 수정하여 7부작으로 완성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게 된다. 현재는 《얼음과 불의 노래》시리즈 집필 중.

이 외에 저널리즘 박사학위까지 받은 후 강사 생활을 하기도 했고, 체스 경기 감독자이기도 하다. 여가 시간에는 중세 테마 미니어쳐와 만화책을 수집한다고 한다. 그의 콜렉션에는 『스파이더 맨』과 『판타스틱 포』코믹스의 초판도 있다. 인터넷을 활발히 이용하지만 보안상의 이유로 인해 집필용 컴퓨터는 따로 운용한다고 한다. 문제의 집필용 컴퓨터는 무려 완전한 도스 시스템.

[편집]테마

비평가들은 마틴의 작품이 상당히 어둡고 시니컬하다고 지적해왔다. 그의 장편 데뷔작인 《Dying of the Lights》만 해도 태양이 점점 멀어지는 통에 점차 생물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해가는 버려진 행성을 무대로 한 작품이다. 그가 쓴 작품들은 대체로 음울한 분위기를 풍긴다. 그의 캐릭터들은 대부분 불행하거나 최소한, 무자비하게 냉소적인 세계에서 이상을 지키려 노력하느라 현실을 불만족스러워하는 인물들이다. 주인공들 대부분이 비극 영웅의 특징을 지니기도 한다.

또한 주요 인물들에게 인정사정없이 험한 꼴을 보이게 하거나 죽여버리는 경우도 빈번한데, 이에 대해 조지 마틴은 독자들이 페이지를 넘길 때 주인공들의 운명에 실감나게 두려워하길 바란다고 이야기하였다.

[편집]팬들과의 관계

이 외에 조지 마틴은 SF 컨벤션에 정기적으로 참여하여 장르문학 팬덤과 자주 교류하는 걸로 유명하다. 70년대 초에 비평가이자 작가인 토마스 디쉬가 마틴을 비롯하여 월드콘에 매년 참가하는 작가들을 두고 "노동절 그룹"이라고 이름붙인 일도 있다. 매년 월드콘이 노동절인 5월 1일 즈음하여 열리는 것에 빗댄 이름이다.

자신의 공식 팬클럽인 Brotherhood without Banners과도 관계가 좋은 편이다. 팬클럽에서 주최한 파티에 축전을 보내기도 했다. 2006년 12월에는 이 단체의 웹사이트에 등록된 회원 수가 1,000명을 돌파했다. 다만 팬픽에 대해서만큼은 상당히 완고한 편이다. 팬픽션이라는게 저작권 침해일 뿐만 아니라 상승하는 작가에게 해로운 결과를 주기 때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그는 자신의 작품과 관련된 그 어떠한 사항도 팬픽에 활용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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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르 카레

도서/인명 2008/09/24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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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존 르 카레(John le Carre)

영국의 소설가
'존 르 카레'는 필명으로, 본명은 '데이비드 존 무어 콘월'이다. 존 르 카레는 콘월이 영국 외무부에 재직 중, 외무부에서 일하는 사람은 본명으로 책을 출간할 수 없다는 규정 때문에 만든 필명이다.

영국 남부 도싯 주 태생. 직업 사기꾼이었던 아버지는 르 카레가 세 살 때 사기죄로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이 일로 인해 아내과 결별했다. 르 카레는 다섯살 때 헤어진 어머니와 21세 때에야 재회했다. 가족 구성은 아버지 로니 콘웰, 어머니 올리브 콘웰, 그리고 남동생 토니 콘웰이 있다.

훗날 르 카레의 아버지는 그 뒤에도 아내를 둘이나 더 얻고 더 많은 사기 행각을 벌이다가 3백억 원 가량의 빚을 지고 화려하게 파산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자식인 르 카레는 특권 계층의 자제들이 다니는 명문학교에 보냈는데, 이는 로널드 콘웰의 교육열이 유별나서가 아니라 그를 '가짜 신사'로 만들어 비밀 첩보원 마냥 특권 계층에 아들을 심어두기 위해서였다. 로널드 콘웰은 "데이비드를 '신사'로 만들기 위해서라면 도둑질도 할 수 있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르 카레 자신은 이로 인해 어렸을 때부터 스파이 생활을 경험했다고 회고하였으며 아버지가 사망한 뒤에 쓴 『퍼펙트 스파이』에는 아버지에 대한 경험이 상당히 많이 반영되었다. 생전에는 아버지와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고 한다.

르 카레는 세인트앤드루스 퍼블릭스쿨을 거쳐 셔본 스쿨에 진학했지만 당대의 빡빡한 영국식 교육에 불만을 품어 자퇴했다. 특히 완고한 사람이었던 사감을 싫어했다고 한다. 1948년부터 1949년까지 스위스의 베른 대학에서 1년간 독일어를 공부하면서 이 인연으로 평생 독일문학에 대한 애착을 갖게 되었다.

1950년에는 오스트리아 주둔 영국군의 정보 장교로 근무하며 2차 대전 후, 철의 장막을 넘어 서유럽으로 온 난민 캠프에 들어온 사람들을 심문하는 일을 주로 담당했다. 1952년에는 옥스퍼드 대학의 링컨 칼리지에 돌아가 서 근대 유럽어학을 전공하는 한편 M15와 비밀요원 계약을 맺었다. 당시 그는 혹시 잠입했을지 모를 소련 요원에 대한 정보를 모으기 위해 극좌 그룹에 가입했다. 재학 중에 영국군 장교의 딸인 앨리슨 앤 베로니카 샤프와 결혼했다.

1954년에 아버지가 파산함에 따라 잠시 대학을 떠나 일을 하지만 1년 후에 대학에 돌아가 최우등상을 받고 졸업했다. 대학을 졸업한 1956년부터 명문인 이튼 스쿨에서 프랑스어와 독일어을 가르쳤고, 1958년부터는 아예 M15 소속 장교로 전업했다. 이 때의 업무는 주로 요원 관리, 심문, 전화 감청 등이었다고 한다.

범죄 소설가 존 브링험의 격려 아래 첫 작품인 『죽은 자에게 걸려온 전화』를 쓰기 시작한다. 존 브링험이란 인물 자체도 르 카레의 셔번 스쿨, 링컨 칼리지 시절 스승인 비비안 그린과 함께 존 르 카레의 가장 유명한 캐릭터인 '조지 스마일리'의 원형이 되었다.

1959년부터는 서독의 본과 함부르크의 영국 대사관에 주재하며 외무부 서기관으로 일했다. 표면적으로는 영국 총리를 위한 번역 등의 외교 업무를 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그의 실제 업무는 영국 정보부의 스파이였다. 이 때의 경험은 아버지와의 유년시절과 함께 그의 소설의 중요한 재료가 된다.

르 카레는 자신의 스파이 업무를 환멸했으며 냉전 구도 속에서 소모되어가는 인간에 대한 슬픔을 담은 소설을 쓰곤 했다. 이 때문에 『007 제임스 본드』시리즈와 같은 대부분의 첩보물들이 첩보원의 매력적인 묘사에 공을 들인 반면 르 카레의 소설은 첩보계에 비판적인 거리를 두고서 그 추악함을 가감없이 묘사해내곤 했다.

1960년대에 쿠바 사태가 발생하자 영국의 사회학자들은 르 카레의 소설을 두고 이런 평을 내렸다.
1960년대의 동서 긴장 상황을 명확하게 알려 주는 데는 르 카레의 소설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런 갈등의 상황에서 벗어나 가벼우면서도 행복한 무언가를 동경하게 되었는데, 그런 소망을 더벅머리 소년 네 명(비틀스)이 화끈하게 충족시켜 주었다.

르 카레는 세번째 작품인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로 문학적·상업적 성공을 거두자 즉각 스파이 업무를 청산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이후로도 냉전 구도를 담은 스파이 소설들을 쓰며 작가 경력을 이어갔다. 예외라면 첫 결혼이 이혼으로 끝날 무렵 쓴 연애 소설 정도이다.

작품
《Call for the Dead》(1961) 《A Murder of Quality》(1962)
《The Spy Who Came in from the Cold》(1963)(Edgar Award 1965, Best Novel) 《The Looking-Glass War》(1965)
《A Small Town in Germany》(1968)
《The Naive and Sentimental Lover》(1971)
《Tinker, Tailor, Soldier, Spy》(1974) 《The Honourable Schoolboy》(1977)
《Smiley's People》(1979)
《The Little Drummer Girl》(1983)
《A Perfect Spy》(1986)
《The Russia House》(1989) 《The Secret Pilgrim》(1990)
《The Night Manager》(1993) 《Our Game》(1995)
《The Tailor of Panama》(1996)
《Single & Single》(1999)
《The Constant Gardener》(2001)
《Absolute Friends》(2003)
《The Mission Song》(2006)
《A Most Wanted Man》(2008)


참고할만한 곳
위키피디아「John le Carre」(영문)
네이버  「007과 2 MB」(키호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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