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문학웹진 거울 비평선, 『B평』이 출간됩니다. 웹진 거울에서 그간 단편선은 여러 권 출간했습니다만 비평선은 이게 처음입니다. 아니 비평선이 동인지로 나온 것 자체가 이 바닥에서는 처음이지 싶군요. 한국 SF·판타지 팬덤도 이제는 1910년대 경성 문단의 수준을 겨우 따라잡았다는 이야기일까요. 그나마도 거울 비평선 2호가 출간될 때의 이야기겠습니다만. 멀고도 먼 이야기죠.

일단 비평선이다 보니까 저 역시 글을 두어편 실었습니다. 최제훈의 연작소설집 『퀴르발 남작의 성』에 대한 서평이 한 편, 장르 작가와 문학상의 상관 관계에 대한 글이 또 한 편입니다. 여기에 더해 작가 인터뷰도 한 편 정도는 기고했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드는데, 물론 당시 상황에선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입니다.

여하간 환상문학웹진 거울의 첫 비평선은 11월 말 출간됩니다. 그냥 이 사람이 요즘은 이런 활동을 하는구나- 하고 알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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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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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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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판타지도서관에서 출간한 무크지 《미래경》2호에 대한 서평이다. 환상문학웹진 거울 88호에 기사로 실렸으니, 본문은 그쪽에서 읽어 주십사 부탁드린다. 서평 대상이 된 책에 대한 말은 기사 안에서 다 했으니 따로 덧붙일 말이 없고, 여기서는 글 외적인 부분에 대해서만 언급하고자 한다. 한마디로 말해 부록. 서평 기사 하나 써놓고 잔말을 길게 쓰자니 퍽 우습기는 한데, 내게는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스스로에게 그만큼 중요한 글이었던 탓이다.





1.

기사에서도 지나가듯 언급되긴 했지만 이번에 서평의 대상으로 삼았던 2호 이전에 나왔던 《미래경》1호, 스타 트렉 특집도 읽었었다. 작년 여름에 열렸던 와우북 페스티발 당시 SF&판타지도서관 부스 자원봉사자로 일했다가 도서관장님에게서 선물받은 것이다. 받은 책이라 읽긴 읽었지만 내게 큰 의미를 가지긴 어려운 책이었다. 특집 기사였던 《스타 트렉》 특집의 비중이 상당히 컸는데, 해당 시리즈에 별 관심이 없는 나로서는 특집 전체를 건너뛰고 나니 읽을 기사가 많지 않았던 것이다. 《스타 트렉》시리즈의 시나리오에 참여했던 무수한 SF/판타지 계열 작가들에 대한 기사가 있었다면 내 태도도 좀 다르지 않았을까 한다. 여하간 이 책에서는 소설가/번역가 인터뷰들만 관심있게 읽었을 뿐, 썩 좋은 인상을 받지는 못했다. 

다만 이 책을 선물받아 읽지 않았더라면, 내가 《미래경》2호에 대한 글을 썼을 가능성은 매우 낮아졌으리라 생각한다. '공짜 책 선물'에 대한 부채감과 수록된 기사들에 대한 실망,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긴 2호에 대한 기대는 내게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이번 리뷰의 대상이 된 《미래경》2호는 지난 8월 1일에 명동에서 열렸던 2010 SF&판타지 페스티벌에서 구입했지만 실제 기사는 9월 말에야 마무리지어졌다. 글 한편 쓰는데만 거의 두 달이 걸렸으니, 원래 내가 글을 좀 더디게 쓰는 편이긴 하지만 이 정도면 개중에서도 퍽 오랜 시간을 들인 편이다. 물론 여기에는 여러 가지 사정이 따랐다.

2.

잡지에 대한 평 자체가 그리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나는 잡지 비평이 그 외의 단행본에 대한 작업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두명의 기획자 아래 여러 명의 작가가 참여하는 단편집에 대한 평이 한 명의 작가에 의한 장편 소설과 다른 형태를 띌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유에서이다.

단편집에 대한 평을 각각의 단편에 대한 평 묶음으로 구성한다면 평 작업 자체는 수월하지만, 그렇게 완성된 평은 책 한 권에 대한 총체적인 시각을 제공하기 어렵기 마련이다. 평자의 작업이 어디까지나 '단편집'에 대한 평인 한, 수록된 단편 하나하나에 지나치게 얽매여서는 곤란하다. 여러 작가의 단편들을 하나의 책으로 묶어내는 기획 의도에 대해 접근해야만이 책 전체에 대한 상을 제공할 수 있다. 잡지평도 이와 마찬가지일 텐데, 특히 《미래경》과 같은 무크지들은 그 기획의도가 단편집들보다도 훨씬 분명하게 독자들 앞에 드러나기 마련이라는 점에서 평자로서는 도저히 그것을 간과할 수 없다.

서평의 목차가 《미래경》2호의 수록 순서를 따르지 않고, 심지어 아예 소개되지 않은 기사까지 있었던 것은 그러한 까닭이다. 《미래경》이라는 잡지 전체, 나아가 그 잡지를 가능케 하는 외연인 팬덤의 장르 담론에 대해 쓰고자 했기 때문에 서평에서 기사들을 소개하는 순서도 그에 맞게 조정되어야 했다. 적어도 평자로서의 내게는 기사들의 면면보다 그러한 기사들을 생산하고 또 무크지라는 형태로 묶게 하는 환경들이 보다 큰 관심사였던 것이다. 쉽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필요한 작업이었다고 생각한다.

3.

기사 작성에 들어가서는 글에 사용된 논리들이 나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가령 SF문학사 관련 기사들에 대한 내 평의 기본 골자는 문학사 기술에는 그 문학사의 면면을 이루는 사회적 맥락, 작가, 작품들에 대한 충실한 이해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문학사 작업에 그러한 이해가 필요하다면 문학사 비평 작업과 그 비평가에게도 마찬가지의 조건이 적용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내 《미래경》기사, 나아가 내 서평 전체는 그러한 논리에 얼마나 충실한가? 물론 흔히들 이야기하듯 축구 비평을 하기 위해 꼭 축구 선수가 될 필요는 없겠지만, 그 평자가 이미 아마추어 축구 선수 내지는 축구 선수 지망생이라면 조금은 다른 윤리 기준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특히 이 서평에서 지적했던 문제점들의 상당수가 과거 내 자신의 한계였음에야.

기사에서는 짐짓 SF에 대한 확고한 견해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실제 내가 그러한 관점들을 갖게 된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좁디 좁은 '이 바닥'의 특성상 SF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오래 전부터 SF에 대한 여러가지 담론들을 주워들었다곤 하지만 실상 내가 SF를 진지한 관찰 대상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 자체가 아주 최근, 구체적으로는 대략 2008년 초부터인 것이다. SF에 대한 내 입장을 어느 정도 정리하게 되는 것은 물론 그보다도 훨씬 이후의 이야기이다.

가령, 내 SF관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이는 공교롭게도 서평에서 다룬 기사들 중 하나를 쓴 정소연님이었다. 지난해에 정소연님이 문지문화원 사이에서 진행했던 《사회문학으로서의 과학소설》 강의를 듣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내 SF관은 쳬계적이지도, 일관되지도, SF가 아닌 다른 문학에 대한 관점들과도 연결되지 못했다. 그 강의를 들으면서야 비로소 내가 그 이전에 쌓았던 문학적 교양과 SF에 대한 관심사를 연결시킬 수 있게 되었는데, 《미래경》 서평에서는 정소연님처럼 내 자신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이들의 글을 마치 그 분야에 대한 전문가라도 되는양 평가하는 위치에 놓였던 것이다.

또한 내 평 작업 자체가 과연 나 자신을 제외한 가치 있는 작업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기사에서는 이 잡지를 읽고 평을 쓴 이가 얼마나 되느냐며 반쯤 조롱하는 투로 말하기도 했었지만, 그런 문제 때문은 아니다. 내가 기사의 기본 전제로 삼았던 것 중 하나인, 'SF 팬덤'이 과연 실재하며, 그 정도의 중요성을 가지냐의 여부가 보다 큰 문제였다.

그 기사의 주된 비평 대상은 기사를 썼던 이들이나 기획자가 아니라 그들이 활동했던 SF 팬덤 전체였다. 그런데 'SF 팬덤'이라는게 과연 실존하는 집단인가의 문제는 완성된 기사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내지 못한 부분이다. 내가 보고 접한 SF독자들을 토대로 특징을 뽑아내긴 했지만, 사실 기사에서 언급되는 독자들이 '팬덤'이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의 집단으로 형성되어 있는지, 또 그렇다 하더라도 그 집단이 SF 독자 전체에서 어느 정도의 대표성을 가지는지는 답할 수가 없다. 기사를 쓰는 내내 혹시 전체 SF 독자들 중에서도 아주 소수에 속하는 SF팬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실재하는지조차 불분명한 소수의 독자들만을 타겟으로 글을 쓴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거기에 대한 판단은 기사를 읽은 독자들이 해주겠지만, 기사에 대한 피드백이 매우 적은 현실적 요건상, 내가 거기에 대한 증언을 들을 가능성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 짐작한다.

4.

기사가 올라간 뒤에도 기사에 대한 고민은 끊이질 않았다. 기사의 수록처인 웹진 측에 기사가 받아들여지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다. 기사가 올라가기 전까지 편집진과 나 사이에 오갔던 이야기들을 까발릴 필요는 없겠지만, 최종 형태에 대해서는 말을 해도 되지 않을까 한다. 미래경 기사가 왜 국내소설 파트에 올라간 것일까?

무크지 《미래경》이 국내 소설을 중점으로 다루는 단행본이라면 국내 소설 파트에 올라가는 것도 어느 정도 수긍할 수는 있다. 국내 소설이 아닌 '국내 문학'이 파트명이었다면 보다 쉽게 납득했겠지. 그러나 《미래경》은 기본적으로 잡지이며, 소설만이 아닌 영화, 애니메이션 등의 매체를 포괄해서 다루고자 하는 담론지다. 이런 책에 대한 서평 기사를 웹진의 국내소설 파트에 소개하는게 과연 적절한 일일까? 사실 《미래경》2호는 일본 SF 특집이기까지 해서 더더욱이나 국내소설과는 거리가 있고, 내 기사에서는 아예 잡지에 수록된 창작 소설에 대한 평 자체를 싣지 않았는데도. 이 기사를 싣고자 했다면 오히려 비소설 파트 쪽이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한다.

0.

기사의 서론 부제인 '왕이 되고 싶었던 사나이'는 러디어드 키플링의 단편 소설 「왕이 되고 싶었던 사나이」에서 따왔다. 서구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은 오지에 자기들을 위한 왕국을 건설하고 싶어했던 두 부랑자의 운명을 다룬 소설이다. 결론의 부제였던 '황제를 위하여'는 이문열의 장편 소설 『황제를 위하여』에서 따왔다. 여러 가지 상황으로 인해 자신이 도참서에 예견된 위대한 왕이 될 재목이라 믿었던 제왕병 환자에 대한 작품이다. 결론의 대부분을 엔데의 『끝없는 이야기』, 「늙은 황제들의 도시」챕터에서 따온 인용구가 대신하기 때문에 이쪽을 연상했을 독자들이 많겠지만, 실제 내가 그 소제목을 달면서 떠올렸던 이는 이문열의 제왕병 환자 쪽이다.

서론의 부제와 결론의 부제를 합쳐서 기사의 제목을 '왕이 되고 싶었던 황제를 위하여'라고 지을까 고민하기도 했었는데, 번잡하기만 하고 알아볼 사람도 적을 듯 하여 관두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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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학기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과 현대문학작가론 수업에 제출한 레포트입니다.

세계의 폭력에 저항하는 힘

1인칭 시점의 미학

다니엘 디포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1719)는 출간되었을 당시에는 이 작품을 소설이 아닌 '로빈슨 크루소라는 사람의 조난 수기'로 생각한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당시만 하더라도 1인칭 시점을 채택한 소설이 흔하지 않았기에 생긴 해프닝이다.

소설의 1인칭 시점은 다분히 고백적·회고적 성격을 띤다는 점에서 여타의 시점과 차이를 보인다. ‘등장인물’들의 사건을 ‘묘사’하는 3인칭 화자와는 달리 1인칭 화자는 그 자신이 극중 사건을 경험했던 사람으로서 자신의 ‘기억’을 풀어낸다. 『로빈슨 크루소』의 독자들이 일으킨 착각도 여기에서 유래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3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로빈슨 크루소』를 수기로 착각하는 독자는 거의 없다. 그러나 1인칭 시점 특유의 회고적·고백적 서술이 당시의 독자들에게 선사했을 남다른 충격은, 그 신선함을 잃은 현재까지도 유효하다.

1인칭 서술자들은 3인칭 서술자들이 다가가지 못하는 곳까지 다가가서는 그들이 집어내지 못하던 주인공의 심리와 기억과 감정을 집어낸다. 보다 인간의 경험과 내면에 가까운 서술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성장소설장르에서 유난히 1인칭 시점을 많이 사용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주인공의 내면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두 양식은 서로 닮은 점이 많다.

1인칭 시점의 사용에 익숙한 현대 독자들은 더 이상 1인칭 화자를 실존 인물로 착각하지 않는다. 그 대신 독자들은 ‘실존 인물’의 자리에 자기 자신을 집어넣는다. 주인공의 경험과 자신의 경험을 비교하고, 주인공의 정서와 자신의 정서를 비교하게 된다. 소설이 1인칭 시점을 통해 주인공의 내면을 돌아보듯이, 독자 또한 소설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파멸의 경험

공감

독자들이 박민규의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서 공감할만한 부분을 찾아내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개인들에게 - 그 전 시대에 비하면 - 가혹하리만큼 많은 것을 요구해왔다. 원래는 기계 장비 등의 성능에나 쓰이던 ‘스펙’이라는 말이 어느 순간부터 사람의 ‘성능’을 가리키는 은어로 통용되기 시작한 상황을 보라. 한 사회의 자본주의적 경향이 심화되면, 사람은 가축이나 기계 장비 따위와 하등 다를 게 없어진다. ‘스펙’, 곧 일정한 자격 요건을 갖추지 못하면 사람으로건 인적 ‘자원’으로건 인정받지 못하게 된다.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소재로 삼은 외모지상주의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소설에 나오는 두 여인, 화자의 연인과 화자의 어머니는 '스펙 권하는 사회‘의 가장 큰 피해자들이다.

부부가 나란히 서 있는 풍경은

그래서 늘, 보는 이로 하여금 묘한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배우라는 신념으로 똘똘 뭉친 미남과 그 곁에서 어딘가 모르게 머뭇하던 박색(薄色)의 여인... 작지만 날렵한 아버지와 크고 펑퍼짐한 어머니의 체격 차이도 분명 한몫을 했으리란 생각이다. 이상하리만치 남아 있지 않은 두 사람의 사진도, 그런 부조화(不調和)를 아는 어머니의 <기피>가 가장 큰 원인이었을 것이다.

더없이 희생을 하면서도 그래서 늘 어머니는 숨거나, 가려진 느낌이었다. 아니 언제나 아버지에게 미안해 한다는 느낌을 나는 지울 수 없었다.(47~48p)
원서를 넣었던 곳에서 저는 모두 탈락했습니다. 문제는 성적이 아니라... 면접이었습니다. 그나마 한 곳에서 이유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성적은 참 좋은데... 우리 업무가 대인관계가 중시되는 일이라 말이지... (중략)

고요하던 교무실과, 그중 어느 한 곳의 담당자에게 전화까지 걸던 선생님의 노력도 떠오릅니다. 좋은 애 보내달라고 해서 제가 추천서까지 넣었지 않습니까? 에이, 그래도 보통은 되어야지...(276~277p)

소설 속의 두 여인들은 결코 무능한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어떤 국면에서는 우수하기까지 하다. 화자의 어머니는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남편을 대신하여 온 집안 살림을 감당했고, 화자의 연인은 탄탄한 교양과 성적으로 스스로를 단련시킨 재원이었다. 단지 ‘외모’라고 하는 스펙에서 통과하지 못했을 뿐이다. 시험으로 치면 ‘과락’(科落)인 셈인데, 이 한 과목의 과락은 사회가 그들을 ‘못생긴 여자’로 낙인찍고, 인생의 낙오자로 취급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또한 자본주의 사회 시스템의 본질이다. 다른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더라도 사회가 중요하게 여기는 하나의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여지없이 낙오자의 낙인을 찍는 것 말이다.

경험

소설 속에서 외모 지상주의의 폭력성은 크게 두 명의 여성을 통해 나타난다. 화자의 어머니와, 화자의 연인이다. 연령대는 다르고 작중에서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은 단 한 번도 없지만, 두 여성은 지독한 박색(薄色)이라는 상처를 공유해야 했다는 점에서 서로 닮았고, 동지라 할만하다.

화자의 어머니는 젊었을 때 무명배우였던 사내에게 반해 결혼한 인물이었다. 화자의 어머니가 그 사내에게 반했던 것은 순전히 외모 때문이었다. 소주잔을 내려놓을 때의 우아함, 짜장면을 먹을 때라도 잃지 않았던 품위 따위가 화자의 어머니로 하여금 결혼까지 결심하게 만든 원인이었다. 박색이라는 어머니 자신조차도 외모지상주의에서는 딱히 자유롭지 않았던 셈이다. 하지만 자신의 추모(醜貌)에서 비롯된 열등감은 남편이 연기를 한답시고 한없이 ‘비현실을 추구하는’(47p) 가운데서도 군말없이 수발을 들게 만들었다. 그런 부모의 관계를 화자는 ‘아마도 아버지는 어머니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미남이었고, 어머니는 희망이라곤 보이지 않았던 삼류 배우가 발견한 최고의 숙주였을 것이다.’라고 정리한다.

우연한 기회를 통해 배우로 성공한 남편이 자신과 자식을 내버리는 와중에도 화자의 어머니는 그러한 취급을 묵묵히 감내해낸다.

실은 그때부터 어머니는 서서히 아버지를 포기해 간 것이 아닌가, 나는 생각한다. 확실히 그런 느낌이다. 막연했던 불안이 현실로 드러난 그날 밤까지, 얇게 오이를 썰듯 조금씩, 또 조금씩... 어머니는 아버지를 포기해 갔다는 생각이다. 어느 노래의 슬픈 가사처럼 못생긴 여자는 스스로의 운명을 미루어,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51p)

이 묵묵한 감내는 화자의 연인에게서도 보인다. 화자가 ‘세기를 대표하는 추녀’(81p)라고 평할 정도로 못생긴 그녀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과한 업무와 말도 안되는 취급을 받아가면서도 거기에 단 한 번의 항변도 하지 않는다.

누구 하나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누구도 그녀가 그 자리에 존재함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83p)

그녀 또한 자신에게 가해지는 외모지상주의의 폭력을 그대로 수용하는 모습을 보이며, 스스로를 위축시킨다. 번드르르하지만 무능력한 남편을 수발하던 ‘어머니’와 늘 고개를 숙인 체 묵묵히 짐을 옮기는 ‘연인’의 모습은 분명 닮았다. 소설의 중반부에 이르면 ‘연인’은 화자에게 자신이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는 편지를 보낸다. 이 편지를 통해 독자들은 비로소 ‘못생긴 여자들’이 스스로를 ‘못생긴 여자’로 규정하고 상처 속에 스스로를 몰아넣기까지의 과정을 이해하고 공감하게 된다.

소설에서 적나라하게 묘사되는 ‘못생긴 여자들’의 모습은 비단 소설 속 인물들만의 경험과 정서가 아니다.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주의가 늘 강조되는데도 정작 이야기되지는 못했던, 피해자들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외모 ‘스펙’의 기준이 터무니없이 높은 만큼 그로 인한 피해자들 또한 수없이 많기 마련이다. 기실, 소설 속에서 ‘못생긴 여자들’이 당하는 폭력적인 언어나 상황, 그에서 비롯되는 자기모멸감 따위의 경험에서 자유로웠을 독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소설은 독자가 자기 상처에 함몰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애당초 소설이 독자를 자기 연민의 신파로 몰아넣고자 했다면, 외모 콤플렉스 없는 - 오히려 배우인 아버지를 닮아 수혜자가 됨직한 - 남자를 화자로 설정할 필요가 없었다. 차라리 주인공의 연인이나 주인공의 어머니와 같은 ‘못생긴 여자’가 소설의 화자였던 편이 독자들로부터 눈물을 뽑아내기는 보다 쉽다. 소설은 그러한 쉬운 길을 택하지 않았다.  적어도 신파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주려 했다는 의미가 된다.

화자의 시선은 물론 기본적으로 ‘못생긴 여자들’의 삶에 주목한다. ‘못생긴 여자들’의 삶에 가해지는 적나라한 폭력은 때로는 화자의 어머니, 때로는 화자의 연인에 대한 관찰을 통해 비춰진다. 이 ‘관찰’이란 수사는 상당히 중요하다. 폭력의 피해자들은 물론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적나라한 폭력에 대해 누구보다도 더 잘 알지만, 동시에 그 경험에 얽매이기 쉽다. 폭력의 경험을 넘어 폭력이 작동하는 구조를 파악하는 일은 늘 피해자가 아닌 증인에게 맡겨진다. 소설은 우리에게 ‘못생긴 여자’들을 바라보는 화자와의 공감을 요구한다. 그들을 연민하고 사랑하며 그들에게 그러한 폭력을 안겨준 이들에 대해 분노하는 화자의 시선을 보여준다. 요컨대 소설의 작자가 독자들에게 바란 것은 피해자들끼리의 상처 핥기가 아니라, 폭력의 구조 파악을 통한 굴레 벗기였을 것이다.

폭력의 구조

소설에서 화자의 어머니나 화자의 연인이 외모지상주의의 피해자임은 명백하지만, 그 가해자는 명확하지 않다. 화자의 아버지는 외모지상주의의 수혜자이고, 그 시스템에 편승하여 어머니를 버린 사람이긴 하지만 엄밀히 말해 그 시스템을 만들어낸 사람은 아니다. 화자의 연인이 고백하는 과거 속에서도 현재의 그녀를 만들어낸 명백한 가해자는 등장하지 않는다. 자신들을 조롱하고 비웃던 ‘사람들’이 제시될 뿐이다. 사람들이 큰 의미를 두지 않고 던진 말들이 그리 처참한 피해자들을 만들어낸 것이다.

가해자들에게 그 책임을 묻는다면 그들은 정색할 것이다. 별 생각 없이 던진 한 마디의 농담, 한 마디의 조롱이 그렇게 큰 상처가 되었단 말인가? 그런 말 따위에 꽁해서 상처를 입는 쪽이 소심한 거 아닌가? 그러나 이것이 외모지상주의의 폭력이 발동하는 방식이다. 딱히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사소한 조롱들이 모여 거대한 폭력을 구성해낸다.

외모 지상주의의 피해자들 또한 가해자가 느끼는 정도의 폭력만을 당했다면, 즉 어떤 한 사람이 조롱과 폭언을 퍼붓는 정도였다면 참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폭력이 그런 식으로 발동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가해자 1인의 입장에서는 소소한 ‘장난’이지만, 피해자 입장에서는 그게 단순한 한 명의 조롱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건 그와 같은 폭력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해자가 소수자인 한, 내가 잘못해서 당한 게 아니라는 믿음은 유지할 수 있다. 한 명의 조롱은 조롱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열 명의 조롱은 폭력이고, 백 명의 조롱은 파멸을 가져다주기 충분하다.

우선 사람들은... 또 세상은 저의 상처를 아물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번갈아 끊임없이 할퀴고 찍고 짓누른 것입니다. 저 같은 여자들은 결국 스스로를 마취해야 합니다. (중략) 얼굴이 무기인 그녀들에게도 두려움이 있다는 사실을... 막춤을 추는 그녀들에게도 영원한 사랑의 발라드가 있다는 사실을 세상은 결코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272~273p, 강조는 인용자)
그렇습니다. 진정한 고통은 그것이었어요.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다는 사실... 누구도 날 사랑해 주지 않을 거란 절망감...(274p)
미소 짓던 다수의 시선 앞에 저는 늘 굴복해야 했습니다. 어떤 개인도 세상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자리를 피하고 자리를 피해도 저는 늘 혼자였습니다.(276p)

한 순간의 조롱이나 놀림 따위는 폭력의 축에 끼지도 못한다. 내가 당한 폭력을 어느 누구에게도 호소할 수 없으며, 그 폭력이 부당한 것이었노라고 공감해주는 사람이 없을 때야말로, 진정한 폭력은 시작된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경멸하고 깔본다는 것은 내가 아는 세계 전체가 나를 경멸한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세계의 경멸, 그것은 피해자로 하여감 폭력에 대한 책임을 가해자들이 아닌 스스로에게 묻게 만든다. 폭력을 가하는 세계가 잘못되지 않았다면 내가 당한 고통은 대체 누구의 잘못 때문에 비롯된 것이란 말인가? 결국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자기 모멸, 자기 학대 등의 자기 파괴적인 행태들은 그 기괴한 면모와 달리 실제로는 생존을 위한 가장 처절한 몸부림인 경우가 많다. 자기 주변 세계가 자신을 쓸모 없는 존재, 추한 존재라고 규정하는 감당할 수 없는 사태에 직면했을 때 스스로를 ‘그런 취급을 당해 마땅한 자신’과 그런 자신을 ‘비웃을 수 있는 자신’, 즉 가해자의 일원으로서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는 자신으로 분리함으로서 자신의 부분만이나마 건져보고자 하는 슬픈 몸부림에 가깝다.

작중에서 화자의 어머니는 조강지처 노릇을 다 하고도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사태에 대해서 화를 내지 않고, 화자의 연인 또한 백화점의 동료 직원·상사가 자신에게 가하는 터무니없는 취급 따위를 묵묵히 감내한다. 이들이 그러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들이 결코 무능해서도, 바보여서도 아니다. ‘그런 취급을 당해 마땅한 존재’라는, 가해자의 정의를 스스로가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한 인간이 자신에 대한 경멸을 하나의 수학 공식과 같은 공리(公理)로 받아들이는 과정, 그 잔혹함을 소설은 보여준다.

구원의 경험

스스로를 못생겼다고 규정하며 자신을 상처입히는 사람들이 비단 소설 속에만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이야기했다. 문제는 이들에게 어떤 해결책을 제시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외모지상주의의 전면적인 해체, 가능하다면 그것이 최선의 방안일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이미 스스로 외모지상주의를 뼛속 깊이 받아들인 환자들에게 ‘외모는 중요하지 않다’는 입바른 소리를 해봐야 오히려 동정으로 받아들여질 뿐이다. 그것은 해결책이 아니다. 대신하여 소설은 ‘사랑’을 제시한다.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서 사랑이란 단순히 로맨스 소설을 쓰기 위한 장치만이 아니다. 스스로를 멸시하고 스스로의 가치를 부정하던 이들에게 선사된 사랑의 감정은 ‘너 또한 살아도 된다’는 메시지를 부여한다.

방에 틀어박혀 남편의 배신을 감내하던 ‘어머니’에게 다시 살 힘을 부여한 것은 화자가 전한 사랑한다는 말이었다. 이 때 화자가 어머니에게 했던 ‘아빠도 예전에는 엄마를 사랑했다’라는 말은 물론 화자가 꾸며낸 말이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게 아니더라도 화자가 내뱉은 “죽지마”, 그리고 “사랑해”라는 말은 파란색 필체의 진실성이 담겨 있었다. 당신이 소중하다고, 아버지가 떠나서가 아니라 그 때문에 내가 사랑하던 ‘예전의 엄마’가 사라졌다는 상실감 때문에 슬프노라고 이야기하던 화자의 말은 ‘어머니’를 울게 했고, 다시 삶을 향해 걸어갈 힘을 부여했다. 그 힘이 없었다면 ‘어머니’가 남편의 흔적을 떨쳐내고 재혼하게 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 점은 화자의 연인 또한 마찬가지이다. 소설에서 대체로 말이 없는 ‘어머니’와는 달리 그녀는 사람이 한 인간을 구원하는 방식에 대한 상세한 증언을 제공한다.

그렇습니다. 그 전까지... 저는 한 번도 뜨거운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습니다. 눈물은 더없이 차가운 것이었고, 그때의 제 마음도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알 수 있었습니다. 냉대를 받은 인간의 마음은 차가운 눈물을 흘린다는 사실을... 관심과... 사랑을 받은 인간의 마음만이 더없이 뜨거운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말하자면 당신은 한 여자의 체온을 바꿔주었고, 한 여자를 둘러싼 세상의 기후를 바꾸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달의 뒷면처럼 어둡고 어두웠던 저라는 여자를 바꾸어놓았습니다. 어느새 저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난날의 모든 상처가 사라졌음을... 그리고 이제는 튼튼하게 아물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285~286p)

열아홉 혹은 스물의 시점에서는 ‘세기의 추녀’였던 그녀가 세월이 지나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된 시점에서는 그럭저럭 평범한 얼굴이 되었다는 묘사는 참 많은 점을 시사한다. 링컨이 그랬던가. “마흔을 넘긴 사람은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라고. 잘났건 못났건 한 인간이 살아온 궤적은 얼굴에 담기기 마련이고, 마흔쯤 되면 외모를 통해 그 사람의 인생을 짐작할 수 있다는 말일 터이다. ‘세기의 추녀’가 ‘평범한 동양인 여자’로 변하는 과정은, 단순히 세월의 흐름에 따라 외모가 변한 것이 아니라, 화자와의 만남을 통해 그녀가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러한 자기애가 인상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봐야할 터이다.

화자의 어머니와 연인의 변화를 이끌어낸 것은 외모지상주의 혁파나 개인의 경쟁력 강화와 같은 거창한 수단이 아니었다. 세상에 부정당한 그녀들에게 사랑한다고 해준 것, 그런 사소한 기적들이 그녀들의 변화를 이끌어낸 것이다.

한 인간의 완전한 파멸을 위해서는 그 인간을 둘러싼 세계 전체가 동원되어야 한다. 세계 전체가 동원된 폭력이란 그만큼이나 가공할 위력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만한 힘을 동원하지 않으면 인간을 굴복시킬 수 없다는, 스스로를 포기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설령 그러한 시도에 성공한다고 해도, 어느 누군가가 그에게 ‘당신은 살 가치가 있다’라는 확신을 주는 순간, 그 압도적인 폭력은 예상외로 쉽게 허물어지게 된다. 남아있더라도 예전과 같은 파괴력은 지니지 못한다. 탈출구가 뚫린 포위망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이 소설에서 박민규는 자신의 장점이라고 평가받았던 웃음을 거의 포기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이 소설에서 작가가 웃음거리로 삼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세계의 압도적인 폭력에 짓눌린 ‘그녀’들을 비웃을 수는 물론 없다. 그렇다고 시스템의 억압 구조에 놓여 있기는 매한가지인 가해자들, 평범한 악당들을 조롱할 것인가. 물론 조롱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웃음이 세계의 폭력에 신음하는 자들에게 어떤 위안과 어떤 희망을 줄 것인가. 소설에서도 나오지만 문학과 음악의 세계로 도피했던 여인은 번번히 현실에 끌려나오며 괴로움에 몸부림쳐야 했다. 억압에 대한 대안 없는 조롱과 유머는 그만큼의 공허함을 선사한다. 결과적으로는 피해자들을 더욱 괴롭힐 뿐이다.

박민규의 시도는 이러한 차원에서 시도되어야 한다. 그는 자신의 장기조차 버려가며 억압과 폭력과 사랑을 강조했다. 한 인간을 짓뭉갤 수 있는 억압과 폭력에 저항할 수 있는 힘으로서의 사랑을 제시했다. 그리고 그것이 세계로부터 소외된체 고통하던 사람들에게 얼마나 기적같은 선물일지를 이야기한다.

소설이 시작되는 시점인 1980년대는 한국에서도 자본의 힘이 급격하게 강화되던 시기였고, 자본의 폭력이 본격적으로 강화되던 시기이기도 하다. 비단 외모지상주의만을 지적하지 안허라도 자본이 오늘날의 인간에게 강요해왔던 여러 가지 ‘스펙’들은 사람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인간들을 더더욱 양산해왔다. 이 상황에서 작가는 묻는다. 젊은이들을 백화점 아르바이트 같은 비정규직으로 몰아넣는 자본에는 저항할 수 없더라도, 당신들 주변의 사람들을 돌아보고 그 사람들에게서 인간을 발견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 않겠냐고. 당신이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시선과 언어들이 얼마나 거대한 폭력이 될 수 있는지 실감하고, 거꾸로 당신이 얼마나 사소한 계기로도 기적 같은 구원자가 될 수 있는지 아느냐고 묻는다. 작가는 그것을 호소한다.

스스로를 죽은 자들로 생각했던 왕녀들이 경쾌한 무곡(Pavane)을 배경으로 춤출 수 있느냐의 여부는 결국 독자 당신에게 달려있노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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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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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자료는 2010년 05월 14일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과 현대문학작가론 수업에 쓰인 발제문입니다. 발표는 저 외에 두 명의 학우와 함께 진행했고, 그 학우들이 쓴 부분은 대부분 삭제했습니다. 

타워, SF로 현실을 말하는 방법

“우리 노동을 그렇게 하자!

우리 재미를 위한 혁명을 하자!”

- T.H.로렌스


(발표자 이름은 생략)


목차


1. 들어가며                                                                          

2. 작가 소개                                                                         

가. 약력                                                                           

나. 『타워』의 줄거리                                                              

3. 작가론 - 누가, 왜 배명훈을 읽는가?                                                

가. 배명훈은 왜 SF 작가인가?                                                      

나. SF라는 장르의 목적                                                            

4. 작품 분석                                                                         

5. 배명훈의 ‘빈스토크’                                                                

가. 타워의 의미                                                                    

나. 타워의 권력이 돌아가는 방식                                                    

다.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인가                                                        

라. 타워의 주인에게 묻는다                                                         

6. 다중의 자율성에 거는 희망                                                         

7. 참고 자료                                                                         



1. 들어가며


배명훈의 『타워』는 쉽게 읽힌다는 의미에서 이번 수업 시간에 소개되었던 작품 중에서 가장 환영받는 작품이었을 것이다. 빈스토크라고 하는 가상의, 그러나 현실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무대에서 딱히 불편하지 않게 유쾌하게 진행되는 풍자와 유머들은 높은 점수를 줄만하다.

본 발표에서는 배명훈이 소설 창작에 SF 기법이 사용된 맥락과 배명훈이 가상의 무대 건설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바에 중점을 두어 살펴보고자 한다.


2. 작가 소개


가. 약력


1978년 부산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우수논문상 수상). 그 어떤 창작 모임과도 연결되지 않은 채 혼자 글을 써오다가 학부 재학 중이던 2004년에 제출한 「테러리스트」가 ‘대학문학상’을 받으면서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이 당시 자신이 썼던 작품 중에서 가장 문단문학에 가까운듯한 작품을 냈는데도 심사평에서 SF 운운하는 것을 보고 비로소 자신의 소설이 SF와 연결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2005년 '스마트D'로 '제2회 과학기술창작문예' 단편 부문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SF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 당시 수상자 모임을 통해 SF 소설가 및 번역가인 정소연을 통해 ‘환상문학웹진 거울’을 소개받았으며, 이 웹진의 필진으로 활동하게 된게 주요한 영향을 끼쳤다.

이후 환상문학웹진 거울을 비롯한 여러 인터넷 지면과 동인지를 통해 꾸준히 작품을 발표해왔다. 2007년에는 공동 단편집 『누군가를 만났어』를 통해 메이저 출간에도 본격적으로 끼게 된다. 잡지 『판타스틱』 등에 단편을 수록한 바 있다. 첫 소설집으로 연작소설집 『타워』를 출간했으며 현재는 장편 소설 집필 중. 「에스콰이어」2007년 1월호 "The Newest: 2007년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중문화 예술의 첨병 14인"에 선정되었으며, 단편 {안녕, 인공존재}로 제1회 문학동네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나. 『타워』의 줄거리


(생략)


3. 작가론 - 누가, 왜 배명훈을 읽는가?


가. 배명훈은 왜 SF 작가인가?


약력에서도 확인되듯 배명훈은 그의 독자들에게 주로 SF 작가로 소개되었고, 그의 소설 또한 SF라는 틀 안에서 읽혀왔다. 작가 자신이 SF팬덤 내부에서 활동하면서도 스스로의 작품을 소위 ‘장르 소설’이라는 테두리로 이야기하려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상당히 특이한 요소라 할만하다. 따라서 배명훈의 소설을 SF라고 규정할 때, 『타워』는 대단히 기묘한 위치를 얻게 된다. 배명훈을 SF작가로 만든 것은 배명훈이 아니라 그 독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한국의 SF 독자들이 ‘한국 SF 작가’들에 대해 대체로 냉소로 일관해온 것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라 할만하다. 80년대 초반부터 해외 원서를 구해다 읽으며 자생한 SF 독자들이 한국 작가를 ‘제대로 된’ SF 작가로 인정하는 경우는 대단히 드물었으며, 특히 문단 쪽에서 “SF적 상상력”을 차용하여 썼다는 작품들은 외려 SF독자들로부터 “그들은 SF를 모른다”며 조소를 당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각주:1] 그 정도의 폐쇄성을 보이던 SF 독자들이 한 작가를 문단 쪽과 한 마음이 되어 지지한다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라 할만하다. 배명훈과 같은 작가들이 문단과 기존 SF 팬덤 양측의 관심을 모으는 현 상황은 상당히 유념해볼만하다. 배명훈이 문단과 SF 팬덤의 경계지역에 서 있으며, 이들을 매개할만한 위치에 서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나. SF라는 장르의 목적


SF라는 장르에 대해 정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SF 독자들끼리도 SF란 장르가 무엇인가에 대한 견해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본토라 할만한 미국에서조차도 작가들이 “SF란 SF팬들이 ‘이건 SF야’라고 가리키는 것들”(프레드릭 폴), “SF란 우리가 SF라고 부르는 것”(데먼 나이트), 심지어는 “SF라고 출판되는 모든 책은 SF다”(노먼 스핀라드)라고까지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SF란 무엇이다-라고 말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각주:2] 다만 SF의 하위 분류 방식에 대해서는 대체로 합의되는 바는 있다. 크게는 두 가지로 나눈다.

첫 번째는 ‘오락물’로서의 SF이다. 영화 《스타워즈》와 같은 우주 활극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흔히 SF라고 하면 이러한 경향의 작품을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정작 SF계 내부에서는 이러한 작품들을 SF로 인정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현재까지도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상태다. 미국의 하드 SF 작가 테드 창이 《스타워즈》류의 작품을 "우주선과 레이저가 등장하지만 핵심은 500년 전, 또는 1000년 전 쯤에 모험 이야기"라고 평가하면서 SF가 아니라고 주장한 것은 이러한 경향을 대표한다.

두 번째는 ‘문학’으로서의 SF이다. SF가 결국은 문학이며 문학의 본질을 실현하는 장르라는 점에 주목하는 셈이다. 전자와의 차이점은 SF를 통해 ‘경이감’(Sence of Wonder)이라는 감성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경이감이란 SF 독자들이 SF를 읽음으로서 세계가 종전과는 다르게 보이게 되는 순간, 기존에는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감각·감성을 자각하게 되었을 때 느끼는 ‘충격’을 이야기한다. 랑시에르가 ‘문학의 정치’라는 개념을 통해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이게 하며, 킁킁대는 동물로 취급되었던 사람을 말하는 존재로 만든다.”[각주:3]고 주장했던 것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물론 ‘경이감’에 대한 추구는 비단 SF만의 것이 아니다. 그 점에 대하여 SF는 SF만의 경이감이 ‘과학적 상상력’에서 비롯되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즉 과학이 세계를 사유하는 방식에 따라 세계를 해석하고, 거기에서 비롯된 상상력을 통해 경이감을 불러일으킨다면 그것이 훌륭한 SF 소설이라는 것이다. 물론 핵심은 여전히 ‘과학적 상상력’이 아니라 ‘경이감’이다. 유전자 복제나 우주여행 같은 자연과학적 소재를 끌어다 쓴다 해도 그것이 현재의 독자들에게 세계 인식의 변화, ‘경이감’을 안겨주지 못한다면 그 작품은 훌륭한 SF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 ‘문학적 SF'를 지지하는 작가/독자들의 입장이다. SF 또한 현재의 독자들에게 현재에 대한 이야기를 이야기하기 위한 문학양식이라는 것이다.[각주:4]

『타워』또한 마찬가지다. 이 작품이 SF라고 해서 이 작품이 얼마나 참신한 무대를 마련했는가, 얼마나 기발한 상상력을 보였느냐에 주목하는 것은 그다지 권장할만한 독법이 아니다. 빈스토크 타워가 정확히 몇 층짜리 건물인가, 현실에서도 구현 가능한 건물인가 따위의 문제는 이 소설에서 굉장히 사소한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그 대신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상은 빈스토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거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4. 작품 분석


사람들을 억압하는 완강한 권력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권력의 중심에 누가 있는지 알 수 없고 때문에 저항할 대상도 분명하지 않은, 빈스토크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통해 배명훈은 그 불명확한 대상이 주는 억압에 저항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지금부터는 각각의 이야기에서 나타나는 우리 사회의 모습과 각 이야기에서 찾아낼 수 있는 권력에 대한 대응법을 중심으로 작품을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생략)


5. 배명훈의 ‘빈스토크’


가. 타워의 의미


『타워』의 무대인 빈스토크에서 빚어지는 군상은 우리가 사는 사회의 모습과 닮아있다. 그러나 『타워』의 무대인 ‘빈스토크’를 곧 한국 사회의 풍자를 위한 수단으로 이해하는 것도 온전히 타당해보이지는 않는다. 어떤 식으로건 모든 소설은 현실에 대한 은유를 담기 마련이다. ‘빈스토크’라는 무대 자체는 한국 사회일 수도 있고 미국일 수도 있으며 또 다른 어떤 나라일 수도 있다.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사회에 시사하는 바를 읽어낼 뿐이다. 타워는 넓게는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세계의 모습 그 자체를, 좁게는 한국 사회를 대변하는 공간이다. 개개인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와 그 내부의 권력관계를 지닌 사회라면 타워와 비슷한 양상을 띠게 마련이다. '타워'라는 모호한 제목 또한 그러한 점을 상징하는 듯 보인다.


나. 타워의 권력이 돌아가는 방식


물론 작품에서는 빈스토크 상류층의 볼썽사나운 모습이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동원 박사 세 사람」에는 지도자층(시장과 정박사)의 성적 타락 및 돌고 도는 양주 선물을 통한 애매하고 미묘한 뇌물 문제 등이 나타나고 있다. 「자연 예찬」에는 언론인 및 지식인들의 비양심적인 침묵 및 청탁 비리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다. 코스모마피아에 대한 선제공격 및 민간 지역에 대한 무차별 폭격 등 국제적 만행을 저지르면서도 의회는 책임을 회피하고, 용역 업체의 직업군인의 생명권은 방기된다. 바벨탑 아닌 바벨탑, 선한 사람이 최소 열 사람 이상 거주하고 있음으로 인해 신으로부터 멸망을 유예 받은 소돔과 고모라처럼 취급되던 공간(「샤리아에 부합하는」)이 바로 빈스토크 타워의 현재다.

시장이나 시의회를 비롯한 권력 상층부에 대한 작가의 시선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 그들은 국가를 대표하고 국가를 책임져야 할 존재들임에도 국가의 안위에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타워를 떠나려 하는, 한마디로 국가에 대한 권리만을 보장받을 할 뿐 책임은 지지 않는 존재들로 묘사된다. (시장 전용 엘리베이터의 존재 「엘리베이터 기동 연습」, ‘무슨 문제만 생겼다 하면 제일 먼저 달아나버릴 인간들’ 「샤리아에 부합하는」, 시위대 승리 후엔 이미 지구 반대편에 가 있던 시장 「광장의 아미타불」)


“최 행정관님. 도대체 누가 최종 명령을 내렸죠?”

최신학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답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최종 명령권자는 당연히 의회였다. 상대인 코스모마피아가 국가는 아니므로 의회에서 선전포고를 의결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늘 병력이 주둔해 있던 지역에서 벌어진 일이라 새로 파병 절차를 밟지도 않았다. 하지만 작전 개시 이면에는 분명히 정치권의 광범위한 승인 혹은 압력이 있었고, 보나마나 그 뒤에는 인공위성 관련 기업들의 어마어마한 이권 문제가 개입되어 있었을 것이다.

(중략)

질문에 답해야 할 사람들이 질문을 던지는 위치에 몸을 숨기려 하기 때문이었다.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책임을 지지 않기로 한 날. 그렇게 심판의 날이 다가왔다. (「샤리아에 부합하는」, 타워 189-190p)


그러나 소설 속에서 묘사되는 모습들은 대부분 우리가 상류층에 대하여 이미 알고 있었거나 혹은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습들의 재현이다. 우리는 상류층이 마땅히 사회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에 있고 그에 대한 권리를 누리면서도 정작 책임을 지지 않는 사태에 대해 분노한다. ‘윗것들이 윗것답게 행동하지 않는다’라는 인식으로 요약될텐데, 이러한 인식에서는 배명훈 또한 독자들의 인식 수준에서 크게 앞서 나가지 않는다. 독자들과 눈높이를 같이하는 것이다. 그러나 배명훈의 문제의식은 그러한 눈높이 맞추기, 권력에 대한 냉소적 풍자 수준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의 시선은 시스템을 돌아가게 하는 구조, 시스템의 전체로 향한다.

권력의 사용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것은 비단 권력 상층부만이 아니다. 관료제 내의 중간 관리자들을 통해서도 보여진다. 중간 관리자들, 혹은 말단 직원들은 상부에서 내려오는 명령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며 기계적으로 일을 진행시킨다. 「엘리베이터 기동 연습」의 주인공은 이유도 모른 채 상부의 명령에 따라 520층으로 군 병력을 이동시키면서 자신을 기계에 비유한다. 「광장의 아미타불」에 등장하는 주인공 역시 기마경비대에서 일하면서 시위대를 진압하는 폭력 행사 - 코끼리, 최루탄을 섞은 물 폭탄 등등 - 에 거리낌 없이 참여한다.

권력에 참여하지 않는 일반 시민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작중에서 ‘현대 도시인이라면 누구나’ 가진 것으로 묘사되는 먼지는 현대 시민들 또한 시스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시스템의 부조리에 대해 이야기해야 함에도 자신의 ‘먼지’ 때문에 침묵하고, 결과적으로는 부조리의 안정적인 고착화에 기여한다.


현대 도시인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존재의 흔적. 초고층 문명의 사회계약은 누구든 털면 먼지가 나기 때문에 서로 털지 않는게 합리적이라는 암묵적 합의 위에서 이루어졌음. 그러나 이 사회계약이 법률상 책임까지 면제해주지는 못함. 예) 그러자 시 정부에서는 비판하는 사람들을 불러다가 먼지를 털었다.(「자연예찬」중에서)[각주:5]


요컨대 시스템의 억압은 무능하고 부패했으며 무책임하기까지 한 권력 상층부에 의해서만 행해지지 않는다. 시스템의 약자들조차도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각자의 방식에 따라 시스템을 지탱한다. 문제는 그 시스템 전체에 대한 책임을 가진 자가 아무도 없다는 점이다. 결국 타워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그 소유주가 뚜렷하지 않은 권력이다.


시위대는 아미타브의 이름을 부르면서 컨테이너 가건물같이 생긴 방어선을 뚫고 정부 청사 쪽으로 몰려 들어갔어. 대승이었지. 하지만 그러면 뭐해. 빈스토크에 그런 난리가 날 때마다 늘 그랬듯이 시장은 그때쯤 지구 반대편에 가 있었는걸. 전략적으로는 별 의미 없는 승리였어. 전술적으로는 완승이었지만. 시위대가 그 싸움을 통해서 얻어낼 수 있는 건 별로 없었거든.(p.184)


전근대의 왕조 사회나 독재 국가에서라면 시위대의 싸움에 저런 낮은 평가를 내리지는 못할 것이다. 그 무렵에는 책임을 물어야 하는 대상이 명확했다. 모든 권력은 중앙의 1인자에게 책임이 집중되었고, 그가 잘못했기 때문에 - 혹은 사악하기 때문에 - 시스템의 억압이 지속된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폭군이나 독재자의 목을 치는 희생 제의를 통해 국가는 정화되고 새로운 생명력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빈스토크와 같은 대의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그러한 책임 전가가 불가능하다. 사회 모순은 이제 더 이상 권력 상층부만의 책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위대가 정부에 그 책임을 물으려 하는 한, 그들의 투쟁은 정부 청사 진입 여부와 관계없이 늘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요행히 시장을 사로잡는데 성공해서 정부를 전복하는데 성공한다 해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대의 민주주의 자체가 유지되는 한 시장과 시의회는 몇 번이고 다시 구성될 테고, 그 권력 상층부를 지탱하는 관료제 조직 또한 재건될 것이다. 결국 그들은 시스템을 통제할 수 없을 것이다. 빈스토크의, 그리고 우리 사회의 문제는 더 이상 어느 누구만의 책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러한 판단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들 중 그 누구도 시스템이 부여하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현실 인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아니 이미 우리도 시스템의 일부이다. 이러한 냉소적인 묘사들은 2000년대 작가들에 대한 정혜경의 지적을 떠올리게 한다.


최근 작가들의 사유 속에는 그 누구도 자본주의적 네트워크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깊은 허무주의가 깔려 있다. 이 허무주의는 현실 도피의 결과가 아니라 현실을 직시한데서 생겨났다는 점에서 타당하다.[각주:6]

 

그러나 배명훈은 정혜경이 말하는 ‘최근 작가들’과 같은 허무주의로 향하지 않는다. 시위대의 성과를 ‘전략적으로는 별 의미 없는 승리’였다고 평가하지만 한편으로는 시스템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그려낸다. 「자연예찬」에서는 개인적 비리가 노출될 것을 감수하고서 결국 사회 비판을 하고 마는 작가를, 「타클라마칸 배달사고」에서는 경위야 어떻든 사막에 떨어진 조난자를 구해내는 네티즌들을, 「샤리아에 부합하는」에서는 수색영장을 받아내지 못하자 직접 난동을 부려서라도 빈스토크를 구해내려 하는 공무원이 나온다. 자기가 사랑하는 공간의 문제를 더 이상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스스로 책임지려 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누구나 ‘먼지’를 가졌기에 시스템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그 먼지를 가진 사람들이 뭐든 하지 않으면 세상은 아름다워지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려 한다.


라. 타워의 주인에게 묻는다


왜 시장이나 시의회가 책임지지 않는 문제를 시민들이 책임져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누리는 이 공동체의 주인이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빈스토크 타워의 주인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최고 권력자인 시장이라고 단정 지을 수도 있겠다. 타워의 권력 장의 중심에는 시장이 있으며, 의회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시장은 권력만 있을 뿐 책임-주인의식-을 지려 하지 않기 때문에 실제적 주인이 아니다.

당위적으로는, 타워에 사는 주민들 개개인이 실질적인 주인이 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것은 시민들이 투표권을 통해 타워에 대한 권력을 행사하는 존재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작중에 나오는 빈스토크 시민들이야말로 빈스토크라는 무대, 공동체에 대한 애정을 느끼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주인됨은 주인의식, 다시 말해 공동체에 대한 애정과 책임의식을 가지지 않은 사람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권리다.

빈스토크 시민들이 보여주는 공동체에 대한 애정은 국가가 부여하는 ‘애국심’이나 권력욕 따위와는 무관한 영역에서 발휘된다. 오히려 빈스토크 시민들은 국가의 존재에 대해 냉소적이거나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 대신 빈스토크 시민들의 내면에 가득찬 것은 그들이 일상생활을 하고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무대, 빈스토크라는 세계 그 자체에 대한 애정이다. 타워를 제2의 바벨탑이라고, 빈스토크를 소돔과 고모라로 보았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조차도 결국에는 타워를 멸망시키기 위한 폭탄을 기폭시키지 않았던 것에는 이들의 신앙이 약화되어서도, 빈스토크 정부에 회유되어서도 아니다. 이웃에 대한 애정이 이념과 종교조차 초월한 것이다.

따라서 빈스토크 타워의 실제적 주인은 마땅히 타워에 대해 주인 의식, 주권 의식을 지닌 개인 혹은 집단이라야 한다. 타워를 ‘아름답게 만들 책임을 가진 사람’은 바로 타워라는 무대와 그 무대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애정을 느끼는 사람들 자신들이다. 배명훈은 그러한 개개인들에게 호소하고자 한다. 작중의 표현을 빌린다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책임’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 당신들이 정말로 이 세계를 사랑하고, 시스템이 문제라고 여긴다면 단순히 앉아있기만 해서는 안된다고 이야기하고자 한다. 더 이상 시스템의 문제를 부패한 권력층에게만 묻는 대신, 스스로의 책임을 회피하는 대신 직접 시스템을 개선하기 위해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먼지’를 신경쓰면서 자신의 책임을 방기한다면 시스템의 억압은 계속되기 마련이라는 것이 배명훈의 소설에서 전달되는 메시지다.

그는 여섯 개의 장을 관통하면서 수평파들의 폭탄 테러며 시민들의 반전 시위는 수박 겉핥기 식으로 언급만 한 채 대부분을 개개인들 각자의 판단과 양심적 행동에 맡긴다. 정부의 통제나 간섭 없이 자율적이고도 효율적으로 돌아가는 운영 체제는 대부분 시민들 개개인의 연합과 협력에 의한 것이다. 그것도 열의나 구호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개인화된 시민들 각자의 ‘개인적 기호에 따른 판단’에 의한 것이다.

「타클라마칸 배달 사고」에는 타워의 우편 시스템에 대한 묘사가 이루어진다. 정부가 운영하는 엘리베이터에 의한 우편배달이 훨씬 비싸기 때문에 타워의 시민들은 대부분 파란 우편함을 이용하는데, 이 우편함에 편지를 가져다 놓으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우편배달의 업무를 이행한다. ‘익명 사회에서 익명 사람들끼리만 통하는 나름의 신뢰’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빈스토크는 개인을 신뢰한다.’

같은 장에서, 용역 회사 직원에 대해 정부가 구출을 방기하고 있을 때 힘을 발휘하는 것은 전 세계 곳곳에 있는 개개인들이었다. 사람들은 약간의 홍보만으로도 자발적으로 사이트에 접속해 실종된 민소를 찾는다. 그런데 그들의 이러한 선택은 선동적인 구호에 의한 것도, 민소에 대한 인류애에 의한 것도 아니다. 그저 기분 내키는 대로의 개인적 취사선택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재미’는 결국 국가가 포기했던 구성원을 구해냈다. 그게 바로 국경과는 무관하게 움직이는 제 나름의 공동체의 힘이다.


병수는 잠이 확 달아났다.

“왜? 지금 이 시간에 이만 칠천 명이 어딨어? 한밤중에.”

“아, 어디 보자. 빈스토크에서 육천 명 조금 넘고, 우리나라에서 오천 명쯤 되고, 나머지는 다른 나라에서 접속했어요.”

“왜?”

“왜는 무슨 왜요? 그냥 찾는 거지.”

“그러니까 걔들이 왜? 뭔가 오류 생긴 거 아니야?”

“오류 같은 거 없어요. 뭐가 있어야 오류가 나죠. 사진하나 달랑인데. 은수 씨가 빈스토크에 돌린 편지가 번역이 돼서 외국으로 갔어요. 그래서 그냥 찾는 거예요, 그냥. 이유가 필요한가? 원래 인터넷에서 하는 일이 그렇잖아요. 그냥 해요, 그냥.”(「타클라마칸 배달 사고」, 타워 109p)


이밖에도 청탁 뇌물 수수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양심적으로 글을 쓰는 작가 K, 무비판적으로 명령을 수용해 군을 이동시켰다가 520층 폭발 후 후회하는 남자 주인공 등을 통해 작가는 개개인의 선택에 대해 계속해서 ‘보여준다.’ 결국 마지막 순간 타워를 지켜내는 것은 샤흐리반 및 열다섯 군데의 가게 주인들의 선택이었다. 열다섯 사람 개개인의 선택은 타워의 멸망을 유예시킨다. 이를 통해 짐작하건데, 작가가 거대한 시스템을 혁파하는 방법으로 제시하는 것은 ‘개인의 정치’다. 개개인이 시스템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에 대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거나 행동하는 것, 그것만이 시민 개개인이 마땅히 지니고 행사해야 할 권력을 소유하고 시스템을 통제하는 방법이다.


(생략)


「타워」는 익명성이 다분한 대중에게 희망을 건다. 이는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아우또노미아의 ‘다중의 자율성’과 맥락을 같이 한다. 민족 국가의 강화나 국가 권력 장악이라는 주권 형식 안에서의 혁명 전략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언제나 같은 패턴의 반복이 거듭될 뿐이다.(독재자 다음의 독재자, 결함 다음의 같은 결함의 탄생) 국민 국가적 주권 형식 안에 권리를 양도하는 네이션=스테이트의 강화가 아니라 양도할 수 없는 자율성의 개화로서 민주주의를 구성해야 하는 것이다.

 「타워」는 여섯 장에 걸쳐서 권력이라는 것의 불합리성, 부실함, 허점에 대해 보여준다. 권력과, 권력에 의해 운영되는 사회적 시스템은 이러한 허약함으로 인해 단 한곳의 빈틈으로도 쉽사리 무너질 수 있을 만큼 불안정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배명훈은 바로 이러한 권력-시스템적 허약함을 인지하고, 다중의 자율성이 이 빈틈을 노려 언제든지 시스템을 전복시킬 수 있다는 데 희망을 두었다고 볼 수 있다. 작가 K, 엘리베이터 기동 팀의 관리자, 아미타브를 맡은 용역 경비대원, 샤흐리반과 열 다섯명의 가게 주인들, 민소를 찾아 밤새도록 사진을 뒤진 전 세계 네티즌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율적 결정과 그로 인한 결과를 통해 ‘개인의 자율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시스템에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 스스로가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다.


6. 다중의 자율성에 거는 희망


배명훈의 소설에서는 적나라한 풍자도, ‘혁명’에 대한 의지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권력의 압제에 따른 절망 또한 없다. 이 점에서는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하 ‘난쏘공’)과 상당히 다른 면을 보인다. 기존의 한국 문단이 보여왔던 리얼리즘에서 벗어난 기법을 사용하여 옳지 못한 현실에 대해 그리고자 했다는 점에서 두 소설은 매우 닮았다. 그러나 그 기법의 활용법에 대해서는 두 소설이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난쏘공』의 ‘행복구 낙원동’은 풍자는 있으되 유머는 가능하지 않은 공간이었다. 낙원동 주민들에게 있어 시스템의 억압은 너무나도 압도적이었기에, 도저히 그들을 상대로 웃어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행복구 낙원동은 이름과는 달리 절망만이 가득한 곳이다. 지식인 지섭은 시스템적 문제를 언급하며 노동자를 계몽하는 지식인과 시스템 자체를 바꾸기 위해 노동 운동에 나설 것을 촉구한다. 지섭과 같은 지식인층의 계몽에 각성한 난쟁이의 자식들은 노동조합을 만들어 시위에 나서지만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한다.[각주:7] 난쟁이의 첫째 아들이 사형당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난쏘공』에 희망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방식으로 저항하고 투쟁하건 간에 절대로 변하지 않는 사회적 시스템이 굳건하게 버티고 있을 뿐이다.

반면에 『타워』의 ‘빈스토크 타워’는 풍자와 유머가 모두 가능한 공간이다. 배명훈의 유머러스한 말솜씨는 체제의 강고함을 묘사하면서도 체제의 허술함 또한 함께 보여준다. 빈스토크는 무책임한 권력이 터무니없는 힘을 휘두르는 공간이지만, 동시에 ‘무책임’의 허술함 속에 지탱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타워』는 ‘권력장’이라는 개념을 통해 권력이 움직이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하고(「동원박사 세 사람」) 권력이 굉장히 엉성한 임기응변으로 움직이기도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엘리베이터 기동연습」) 즉, 소설은 현실의 모습을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현실을 억압하는 시스템의 구조에 대해 파악하고자 한다. 권력의 구조를 파악하면 그 사회의 주인들이 자기 현실을 보다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는 믿음, 거기에서 비롯된 희망이 빈스토크 타워를 지탱하는 힘이다.

배명훈은 전근대적 공동체의 상실과 개인의 파편화를 비관하지 않는다. 그런 비관은 굳이 소설을 통해서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가능하다. 소설을 읽기 이전에 현대인 누구나 지독하게 실감하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 상황 자체는 이미 돌이킬 수 없다. 그러나 상황을 절망하고, ‘세상을 이따위로 만든 누군가(남)’을 조롱한다고 해서 상황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익명 사회에서는 익명의 사람들끼리만 통하는 나름의 신뢰”(p.82)의 한계는 분명하지만, 우리의 조건이 이렇다면 변화는 이 조건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래서 배명훈이 꺼낸 카드가 바로 ‘웃음’이다. "조롱과 비웃음은 억압적 권위를 겨냥하는 무기이면서 만인을 유쾌하게 만“[각주:8]든다. 유머를 통해 권력이 지닌 권위를 벗겨내고 권력의 구조와 허위를 폭로한다.[각주:9]

배명훈이 웃음을 활용하는 방식은 바흐친이 주창한 ‘카니발’의 개념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카니발이란 “대화와 공동체의 의식이며 사람들을 해방시키고 함께 참여케 함으로써 공동생활에 참여하도록 만든다. 폭력적 파괴의 형태인 혁명과 달리 카니발은 대화 속에서 이루어지며 반항의 유쾌한 몸짓이다.”[각주:10]라고 주장했다. 바흐친은 웃음의 장인 축제를 통해 모인 사람들이 체제와 억압에 대해 - ‘사유’하는 대신 - 비웃음으로서 그 권위를 추락시키는 것, 그리고 그렇게 모인 사람들끼리 하나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웃음’의 기능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바흐친의 시대에 비해 훨씬 파편화되고 시스템의 억압 또한 보다 막강해진 우리네 시대에 바흐친이 기대했던 것과 같은 카니발이 이루어질 수는 없다. 지금의 우리 사회는 어떤 정체성을 공유하는 하나의 공동체 사회라기보다는 익명성 아래 침묵하는 개개인들의 군체에 가깝다. 거기에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익명 사회에서는 익명의 사람들끼리만 통하는 나름의 신뢰’ 정도 밖에, 혹은 한국이라는 거대한 사회 아래에서 만들어지는 여러 군소 공동체 관계 뿐이다. 어차피 시스템 전체에 대한 저항이 불가능하다면, 개인에게 뭔가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면 그 정도 선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이야기해주면 될 뿐이다. 즉, 신랄하게 풍자하고 비꼬지만 행동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타워』에서 드러나는 배명훈 식 화법이다.


7. 참고 자료


민유기,「폭력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과 2008년 촛불신화의 역사적 의미」,『실천문학』2008년겨울호.

배명훈, 『타워』, 오멜라스, 2009.

연합뉴스, <네그리 : 제국, 다중, 그리고 아우또노미아>, 2003, 10, 02

자하, 「독점 인터뷰 - 작가 배명훈을 만나다 2/2」, 『환상문학웹진 거울』 73호, 2009.

자크 랑시에르, 유재홍 역, 『문학의 정치』, 인간사랑, 2009.

정혜경, 「백수들의 위험한 수다」, 『문학과 사회 2005년 여름호』, 문학과지성사, 2005.

정화열, 박현모 역, 『몸의 정치』, 민음사, 2000.

  1. 배명훈 이전에 SF 독자들에게 인정받던 한국 SF 작가는 『비명을 찾아서』의 복거일과 듀나(이영수) 정도가 거의 유이했다. 그러나 이들은 SF작가이기 이전에 지독한 (해외) SF 독자였으며, SF 독자들의 외서 취향과 맞는 면이 많았다. 예컨대 듀나는 하이텔 과학소설동호회 시절부터 창작과 번역으로 유명했고, 복거일 또한 미군기지에서 흘러나온 SF를 읽으며 성장했다. [본문으로]
  2. 특히 국내에서는 ‘공상과학소설’이라는 용어(Fantasy & Science Fiction의 오역. 원래는 두 장르를 한데 묶어 부르던 이름이다)가 널리 퍼지면서 혼란이 더욱 가중된 감이 없잖아 있다. [본문으로]
  3. 자크 랑시에르, 유재홍 역, 『문학의 정치』, 인간사랑, 2009, 12p [본문으로]
  4. 이러한 점을 강조하다 보니 1960년대 이후 미국에서 이른바 뉴웨이브 운동이 제기되기도 했다. 대체로 좌파 성향의 작가들이 주도했던 뉴웨이브 진영은 종전의 SF가 주로 ‘자연과학적 상상력’을 추구해온 반면 인문과학이나 사회과학을 통해서도 ‘SF적 경이감’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때 이후로 페미니즘이나 좌우갈등, 인종차별주의 등을 이야기하는 작품들이 활발히 창작되었다. [본문으로]
  5. 배명훈, 「부록-타워 개념어 사전」, 『타워』, 오멜라스, 2009, 264p. [본문으로]
  6. 정혜경, 「백수들의 위험한 수다」, 『문학과 사회 2005년 여름호』, 문학과지성사, 2005, 174p. [본문으로]
  7. 이 시위대의 실패는 「광장의 아미타불」에서 등장하는 타워 시위대를 연상시킨다. [본문으로]
  8. 민유기, 「폭력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과 2008년 촛불신화의 역사적 의미」, 『실천문학』 2008년 겨울호, 340쪽. [본문으로]
  9. 자하 “근데 또 보통 정치풍자 하는 분들은 글이 재미없거든요. 이야기가 없어요. 껍질만 있어요.” 명훈 “알라딘에 실은 인터뷰에 썼는데, 그냥 500층, 600층 이렇게 백 단위로 딱 떨어지면 풍자하긴 더 좋은데, 그럼 대안을 못 만든다는 거죠. 비웃기는 더 좋아요, 백 단위로 떨어지는 상징적인 숫자면. 근데 그 안에 사람을 살게 만들어야 하니까, 나는. 그래야…… 비판하고 나서 어쩔 건데? 하는 문제가 나오니까. 그래서 그걸 쓴 것 같고.” 자하, 「독점 인터뷰 - 작가 배명훈을 만나다 2/2」, 환상문학웹진 거울 73호, 2009. [본문으로]
  10. 정화열, 박현모 역, 『몸의 정치』, 2000, 81p.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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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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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에 《판타스틱》에 대한 글을 썼었다. 그러고 난 2주쯤 뒤에 《판타스틱》이 휴간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블로그에 상당히 냉소적인 글을 썼고 사석에서야 "이렇게 할 거면 빨리 망하는 편이 낫다"라는 둥의 극언도 내뱉곤 했었지만, 막상 그 소식을 듣고 나니 기분이 영 개운치 않았다. 그런데 요새는 아예 폐가뇐다는 말까지 도는 모양이다. 휴간 소식이 비공개 게시판을 중심으로 돌던 것과는 달리 폐간 소식은 트위터 같은 공개 게시판에서도 언급될 정도.

무슨 일인가 싶어서 간만에 판타스틱 홈펭지/블로그에 가봤으나 죄다 2010년 1월 이후 기능이 정지된 상태. ...뭐냐, 이거?

일단 루머(?)에 따라 폐간이 확정되었다고 가정해보자. 어찌 된 일일까. 시공사가 페이퍼하우스로부터 《판타스틱》을 인수한지 고작 석달만이다. 시공사가 원래도 사업 철수로 유명한 회사긴 했지만 이건 좀 이상할 정도다. 시공사 경영진의 인내심이 예전에 비해 악화된 것이 아니라면 《판타스틱》의 문제가 예상보다 심각했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자본의 문제이건, 내부 역량의 문제이건.

《판타스틱》은 망할 수도 있고 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망한다면 망할만한 이유가 있었으니 망했을 테고, 망하지 않고 버틴다 해도 그 원인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위기는 다시 반복될 수밖에 없다. 판타스틱이 휴간된다 만다 하는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 않은가. 상황 자체는 그 때와 다르지 않고, 별 일이 없다면 앞으로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저번처럼 이번 위기 또한 어찌어찌 버텨낸다 해도 다음에 같은 위기가 발생한다면, 그 때가서도 이번만 버텨주길 간절히 기도나 할 셈인가. 그보다 필요한 건, '장르문학 전문지' 판타스틱의 상황에 대한 총체적인 분석이다. 

장르문학 잡지는 어떠한 성격을 갖춰야 하는가, 판타스틱은 그러한 성격에 충실했는가를 분석해야 한다. 요컨대 '판타스틱의 폐간을 장르문학진영의 책임으로 돌릴 수 있느냐'의 문제가 된다. 조악한 비유이긴 하지만 소련(국가사회주의)의 패망을 거의 모두가 사회주의 전체의 실패로 받아들였다는 점을 생각해보라. 《판타스틱》에 대해서도 비슷한 현상이 발생할 거다. 그 잡지의 문제를 곧 장르문학의 문제로 연결시켜서 '역시 장르문학 잡지는 안된다'는 식의 헛소리가 반드시 제기되지 않을까. 판타스틱이 장르문학 잡ㅈ지로서 얼마나 충실했는지는 이야기하지 않고서 장르문학 독자들이 판타스틱을 안사줘서 망했다는 식의 - 애국심 마케팅과도 유사한 - 개드립을 막기 위해서라도 《판타스틱》에 대한 분석은 필요하다.

그래도 뭐 《판타스틱》 쪽에서 무슨 공식 발표를 해야 이야기가 되지 이건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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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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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모 커뮤니티에서 판타스틱이 대화 주제로 나왔었습니다. 저도 평소 그 잡지에 대해 가졌던 생각을 풀어냈었죠. 2010년 2~3월호는 딱히 의식하지 않았고요. 글을 쓰다 보니 현재 상태가 지속되는 한 제가 《판타스틱》에 관심을 가질 일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마지막으로 《판타스틱》에 대한 견해를 정리하는 차원에서 그 때 썼던 글을 고쳐 내놓습니다.




0. 기획 : 방향성/정체성이 없다

따지고 보면 판타스틱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기획과 정체성의 부재입니다. 

판타스틱이 창간된게 2007년 4월입니다. 기간으로만 치면 나온지가 거의 3년이 다 된 잡지죠. 그런데도 저는 아직까지 판타스틱이 무슨 잡지인지 모르겠습니다. 장르문학 잡지라고는 하지만 판타스틱이 장르문학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진 잡지인지, 어떤 장르를 다루고자 하는지, 또 잡지를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가고자 하는지를 느끼지 못하겠다는 거죠. 

이런 현상을 두고 예전에 판타스틱 측에서는 '여러 가지 실험을 하는 중'이라고 하기도 하던데, 말도 안되는 소리죠. 독자들에게 내놓을 말이 아닙니다. 베타 서비스판을 돈 받고 파는 회사도 있습니까. 애당초 잡지의 지향점에 대해 고민하지 않은 결과가 방향성 상실, 우왕좌왕, 좌충우돌이라는 결과로 나타났을 뿐인데 그걸 '실험'이라는 말로 떼우려 한다면 너무 안일한 거죠.

그 '실험'들이 문제되는 이유는 하나 더 있습니다. 고정 독자층이 안생기거든요. 요즘의 '장르문학' 독자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장르만을 소비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근래 들어 SF도 보는 판타지 독자들이 늘었다지만 그거야 요새 판타지가 하도 죽다 보니까 궁여지책으로 넘어오게 된 것이고요. 그렇다면 '다양한' 장르를 취급한다는 판타스틱은 장르문학의 독자들에게 큰 매력을 주지 못합니다. 앞으로 나올 권에서 어떤 장르를 다뤄줄지 알지도 못하겠는데 무슨 깡으로 정기 구독을 합니까. 장르문학에 막 입문해서 정보가 절실한 초보 독자나 아예 후원 차원에서 정기 구독을 해주는 파워 유저 아니면 굳이 정기 구독을 할 필요가 없는 거죠.

왕년에 판타스틱이 휴간하기 전에 정기 구독자를 늘리기 위해서 이런 저런 경품을 제공하는 등 상당히 많이 애를 썼었는데... 생각해보면 그게 다 헛짓이죠. 왕년에야 장르문학이라는 이름 하에 SF 독자가 판타지도 보고 추리도 보고 그랬다지만 그거야 정말 전설 같은 이야기죠. 장르문학 진영 자체가 워낙에 협소하던 시절의 이야기기도 합니다. 지금 상황에서 그런 독자들을 기대하기는 어려워요.

이번에 판타스틱에서 라이트노벨 특집을 내면서 상당히 이례적인 표지를 쓰기도 했지만, 그게 판타스틱의 독자층 확대로 이어지진 못할 겁니다. 이번 호에 관심을 갖고 사본 독자라 하더라도 그 다음호에 라노베 관련 기사가 없다면 안사겠지요. 그 사람들이 바보는 아니니까요.

1. 기사 : 내용이 부실하다

그러한 정체성의 문제는 기획 기사의 부실함으로도 연결됩니다. 딱히 집중하는 장르가 없으니 역량이 집중되지 않고, 그러다보니 기사도 좌충우돌인거죠. 원체 실린 기사 자체도 적지만 그나마도 볼만한 기사가 많지 않습니다. 몇호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커피 관련 기사가 실렸을 때는 정말 골때렸었죠. 그래도 2009년 봄호의 김내성 특집은 괜찮았지만, 그걸로 끝이었죠. 그나마 중국 전설 관련 기사와 아서왕 전설 관련 기사가 종료된 뒤에는 뭐 볼게 있나 모르겠습니다. 어쩌다가 운좋게 내공 좋은 필진이 걸린 경우라면 모를까 그 외에는...

이를테면 지난 호에는 외국의 장르문학상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더군요. 저야 지난호를 보지 않아서 기사가 어떤 식으로 구성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주변의 평으로는 대충 이러저러한 상이 있다고 소개하는 수준이었던 모양이더군요. 그게 큰 의미를 지닌다고 보긴 어렵죠. 막말로 인터넷만 뒤져도 다 나오는 정보입니다. 판타스틱까지 사볼 정도의 SF 독자라면 거기에 대해 대충은 알기 마련이고요. 설령 아무것도 모르는 독자가 있었다고 해도 그 기사에 무슨 의미가 있었겠어요. 휴고상이니 네뷸러상이니 하는 걸 수상했다고 (장르 밖의) 독자들이 눈길이나 주던가요? 굳이 장르문학상에 대한 기사를 싣고자 했다면 한국에서 명멸해간 수많은 장르문학상과의 비교를 통해 한국 장르문학계의 과제가 무엇인지 살펴보는 작업이 더 유효했을 겁니다.

예전에 거울에 실린 판타스틱 2009년 여름호 비평 기사에서 "이따위로 할 거면 차라리 소설 번역할 고료로 외국 장르 칼럼이나 번역하라"는 식으로 이야기하기도 했는데, 가벼이 넘길 말이 아닙니다. '장르문학' 잡지로서의 명확한 정체성도 없는 상황에서 값싼 가격에 후려친 원고나 실어대는 잡지라면 굳이 오프라인에서 나올 필요도 없기 때문이죠.


2. 소설 : 수록이 절실하진 않고, 작가에 대한 다른 방식의 보상이 필요하다

제 주변에서는 판타스틱의 소설 비중에 대한 말이 좀 많이 오가는 편입니다.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의견이 분분한데, 저는 일단 판타스틱이 굳이 소설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판타스틱이 아니더라도 소설을 연재할 공간은 충분하니까요. 크로스로드, 문장, 다음, 네이버... 비정기 공모전도 많이 늘었습니다. 고료를 주지 않는 연재공간까지 더한다면 훨씬 많아지고요. 굳이 판타스틱까지 소설 연재 공간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할 필요는 없다는 거죠.

물론 그렇다고 판타스틱에 소설이 실리지 않아도 된다는 건 아닙니다. 그랬다간 잡지 못팔죠. 다만 굳이 거기에 집착할 필요가 없고, 굳이 소설을 싣겠다면 잡지, 특히 오프라인 잡지만의 강점을 살려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판타스틱이 그러한 자신들의 특색을 잘 살리는지는 실로 의문입니다. 가령 장편 연재가 주를 이루는 상황부터가 그렇죠. 이건 판타스틱이 자신들의 장점을 살리기는 커녕 단점조차 분석하지 못했던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대체 무슨 깡으로 장편 비중을 늘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장편 비중이 커질수록 신규 독자의 진입 장벽은 더 커질 텐데요. 

또 한가지, 판타스틱이 좋은 원고를 끌어모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소설가들이 작품에 대한 보상으로 가장 원하는게 뭘까요? 돈과 평가입니다. 창작에 대한 경제적 보상의 필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겁니다. 글을 쓰겠다고 마음 먹은 사람들인만큼 자신의 작품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평가받고 싶어하는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판타스틱이 작가들에게 안겨줄 수 있는 비금전적 보상은 뭐가 있을까요.

판타스틱은 정부 지원을 등에 업은 크로스로드도 아니고 막강한 조회수를 안겨줄 포털 사이트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문장처럼 투고한 작가들을 '작가 지망생' 취급하는 피드백을 해줄 수도 없어요. 그렇지만 오프라인 잡지인 판타스틱만이 가능한 영역이 분명 존재할 겁니다. 수록된 작품에 대한 분석 기사나 토론회(합평회?)를 제공할 수도 있겠고, 판타스틱과 관계된 작가들끼리의 워크샵을 열 수도 있겠죠. 미국에서야 테드 창을 배출한 클라리온 워크샵이니 하는게 활발하게 이루어지지만 한국에서는 그런 워크샵이 그렇게까지 크게 이루어지지는 않는게 현실이죠. 물론 저도 판타스틱이 그러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그러한 시도를 해볼 명분은 있을 겁니다.

3. 서평 : 홍보 기사 수준 좀 넘어서라

현재 실리는 서평 관련 기사라고는 박도빈 씨가 그리는 만화 정도가 전부인데... 말이 서평 기사지 사실은 책 광고라고 봐도 무방하죠. 특정 작품에 대한 심도 있는 비평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일전에 판타스틱에서 『싸우는 사람』의 서평 기사를 써줄 사람을 찾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결과물이 어찌 나왔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청탁해서 받은 작품도 투고작 취급한다는 그네들만의 관례를 생각해보면 썩 좋은 의도에서 받았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신간 홍보 기사나 써달라는 식이었겠지요.

따지고 보면 장르문학계에서 비평 기사가 필요한 건 그런 신간이 아닙니다. 장르문학 시장, 특히 SF&판타지 쪽이 원체 홍보가 부실한 편이라지만 그나마 신간은 사정이 낫습니다. 팬들이 열심히 소식을 퍼날라주니까요. 하지만 출간된 후 일정 시간이 지난 구간 서적들은 그나마의 관심도 받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절판된 다음에야 어쩌다 누구 눈에 띄어서 희귀본이니 절판본이니 하는 소리 듣고 끝인 거죠.

특히 SF 계열의 출간이 급속도로 증가하면서 작품들이 소모되는 경향이 훨씬 심해졌어요. 심지어는 SF 팬들조차 출간 사실을 모르는 상태에서 툭 튀어나왔다가 사라지는 작품도 있을 정도죠. SF가 기본적으로 팬덤 마케팅에 기대는 면이 크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책이 나올 때마다 무슨 분야의 거장이니 무슨 상을 수상한 걸작이니 하며 떠들어대지만 그 '거장'의 '걸작'들은 나오자마자 잊혀집니다. 팬덤 외부는 차치하더라도 팬덤 내부에서조차 그에 걸맞는 대접과 관심을 쏟아주는 경우가 과연 얼마나 됩니까? 지금의 장르문학 팬덤에게 필요한건 어느 작가의 작품이 새로 출간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출간된 작품에 대한 관심과 분석입니다. 장르에 대한 이런저런 대화와 평론을 통해 평가를 축적하고, 그렇게 하여 '장르의 고전'을 형성해야 하는 것이지요.

마크 트웨인이 고전을 두고 '모두가 좋다고 말하지만 모두가 읽지 않는 책' 뭐 이런 식의 시니컬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지만, 고전의 가치는 가볍지 않습니다. 고전은 해당 장르의 성격을 말해주는 존재이면서, 독자들에게 해당 장르의 독서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 알려주는 가이드라인도 하거든요. 그렇기에 고전은 매 시대마다 새로 정의되는 겁니다. 그런데 한국의 SF 팬들은 여전히 그리폰 북스니 아이디어회관문고니 하는 전설이나 회상하는 판국이지요. 중고시장에 가봐도 이제는 절판본으로 장사해보려고 환장한 장사치들이나 돌아다니는 판국이고요. 우리가 언제까지 똑같은 염불이나 외야 합니까. 

그나마 이런 풍토에서는 '그리폰 북스'의 전설 같은건 재현되지 못합니다. 알아야 대접도 해주죠. 

따라서 판타스틱이 관심을 쏟아야 하는 부분은 신간 소개가 아닙니다. 물론 그 부분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자칫 묻히기 쉬운 작품들을 자꾸 발굴해내야 한다는 거죠. 그렇게 함으로서 한국 SF 팬덤의 '고전'을 형성하고, 장르의 성과를 축적해야 한다는 거죠. 그건 장르 커뮤니티나 블로그 등에서 이루어지기 어려운 영역입니다. 그런 게시판에는 써봐야 금새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버리고, 그나마의 반향도 해당 공간 안에서밖에 이루어지지 않으니까요. 이런 심도있는 작업은 오프라인 잡지가 더 효율적입니다. 판타스틱은 판타스틱 2009년 봄호의 '김내성 특집'에 대해 사람들이 보여준 호평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4. 인터뷰 : 업계 전반이 다 부실하다

판타스틱의 인터뷰 수준에 대한 불만도 의외로 크더군요. 왕년의 홍정훈 씨 인터뷰라던가. 사실 인터뷰 기사들이 시원찮은 거야 그리 놀랄 일도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판타스틱만의 문제도 아니니까요. 장르문학 작가를 데리고 쓸만한 인터뷰를 뽑아낼만한 리포터 자체가 얼마 없습니다. 장르문학에 대해 깊이 아는 사람 자체가 별로 없으니 당연한 노릇이죠. 판타스틱의 문제라기보다는 기본적으로 이 바닥 자체의 역량이 부족한 탓이라고 봐야 합니다.

예전에 다치바나 다카시가 인터뷰 대상과 그 분야에 대한 기자의 이해 수준에 따라 인터뷰의 질도 천지차이로 달라진다고 했는데, 장르문학판이라 해서 별 다르지 않아요. 리포터가 해당 작가에 대해 잘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인터뷰의 질문과 답변 내용은 천지차이로 달라집니다.

특히 거울 작가들에 대한 인터뷰를 보면 확실히 드러납니다. 거울에 실린 인터뷰 기사와 외부 기사의 질적 수준이 민망하리만큼 차이나는 경우를 많이 보고, 인터뷰하는 작가들도 거울 인터뷰와 다른 공식적 인터뷰와의 차이를 많이 거론하곤 합니다. 그렇다고 거울에서 인터뷰를 진행하는 분들이 전문 리포터는 아닙니다. 단지 평소 사적인 교류를 해왔고, 작품에 대해서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던게 인터뷰에도 깊게 반영되었을 뿐이죠. 잘 모르는 사람이 만들 수 있는 질문은 한정되기 마련이거든요. 『타워』 출간 후 배명훈 씨가 외부 인터뷰만 20회 이상 하다 보니 이젠 무슨 질문이 나올지 짐작할 정도가 되었다고 했는데, 이 역시 생각해봐야 할 대목입니다.

그렇다면 판타스틱은 뭐 잘못한 게 없단 말인가. 많죠. 장르문학 잡지라면서 왕비호, 레진, 쿄코 등을 인터뷰했다는 것 자체가 미쳤다는 반증 아니겠습니까. 그나마 레진이나 쿄코는 장르문학에 대한 포스팅을 '어쩌다가' '가끔'이라도 하는 수준이 되었으니 어떤 경위에서 인터뷰에 들어갔는지 이해는 되는데 왕비호는 대체 무슨 짓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생각해보면 왕비호 그 사람도 딱해요. 무슨 잡지랑 인터뷰하는지는 알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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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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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작품만을 읽고서 장르 전체를 판단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도 드물다. 그러나 한 작품을 더 읽음으로서 이미 안다고 생각했던 장르에 대한 견해 자체가 바뀌기도 마련이다. 시어도어 스터전의 말을 빌린다면 "90%의 쓰레기"가 아닌 작품을 읽었을 때 생기는 현상이다. 당연히 내게도 그러한 예로 들 만한 작품이 여러 개 있다. 『어스시의 마법사』, 「오딘의 비애」, 『옥스타칼니스의 아이들』 등.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역시 『끝없는 이야기』를 능가하는 충격을 주었던 작품은 없다.

내가 이계 진입이라 하는 소재 - 혹은 하위 장르 - 를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건 물론 판타지 소설을 처음 접하면서부터였지만, 그 소재에 대해 딱히 좋은 감정을 가져본 적은 거의 없었다. 사실 그럴 만도 했다. 내가 한창 판타지를 읽어 내리던 시절 주변에서 접할 수 있었던 '이계진입물' 중에는 쓸만한 소설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창작되던 '이계진입물'들을 싸잡아 '독자들이 대리만족할만한 요소들을 좀 더 첨가시킨 먼치킨물' 이상으로 보지 않았고, '이계 진입'이라는 소재 자체에 대해서도 호의적이질 못했다. 『끝없는 이야기』를 읽기 전까지는 그랬다는 이야기다.

『끝없는 이야기』의 도입부는 흔한 '이계진입물'과 크게 다를 게 없다. '우연히' "끝없는 이야기"라는 소설을 읽게 된 바스티안 발자타르 북스라는 소년이 책속 세계의 위기를 해결할 영웅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과연 책 속으로 들어간 소년은 세계를 구하고, 그 대신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권능을 부여받는다. 여기서 '무엇이든'이라는 건 말 그대로의 의미다. 현실 세계에서는 뚱뚱하고 작고 힘없는 소년인 바스티안도 이 세계에서는 잘생기고 훤칠하고 힘센 외모를 가질 수 있고, 바스티안이 만들어낸 이야기들은 그 세계의 현실이 된다. 그 뒤 바스티안이 벌이는 활약상. 여기까지가 소설의 전반부이며 사실 작품 내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엔데의 진면목은 오히려 그 뒷부분에서 발휘된다.

바스티안이 갖게 된 힘은 물론 강력하지만, 그만큼의 대가도 뒤따른다. 바스티안이 현실화한 이야기들은 서로 뒤엉켜서 예상치도 못했던 결과를 낳고, 그 후폭풍은 바스티안에게 몰려온다. 그러나 더욱 무서운 대가는 바스티안이 권능을 발휘할수록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어버리게 된다는데 있다. 자잘한 기억부터 시작해서 바스티안이 사랑하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 종내에는 자신의 이름까지. 자기 자신을 잃고 그 환상 세계에 함몰되는 것이야말로 권능의 가장 큰 대가이다. 그 뒤로는 바스티안이 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해 현실로 돌아가기까지의 여정이 그려진다. 여기에는 화려한 재미가 없다. 그러나 여운을 길게 남긴다.

이러한 서사가 남기는 메시지는 매우 간단하고도 명료하다. 환상의 나라는 잠시의 피난처나 성장을 위한 발판이 될 수 있지만, 결국 영원히 안주할 공간은 아니다. 현실의 인간은 현실 속에서 현실과 부딪쳐야 한다. 이토록 정교하고도 매력적인 환상세계를 창조한 작품이 말하는 게 결국은 '현실로 돌아가라'라는 거라니. 현실과 환상세계와의 접점을 다룬 작품에서 충분히 나올 만한, 어쩌면 장르의 특성을 가장 잘 살린 작품 아닐까. 소위 '이고깽'이라 하는 장르에 속하는 작품들과는 명백히 구분될 만한 작품 아닌가 말이다. 내가 최근 들어 '장르나 소재 자체보다는 그걸 어떻게 쓰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주장을 펼 때마다 늘 이 작품을 거론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여기까지가 두 번째 읽었을 때까지의 감상이었고, 몇 해 뒤에 이 작품을 다시 손에 들었을 때는 약간 달라졌다. 여태의 감상 자체가 달라졌다는 뜻은 아니다. 작품의 새로운 면에 주목하게 되었다고 봐야 한다. 바스티안 발자타르 북스야말로 내가 여태 접한 작품 중 가장 부러워해 마땅한 주인공이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떠오른 거다.

이 작품 내에서 바스티안이 들어가는 환상의 세계는 "끝없는 이야기"라는 책 속의 세계이다. 바스티안이 이 책을 덮었을 때 - 모험에서 돌아왔을 때 - 흐른 시간은 고작해야 반나절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바스티안은 창고에 숨어 책 한 권을 읽었을 뿐이다. 그러나 바스티안이 경험한 독서를 '고작' 책 한 권을 읽었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느 누가 바스티안만큼이나 '책 속에 빠져들어' 봤겠는가. 독자라면 누구나 바스티안처럼 되길 바라고, 작가라면 누구나 바스티안 같은 독자를 가져보길 바라지 않을까. 그러니 바스티안을 그리워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P.S.

『끝없는 이야기』를 처음 읽었을 때는 그렇게 높은 평가를 하지 않았었다. 당시 내가 읽어낼 수 있었던 건 이 작품이 '평범한 이고깽물'과는 뭔가 다르기야 하다는 것 뿐이었고, 결국에는 '이고깽물'을 혹평할 만한 근거로 쓰일 만한 작품을 알게 되었다는 선에서 만족했을 뿐이었다. 내가 이 작품을 이처럼 좋아하게 된건 그로부터 적어도 2년 뒤다. 그 때서야 나는 『끝없는 이야기』를 읽어낼 여유를 갖췄던 셈이다.

P.S.2

이 작품을 읽은 뒤에 엔데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보려 했던 적이 있다. 물론 1순위는 어렸을 때 이미 읽었던 『모모』였고. 워터가이드에서 당시 절판 중이었던 『거울 속의 거울』인가가를 당시 대학 강사 생활하던 모님이 제본하여 뿌렸을 때(물론 복사비는 내야 했지만) 나 역시 받으려 했지만 서울 사는 사람 한정이어서 결국 수령해지 못했던 적이 있다. 내 대신 책을 받아주셨다가 결국 책 두 권을 떠안게 된 모 님께는 늘 죄송하게 생각했었는데, 작년엔가 수년 만에 뵈었을 때 여쭤보니 다핻히도 이미 선물용으로 쓰셨다고 했다.

그 이후에는 『자유의 감옥』이라는 중단편집을 사서 읽어봤지만 『끝없는 이야기』에 비하면 아무리 생각해봐도 별로. 지금 읽으면 또 어떨지 모르겠지만 지금 감상 같아서는... 이 외에 『짐 크누프』를 비롯한 다른 책들은 소개문만 읽어봐도 아동 서적이라는 느낌이 너무나 짙게 풍겨나오는지라 차마 건드리고 싶지 않다. 이러니 엔데는 나에게 『끝없는 이야기』와 『모모』의 작가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P.S.3
가만 생각해보면 내가 『끝없는 이야기』를 읽게 된 계기 자체도 작품 자체의 가치와는 무관했다. 이름 자체는 워터가이드에 올라왔던 '벌거지 팬터지 목록 2.0'을 통해 알고 있었지만 - 이름이 꽤 멋지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 읽어볼 생각을 하게 된 건 누군가가 워터가이드에 『끝없는 이야기』 번역본 선택에 대해 올렸던 질문글을 본 뒤였다. 당시 어느 답변자가 저자인 엔데와 초역자인 차경아 사이에서의 인연에 대해 거론하며 차경아역을 추천했었는데, 그 사연이라는게 퍽 인상깊었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의 미담이 나로 하여금 엔데라는 작가의 팬으로 만든 셈이다. 그러고보면 '가십거리'의 기능이라는 것도 꼭 그렇게 무시할만한 건 아니다.

이때의 경험은 내가 거의 처음으로 '외국 판타지'를 읽게 만들면서 한편으로는 '번역본'과 '가십거리'에 대하여 그리 집착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리플로 장문의 썰을 풀어내던 그이의 모습이 그렇게 부러울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훗날 내가 '판작안'과 '작가들에 대한 가십거리'를, 그리고 '북시 위키'를 만들게 되는 단초를 제공한 원흉(?)이랄까. 하지만 작품 자체는 정말 좋았고, 탈도 많기야 했지만 '판작안' 등의 기획도 결국 내가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으니 딱히 그에게 악감정은 없다. 아니, 악감정 가지는 쪽이 이상한 거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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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 레스타. 1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앤 라이스 (황매,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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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 레스타. 2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앤 라이스 (황매,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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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 라이스의 히트작 시리즈 《뱀파이어 연대기》의 두번째 작품. 두번째 작품이라고는 하지만 무려 9년만에 나온 작품이고, 그만큼이나 전작인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문제는 그 변화가 과연 얼마나 성공적이냐 하는 것인데, 불행히도 그다지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작가가 자신의 히트작에 대한 '팬픽'을 쓰고자 했을 때 어떤 재앙이 초래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까. 프리퀄이라는게 대개 그런 위험을 어느 정도 안고 시작하기는 하지만 이 작품의 경우는 그게 상당히 치명적이었다.

전작에서 레스타가 보여줬던 매력 중에는 그가 실체를 알 수 없는, 불안하고 불안정한 캐릭터였다는 데서 기인하지 않았나 싶다. 루이스가 처음 그를 봤을 때는 정말 대단하고 무엇이든 아는 그런 인물처럼 보였지만 작품이 진행됨에 따라 실상은 천박하고 얄팍한 속빈 건달에 불과하다는게 드러나지 않던가. 그 실상을 허세와 비밀주의로 감추려던 레스타와, 뱀파이어로서의 경험을 쌓아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레스타의 실체에 대해 알게 되는 루이스 사이에서의 긴장... 그 속에서 겉으로는 강한 척 허세를 부리지만 누가 잘못 찌르기라도 하면 그대로 추락해버릴 듯한 아슬아슬한 면모를 보여주던 캐릭터. 그게 레스타 아니었나 하는 이야기다.

『뱀파이어 레스타』를 읽는 내내 입맛이 썼던 건 그런 데서 기인한다. 그러던 레스타가 2권에서는 락스타가 되어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거나 아예 자기 입으로 자기 과거사를 까발리기까지 하니, 이건 작품의 전제부터가 도무지 매력적이기지가 않은 거다. 비밀주의를 벗는다는 것 자체가 레스타의 매력을 상당 부분 벗겨낸다는 의미 아닌가 말이다. 그나마 일개 팬이 쓴 팬픽 같으면 공식 작품이 아니니까 무시할 수나 있는데 이건 작가 자신이 쓴 공식적인 후속작이고 보니 무시해버릴 수도 없고. 참으로 난감했다. 앤 라이스가 공식적으로 팬픽을 금지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는 심정이 참으로 복잡했고.

『뱀파이어 레스타』가 이런 작품이라는 걸 아주 모르지는 않았다. 애초에는 시리즈의 첫 작품인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만을 읽다 마려는 것을, 모처에서 "시리즈의 5권인 『악마 멤노크』가 시리즈 중 절정에 달한다"라는 말을 듣고 5권을 읽기 전에 읽어보려 산 것인데... 그나마 평가가 괜찮은 2권부터 이런 문제가 발생해서야 도저히 5권까지 버텨내지 못할 듯 하다. 게다가 말이 5권이지, 앞으로 남은 3,4,5권을 분량으로 따지면 무려 6권 분량 아닌가. 과연 5권에 이걸 감당할 정도의 가치가 있을까 싶다.

...라고 5권을 추천해주셨던 분께 불평했더니 매우 쿨하게 웃으며 "그러면 읽지 마세요. 세상에 좋은 작품이 얼마나 많은데 싫은걸 억지로 읽어요."라고 대답하셨다. 아, 그렇다면 나는 왜 대체 『뱀파이어 레스타』를 읽었단 말인가.


P.S.

꽤 오래 전에 읽었지만 영 마음에 들지 않은 작품인지라 평을 쓸지 말지 고민했었는데... 역시 쓰는게 낫지 싶었다.

P.S.2

얼마 전에 북시 위키의 내용을 복구하려고 다시 위키피디아에 들렀다가 든 생각인데, 우리 나라에서는 여전히 앤 라이스가 뱀파이어물 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미국에서는 차차 종교물 작가로서도 알려지는 추세가 아닌가 싶다. 분명 몇 달 전까지만 해도 'Anne Rice'항목에 대한 내용은 대개 뱀파이어 작가로서의 내용이었고, 앤 라이스가 쓴 종교물에 대해서는 다소 불평하는 듯한 뉘앙스의 문장이 제법 많았다.

그런데 얼마 전에 가서 확인해보니 앤 라이스가 남편의 사망 후 스트레스로 살이 얼마나 쪘었다는 둥, 앤 라이스 팬들이 앤 라이스의 새벽 미사 외출을 구경하기 위해 집 앞에 텐트치고 기다릴 정도였다는 둥의 가십거리들은 대부분 삭제되고 그를 대신하여 앤 라이스의 종교물에서 가져온 인용구들이 엄청나게 수록된 게 아닌가. 항목의 토론 페이지도 썰렁하기만 한 통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뭐 그 인용구 덕분에 《뱀파이어 연대기》에 대한 앤 라이스의 언급이 점점 황당 일로를 걷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나름 소득이기야 하지만, 항목 자체를 보는 재미는 영 줄었다.

P.S.3

그리고 이 작품의 역자에 대해서도 한 마디. 근래 재간된 《뱀파이어 연대기》시리즈는 과거 여울에서 김혜림 씨의 번역으로 나왔던 책을 그대로 재간한 것이라 들었다. 문제는 새 출판사에서 나온 번역본이 과거 판본을 번역했던 역자와 연락이 닿질 않아 하는 수 없이 과거의 번역을 그대로 가져다 편집을 해서 낸 책이라는 점이다.

김혜림 씨가 《뱀파이어 연대기》시리즈를 번역할 때 모 중학교 영어 교사로 재직중이었던 걸 감안하면 관련 정보가 남지 않았을 리 없거니와, 설령 찾지 못했다 하더라도 허락도 구하지 않은 채 옛 번역자의 글을 그대로 가져다 쓰는 게 정상적인 일인 걸까? 차라리 다른 번역자를 구해서 새로 번역하게 하는게 모양새는 더 좋지 않았겠냐는 말이다. 어차피 출판사의 주장대로 기존에 한국에서 출간되지 않은 6~10권도 번역할 예정이었다고 한다면 새로운 번역자를 구할 수밖에 없었을 텐데.

출판사의 말과는 달리 6~10권은 아직까지 출간되지 않았고, 출판사에서 마련한 뱀파이어 연대기 공식 팬카페도 사실상 2009년 8월 말 이후로는 관리가 전혀 되지 않는 상황이고 보니 (일단 그 이후로 올라온 글 자체가 10월 28일에 올라온 스팸더미밖에 없고, 그나마도 지금까지 삭제되지 않았다) 뭘 탓하는 상황 자체가 우습기도 한데... 

여하간 책 자체만이 아니라 외부 사정을 보더라도 영 씁쓸해지는 시리즈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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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집」

도서/문학 2009/12/01 15:47
        빈 집
               -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빈 집이란 대개 사람이 없는 집을 말하고, 그 사람이란 으레 주인을 뜻하기 마련이다. 이 집의 주인은 사랑의 주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사랑은 주인을 잃고 사랑에 갇힌 것이다. 그 '주인'이 누구냐에 대한 해석은 시인이 문을 어느 방향에서 잠궜느냐에 따라 갈린다. 방 밖에서 잠궜다면 시인 스스로가 사랑을 떠난 것이고, 방 안에서 잠궜다면 그주인이 떠나 의미가 없어진 사랑과 시인이 '빈집'에 갇힌 것이다. 어느 쪽이건 사랑이 버려졌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다.

집이란 모름지기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으면 빨리 허물어져가기 마련이다. 우리가 흔히 '폐가'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 집이 버텨낸 세월과 관계없이 다 쓰러져가는 모양새를 떠올리는 것도 버려진 집의 운명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 빈 집에 버려진 사랑의 운명 또한 자명하다. 주인의 손길이 닿질 않아 폐가가 되어가는 집 속에서,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곳에서 썩어갈 것이다.

슬픈 일 아닌가.




P.S.

글을 쓴 지 한참 지나도 마이글에 올라오질 않길래 의아해 했는데, 글을 '비공개' 상태로 두었던 모양이다. 늦게나마 돌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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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들에게 고하라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이영도 외 9인 (해토, 2009년)
상세보기


시험 공부가 잘 되지 않으니 기분전환 삼아 서평이라도 써야겠다. 전체적으로는 판갤에 올렸던 글(링크)이 기반이다. 

-

이영도「별뜨기에 관하여
이영도의 SF 소설을 읽고는 한번도 만족해본 적이 없다. SF계의 클리셰들을 많이 가져다 쓴 티가 나서... (그나마 듀나처럼 클리셰를 잘 써먹으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고.)《헤인 연대기》의 '연맹'을 연상시키는 조직에다가 앤시블까지 등장하던데, 이건 아무리 봐도 어슐러 K. 르 귄의 영향이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이영도가 SF쪽에서는 아직 자기 색을 모찾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듀나 「죽은 자들에게 고하라
표제작. 듀나 이름값이 아니면 그리 나쁘지 않은 단편이기야 한데... 마이크 레스닉의 「늙은 신들의 죽음」과 비슷하게 흘러가려나 싶더니 결말이 조금 어처구니 없게 끝나서 기분이 상했었다. 우주인 중 한 명은 굳이 필요하지 않았다는 생각도 든다. 아마 다른 한 명을 위한 캐릭터였으리라. 자기가 어떤 계획을 세우고 실행했는지 독자들에게 알려줘야 하는데, 독백이라면 영 꼴이 이상하니까.

임태운「채널
재미없다. 대사도 그렇고 문장도 그렇고... 임태운 소설의 재미는 별 것 아닌 플롯을 재치있는 대사와 설명으로 맛깔나게 버무린다는 건데 이렇게 건성이어서야 곤란하다. 작가에겐 대단히 미안한 말이지만 대강 쓴 느낌이라 해야 하나. 전체적으로 좀 다듬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데커드' 형사는... 필립 딕일까, 로봇수사대 K캅스일까?
 
송경아「하나를 위한 하루
스토리야 별 것 없고 캐릭터에 기대는 소설인데... 핵심 인물 중 하나인 '형'의 성격이 그닥 일관되질 못하다. 권위적인듯 했다가 다정하고, 군림하는 듯 하다가도 그렇지 않고... 캐릭터의 성격이 변한다는게 아니라 그냥 튄다는 이야기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전반부는 정말 괜찮은데 후반부가 별로. 엔딩도 거기서 끝맺어질 시점은 아니었다. 기왕 쓸 거라면 차라리 더 길게 이어가는게 나았을 텐데.

설인효「진짜 죽음
총체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상황 설정, 캐릭터들의 행동 양상, 결말 맺는 방식 등등... 임태운의 단편 이상으로 안일한 작품이다. 이 책 읽을 분들은 그냥 건너 뛰라고까지 말하고 싶다.

노기욱「소울메이트
'과학이 당신의 사랑까지 해결해드리겠다!' 처음부터 이런 식의 프레이즈가 나오는 작품은 대개 결말도 결정되기 마련. 과연 기계에 대한 인간의 우월성을 확인하면서 끝난다. 나야 이런 결말을 그다지 싫어하지는 않지만 그 결말을 끌어내는 방식은 좀 더 정교해야 했다.

판갤에서 이 단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더니 누군가가 이 단편의 기반이 된 너비아니 씨의 엽편을 보여주었는데, 그 엽편 쪽의 완성도가 더 높았다. 좀 어거지로 끼어든다 싶었던 마지막 부분도 이 엽편에 실린 문단을 그대로 실으려다 보니 그리 되었던 모양. 또 너비아니씨는 '내 작품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동치성이라는 이름의 캐릭터가 한번쯤 나왔어야 했다'고 했는데,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다.

김보영「0과 1 사이
같은 앤솔러지에 실린 작품 중 가히 최고 걸작. 이 작품이 실렸다는 것만으로도 이 앤솔러지는 값을 한다. 커트 보네거트나 테드 창이 이미 비슷한 소재로 작품을 내긴 했지만, 그들의 소설에 견주어도 꿀리지 않는 훌륭한 작품이다. 그렇게 압도적인 비교 대상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이런 작품을 썼다는 것 자체가 경이적인 일이다.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문장들로 가득찬 좋은 작품.
 
'나는 아이들에게 너희 때가 좋았다는 말을 하지 않을 거야.
그 시절이 좋았다는 말을 하지 않겠다고
너희 나이 때엔 다 그런 거라는 말도, 누구나 겪는 일이라는 말도 하지 않겠어. 내게 그 말을 '하지 않는' 어른이 아무도 없다면, 그럴 수 있는 어른이 이 세상에 남아 있지 않다면, 내가 나이를 먹고 그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 되겠어. 그 말에 담긴 무심함과 비겁함을, 어리석음을 아는 어른이 되겠어.
- 김보영「0과 1 사이」 中

이런 위로를 듣고서 어떻게 울지 않을 수 있겠는가.

김몽 「차이니스 와이너리
괜찮은 작품이긴 한데... 뒷심이 많이 부족하다. 주인공이 귀국한 후를 좀 더 상세하게 풀었다면 어땠을까 싶다. 잘 나가다가 갑자기 급하게 끝맺어버린 느낌이다. 마감에 쫓기기라도 했던 걸까?

김선우「양치기의 달
고백하건데, 김선우의 소설은 단 한번도 만족스럽게 읽은 적이 없다. 그래도 이 소설은 그나마 괜찮은 편이었지만. 외계 행성에서의 탐험을 다룬 소설에서는 독자가 실존하지도 않는 그 세계에 관심 가질만한 이유를 부여해야 하기 마련이다. 어슐러 K. 르 귄의 『로캐넌의 세계』가 걸작이란 소릴 듣는 건 그런 작업을 아주 성공적으로 해냈기 때문이고. 그런데 이 소설이 그런 작업에 성공했는지는 상당히 미지수. 한마디로 거기 사는 사람들이 어떤 인종인지 별로 궁금하지 않다. 주인공도 영 매력적이지 않고. 생판 처음 만난 소녀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사랑'이라는 걸 어떻게 그리 쉽게 확신하는지 모르겠다. 나중에 주인공이 절망하는 장면을 그리기 위해 끼워맞춘 장면인듯 싶다. 그래서야 설득력은 떨어지고, 공감도 되지 않는다.

백상준「우주복」
처음 보는 작가이긴 한데... 나쁘진 않다. 다만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는 『로캐넌의 세계』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물론 표절이라고 말할 정도는 아니지만 썩 독창적이라고 하지는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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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잔을 들고 재채기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김이환 외 9인 (황금가지, 2009년)
상세보기

『한국 환상문학 단편선』(2)과 마찬가지로 위 프로필의 '지은이' 부분을 고쳤다는건 다들 짐작했으리라 믿는다. 표제작 쓴 작가를 놔두고 왜 다른 작가를 메인 작가로 내세운단 말인가. 거 참...

지난 해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된 『한국 환상 문학 단편선』의 후속편에 해당하는 앤솔러지가 출간되었다. 전작과는 달리 표제작을 선정했고, 포맷도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환상문학웹진 거울' 소속 작가진이 주축이라는 점만큼은 여전하다. 얼마 전에 '시작'에서 출간된 『한국 환상문학 단편선』(2) 또한 거울 작가들의 작품을 주로 담았다는 것과 연결지어 생각해보면 적어도 창작 장르문학 단편에서만큼은 거울의 입지가 서서히 탄탄해져간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거울 측에서 자체적으로 냈던 단편집들을 제외한다 해도 이걸로 거울 작가들이 주축인 단편집이 벌써 여섯 권 아닌가 말이다. (『누군가를 만났어』, 『잃어버린 개념을 찾아서』, 『커피 잔을 들고 재채기』, 『한국 환상 문학 단편선』, 『한국 환상문학 단편선』(2), 『U, ROBOT』) 최근 4,5년 사이에 정식 출판사를 통해 출간된 창작 SF&판타지 단편집이 열권 남짓하다는 걸 생각해보면 상당히 놀라운 수치다.

(물론, 다시 생각해보면 한국 장르문학판의 작가 발굴 시스템이 뭔가 기형적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할 거다. 거울이 정말로 탄탄한 작가진을 갖춘 집단이라고 해도, 이 정도로 비중이 쏠린다는건 사실 그렇게 바람직한 사태는 아니다.)

전체적인 평을 해보자면, 근래 메이저(?)에서 나온 거울 관련 앤솔러지 중에서는 가장 나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환상 문학 단편선』의 경우와는 달리 대부분이 한두 해 전에 발표된 '최신' 작품이라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듯 하다. 그 덕인지『한국 환상 문학 단편선』에 비하면 작품 간의 편차도 덜한 편이고... (『한국 환상 문학 단편선』에 수록된품들의 발표 연도는 2003년에서 2008년까지 참으로 다양하다. 북시의 관련 항목 참조) 

그런데 신기하게 이번 단편집에서는 결말이 마음에 드는 작품이 거의 없다. 미완성 작품이거나 편집 미스로 뒷부분이 누락된 거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작품까지 있을 지경인데다 전반부는 정말 몰입해서 읽던 작품도 막판에 가서 뒤통수를 맞는 경우가 부지기수고 보니... 원래 결말 맺기가 어렵다는 것인지, 아니면 내 취향이 좀 괴팍한 것인지는 좀 더 생각해볼 일이다.

-

※ 거울에서 이미 발표되었던 게시물의 경우는 옆에 링크를 추가했다. 해당 게시물에 달렸던 리플 역시 참고해보는 것도 괜찮을 테니까.

지하철에서 한참 몰입해서 읽다가 마지막에서 두번째 문단 말미를 읽고는 속으로 '이건 뭐여!'하고 외쳤더랬다. 왜 이런 결말이 나왔는지 궁금하기도 한데, 그 전까지는 정말 괜찮은 소설이다. 거울에 발표되었을 때 달렸던 어느 리플따나마 슬픈 작푸미기도 하고... 그렇지만 이 작품에 더이상 공감하지 않을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었다는게 솔직한 심정이다. 

은림 「노래하는 숲」(2007) http://mirror.pe.kr/zboard/zboard.php?id=eun&no=12
일전에 『한국 환상문학 단편선』(2)의 리뷰를 쓰면서 '비슷비슷한 작품을 내는 작가'라고 흉(?)을 본 적이 있다. 물론 이 작품 또한 기존에 읽었던 작품과 연결지을 만한 곳이 없는 건 아니지만 - 가령 '식물=여성성' - 절대 '고만고만'하다고 할 만한 작품은 아니다. 지난 리뷰에서 내렸던 평가가 상당히 섣부른 것이었음을 인정해야겠다. 신작도 아니고 2007년에 이미 발표되었던 작품이라는 걸 감안하면 더더욱.
사실 그 플롯이야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긴 하다. 하지만 새로운 시도를 해볼 여지가 적은 소재로 좋은 작품을 쓰기란 더 어려운 법인지라... 중후반에 이르러서는 결말을 거의 예상했으면서도 정말 재미있게 읽은 단편이었다. 이 단편선에서는 가장 마음에 든다.

김보영「노인과 소년」(2009) http://navercast.naver.com/literature/genre/571
네이버를 통해 소개되었던 작품...이면서 그다지 네이버를 좋아하지 않는 나로 하여금 (정말이다. 그래서 네이버 카페들은 가입만 해놓고 잘 들어가지도 않는다) '얘들도 가끔은 쓸만한 짓을 하는군'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작품이다. '노인'과 '소년'의 대화가 후반부로 갈수록 선문답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이 정도면 뭐... 그러고보니 작가가 헤세를 좋아한다던가.

김선우「천국으로 가는 길
베르나르 베르베르인가가 이미 써먹은 통에 참신성은 떨어지는 작품이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끝나서는 안될' 부분에서 끝났다는게 아닐까. 박애진의 단편을 읽었을 때와는 좀 다른 의미에서의 '이건 뭐여!'. 다 읽고 나서도 혹시 편집 미스로 뒷 부분이 누락된 거 아닌가 싶어서 페이지 번호를 확인해봤을 정도다. 정말로, 만에 하나, 진실로 이게 완전한 버전이라면 뒷 부분을 좀 더 이어서 쓰라고 말하고 싶고.

김이환「커피 잔을 들고 재채기」(2006) http://mirror.pe.kr/zboard/zboard.php?id=robby&no=10
솔직한 심정으로 말하자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더라. 몇 번 더 읽어봐야겠는데, 좀 자신은 없다.

정보라「은아의 상자
재밌게 읽긴 했지만 '은아의 편지' 부분부터는 급속도로 맥이 빠진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구구절절히 설명하지 않아도 될 텐데. 좀 과격한 비유이긴 하지만 B급 할리우드 영화에서 악당이 주인공에게 그간의 전모를 죄다 밝혀주는 그런 장면을 보는 기분이랄까... 

임태운「뮤즈는 귀를 타고
나비 효과와 타임 패러독스를 이용한 단편인데, 사실 같은 소재라면 듀나의 「나비 전쟁」이 더 나았지 싶다. 이 작품도 재밌게는 읽기야 했지만... 여담으로, (항상 겪는 일은 아니지만) 임태운의 단편을 읽다 보면 한창 재밌게 읽다가 난데없이 튀어나오는 섹스 관련 장면 때문에 기분을 잡치는 일이 종종 생긴다. 그게 절정에 달했던 「전설의 용 우리 마을에 오시네 Red Dragon is coming to town」때만큼은 아니지만 이번 작품에도 그런 대목이 하나 있어서 영 찜찜햇었다. 어찌 보면 작가의 잘못이라기보다는 내 취향 탓이긴 한데...

정지원「장미 정원에서」(2009) http://mirror.pe.kr/zboard/zboard.php?id=sandmeer&no=5
'오빠'란 캐릭터의 '급격한' 성격 변화는 좀 황당했다. 바로 전까지는 주인공을 집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하다가 그 직후에 '널 보낼 순 없어' 하는 식이라니... 뭐 다 읽고 나면 나름 이해할 구석이 생기긴 하는데 여튼 그건 좀 걸렸던 부분이다. 거기만 제외하면 제법 준수한 단편.

정희자「소설을 쓰는 사람에 대한……
90년대 중후반부터 장르문학 관련 통신 활동을 해온 사람이라면 향수를 자극할만한 요소들이 제법 많이 나온다. 어쩌면 작가 자신의 경험이 들어갔을지도 모르겠다. 길게 갈 것 없이 차라리 중간 부분에서 끊었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 싶기도 한데...
 
이영도「샹파이의 광부들」(2009)
「봄이 왔다」 때부터도 느꼈던 거지만 이영도는 도대체 왜 그리 반전에 집착하는 건지 모르겠다. 복거일이 『드래곤 라자』에 반전 없다고 까댔던 게 그렇게 상처였던 걸까? 엉성한 반전은 장기적으로 보면 결국 작품의 생명을 깎아먹기 마련이라는 걸 모를리도 없을텐데 말이다. 결말부에 가서는 아예 그게 왜 반전인지 설명하기까지 하는 통에 보는 내가 민망해질 지경이다.
정 이영도의 단편을 싣고자 했다면 사실 이 작품보다는 전작인 「에소릴의 드래곤」쪽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이영도의 애독자들은 대부분 네이버를 통해 전작을 읽었겠지만, 사실 전작을 읽지 않았다면 깨나 재미가 떨어질 단편이 「샹파이의 광부들」이기 때문이다. (가령 이 단편에서는 더스번 칼파랑이 왜 '좋은 남자'인지 설명해주지 않는다.) 어차피 이영도쯤 되는 작가면 굳이 이번이 아니더라도 언제든지 「샹파이의 광부들」을 실을 수 있을 텐데 왜 굳이 아직 출간 안된 전작을 내버려두고 굳이 이 작품을 수록한 것인지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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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환상문학 단편선. 2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강지영 외 12인 (시작, 2009년)
상세보기

※ 원래 티스토리에서 제공하는 '책 정보' 서비스에는 지은이가 '강지영'으로만 되어 있다. 차마 저자들의 이름을 일일히 열거하진 못하더라도 하다못해 '~ 외 X인' 하는 식의 언급은 해줬어야 하지 않나 싶다. 딱히 표제작이 없는 이런 책에서는 그 것도 사실 썩 적합한 방식은 못되지만, 어쨌거나 그게 저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는 거다. 

-

거울 작가들이 주로 참여한 단편선이라는 점에서 얼핏 황금가지에서 나왔던 『한국 환상 문학 단편선』을 떠올리게 하는 책이다. 사실 '거울 작가진이 참여한' 책이라곤 해도 두 책의 저자가 그리 많이 겹치지 않는지라 서로 비교하기는 좀 어렵기야 하지만서도.

이 책에 대해서는 대체 뭐라고 평가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한국 환상 문학 단편선』에 비하면 평균적으로 좀 더 낫기야 하다. 개중 굳이 베스트를 꼽아본다면 은림의 「낙오자」, 이수현의 「쓰레기들의 왕」, 임태운의 「이빨에 낀 돌개바람」정도를 들 수 있겠고. (저자 이름 순으로 배열) 허나 그 작품들도 진정 베스트라 하기에는 걸리는 부분들이 영 많은데다, 반대편에서는 거의 울화가 치밀 정도로 형편없는 작품도 더러 섞인 판이니... 그런 작품들만 보자면 장르문학 리뷰어로도 제법 알려진 모 작가가 이 책을 거의 걸레짝 마냥 씹어댔다는게 딴에는 이해 못할 일도 아니다 싶을 정도다. 나는 정말이지 내가 못쓴 글 때문에 누군가에게 분노를 품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전혀 못했었는데 말이다.

그러니까 이런 거... (by 콘라드, 판타지 갤러리)


-

강지영「브라보,청춘!
이 작품을 읽고 난 다음 책을 덮고 한참을 생각했다. 도대체 이 책의 편집자는 무슨 저의에서 이 작품을 맨 앞에 배치한 걸까 하고. 단편선과 음반의 유사성을 지적하지 않는다 해도 '첫 번째 작품'이라는게 독자에게 다가가는 의미란 상당하기 마련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단편선의 얼굴 역할을 하기도 마련인데, 그런 위치를 차지한 작품이라기엔 상당히 민망한 단편이다. 캐릭터는 엉성하고, 반전도 반전 같지 않고, 메시지는 노골적으로 다 드러나 있고... 『한국스릴러문학 단편선』이나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에 수록된 단편은 이보다 좀 더 나으리라 믿는다. 아니면 요 근래 낸 장편 소설이라도. 그렇게라도 믿지 않으면 내가 돌아버릴 것 같다!
 
배명훈「얼굴이 커졌다
요즘 들어서는 가능하면 특정 작품의 리뷰에서 다른 작가의 작품과 비교하는 짓을 자제하려 하는 편이다. 그렇지만 이 작품에 대해서만큼은 이오네스코의 「무소」를 언급하지 않고서야 도저히 넘어갈 수가 없다! 같은 아이디어를 서로 전혀 다른 방식으로 활용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인데, 나로서는 해피 엔딩인 「얼굴이 커졌다」쪽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최현숙(은림)「낙오자
은림의 단편들에서는 늘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작가가 일관된 스타일을 좇는다고도 볼 수 있겠고, 점점 그 완성도가 나아지는 걸 보면 역시 그렇게 보는게 맞겠지만, 줄곳 작품을 보는 입장에서는 사실 좀 질린다. 좀 더 색다른 방향으로 나가봐도 좋을 텐데.
  
김이환(콜린)「버지니아 울프는 없었다
모 게시판에서 다른 단편선에 대한 프리뷰를 썼을 때 이 작품에 대해 언급했더니 이름모를 누군가가 사실 이 작품은 2005년에 거울에서 발표된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과연 찾아보니 「버지니아 울프 가라사대」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적 있었다. 아하. 이게 일반적인지는 모르겠는데 이 단편선에는 통신상에 발표되었을 때와는 그 제목이 다른 작품이 여럿 있다. 작가와 편집자, 둘 중 누구의 뜻이었을까? 여하튼. 상상력의 과잉이라 해도 좋을 정도였던 『오후 다섯시의 외계인』을 본 탓인지는 몰라도 이 단편은 상대적으로 밋밋한 인상을 준다. 구멍 속 세계를 묘사할 것 까지야 없지만 - 그랬으면 오히려 재미가 덜했을지도 모르고 - 좀 더 길게, 과격하게 나갔어도 되지 않았을까.

김주영(赤魚)「지구의 중력은 안녕하시니?
『환상문학웹진 거울 외계인 단편선』에 실렸던 작품의 재수록. 당연히 외계인을 다룬 단편인데, 소재를 활용한 방식은 내 취향에 맞는다. 외계인에 대한 작품을 쓰랬더니 '진짜' - 혹은 '전통적인' - 외계인이 튀어나와버리는 건 좀 재미없잖나. 다만 완성도가 그리 만족스럽다고 하기는 어렵다. 특히 아르코의 아내가 등장하는 부분은 작가가 주인공들의 '정체'를 너무 서둘러서 밝히려 했다는 인상을 주고...
 
임태운「이빨에 끼인 돌개바람
임태운의 단편은 사실 두어편 읽어봤을 뿐이지만 술술 읽히는 '재미있는' 글을 쓰려하는 작가라는 인상을 받는다. 이 작품 또한 그러한데, 코믹물로서 가볍게 읽기 좋은 작품이다. 김보영이 거울 프로필에 실린 임태운의 캐리커쳐를 그리면서 '소년 만화 주인공을 컨셉으로 잡았다'고 했는데, 재미있으면서도 일리있는 관찰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권민정(가는달)「나하의 거울
액자형 구조로 된 예술가 소설...이라고 정의해야 할 텐데, 액자형 구조가 과연 필요했는지는 의문. 바깥 이야기는 아예 내던져버리고 본론인 예술가 쪽에만 집중하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작품의 내용과 제목이 그리 잘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 '나하'에 대해 초반에 잠깐 언급되었다가 엔딩 부분에 거울이 다시 등장하는 수준인데, 이래서야 이런 제목을 붙일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김지현(아밀, 루나벨)「방문자
이전에 방문자들의 방문을 받은 사람들과 신부의 차이가 대체 뭘까?

김지원(Sandmeer)「시간을 팝니다
책에는 '정지원'이라는 이름으로 실려 있지만 그거 필명 아니던가? 뭐 은림도 본명이 아닌 필명으로 작품을 수록했으니 별 문제 될 것 없긴 한데 좀 의아하기야 하다. 
 
김두흠(아이)「1억 원
중반부는 흥미진진하게 읽다가 종반부까지 보고 나면 '초반부는 대체 왜 들어갔던 건가' 고민하게 되는 소설. '아 시발 꿈'은 대략 좋지 않다.
  
이수현(Askalai)「쓰레기들의 왕
혹시 예전에 발표된 단편이 아닐까 싶어 찾아보니 과연 거울에서 2003년에 발표된 작품이었다. 그 때는 「쓰레기나라의 왕」이라는 제목이었는데, 바뀐 제목이 더 마음에 든다. 웹상에 올라왔던 작품을 대충 훑어보니 - 정말 대충! - 제목이 바뀌었을 뿐 내용 자체는 달라지지 않은 듯 하여 영 아쉽다. 재미있게 읽기는 했어도 작가가 '영웅으로의 재탄생'이란 테마를 다루고 싶어했던 티가 너무나도 역력한 작품이었던 지라. (후반부의 '교수'는 거의 해설역에 가깝다.) 사실 단편 소설이라기보다는 장편 소설의 서장에 가까운 느낌을 주는 단편이고, 뒷 이야기가 더 궁금한 작품이지만 작가의 신작을 내는 주기가 워낙 느리다는걸 감안하면 역시 이 작품이 장편으로 확장되는걸 보기란 지난한 일 아닐까...

써놓고나서 '왜 이 작품에 대해서만 할 말이 이리 많지?'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만약 내가 창작을 한다면 꼭 한번쯤 다뤘을 만한 - 아니 다루고 싶어할만한 - 테마를 다룬 작품이기 때문이었다.
 
양미현(Raile)「파랑새
'서로 시간차를 두고 천사와 악마를 그렸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동일인물이더라' 하는 이야기를 예전에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데 출처가 도통 기억나지 않는다. 여하간 그 이야기를 읽었던 사람에게는 참신한 맛이야 좀 떨어지는 단편이 아닐까 싶다.
 
이상민「댁의 아내는 안녕하십니까?
퇴마록을 비롯한 현대 배경 퇴마물에 등장할 법한 장면을 뚝 떼다가 글로 옮겨놓은 작품. 다른 소설의 외전이라던가 하는 식으로 작가의 다른 작품과 연결되는 글이 아니라면, 굳이 이런 소재를 글로 쓸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강지영의 「브라보, 청춘!」이 보자마자 사람을 격노케 했던데 비해, 곱씹으면 곱씹을 수록 사람을 울분케 했던 작품.



Posted by 최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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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리뷰의 본문은 환상문학웹진 거울에 올라간 기사에서 확인해주세요.

여름 호러 특집 기사 자체는 이미 지난달 29일에 올라온 것을, 며칠 늦게 퍼다놓는다. 핑계를 삼자면, 지난 며칠간 지난 기사에 관심을 쏟을 정도가 되질 못했었다. (뒤늦게나마 글을 쓰게 된건 블로그를 1주일 넘게 버려놓았었다는게 뒤늦게 생각나서...)

거울 쪽에서 처음 청탁을 받았을 때부터 완성된 기사를 넘길 때까지 상당히 애를 먹였던 소설이었다. 이 소설의 원작, 즉 『오만과 편견』에 대한 애정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기사를 쓰겠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첫 페이지를 펼치는 순간부터 나를 난감하게 했던 작품이었으니까.

기힉 자체는 재미있다. 전혀 다른 장르에 속한 고전을, 몇몇 문장만 뜯어고쳐서 좀비물로 바꿔놓겠다는 것인데, 리뷰에도 썼듯 꽤나 대담하고 파격적인 상상력의 결과물임은 분명하다. 나 자신도 고전을 활용한 작품들은 꽤 좋아하는 편인지라 상당히 기대를 갖고서 소설을 읽기 시작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결과물은 처참할 정도의 졸작이었다. 원작에서 각각의 인물들이 보여주었던 섬세한 성격차는 할리우드 액션 활극에 걸맞도록 단순화되었고, 그 결과 이 소설이 원래 연애물로서 갖고 있던 성격은 거의 퇴색되어버렸다. 사실 원작인 『오만과 편견』(자신의 시대에 비해서는) 가히 선구적이라 할 정도로 재기발랄하며 지적이고, 세련된 여성과 그와 마찬가치로 여성의 지적 능력을 존중할 줄 아는 멋진 남성과의 밀고 당기는 로맨스를 지켜보는 재미로 봤던 작품인데, 그런 캐릭터들이 무식하기 짝이 없는 좀비 사냥꾼 두 마리로 변신하고 말았으니...  요컨대 원작의 명성은 최대한 빌리면서도 정작 원작에 대한 예의는 가장 지키지 않은 '패러디물'이라고 해야 할까. 

결국 거울에 보낸 서평은 '원작을 훼손한' 작가와 기획자에 대한 분노가 치덕 치덕된 글이 되고 말았으니... 사실 '여름 호러 특집'에 걸맞는 글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반성, 반성.
Posted by 최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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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자체는 6월 말에 받았으면서도 하필 학교 도서관 정비 기간이 오는 바람에 조금 늦게 읽었던 작품. 간만에 많이 웃으며 읽었던 소설이기도 하다.

처음 들을 때는 예전에 읽었던 『처절한 정원』류의 전후 소설일 거라고 생각했다. 2차 세계 대전을 소재로 삼았다는 점, 전쟁 후 '살아남은 자들의 상처'에 대해 조명했다는 점에서 비슷한 소설일 거라 여겼던 거다. (그래서 추천해주신 분께 그 소설도 읽어보시라 권해드렸었다) 하지만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이 전쟁을 다루는 방식은 『처절한 정원』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처절한 정원』이 주목하는게 '남은 자'들이 지고 간 상처의 정체였다면,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은 그들이 상처를 극복하는 과정에 더 많은 초점을 두었다고 해야 할까. 

해서 이 소설을 평범한 전후 소설이라고 말해버리기엔 좀 그렇다. 어떻게 본다면 이 소설의 중심 소재는 '2차 세계 대전'이 아니라 '독서' 그 자체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문학을 통해 인간성을 지켜나갔고, 지켜나가려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전쟁 전까지만 해도 책에는 전혀 관심 없던 사람들이 독일군 점령 치하에서 찰스 램을 읽고, 셰익스피어를 읽으며 인간성을 유지하려 애썼다는 내용을 보면서 문학의 힘 외에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문학회에서 무수한 책을 읽으면서도 독일 작가들의 이름은 끝끝내 읽지 않는 이 기묘한 '저항'까지 포함해서.

문학애호가들은 비단 건지 섬의 주민들만이 아니다. 기실 이 소설에 나오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학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인다. 가령 주인공 줄리엣이 직원에게서 비밀을 캐낼 때는 한 손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든 채 위협하고 심지어 비열한 악당조차도 직접적인 욕설 대신 "혹시 오스카 와일드 같은 취미라도?"같은 세련된 야유를 택하지 않는가 말이다. 이처럼 고전 문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웃을 수밖에 없는 요소들이 가득하다. 바꿔 말하자면 문학에 취미가 없는 한 별로 관심가질만한 소설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 많은 작가들 중에서도 찰스 램, 브론테 자매, 오스카 와일드가 유독 자주 등장하는 걸 보면 저자인 매리 앤 셰퍼가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인지도 대강 짐작해볼만 하다. 미국인 작가가 영국 작가들에게 그리 많은 애착을 보이고 또 영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썼다는 게 신기하긴 하지만. (하기사 미국을 배경으로 2차 대전에 관한 소설을 쓴다는게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P.S.

두번째 문단을 쓸 때 생각났던 대목. 유럽에서 집필된 전후소설에는 유독 '전쟁 중에도 인간으로서의 긍지를 잃지 않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유독 많다. 이 소설에서만도 그런 인물들이 수두룩. 한국의 전후 소설에서는 대부분 전쟁 생존자들을 구질구질한 전쟁의 피해자 정도로 그리려는데 만족하는 것과 비교한다면 좀 재미있는 대목이다. 그네들의 2차 세계 대전보다 우리네의 한국전쟁이 더 처절했던 것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2차 세계 대전은 기본적으로 국가간의 전쟁이었고, 스페인 정도를 제외한다면 '동족 상잔의 비극'을 겪은 나라는 많지 않으니까. 이념 구도에 따라 같은 동네 사람들끼리도 살육 잔치를 벌여야했던 우리네의 실정을 감안하면, 유럽 같은 '깔끔한' 전후 소설을 기대하는게 무리일런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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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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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자면 내가 《판타스틱》을 읽어본 건 이번 호가 처음이다. 사실 그 전에도 주변으로부터 추천은 여러 번 들었건만, 어쩐 이유에서인지 결국 이 잡지를 본 건 계간지로 전환하게 된 뒤였던 셈이다. 핑계를 대자면, 여태 판타스틱이 다뤘던 기사들 중에 내 마음에 끌리는 게 그다지 없었다고 해야 할까. 이번에 구입했던 것도 반쯤은 책 말미에 실렸다는 중세 장르문학 특집 덕분이었으니 핑계로서는 충분하지 않나 싶다. 

나머지 절반은 판타스틱이 계간지로 전환되게 내버려둔 데 대한 미안함 때문이다. 작년에 한창 《판타스틱》 폐간 루머가 돌 때 조차도 내가 집어들었던 건 《판타스틱》이 아니라 『타임 패트롤』 시리즈였기 때문이다. 이걸로 나 혼자만 《판타스틱》에 대해 갖고 있던 부채감을 어느 정도는 덜었다 해야 할까.

정작 《판타스틱》에서 대대적으로 다루었던 김내성 100주년 특집은 사실 그저 그랬다. 일제 시대에 쓰여진 소설이니까 딴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하겠지만 배경도 썩 익숙해지긴 어려웠고 소설의 핵심이어야 할 트릭도 썩 정교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차라리 심리극이라 하면 적절치 않을까 싶고... 특히 「탐정소설가의 살인」이 그렇다.

다만 단편 「연문기담」에 나오는 여성 주인공의 당돌함은 꽤 마음에 들었다. 특히 "누구냐! 찬란한 태양을 한 아름 안고 창천을 우러러 한숨짓는 자는?"이라는 대사는 지금도 꽤 재미있게 읽히는 대사다. 일제 시대의 '신여성'이 지금까지도 구시대의 인물로 읽히지 않는 건 이 시대의 비극이겠지만, 그래도.

원래 목적이었던 「중세유럽의 장르문학」이라는 기사는 꽤 괜찮았다. 내가 원래 판타지 장르의 원형을 제공한 작품들에 호의적이라는 걸 감안해야겠지만, 자칫 지루하기 쉬운 내용을 재미있게 전달하기 위해 꽤 노력했고, 성공했다는 건 높은 평가를 주고 싶다. 같은 필자에 의한 후속 기사를 몇 편 더 보고 싶기도 하고. 이에 비해서는 좀 딱딱한 편이긴 했지만 중국귀신 이야기 관련된 기사도 꽤 흥미로웠다. 기회가 되면 북시 위키에 이 기사의 내용을 요약 수록해보고 싶지만 그건 저작권 때문에 안되겠지...

이 정도 수준만 유지된다면 앞으로도 꾸준히 사볼만하지 않나 싶다. 여름호는 봄호와는 또 완전히 다른 구성이 될 거라 하니 두고 봐야 하겠지만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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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초, 『퍼언 연대기』를 읽던 무렵에 읽었던 책이니 사실은 꽤 전에 읽은 책이다. 마땅히 감상을 정리하지 못한 까닭에 비공개 상태로 해놓고서 간간히 한 두 작품의 단평을 추가하곤 해온 정도다. 그렇다고 쓸만한 평가가 이루어진 것 같지도 않지만... 커그에서 테드 창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길래 내친김에 몇 자 덧붙여서 내놓는다.

  1. 바빌론의 탑」 (Tower of Babylon)
    바빌론의 탑 건설기. 기독교인이라면 꽤나 관심 가질만하겠으나, 나로서는 그저 그랬던 작품이다. 물론 탑에 대한 묘사 등, 작품으로서의 완성도는 제법 괜찮은 편이지만 그 이상의 공감은 느끼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2. 이해」 (Understand)
    테드 창 식의 이능력배틀물이라 보면 될까? 호쾌하고 스피디한 전개가 재미있었던 작품이다. 이수영도 그렇지만 기본적인 실력이 있는 작가는 어느 장르에서건 제 진가를 발휘하기 마련이다.

  3. 영으로 나누면」 (Division by Zero)
    수학 전공자들이라면 꽤 좋아하겠지만 수능 이후로 수학을 완전히 놨던 나로서는 그저 좌절의 대상일 뿐. '천재의 좌절'은 내가 좋아하는 소재이지만, 묘사되는 재능을 이해할 수 없어서야 아무 소용이 없다.

  4. 네 인생의 이야기」 (Story of Your Life)
    이 단편집에 실린 작품들 중에서도 압도적인 걸작이다. 내가 편집자였어도 이 작품을 표제작으로 올려놓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언어학 전공자에게 읽히면 색다른 감상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하긴 하지만, 그보다 나를 감탄케 했던 건 이 작품에서 테드 창이 주인공의 정서를 전달하는 솜씨였다. 1인칭과 3인칭을 번갈아 사용해가며 정교하게 절제된 슬픔을 끼워넣는 수완은 정말 혀를 내두르게 한다.

    '뻔한 이야기이기에' 외려 완성미가 돋보이는 단편이란 것도 놀랍다. 모든 소설이 다 그렇지만 '뻔함'이라는 건 단편의 독 아니던가. 그런 걸 외려 장점으로 삼아버린 재주란 참... 김보영의 단편 「0과 1 사이」(링크)는 이 작품을 읽은 후 쓴게 아닌가 싶을 정도. 사실 이건 일전의 『U, ROBOT』 작가 간담회 때 직접 물어보려다가 괜한 오해를 주고 받게 될까 싶어 관뒀었다.

  5. 일흔두 글자」 (Seventy-Two Letters)
    골렘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바빌론의 탑」을 읽을 대도 그랬지만 과연 이게 SF가 맞는지 고민하게 만들었던품이기도 하고.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판갤의 베로스란 작자에게만큼은 절대 읽히고 싶지 않은 작품.

  6. 인류과학의 진화」(The Evolution of Human Science)
    이게 소설이긴 한 건가? 단편보다 더 짧은 엽편이라는 장르도 있다고는 하지만 이건 대체...

  7. 지옥은 신의 부재」 (Hell Is the Absence of God)
    천사 강림으로 인한 신의 은총이 죄다 신도들에게 신체적·정신적 변화를 - 신심 깊은 장애인으로 만들어버리거나 반대로 장애를 낫게하는 등 - 이끌어낸다는 이야기. 기적에 매달리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성인 컴플렉스'라는 단어로 나를 뜨끔하게 했던 작품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4월 4일자 근황에서도 다룬 바 있으니 딱히 언급하진 않겠다)

    결말은 제목 그대로라 딱히 예상하고 말 것도 없었다. 다만 이영도가 「행복의 근원」이라는 단편에서 '행복의 근원은 불행'이라고 주장했던게 생각나서 조금 재미있었다는 정도. 궁금해할 사람들을 위해 덧붙여두자면, 발표 자체는 「지옥은 신의 부재」 쪽이 3년 정도 이르지만 번역본을 기준으로 하면 「행복의 근원」 쪽이 9개월 정도 이르다.

  8.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소고 - 다큐멘터리」 (Liking What You See: A Documentary)
    김상훈 씨는 애초에 이 단편의 제목을 '얼짱신드롬 - 다큐멘터리'로 번역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이 중단편집이 처음 번역되서 나올 무렵에야 얼짱이라는 '신조어'가 한창 유행일 때였으니까 그런 생각을 했을 법도 하지만, 지금 와서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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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에 올라온 기사 보러가기

지난해 11월 초 거울 편집장님에게서 거울 필진으로 활동해보지 않겠냐는 제의를 받았었다. 제의를 수락했던 것도 그 무렵. 그러니까 저 서평은 스카웃(?) 제의를 받은지 장장 6개월만에 내놓은 결과인 셈이다. 어느 정도는 불가피하기도 했다. (작품이 부족해서건 내가 부족해서건) 서평으로 보낼만한 다른 책을 도무지 찾지 못한데다 2월에서야 《타임 패트롤》시리즈를 다 읽었으니까.

허나 그 뒤로도 두 달을 더 놀 정도의 가치가 있었냐고 묻는다면, 물론 그건 아니다. 기왕 이렇게 보낼 글이라면 차라리 2월 초에 보내는게 좋았으리라. 어쩌면 2권을 읽고 난 시점에서 - 서평 이벤트로 소모해버리는 대신 - 2권만을 중점으로 다룬 원고를 보내는게 나았을지도 모르겠고. 

아래는 거울에 보낸 서평에서는 빼버린 단평들이다. 사실 기사가 올라오자마자 소식을 올렸어야 정상일 텐데, 이 단평들을 정리하다 보니 며칠 늦어버렸다.



타임 패트롤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폴 앤더슨 (행복한책읽기, 2008년)
상세보기

타임 패트롤Time Patrol」(1955)
시리즈의 첫 작품. 같은 시리즈에서 사용되는 세계관이나 시간 여행에 대한 설명을 해주는 글이기도 하다. 그 자체로는 큰 인상을 주지 않지만 시리즈 전체로 보면 이런 작품이 하나쯤은 꼭 필요하다. 즉, 그 자체만 놓고 보면 재미는 별로 없다. 다만 셜로키언이라면 맨스 에버라드와 그의 동료가 빅토리아 시대 영국으로 갔다가 만난 탐정을 보고 실소할 수밖에 없으리라. 정확히 이름이 나오는 건 아니라 읽을 때도 설마 했지만, 역시나 셜록 홈즈에 대한 오마쥬 격으로 등장시켰던 듯 하다. 작가가 셜록 홈즈 팬클럽 회원이었다 하니, 거의 확신범.

왕과 나Brave to be a King」(1959)
키루스 대왕 시절의 페르시아 제국을 배경으로 한 단편. 2권에 수록된 「오딘의 비애」만큼이나 타임 패러독스를 크게 활용한 작품이다. 타임 패트롤 소속의 역사학자가 고대 페르시아로 넘어갔는데 어찌어찌 하다 보니 키루스 대왕이 되어버렸더라... 하는 이야기. 사실 썩 편한 심정으로 읽었던 작품은 아니다. 이 단편의 주인공이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키루스 대왕 시대에서 벗어나 원래 아내의 품으로 돌아간 뒤에도 더이상 만나지 못하게 된 섹스 파트너를 생각하는 지저분한 사내의 비극에 공감하기란 영... 차라리 반쯤악역으로 등장하는 페르시아 귀족의 처지가 더 애처로웠다. 글쎄. 문제의 '키루스 대왕'이 그의 시간대에서는 14년간 고대 페르시아에 머물며 그 삶에 적응해야 했다는 걸 감안해야 할까?

지브롤터 폭포에서Gibraltar Falls」(1975)
시간 여행을 소재로 한 연애물. 단편의 주인공인 노무라의 심리 묘사가 제법 근사하긴 하지만... 다소 중량감 떨어지는 소품에 가깝다. 시리즈의 주인공인 맨스 에버라드가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오딘의 비애」를 위한 실험작 쯤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정도. 「사악한 게임」에 이어 15년 만에 나온 단편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당시 이 단편을 접한 팬들이 얼마나 맥빠져 했을지 짐작할만 하다. 그 점만 아니라면 꽤 빼어난 단편인데.

사악한 게임The Only Game in Town」(1960)
유럽인이 아메리카 대륙을 지배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지키기 위해 타임 패트롤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갔던 중국인들을 저지한다는 내용의 단편이다. 요컨대 역사의 개변을 막기 위해 활동하는 타임 패트롤이 역사의 개변을 직접 만들어낸다는 글이기도 하다. 거울에 보낸 서평에서도 비슷하게 언급하긴 했지만, 2,3세계권 국가의 독자들이라면 영 탐탁찮게 읽었을만한 작품. 주인공인 맨스 에버라드는 중국인들의 문명이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전달되어서 유럽인이 개입되지 않는 강대국이 생겨나기라도 하면 어떻하겠냐며 나바호 인디언 동료를 설득하는데, 글쎄다. 읽던 당시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그게 뭐 어쨌다고" 하는 심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현대 미국인 독자 입장에서야 그게 대재앙일지 몰라도 우리네야 그런 심정에 공감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더욱이 맨스 에버라드를 비롯한 타임 패트롤의 입장은 그렇게 함으로서 훗날 아메리카 지역에서 일어나게 되는 온갖 학살을 지원한다는 말도 되고. 직접적인 참여는 아니지만 방관과는 또 다른, 간접적 지지가 아닌가. 작가가 미국 중서부 지역에서 태어난 보수주의자라는 걸 다시 한 번 생각케 한 단편이다.

델렌다 에스트Delenda Est」(1955)
'2차 포에니 전쟁에서 스피키오가 한니발을 물리치지 못했다면?'이라는 의문에 대한 단편이다. 다른 작품에서는 그저 가설을 설명하는 선에서 끝내는게 일반적이지만 이 단편은 정말 그렇게 역사가 바뀌어버린 상황에서, 타임 패트롤 대원들이 우리가 아는 역사로 되돌려놓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20세기에도 켈트 문화가 주류를 이루는 세계란 흥미로웠지만, 작품의 길이에 비하면 밀도가 다소 떨어지는 편이지 싶다. 「사악한 게임」과 비교한다면 정치적으로는 덜 불공정할지언정 재미 자체는 영 그렇더라는 이야기다.

바다의 별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폴 앤더슨 (행복한책읽기, 2008년)
상세보기

오딘의 비애The Sorrow of Odin the Goth」(1983)
북유럽 신화의 오딘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분명 자신이 쓰려 하는 장르와 활용하려 하는 소재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선행될 때만이 나올 수 있는 걸작이다. 뜻밖에도 변변찮은 상 하나 받지 못했다는게 안타까울 따름. 《타임 패트롤》 시리즈 안에서 본다면 「왕과 나」와 여러 가지 의미에서 거의 대척점에 서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중편에 대해서는 예전에 거울에서 이야기한 바 있으니 이하 생략. 그 글을 쓸 때와는 현재 내 사정이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작품에 대한 평가만큼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링크)

바다의 별Star of the Sea」(1991)
표제작이긴 하나, 「오딘의 비애」를 먼저 본 사람들 입장에서는 좀 성에 안찰 수밖에 없겠다. 전체적으로 보면 「오딘의 비애」의 여성용 버전이라는 느낌이 강한지라... 

상아와 원숭이와 공작새: 타임패트롤 시리즈 3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폴 앤더슨 (행복한책읽기,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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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아와 원숭이와 공작새Ivory, and Apes, and Peacocks」(1985)
솔로몬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지만, 정작 솔로몬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델렌다 에스트」 시절만 해도 어떻게든 역사적 인물(즉 스피키오 아프리카누스)을 등장시키더니 이 때쯤 되면 역사적 위인을 등장시켜야 한다는 압박감도 떨쳐낸게 아닐지. 물론 솔로몬 시대라는게 서구에서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민감한 소재라는 것도 감안해야겠고. 당대의 예루살렘과 티레 시와의 관계를 설명해주는 부분은 재미있게 읽었고, 맨스 에버라드가 만난 소년도 눈에 듸는 캐릭터였다만 사실 시간여행물로서 괜찮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굳이 점수를 주자면 B+ 정도의 느낌?

몸값의 해The Year of the Ransom」(1988)
스페인인 피사로가 잉카 왕을 잡고 인질극을 벌일 때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 다른 단편들에서도 간간히 역사 개변을 시도하며 악역으로 출연했던 '고양주의자'들이 재출연하지만 스페인인 기사가 눈부신(?) 활약을 펼치는 통에 이 단편에서의 비중은 낮다. 잘쳐줘봐야 중간보스급이고 실상은 '쟈코' 역일 뿐. 만일 타임 패트롤 시리즈가 영화화된다면 「몸값의 해」가 가장 먼저 손꼽힐 테고, 포스터에는 맨스 에버라드와 이 기사의 사진이 가장 크게 나오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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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문학동네,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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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주의에 대하여

도갤에서 『파우스트』 관련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겁을 주려 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었다. 사전이 없으면 읽을 수 없다, 원서로 읽지 않으면 제맛을 느낄 수 없다 운운. 지금 와 생각해보면 그것도 일종의 떡밥이 아닌가 싶다. 그들의 의견에도 물론 일리는 있다. 가령 트로이의 헬레네가 누군지도 몰라서야 파우스트나 황제 등이 왜 그리 그 고대 미녀에 집착하는 것에 공감하기란 불가능할테니까. 이해를 넘어 공감을 위해서는 적어도 『일리아스』에 대한 교양을 필요로 할 터이다.

허나 그 역의 상황을 가정해보자. 『일리아스』를 처음 읽는 독자가 그 전에 『파우스트』를 읽었던 사람이라면? 물론 『파우스트』를 읽을 때는 좀 어려워했을지 모르겠지만 그 감상을 토대로 『일리아스』는 좀 남다르게 읽을지 모르는 일 아닌가. 이 경우 '배경 지식'은 『일리아스』가 아닌 『파우스트』다. 

요컨대 배경 지식'과 '독서 대상'의 관계는 그렇게 명확하게 구분지어 말할 것이 못된다. 그들은 늘 상호적이다. 아르헨티나의 작가 에세키엘 마르티네스 에스트라다의 말은 그래서 시사적이다.

"책을 읽으면서 그전에 다른 책을 읽었을 때를 회상하고 서로 비교하면서 그때의 감정을 불러내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독서야말로 가장 세련된 형태의 간통이다."

물론 일정한 '테크트리'를 밟는게 여러모로 편할 때가 많다는 것을 인정한다. 허나 그것은 대개 공부 차원의 일이다. 문학 감상에서까지 그런 잣대를 들이댈 필요가 있을까. 독서가 기술이 아닌 하나의 취미이며 오락일 수 있다는 걸 인정한다면 작품에 대한 경험들도 독자들마다 다르다는 점 또한 인정해야 한다. 왜. 그렇잖으면 『변신』을 읽기 전에 곤충도감이라도 읽어야 한다고 할 셈인가.

사실 『파우스트』가 읽기에 그렇게 빡빡한 작품도 아니다. 그리스신화에 대한 교양이 필요하다지만 고유명사들이나 구분할 줄 안다면 족하고 모른다 해도 주석을 통해 짚고 넘어가거나 정 모르겠다면 그냥 넘어가버려도 무방하다. 설령 독자가 정말 일자 무식이라 해도 괴테의 화려한 문장이라도 건질 수 있지 않겠나. 고전이란 원래 천의 얼굴을 가진 존재가 아닌가 말이다.

P.S.

가만 생각해보면 언제부터인가 도갤에서도 레벨이니 순서니 하는 걸 따지는 사람들이 제법 늘어나지 않았나 싶다. 그들은 온라인 게이머들을 생각나게 한다. 스킬 테크트리를 외우고, 커뮤니티에 어떤 스킬이 가장 좋은 스킬인지 묻는... 읽은 책이나 사들인 책의 숫자는 경험치라도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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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언 연대기 세트 (전3권)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앤 맥카프리 (북스피어,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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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주 전에 읽고서 뒤늦게 쓰는 감상이라는 걸 감안해주시기 바란다. 이 글에는 2월 초에 썼던 문장도 있다.

0.

사실 읽기 전부터도 내가 재미있게 읽을만한 소설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짐작했었다. 사실 드래곤에는 별 흥미를 못느끼게 된지도 꽤 오래 되었으니까. 드래곤 뿐만 아니라 에픽 판타지 장르에 대한 관심 자체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샀던 건 순전히 북스피어에서 나온 책이었기 때문이다. 마침 반값 이벤트가 열렸다고는 하지만 좋아하는 출판사를 돕자는 핑계가 아니었다면 내가 이 작품을 집을 일은 결코 없었을 게다. 반값 이벤트가 아니라 공짜 이벤트라 해도 마찬가지다.

결국 다 읽기는 읽었지만, 작품 때문에 그랬던 건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한꺼번에 세 권을 사버렸기 때문이라고 봐야겠지. (아마 1권부터 차근차근 보고자 했다면 2,3권을 사볼 일은 없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읽기 전에 생각했던 것보다는 근사한 오락물이라는데는 동의하지만 그냥 넘기기 민망한 요소들이 제법 눈에 많이 걸리니.

1.

작품에서 용기사들은 해당 세계관에서 자연 재해급 재앙인 사포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집단으로 묘사된다. 실제로 과거에는 사포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해줌으로서 존경과 신망을 얻었었고. 다만 1부가 시작하는 시점에서는 사포가 습격해온지도 근 400년이 지난 상황인지라 용기사의 권위고 뭐고 다 떨어진 상황이다.

이 지경이 되서도 용기사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영주들이 자신들을 상전으로 모셔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결국 1부 중반에 이르면 용기사들은 왕년의 권위를 되찾게 되는데, 역설적이게도 그것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건 왕년의 적이었던 사포의 귀환이다. 시대가 영웅을 다시 부른다고 해야 할까?

문제는 용기사라는 집단이 작중에서 묘사되는 것과는 달리 그렇게 영웅적이며 존경할 만한 인물들로 보이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은 대단히 봉건적이며 권위적이고 시대착오적이다. 사포가 없기 때문에 영주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노동을 거부하며 영주들에게 공물과 공녀들(여왕 드래곤의 파트너가 될 후보들)을 요구한다. 불만을 품는 영주들에게는 왕년에 용기사들이 수행했던 업적이나 용기사와 일반인들 사이의 '신분차'를 강조하기도 한다. 그나마 1부의 주인공 격인 플라르는 나은 편이고 2,3부로 갈수록 다른 용기사 몇몇도 권위주의적 모습을 벗으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긴 하지만 그래봤자다. 흡사 한국전쟁 참전자 출신 반공주의자들을 보는 기분이라 해야 할까. '구시대인'에 이르면 뭐 별 달리 할 말도 없을 지경이고. (물론 이들은 명백히 부정적으로 묘사되기야 한다)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주인공들을 매력적인 것처럼 묘사하니 스토리인들 궁금할리가.

시대착오적이라는 것에 더 연관짓자면, 혈통주의의 흔적마저 느껴지기도 한다. 용기사의 계급은 오로지 그 용기사의 파트너 드래곤에 따라 결정된다. 용기사 본인의 역량이 어떠하건 '황금 드래곤>청동 드래곤>갈색 드래곤>녹색 드래곤'의 서열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는 점이다. 헌데 이 결정은 오로지 드래곤의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 물론 거기에는 어떠한 설명도 없다. 용기사의 운명은 그저 타고날 뿐이다.

2.

사실 3부까지 다 읽은 후 권말의 서평에서 이 작품을 '페미니즘적 소설'이라고 평하는 걸 보고 크게 놀랐었다. 읽는 내내 그런 식으로는 한번도 생각해보질 못했고, 되레 굉장히 마초적인 소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시리즈의 첫 작품인 중편 「용의 간택」이 1967년에 나온 작품이라는 걸 감안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현대 독자들 역시 같은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수준은 분명 아니다. 소설에서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지위에 오르려 한다는 - 이미 오른데다 그게 당연시되는 것도 아니고 - 정도로 감탄할 수 있는 시대야 이미 지나지 않았나.

더군다나 여성 캐릭터를 묘사하는 방식에서도 못마땅한 부분들이 많이 비쳐지기도 한다. 예컨대 레사. 첫 중편인 「용의 간택」에서만 해도 상당히 정교한 성격을 보여주는 이 캐릭터는 남자주인공인 플라르를 만나면서부터 급격히 단순화된다. 여전히 현명하긴 하지만 성질은 예전같지 않아지고 그렇게 매력적인 면모도 보여주지 못한다. 말괄량이가 요조숙녀로 변하는 수준의 변화가 오는 건 물론 아니지만 상당히 허전해지는 건 사실이다. 그 전까지는 플라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듯 굴다가 성관계를 맞은 뒤로는 갑자기 태도가 돌변하는 것도 그렇고. 말이 관계지 따지고 본다면 세련된 형태의 강간에 지나지 않을 텐데 그런 장면을 두고도 여성주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3.

그러고보면 이 작품이 무려 SF장르라고 이야기되는 모양이다. 번역도 김상훈 씨가 맡았고. 헌데 다 읽고 난 지금도 나는 이 작품이 왜 SF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적어도 국내에 소개된 3부작만 본다면 『퍼언 연대기』는 SF라기보다는 판타지에 가깝다. 이게 SF라면 《영웅전설》 시리즈(특히 가가브 트릴로지 이전)도 SF RPG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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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발론 연대기 7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장 마르칼 (북스피어,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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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발론 연대기』 7권을 거의 다 읽어간다. 여태 봤던 권 중에서는 가장 재미가 없다. 이는 순전히 7권에서 중심에 서 있어야 할 기사, 갈라하드의 몰개성 때문이다. 갈라하드에게서는 성배 탐색의 완료자라는 것 외의 어떠한 개성도 찾기 어렵다. 그 이전에 최고의 기사였던 사람들처럼 화려한 무훈을 펼치는 것도 아니고, 원탁의 다른 기사들과 깊은 관계를 맺는 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갑자기 튀어나와서는 최고의 영광을 채가는 등... (그는 처음 등장하자마자 어떠한 증명도 없이 곧바로 최고의 기사임을 인정받는다!) 아서왕 전설이 기독교도의 입맛에 맞게 각색되면서 억지로 삽입된 기색이 너무나 역력한 인물이랄까.

그의 등장을 기점으로 그 이전까지는 온갖 개성을 보이던 인물들도 죄다 단순화되어버린다. 가웨인은 태양신의 흔적을 잃고, 퍼시발은 원시인에서 기독교도가 되며 란슬롯도 최고의 기사라는 명예와 귀네비어 왕비에 대한 사랑을 잃는다. 남은 것은 그저 성배 탐색을 위한 신실한 기독교도 기사들 뿐. 이전 권에 비해 주석이 많이 줄어든 것도 그 때문일지 모르겠다. 적어도 성배 탐색에 관해서는 신화학자들보다 신학자들이 더 할 말이 많을 테니까.

뭐 그래서... 이번 권은 아서왕 전설이 아니라 그냥 흔해빠진 중세 모험담을 읽는 기분이다. 대강 읽고 모드레드가 분탕질 치는 8권으로 넘어가야겠다. 적어도 8권에서는 그놈의 지겨운 성배 탐색이 나오질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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