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문학웹진 거울 비평선, 『B평』이 출간됩니다. 웹진 거울에서 그간 단편선은 여러 권 출간했습니다만 비평선은 이게 처음입니다. 아니 비평선이 동인지로 나온 것 자체가 이 바닥에서는 처음이지 싶군요. 한국 SF·판타지 팬덤도 이제는 1910년대 경성 문단의 수준을 겨우 따라잡았다는 이야기일까요. 그나마도 거울 비평선 2호가 출간될 때의 이야기겠습니다만. 멀고도 먼 이야기죠.

일단 비평선이다 보니까 저 역시 글을 두어편 실었습니다. 최제훈의 연작소설집 『퀴르발 남작의 성』에 대한 서평이 한 편, 장르 작가와 문학상의 상관 관계에 대한 글이 또 한 편입니다. 여기에 더해 작가 인터뷰도 한 편 정도는 기고했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드는데, 물론 당시 상황에선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입니다.

여하간 환상문학웹진 거울의 첫 비평선은 11월 말 출간됩니다. 그냥 이 사람이 요즘은 이런 활동을 하는구나- 하고 알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도서 > 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환상문학웹진 거울 비평선』 출간 예고  (0) 2011/10/04
《미래경》(일본 SF 특집)  (2) 2010/10/06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과제)  (0) 2010/06/01
『타워』(발표)  (1) 2010/05/25
Posted by 최진석

트랙백 주소 : http://abraxas.pe.kr/trackback/334 관련글 쓰기

제가 올해 읽었던 책들을 정리한 글입니다. 올해라곤 해도 아직 4일이 남은만큼 여기에 몇 권이 더 추가될지는 모르죠. 그렇지만 따로 코멘트를 달만한 책이 추가될것 같진 않기에, 미리 쓰고자 합니다. 목록만 제시했던 전년도와는 다르게 이번년에는 분야별로 주목할만한 책에 대한 간단한 코멘트를 덧붙였습니다.

제목이 굵게 표시된 책은 이전에 제 블로그나 환상문학웹진 거울에서 자세한 서평을 썼던 책들입니다. 그런 책들은 제목을 클릭하시면 해당 서평에 대한 링크가 뜹니다.

이중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을 꼽아보라면 다음과 같습니다. 작년에 비해서는 좀 밋밋한 선정인 듯 싶어 아쉽군요.

이글턴『신을 옹호하다』강주헌, 모멘토
루카치『소설의 이론』김경식, 문예출판사
박민규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위즈덤하우스
보네거트『마더 나이트』김한영, 문학동네
보네거트『타임퀘이크』박웅희, 아이필드


총류
서평에서 잡다하게 쓰기는 했지만, 일본 근현대사에 관심이 없는 독자라면 굳이 찾아 읽을 필요 없는 책입니다.

종교
세 권 다 권할만 합니다. 다만 한국 교회의 복음주의적 경향에 깊이 공감하시는 분이라면 꽤나 난감해하실 겁니다.
-
일단 『한국 근현대사와 기독교』는 구한말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개신교 교회가 한국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 다룬 책입니다. 구한말 '근대화'의 상징으로서의 교회, 북한과 교회(주로 감리교와 장로교)의 관계, 독재정권 시기 교회의 관점, 대형교회와 보수주의 세력간의 결탁 문제 등... 단점도 있습니다. 제목과는 달리 개신교 특정 종파에 치중된 느낌이 강한데다 교회의 긍정적 역할을 발굴하려다 보니 부정적 역할에 대한 서술이 다분히 축소된 경향이 있죠. 하지만 그런 영역을 감수하고도 볼 가치는 있습니다. 어쨌거나 종교에 대해 세속적 접근을 시도하면서도 이 정도의 균형을 갖춘 책은 분명 드문 편이니까요.
-
사회주의적 문학 비평가 테리 이글턴이 현대의 자본주의적·사회주의적 무신론을 비판한 책입니다. 무신론이 어떤 논리적 허점을 가지고 있으며 종교의 본래 가치를 어떤 식으로 왜곡하는지 비판한 책이죠. 그와 동시에 본래의 기독교적 신이 어떤 미덕을 가지고 있는지 그만의 시선으로 포착해냅니다. 그가 복원해내는 '소외된 자로서의' 하느님은 비신자의 가슴마저 두근거리게 할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제가 이 책을 읽을 때는 아직 비신자였지요. 다만 그 아름다움은 즐거움과 동시에 슬픔 또한 가져옵니다. 어쨌거나 현실의 교회 공동체에서 이글턴이 말하는 하느님을 찾기란 어려울 게 뻔하기 때문이죠.
-
『성서가 말하는 동성애』는 일종의 (자유주의적) 성서 비평학에 의거한 보수주의 신학 비평서입니다. 가톨릭, 개신교 할 것 없이 기독교 신자들은 동성애에 대한 혐오를 보이는 경우가 많고, 그 근거는 많은 경우 성서에 기반합니다. 그런데 성서에서 동성애를 정말 그런 식으로 취급했냐 하는 거죠. 흔히 교회에서 동성애 혐오의 근거가 되는 구절들을 집어다가 그것이 왜곡되게 이해되고 있음을 증명하고자 하는 책입니다.

문학(이론)
  • 망구엘『독서일기』강수정, 생각의나무
  • 루카치『소설의 이론』김경식, 문예출판사
  • 복거일『국제어 시대의 민족어』문학과지성사
  • 복거일『수성의 옹호』문학과지성사
  • 황호덕『프랑켄 마르크스』민음사
  • SF판타지도서관《미래경》(2) SF판타지도서관
딱히 권할만한 책은 게오르규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 뿐입니다. 『소설의 이론』은 소위 '전기 루카치'를 대변하는 이론서로 평가되는 책으로, 루카치가 근대 문학의 기원과 그 성격에 대해 규명하고자 한 책입니다. 근대 문학을 다루고자 하면서도 정작 이야기는 그리스 서사시에서부터 시작하는데다 독일 비평가들 특유의 비유적 표현으로 가득한 책이기 때문에 한두번 읽어서야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긴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근대 문학의 '리얼리즘'과 '장편 소설'의 속성에 대해서는 잘 규명한, 고전적 이론서라 할 수 있죠.
-
이외에 복거일의 책들은 그가 여러 곳에 기고했던 쪽글들을 모은 책인데, 문학에 관련된 글들만 찾아 읽을 것을 권합니다. 특히 『수성의 옹호』에 실린 「전체주의 사회에 예술이 존재할 수 있는가?」와 같은 글이 권할만 합니다. 알베르토 망구엘의 『독서일기』는 전혀 읽을 가치가 없습니다. 제목과는 달리 망구엘이 여러 나라를 다니며 적은 여행 에세이에 가깝습니다. 책에 대해서라면 차라리 과거에 나왔던 『독서의 역사』가 더 낫습니다.

문학(한국)
  • 김보영『멀리 가는 이야기』행복한책읽기
  • 김보영『진화신화』행복한책읽기
  • 김이환『집으로 돌아가는 길』이타카
  • 박민규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위즈덤하우스
  • 배명훈『안녕, 인공존재』북하우스
  • 앤솔러지『백만 광년의 고독』오멜라스
  • 앤솔러지『소설 이천년대』생각의나무
  • 장정일『구월의 이틀』랜덤하우스
  • 정보라『문이 열렸다』새파란상상
  • 정이현『너는 모른다』문학동네
  • 최제훈『퀴르발 남작의 성』문학과지성사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퀴르발 남작의 성』이 권할만 합니다. 
-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기왕에 장난끼 넘치는 언어유희를 장기로 삼아왔던 박민규가 정색하고서 진지한 이야기를 시도한 장편 소설입니다. 간단히 요약하면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의 이야기-라고 하겠고요. 단순히 외모 지상주의의 폐해를 지적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사소한' 조롱들이 모여 한 개인에게 구조적 폭력으로 변화되는 과정과 그 폭력이 극복하는 방식을 섬세하게 다룬 소설이지요. 개인적으로는 올해의 베스트로 뽑습니다.
-
『퀴르발 남작의 성』은 19세기 영국 고딕 문학의 이미지들을 차용하여 쓴 8편의 단편을 모은 책입니다. 『드라큘라』, 『셜록 홈즈』,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프랑켄슈타인』 등을 유머러스하게 패러디한 소설들이죠. 특히 연작을 염두에 쓴 책은 아닌 듯 한데도 통일된 구성을 보인다는 점 또한 재밌습니다. 특히 첫 단편과 마지막 단편을 보면 그게 드러나는데... 아울러 이 책이 스스로를 작가와 독자, 세계 사이에 위치시키는 방식 또한 흥미롭죠.
-
이외에는 김보영의 『진화신화』에 실린 「0과 1 사이」라는 단편도 권할만 합니다. 커트 보네거트의 『제5도살장』이나 테드 창의 「네 인생의 이야기」에도 견줄 수 있는 걸작 SF 단편이라고 생각하지요. 이 단편은 웹진 크로스로드에서 발표된 단편들을 묶은 『죽은 자들에게 고하라』라는 단편집에도 실려 있는데, 불행히도 이 책에는 김보영의 단편 외에 볼만한 작품이 없습니다.

『구월의 이틀』과 『너는 모른다』는 권하지 않습니다. 전자는 보수주의자들을 풍자하고자 한 소설인데 그 정도가 과해서 독자들이 작가의 진의를 못알아볼 지경이고, 후자를 보느니 차라리 아침드라마를 보는게 더 낫습니다.

문학(중국)
  • 루쉰『루쉰 소설 전집』김시준, 을유문화사
딱히 권하지는 않습니다.

문학(영미)
  • (미상)『가윈 경과 녹색 기사』이동일, 문학과지성사
  • 딕  『유빅』한기찬, 문학수첩
  • 르 귄『날고양이들』김정아, 봄나무
  • 르 귄《서부 해안 연대기》이수현, 시공사
    • 1권『기프트』
  • 르 귄『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미줄』최한림, 미래사
  • 르 귄《어스시》최준영/이지연, 황금가지
    • 5권『어스시의 이야기들』
    • 6권『또 다른 바람』
  • 르 귄《헤인 연대기》
    • 4권『어둠의 왼손』서정록, 시공사
  • 보네거트『갈라파고스』박웅희, 아이필드
  • 보네거트『고양이 요람』박웅희, 아이필드
  • 보네거트『마더 나이트』김한영, 문학동네
  • 보네거트『타임퀘이크』박웅희, 아이필드
  • 브래드버리『화성 연대기』김영선, 샘터
  • 브래드버리『화씨 451』박상준, 샘터
  • 스칼지『노인의 전쟁』, 이수현, 샘터
  • 앤솔러지『다른 늑대도 있다』정소연, 창비
  • 젤라즈니『드림 마스터』김상훈, 행복한책읽기
  • 젤라즈니《앰버 연대기》최용준, 예문
    • 1권『앰버의 아홉 왕자』
    • 2권『아발론의 총』
  • 젤라즈니『집행인의 귀향』김상훈, 북스피어
  • 파워스『낯선 조류』김민혜, 샘터
『마더 나이트』를 권할만 합니다. 평생 2차 세계 대전이라는 소재에 천착해온 커트 보네거트가 만년에 남긴 걸작이라 할 수 있죠. 보네거트 본인도 참전자였습니다. 포로병으로서 드레스덴 폭격을 목격했었죠. 여하간 이 책은 종전 이후 수십년이 지난 시점에서 전범 재판을 받게 된 나치 전범(주인공)을 중심으로 전쟁 당사자들의 심리 상황을 보여줍니다. 아돌프 아이히만을 연상시키는 주인공의 이력에서도 짐작되듯 악인들의 평범성과 이중성에 대해 다루죠. 제게 유독 기억에 남는 대목은 이겁니다. 한 흑인이, 자신은 2차 대전 당시에 유색인종으로서 일본을 지지했다면서도 중국인은 혐오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주인공이 여기에 대해 되물으니까 그 흑인이 대답하죠.

"누가 중국놈들 따위를 유색인종이랍디까?"

따로 글을 쓰진 않겠지만 같은 작가의 『타임퀘이크』도 아주 좋습니다. 『제5도살장』과 더불어, 작가가 시간여행이라는 소재를 탁월하게 활용한 예라고 할 수 있죠.

-
이외에 스릴러 소설을 찾으시는 분이라면 『유빅』과 『집행인의 귀향』도 괜찮습니다. 둘다 반전이 일품인 소설이죠. 『낯선 조류』도 괜찮은 해적물이긴 합니다. 특히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시리즈에 준 영향이 지대하기 때문에, 영화의 팬들도 읽어볼만 하죠. 공식적으로는 4편의 원작이 이 소설이라고 하는데, 이미 1~3편에 다 써먹은 소설을 뭐 새삼스레 원작으로 삼겠다는건지 이해가 안되더군요. 다만 극중 해적들의 어조가 영 해적답잖게 번역되었고, 작가가 섬세하게 집어넣은 카리브해의 역사·종교·정치에 대한 주석을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기프트』는 같은 작가의 『어스시』시리즈 1~3권을 생각하면 영 함량 미달의 소설이고... 『어둠의 왼손』이나 『화씨 451』, 『화성 연대기』 또한 SF 팬 사이에서는 고전으로 꼽히는 책이지만 지금에 와서 읽기에는 다소 낡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젤라즈니의 중단편집 『드림 마스터』에는 작가가 사랑해마지 않는 '정체 불명의 다크 히어로'에 대한 이야기가 지겹도록 나옵니다. 어떤 의미에선 『앰버 연대기』도 이 연장선에 서 있죠.

문학(프랑스)
  • 뒤마『몬테크리스토 백작』오증자, 민음사
권할만 합니다. 쓸데없으리만큼 긴 장광설들이 많이 보이기는 하지만, 그런 부분들을 설렁설렁 건너뛰어가며 읽으면 그야말로 페이지 터너Page turner라고 불릴만한 흡입력을 보이죠. 후대의 복수극들은 대부분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아류작이라는 소릴 듣는데, 그럴만한 매력을 지닌 소설입니다.

문학(이탈리아)
  • 칼비노『반쪼가리 자작』이현경, 민음사 (재독)
  • 칼비노『존재하지 않는 기사』이현경, 민음사 (재독)
칼비노의 소설에는 화끈한 박진감이나 흡입력은 없지만 두고 두고 곱씹을만한 매력이 있죠. 『반쪼가리 자작』은 몸 자체가 두 개로 나뉘어서 한쪽에는 선한 인격이, 다른 한쪽에는 악한 인격이 담긴 자작의 이야기입니다. 마냥 선이 좋게만, 악이 나쁘게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선악에 대한 작가의 관점이 담긴 소설이라고 할 수 있죠. 『존재하지 않는 기사』는 몸이 없고 갑옷만으로 존재하는 '인간같지 않은 이상적인 기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가만 보면 두 소설 모두 '몸'이 '인간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요한 소재가 되는 셈이죠. 이 두 소설이 포함된 《우리 선조들》삼부작은 오래 전에 절판되어서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는데, 올해에 위의 두 권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재간됨으로서 모두 편하게 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문학(러시아)
  • 불가코프『거장과 마르가리타』정보라, 민음사 (재독)
  • 앤솔러지『무도회가 끝난 뒤』박현섭/박종소, 창비
  • 체호프 『벚나무 동산』강명수, 지만지고전천줄
  • 크릴로프『끄르일로프 우화집』정막래, 문학과지성사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권할만 합니다. 러시아 매직 리얼리즘 문학의 최고 걸작이라고도 할 수 있죠. 국내에서의 인지도는 낮지만 해외에서는 이미 컬트적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고요. 아마존 러시아문학 코너에서는 이 소설이 『전쟁과 평화』, 『죄와 벌』과 함께 판매순위 최고위를 다툴 정도입니다. 여하간 이 소설은 소비에트 정권 시절의 모스크바에 현현한 악마와 탄압받는 예술가, 고뇌하는 본디오 빌라도 등을 통해 인간에 대한 심도 있는 접근을 합니다. 전체주의 정권에 대한 풍자, 불변하는 예술의 가치, 인간의 구원 가능성과 그 주체 등에 대한 주제들이 이 한 권의 책에 담겨 있죠. 다만 불가코프가 이 소설을 쓰기 위해 방대한 자료들을 참고했기 때문에(중세 유럽 민담, 당대 모스크바와 고대 예루살렘의 지명·인명 등) 소설만 봐선 그 참맛을 알기 어렵습니다. 시중에서 나온 책 중에선 문학과지성사판의 주석과 민음사판의 역자 해설이 이 부분을 가장 상세하게 해결해주는 편인데, 사실 그것만으론 많이 부족하죠.

문학(터키)
  • 케말『독사를 죽였어야 했는데』오은경, 문학과지성사
그냥저냥 읽을만합니다. 중편 소설 두 작품을 모은 책입니다. 과거의 전통이 현재의 인간을 어떻게 얽어매는지 다룬 소설들이죠. 명예살인을 다룬 표제작, 「독사를 죽였어야 했는데」가 인상적입니다. 유사한 소재를 다룬 메리메의 「마테오 팔콘느」완 정반대로 나가죠. 두 소설에서 다루는 사건 자체는 매우 유사합니다. 하지만 그 사건을 다루는 방식이나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그와 정 반대죠.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도서 > 통계'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0년에 읽은 책  (8) 2010/12/27
2009년에 읽은 책  (0) 2009/12/08
끝까지 다 못 본 소설들...  (7) 2009/01/22
2008년에 읽은 책  (0) 2008/12/24
Posted by 최진석
TAG 2010년, SF&판타지도서관, 《미래경》, 《서부 해안 연대기》, 《앰버 연대기》, 《어스시》, 《헤인 연대기》, 『갈라파고스』, 『거장과 마르가리타』, 『고양이 요람』, 『구월의 이틀』,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 『기프트』, 『끄르일로프 우화집』, 『날고양이들』, 『낯선 조류』, 『너는 모른다』, 『노인의 전쟁』, 『다른 늑대도 있다』, 『독사를 죽였어야 했는데』, 『독서일기』, 『드림 마스터』, 『또 다른 바람』, 『루쉰 소설 전집』, 『마더 나이트』, 『멀리 가는 이야기』, 『몬테크리스토 백작』, 『무도회가 끝난 뒤』, 『문이 열렸다』, 『반쪼가리 자작』, 『백만 광년의 고독』, 『벚나무 동산』, 『성서가 말하는 동성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미줄』, 『소설 이천년대』, 『소설의 이론』, 『수성의 옹호』, 『신을 옹호하다』, 『아발론의 총』, 『안녕 인공존재』, 『앰버의 아홉 왕자』, 『어둠의 왼손』, 『어스시의 이야기들』, 『유빅』,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지의 정원』, 『진화신화』,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집행인의 귀향』, 『퀴르발 남작의 성』, 『타임퀘이크』, 『프랑켄 마르크스』, 『한국 근현대사와 기독교』, 『화성 연대기』, 『화씨 451』, 가윈 경과 녹색 기사』, 강명수, 강수정, 강주헌, 김강일, 김경식, 김민혜, 김보영, 김상훈, 김영선, 김이환, 김정아, 김한영, 다치바나 다카시, 뒤마, , 랜덤하우스, 루쉰, 루카치, 류대영, 르귄, 망구엘, 모멘토, 문예출판사, 문학과지성사, 문학동네, 문학수첩, 미래사, 민음사, 박민규, 박상준, 박연정, 박웅희, 박종소, 박현섭, 배명훈, 보네거트, 복거일, 봄나무, 북스피어, 북하우스, 불가코프, 브래드버리, 새파란상상, 샘터, 생각의나무, 서정록, 스칼지, 시공사, 아이필드, 앤솔러지, 예문, 오멜라스, 오은경, 오증자, 위즈덤하우스, 을유문화사, 이글턴, 이동일, 이수현, 이지연, 이타카, 이현경, 장정일, 정막래, 정보라, 정소연, 정이현, 젤라즈니, 지만지고전천줄, 창비, 체호프, 최용준, 최제훈, 최준영, 최한림, 칼비노, 케말, 크릴로프, 파워스, 푸른역사, 한기찬, 해울, 행복한책읽기, 헬미니악, 황금가지, 황호덕

트랙백 주소 : http://abraxas.pe.kr/trackback/305 관련글 쓰기

신을 옹호하다
카테고리 인문 > 인문학일반 > 인문교양
지은이 테리 이글턴 (모멘토, 2010년)
상세보기

테리 이글턴의 『신을 옹호하다』는 일종의 무신론 비판서입니다. 리처드 도킨스나 크리스토퍼 히친스로 대표되는 무신론 만이 아니라 사회주의 계열의 무신론 또한 함께 비판하면서 종교의 본래 가치를 옹호하고자 한 책이죠. 이 책을 통해 이글턴은 현대의 무신론들이 어떤 논리적 허점을 갖고 있으며 종교의 가치를 어떻게 왜곡시키는지 분석하고자 합니다. 다만 그 방식은 꽤나 유쾌해요. 이 사람이  무신론자들의 논리적 허점이나 이중성 등을 풍자하고 비판하는 방식은 위트와 유머가 넘쳐 흐릅니다. 어지간한 블로거들하고는 비교가 안되죠.

물론 이글턴 또한 현대의 종교 그 자체를 옹호하진 않습니다. 무신론자들의 성과를 완전히 무시하지도 않고요. 그렇지만 무신론자들의 비판을 일정 부분 수용하면서도 '본래 종교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자기 소신을 이야기하고자 하는게 이 사람의 목적입니다. 

재미있는건 이 사람의 성향입니다. 테리 이글턴의 본업이 문학 비평가이긴 하지만 그건 별로 중요한게 아니고, 이 사람이 사회주의자라는게 주목할 대목이죠. 심지어 스스로는 '나는 문학 비평가가 아니라 사회주의 비평가'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자본주의적·사회주의적 무신론을 모두 비판하면서 종교적 가치가 현대 사회와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 이야기하는 거죠.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어쨌거나 테리 이글턴의 논리 자체는 매우 탁월합니다. 그가 복원해내는 '소외된 자로서의' 하느님은 비신자조차도 가슴을 두근거리게 할 정도로 아름답죠. 그러나 이글턴이 풀어내는 신의 의미들은 결국 이상적인 가치일 뿐, 현실의 - 특히 한국의 - 교회 공동체에서 그러한 하느님을 찾기란 매우 어렵기 때문이죠. 저만 해도 독실한 개신교 신자인 친구에게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그건 이단의 논리다'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고요. 그래서 이 책을 읽다 보면 즐거우면서도 슬픕니다. 정말 역설적이죠.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도서 > 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을 옹호하다』  (0) 2010/12/27
사서를 부언해로 완비한게 자랑  (6) 2009/04/09
『공자와 그의 제자들』  (0) 2008/06/30
『중국철학사 Ⅰ : 선진(先秦)』  (0) 2007/11/19
Posted by 최진석

트랙백 주소 : http://abraxas.pe.kr/trackback/325 관련글 쓰기

지의 정원
카테고리 인문 > 인문학일반 > 지식과학문
지은이 다치바나 다카시 (예문, 2010년)
상세보기


괴물 같은 독서량과 도서 전용 건물인 고양이 빌딩의 주인으로 유명한 저널리스트 다치바나 다카시의 책입니다. 『도쿄생은 바보가 되었는가』로 유명세를 얻었고, 이외에는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 『뇌를 단련하다』 등이 한국에서도 제법 인기를 얻었죠. 2010년에 와서까지 책이 꾸준히 나오는 걸 보면 나름 인기 저자라 하겠는데... 최근에 와서는 다소 인기가 떨어진 감이 있습니다. 저는 이 책 『知의 정원』이 그 인기 감소의 이유를 설명해줄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책을 이전에 몇 권 보셨던 분이라면 굳이 이 책을 찾아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 책에서 다치바나 다카시는 과거에 다른 책에서도 보여왔던 패턴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즉 문학에 대한 폄훼와 논픽션의 가치 옹호, 저자의 광범위한 독서를 통한 잡다한 지식의 나열이죠. 이 책에서는 거기에 공동 대담자인 사토 마사루의 추임새가 들어갔다는 정도가 다를 뿐입니다. 

이러한 형태의 저술이 현대의, 특히 한국의 독자들에게 얼마나 의미를 가질지는 모르겠습니다. 일단 다치바나 다카시의 문학관 자체가 썩 동의하기 어려운 측면이 많죠. 다치바나 다카시의 문학관이란 이런 겁니다. '픽션임을 전제하고서 보는 문학보다는 오히려 현실의 이야기를 담은 논픽션들이 더 '재미'있으며 남을게 많다. 굳이 문학을 읽는다면 해당 사회의 교양이면서 그 사회의 정신 문화를 설명해줄 수 있는 고전들을 읽어야 한다.' 즉 다분히 실용적인 문학관을 가진 사람인 겁니다.

그러나 다치바나 다카시의 문학관은 다분히 피상적이라고 할 수 있죠. 문학을 지나치게 엔터테인먼트 위주에 가깝게 보는 면이 있고, 픽션과 논픽션의 전달 방식 차이도 무시해버리죠. 지나치게 실용주의적이기도 하고요. 물론 지금 존재하는 현실 그 자체를 이해하는데는 다치바나 다카시의 말대로 논픽션이 더 유리할 겁니다. 논픽션에서는 확실한 데이터로 현실을 이야기하고자 하니까요. 그렇지만 문학은 데이터만으로는 담지 못하는 영역을 전달해냅니다.

왕년에 사르트르와 리카르두 사이에서 오간 이야기가 좋은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사르트르는 자신의 소설을 두고 "굶주린 아이들 앞에서 내 「구토」는 한 조각의 빵의 무게도 나가지 못한다."라고 개탄한 바 있는데, 그 말을 들은 리카르두는 "문학은 배고픈 아이에게 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에 배고픈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추문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화답하죠. 문학이 현실 그 자체를 담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통계 수치로는 알 수 없는 삶의 국면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지요.

더 큰 문제는 다치바나 다카시의 문학관이 과연 문학에 대한 충실한 이해에 기반하느냐 하는 겁니다. 다치바나 다카시 자신의 말에 따르면 대학 시절까지는 문학만을 탐독하였는데, 직장 선배의 충고에 따라 논픽션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였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다치바나 다카시가 이해하는 문학 자체는 거개가 젊은 시절에 형성되었다는 겁니다. 게다가 이 사람의 독서는 책을 후다닥 읽어 해치우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런 '생산적인' 독서는 논픽션에서야 유용하지만 문학에서까지 그렇지는 않죠. 같은 책이라도 처음 읽을 때와 두번째 읽을 때가 다릅니다. 그런데 독서량 및 장서량을 늘리는데 중점을 두어온 다치바나 다카시가 심도 있는 독서를 했으리라 보기는 어렵죠.

특히 이 책에서 다치바나 다카시가 고전 문학에 대해 늘어놓는 "썰"들을 보면 그게 더 확연해집니다. 앞서 말했듯 다치바나 다카시는 그나마 고전 문학의 가치에 대해서는 인정하는 편인데 - 물론 이 사람이 생각하는 '고전'의 범위는 일반 독자들의 그것에 비해 좀 더 까다롭습니다만 - 그게 다분히 실용주의적이면서도 얄팍한 편입니다. 때론 정말 읽어보기나 했는지 의심스러운 경우도 발견되고요. 대담자인 사토 마사루 또한 외교관 출신으로서 다치바나 다카시의 관점에 거의 동의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지금 제 옆에 이 책이 없어 상세한 사례를 들 수 없는게 아쉽습니다만.

더욱이 이 책에서 두 사람이 하는 이야기들은 문학이 아닌 논픽션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그 이야기들은 대부분 일본 근현대사와 관계된 내용입니다. 그나마 한국 사회와는 썩 관계가 없어보이는 이야기들이 많아서, 일본 독자들에게라면 모를까 한국 독자들에게는 크게 의미를 갖기 어렵죠. 게다가 그 구성도 두 사람이 번갈아가며 일본 근현대사에 대한 잡다한 지식들을 마구잡이로 풀어내는 형태라 엄밀하다고도, 세련되었다고도 보기 어렵지요. 요컨대 분명 대중서인데도 특정 전공자들을 제외한 한국인 독자들은 굳이 읽을 필요가 없는 책이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기왕에 했던 잡설들을 한줄로 줄이면 이렇습니다.

문학은 다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책덕후 두 사람의 자기 지식 늘어놓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도서 > 기타' 카테고리의 다른 글

『知의 정원』  (0) 2010/12/27
『한국의 책쟁이들』  (0) 2009/11/11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0) 2009/10/08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  (0) 2009/03/25
Posted by 최진석

트랙백 주소 : http://abraxas.pe.kr/trackback/324 관련글 쓰기


거울 기사
보러가기

SF&판타지도서관에서 출간한 무크지 《미래경》2호에 대한 서평이다. 환상문학웹진 거울 88호에 기사로 실렸으니, 본문은 그쪽에서 읽어 주십사 부탁드린다. 서평 대상이 된 책에 대한 말은 기사 안에서 다 했으니 따로 덧붙일 말이 없고, 여기서는 글 외적인 부분에 대해서만 언급하고자 한다. 한마디로 말해 부록. 서평 기사 하나 써놓고 잔말을 길게 쓰자니 퍽 우습기는 한데, 내게는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스스로에게 그만큼 중요한 글이었던 탓이다.





1.

기사에서도 지나가듯 언급되긴 했지만 이번에 서평의 대상으로 삼았던 2호 이전에 나왔던 《미래경》1호, 스타 트렉 특집도 읽었었다. 작년 여름에 열렸던 와우북 페스티발 당시 SF&판타지도서관 부스 자원봉사자로 일했다가 도서관장님에게서 선물받은 것이다. 받은 책이라 읽긴 읽었지만 내게 큰 의미를 가지긴 어려운 책이었다. 특집 기사였던 《스타 트렉》 특집의 비중이 상당히 컸는데, 해당 시리즈에 별 관심이 없는 나로서는 특집 전체를 건너뛰고 나니 읽을 기사가 많지 않았던 것이다. 《스타 트렉》시리즈의 시나리오에 참여했던 무수한 SF/판타지 계열 작가들에 대한 기사가 있었다면 내 태도도 좀 다르지 않았을까 한다. 여하간 이 책에서는 소설가/번역가 인터뷰들만 관심있게 읽었을 뿐, 썩 좋은 인상을 받지는 못했다. 

다만 이 책을 선물받아 읽지 않았더라면, 내가 《미래경》2호에 대한 글을 썼을 가능성은 매우 낮아졌으리라 생각한다. '공짜 책 선물'에 대한 부채감과 수록된 기사들에 대한 실망,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긴 2호에 대한 기대는 내게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이번 리뷰의 대상이 된 《미래경》2호는 지난 8월 1일에 명동에서 열렸던 2010 SF&판타지 페스티벌에서 구입했지만 실제 기사는 9월 말에야 마무리지어졌다. 글 한편 쓰는데만 거의 두 달이 걸렸으니, 원래 내가 글을 좀 더디게 쓰는 편이긴 하지만 이 정도면 개중에서도 퍽 오랜 시간을 들인 편이다. 물론 여기에는 여러 가지 사정이 따랐다.

2.

잡지에 대한 평 자체가 그리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나는 잡지 비평이 그 외의 단행본에 대한 작업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두명의 기획자 아래 여러 명의 작가가 참여하는 단편집에 대한 평이 한 명의 작가에 의한 장편 소설과 다른 형태를 띌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유에서이다.

단편집에 대한 평을 각각의 단편에 대한 평 묶음으로 구성한다면 평 작업 자체는 수월하지만, 그렇게 완성된 평은 책 한 권에 대한 총체적인 시각을 제공하기 어렵기 마련이다. 평자의 작업이 어디까지나 '단편집'에 대한 평인 한, 수록된 단편 하나하나에 지나치게 얽매여서는 곤란하다. 여러 작가의 단편들을 하나의 책으로 묶어내는 기획 의도에 대해 접근해야만이 책 전체에 대한 상을 제공할 수 있다. 잡지평도 이와 마찬가지일 텐데, 특히 《미래경》과 같은 무크지들은 그 기획의도가 단편집들보다도 훨씬 분명하게 독자들 앞에 드러나기 마련이라는 점에서 평자로서는 도저히 그것을 간과할 수 없다.

서평의 목차가 《미래경》2호의 수록 순서를 따르지 않고, 심지어 아예 소개되지 않은 기사까지 있었던 것은 그러한 까닭이다. 《미래경》이라는 잡지 전체, 나아가 그 잡지를 가능케 하는 외연인 팬덤의 장르 담론에 대해 쓰고자 했기 때문에 서평에서 기사들을 소개하는 순서도 그에 맞게 조정되어야 했다. 적어도 평자로서의 내게는 기사들의 면면보다 그러한 기사들을 생산하고 또 무크지라는 형태로 묶게 하는 환경들이 보다 큰 관심사였던 것이다. 쉽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필요한 작업이었다고 생각한다.

3.

기사 작성에 들어가서는 글에 사용된 논리들이 나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가령 SF문학사 관련 기사들에 대한 내 평의 기본 골자는 문학사 기술에는 그 문학사의 면면을 이루는 사회적 맥락, 작가, 작품들에 대한 충실한 이해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문학사 작업에 그러한 이해가 필요하다면 문학사 비평 작업과 그 비평가에게도 마찬가지의 조건이 적용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내 《미래경》기사, 나아가 내 서평 전체는 그러한 논리에 얼마나 충실한가? 물론 흔히들 이야기하듯 축구 비평을 하기 위해 꼭 축구 선수가 될 필요는 없겠지만, 그 평자가 이미 아마추어 축구 선수 내지는 축구 선수 지망생이라면 조금은 다른 윤리 기준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특히 이 서평에서 지적했던 문제점들의 상당수가 과거 내 자신의 한계였음에야.

기사에서는 짐짓 SF에 대한 확고한 견해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실제 내가 그러한 관점들을 갖게 된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좁디 좁은 '이 바닥'의 특성상 SF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오래 전부터 SF에 대한 여러가지 담론들을 주워들었다곤 하지만 실상 내가 SF를 진지한 관찰 대상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 자체가 아주 최근, 구체적으로는 대략 2008년 초부터인 것이다. SF에 대한 내 입장을 어느 정도 정리하게 되는 것은 물론 그보다도 훨씬 이후의 이야기이다.

가령, 내 SF관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이는 공교롭게도 서평에서 다룬 기사들 중 하나를 쓴 정소연님이었다. 지난해에 정소연님이 문지문화원 사이에서 진행했던 《사회문학으로서의 과학소설》 강의를 듣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내 SF관은 쳬계적이지도, 일관되지도, SF가 아닌 다른 문학에 대한 관점들과도 연결되지 못했다. 그 강의를 들으면서야 비로소 내가 그 이전에 쌓았던 문학적 교양과 SF에 대한 관심사를 연결시킬 수 있게 되었는데, 《미래경》 서평에서는 정소연님처럼 내 자신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이들의 글을 마치 그 분야에 대한 전문가라도 되는양 평가하는 위치에 놓였던 것이다.

또한 내 평 작업 자체가 과연 나 자신을 제외한 가치 있는 작업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기사에서는 이 잡지를 읽고 평을 쓴 이가 얼마나 되느냐며 반쯤 조롱하는 투로 말하기도 했었지만, 그런 문제 때문은 아니다. 내가 기사의 기본 전제로 삼았던 것 중 하나인, 'SF 팬덤'이 과연 실재하며, 그 정도의 중요성을 가지냐의 여부가 보다 큰 문제였다.

그 기사의 주된 비평 대상은 기사를 썼던 이들이나 기획자가 아니라 그들이 활동했던 SF 팬덤 전체였다. 그런데 'SF 팬덤'이라는게 과연 실존하는 집단인가의 문제는 완성된 기사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내지 못한 부분이다. 내가 보고 접한 SF독자들을 토대로 특징을 뽑아내긴 했지만, 사실 기사에서 언급되는 독자들이 '팬덤'이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의 집단으로 형성되어 있는지, 또 그렇다 하더라도 그 집단이 SF 독자 전체에서 어느 정도의 대표성을 가지는지는 답할 수가 없다. 기사를 쓰는 내내 혹시 전체 SF 독자들 중에서도 아주 소수에 속하는 SF팬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실재하는지조차 불분명한 소수의 독자들만을 타겟으로 글을 쓴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거기에 대한 판단은 기사를 읽은 독자들이 해주겠지만, 기사에 대한 피드백이 매우 적은 현실적 요건상, 내가 거기에 대한 증언을 들을 가능성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 짐작한다.

4.

기사가 올라간 뒤에도 기사에 대한 고민은 끊이질 않았다. 기사의 수록처인 웹진 측에 기사가 받아들여지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다. 기사가 올라가기 전까지 편집진과 나 사이에 오갔던 이야기들을 까발릴 필요는 없겠지만, 최종 형태에 대해서는 말을 해도 되지 않을까 한다. 미래경 기사가 왜 국내소설 파트에 올라간 것일까?

무크지 《미래경》이 국내 소설을 중점으로 다루는 단행본이라면 국내 소설 파트에 올라가는 것도 어느 정도 수긍할 수는 있다. 국내 소설이 아닌 '국내 문학'이 파트명이었다면 보다 쉽게 납득했겠지. 그러나 《미래경》은 기본적으로 잡지이며, 소설만이 아닌 영화, 애니메이션 등의 매체를 포괄해서 다루고자 하는 담론지다. 이런 책에 대한 서평 기사를 웹진의 국내소설 파트에 소개하는게 과연 적절한 일일까? 사실 《미래경》2호는 일본 SF 특집이기까지 해서 더더욱이나 국내소설과는 거리가 있고, 내 기사에서는 아예 잡지에 수록된 창작 소설에 대한 평 자체를 싣지 않았는데도. 이 기사를 싣고자 했다면 오히려 비소설 파트 쪽이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한다.

0.

기사의 서론 부제인 '왕이 되고 싶었던 사나이'는 러디어드 키플링의 단편 소설 「왕이 되고 싶었던 사나이」에서 따왔다. 서구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은 오지에 자기들을 위한 왕국을 건설하고 싶어했던 두 부랑자의 운명을 다룬 소설이다. 결론의 부제였던 '황제를 위하여'는 이문열의 장편 소설 『황제를 위하여』에서 따왔다. 여러 가지 상황으로 인해 자신이 도참서에 예견된 위대한 왕이 될 재목이라 믿었던 제왕병 환자에 대한 작품이다. 결론의 대부분을 엔데의 『끝없는 이야기』, 「늙은 황제들의 도시」챕터에서 따온 인용구가 대신하기 때문에 이쪽을 연상했을 독자들이 많겠지만, 실제 내가 그 소제목을 달면서 떠올렸던 이는 이문열의 제왕병 환자 쪽이다.

서론의 부제와 결론의 부제를 합쳐서 기사의 제목을 '왕이 되고 싶었던 황제를 위하여'라고 지을까 고민하기도 했었는데, 번잡하기만 하고 알아볼 사람도 적을 듯 하여 관두고 말았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도서 > 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환상문학웹진 거울 비평선』 출간 예고  (0) 2011/10/04
《미래경》(일본 SF 특집)  (2) 2010/10/06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과제)  (0) 2010/06/01
『타워』(발표)  (1) 2010/05/25
Posted by 최진석

트랙백 주소 : http://abraxas.pe.kr/trackback/322 관련글 쓰기

※이 문서는 북시 위키( http://booksea.pe.kr/ )의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 문서 백업본입니다.

Howard Philips Lovecraft(1890.08.20~1937.03.15)

'빛의 톨킨이 있다면 어둠의 러브크래프트가 있다.' 라고 할 만큼 판타지 문학에 한 획을 그은 작가. 특유의 음울하지만 방대한 설정으로, 톨킨과 함께 판타지 문학의 양대산맥으로 추앙받고 있다.

생전의 러브크래프트는 그다지 저명한 작가라고 할 수 없었지만, 지난 수십 년간의 평가는 점차 상승하여 현재는 20세기 중 가장 영향력 있는 호러 작가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작품은 직간접적으로 광범위한 영향을 미쳐, 종종 애드가 앨런 포와 비교되기도 한다. 스티븐 킹은 러브크래프트를 "고전 호러물에 있어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개업의(the Twentieth Century's greatest practitioner of the classic horror tale)."라고 부르기도 했다.

목차

 [숨기기]

[편집]생애

[편집]유년

1890년 8월 20일, 로드 아일랜드 주의 프로비던스 시 엔젤 거리에 있는 가족 집에서 태어났다. (이 집은 1961년에 파괴되었다.) 아버지 윈필드 스콧 러브크래프트는 보석과 귀금속의 외판원이었다. 1893년, 러브크래프트가 3살일 때, 그의 아버지는 업무상 여행 도중 시카고 호텔에서 정신병원에 걸렸다. 러브크래프트의 아버지는 프로비던스로 돌아왔고, 버틀러 병원에 입원하여 여생을 마쳤다. (1898년 사망). 러브크래프트는 일생 내내 그의 아버지가 과로로 인한 "신경 소모"가 촉진한 마비 때문에 죽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러브크래프트의 아버지의 사인이 광증(general paresis of the insane)이라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러브크래프트가 아버지의 병의 상태나 그 원인(원인)에 대해 알고 있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하지만 러브크래프트의 어머니가 유사한 증세를 보이자 "예방"을 위해 극소량의 비소를 처방받았던 듯 하다.

아버지가 죽은 후에 러브크래프트는 그의 어머니, 두 고모, 할아버지에 의해 양육되었다. 어머니 아래에서 자라면서 여섯 살 때 까지 여장을 하며 지냈다. (당시에는 남자아이를 여장해서 키우는 것이 그리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는 설도 있다.) 체격도 좋지 못하고 비쩍 마른 얼굴 등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러브크래프트의 어머니는 러브크래프트의 외모를 추하다(ugly) 평가했다.

하지만 그는 두살 때 시를 암송하고, 여섯살 때 창작 시를 완성한 천재였다. 그의 할아버지는 러브크래프트의 독서를 격려하여 러브크래프트에게 고전문학들을 제공해 주었다. (『아라비안 나이트』, 토마스 불핀치의 우화들,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 등). 그의 할아버지는 러브크래프트에게 자신의 창작 고딕 호러 동화를 들려줌으로서, 러브크래프트가 괴기물에 관심을 갖게 이끌기도 했다. 한편, 러브크래프트의 어머니는 그런 이야기들이 아들을 불량아로 만들까봐 걱정했다고 한다.

유년시절의 러브크래프트는 병치례가 잦았으며, 그 중 몇 가지는 분명히 정신 신체증이었다. 그러나 그가 앓았던 다양한 질환들은 신체적 이유만으로 생겨난 것이다. 과거에는 러브크래프트의 정신병이 선천적이었으리라는 추측이 있었으나 (아버지가 갖고 있던 매독이 그를 임신했던 어머니를 건너 태아 때의 그에게 감염되었다는 가설) 현재는 폐기되어가는 추세다. 건강이 좋지 않은데다가 성격 또한 불규칙적이고 논쟁적이었기 때문에 러브크래프트는 8살 전까지 학교 수업에 거의 참여하지 못했으며, 1년 후 자퇴했다. 러브크래프트는 이 기간동안 독서에 탐닉했고, 화학과 천문학에 매료되었다. 1899년에 러브크래프트는 The Scientific Gazette와 함께 여러 hectographed publications을 소규모로 출판하기 시작했다. 4년 후 러브크래프트는 호프 스트리트 고등학교로 복귀했다.

1904년에는 러브크래프트의 할아버지가 사망했다. 이 사건은 러브크래프트의 인생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할아버지의 유산을 잘못 관리한 탓에 그의 가족들은 곧 재정적 위기에 빠지게 되었으며, 결국 같은 거리에 위치하긴 했지만 좀 더 작은 집으로 이사해야 했다. 러브크래프트는 집이자 출생지인 곳을 잃은 것에 강한 충격을 받았고, 한동안 자살을 고려하기까지 했다.

고등학교 시절 포의 소설이나 불핀치, 기타 고딕 소설들을 탐독하다가 나중에는 신경증으로 인해 고등학교를 중퇴하게 된다. S. T. 조쉬는 자신의 러브크래프트 전기에서 이 쇠약의 주된 원인은 그가 고등 수학 과목의 성적이 부진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고등 수학은 전문 천문학자가 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과목이었다.) 러브크래프트는 브라운 대학에 진학하기를 바랬으나 진학에는 실패했고, 이 때의 실망과 수치감은 훗날 그의 일생을 지배하게 된다.

1908년부터 1913년까지, 러브크래프트는 소설도 조금 쓰긴 했지만 그가 내놓는 작품은 여전히 주로 시였다. 이 기간동안, 러브 크래프트는 은둔 상태로 지냈으며, 어머니를 제외한 어느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았다. 이것은 러브크래프트가 펄프 잡지 The Argosy에 편지를 쓴 때부터 바뀌게 되었다. 이 편지에서 러브크래프트는 출판 작가들이 재미 없는 연애소설이나 쓰는 것에 대해 불평하고 있다. 이 잡지의 편지 칼럼(letters)에서는 이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는데, 이 토론을 눈여겨 본 UAPA(미국 아마추어 출판 협회) 회장 에드워드 다아스는, 러브크래프트에게 협회에 가입할 것을 제안했다. (1914년) UAPA는 러브크래프트에게 활기를 주었으며 러브크래프트가 시와 에세이를 기고하도록 이끌었다. 1917년에는 서신 교환자들의 격려에 힘입어, 「The Tomb」「데이곤」과 같은, 보다 세련된 소설 작품들과 함께 소설 창작에 돌아섰다. 「데이곤」은 러브크래프트의 첫 출판작이었다. (1919년 11월, W. 폴 콕의 The Vagrant에 수록) 이 시기에 러브크래프트는 그의 편지 친구들과의 방대한 관계를 쌓아가기 시작했다. 러브크래프트의 긴 서한들은 그를 이 세기의 가장 위대한 편지 작가 중 하나로 만들어주고 있다. 그와 편지를 나눈 사람 중에는 로버트 블록클락 에쉬튼 스미스로버트 하워드와 같은 이들도 있었다.

1919년에는 오랜 기간 히스테리와 절망으로 고통받은 끝에 러브크래프트의 어머니가 신경 쇠약에 걸렸으며, 러브크래프트의 아버지가 입원했던 버틀러 병원에 입원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러브크래프트에게 자주 편지를 보냈고, 두 모자는 러브크래프트의 어머니가 1921년 5월 21일 사망하기 전까지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사인은 담낭 수술의 합병증. 러브크래프트는 어머니를 잃은 것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

[편집]결혼과 뉴욕 생활

어머니가 죽고 난 몇 주 뒤, 러브크래프트는 보스턴에서 열린 UAPA 컨벤션에 참가했다. 그곳에서 러브크래프트는 소니아 그린을 만났다. 소니아 그린은 우크라이나 유태인 혈통으로, 러브크래프트보다는 7살이 많았다. 그들은 1924년에 결혼했고, 이 커플은 뉴욕 시 브루클린 자치구로 이사했다. 러브크래프트의 고모들은 이 결합을 못마땅해 했다. 러브크래프트가 '장사꾼'과 결혼한 것을 좋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소니아는 모자 가게의 주인이었다). 처음에 러브크래프트는 뉴욕에 매료되었지만 곧 재정적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소니아는 모자 가게를 잃었고, 빈약한 건강 상태 때문에 고생을 해야 했다. 러브크래프트는 이를 돕기 위한 일을 찾는데 실패했고, 결국 소니아는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클리브랜드로 이사해야 했다. 소니아가 떠난 후 러브크래프트는 브루클린의 레드훅 지구에서 혼자 살기 시작했으며 뉴욕에서의 삶을 격렬히 혐오하게 되었다. 더욱이 뉴욕으로 엄청나게 밀려드는 — 특히 비 앵글로 색슨 계통의 — 이민자들 때문에 아무런 일자리도 구할 수 없었다. 이 참담한 실패는 그의 인종차별주의를 부채질했다. 당시의 두려움은 「레드훅의 공포」에 잘 나타나 있다.

초기에는 위어드 테일즈(Weird Tales)나 어스타운딩 스토리(Astounding Story) 같은 싸구려 펄프잡지에 중/단편을 쓰기 시작했으나 1928년 위어드 테일즈에 『크툴루의 부름』(The Call of Cthulhu)을 연재하면서 본격적으로 '크툴루 신화'의 설정을 시작한다.

몇년 간의 별거 후 러브크래프트와 소니아는 이혼에 합의했지만 완전히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러브크래프트는 고모들을 돌보기 위해 프로비던스로 돌아왔다. 이후 그는 소설을 쓰는 일에만 열중하기 시작한다. 러브크래프트가 섹스에는 전혀 무관심한 모습을 보였고, 결혼 생활이 불행했던 것 때문에, 러브크래프트가 무성(無性, asexual)이었을 수도 있다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더욱이 친구였던 로버트 하워드가 게이 취향이었다) 하지만 소니아는 그를 "꽤 훌륭한 연인"이라고 평한걸 보면 단순히 성에 관심이 없었던 것 뿐인듯 하다.

[편집]프로비던스로의 귀향

프로비던스로 돌아온 뒤에는 1933년까지 10 Barnes Street의 넓은 빅토리아 양식 목조 저택에서 거주했다. (이 주소는 『찰스 덱스터 워드의 비밀』에 등장하는 윌레트 박사의 주소로 나오기도 한다) 프로비던스로 돌아온 후 사망하기까지의 이 기간은 러브크래프트의 문학적 활동이 가장 왕성한 시기였다. 이 시기 동안 러브크래프트는 그의 걸작 단편 대부분을 써냈으며, 『찰스 덱스터워드의 비밀』와 『광기의 산맥에서』과 같은 장편 소설을 쓰기도 했다. 러브크래프트는 종종 다른 작가들을 위해 개작하기도 했고 엄청난 양의 대필을 하기도 했다. ("The Mound", "Winged Death", "Imprisoned with the Pharaohs" , "The Diary of Alonzo Typer")

하지만 이 뛰어난 문학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러브크래프트는 점점 궁핍해져 가기만 했다. 러브크래프트는 고모와 함께 더 작고 더 허름한 하숙집으로 옮겨가야 했으며 로버트 E. 하워드의 자살에 충격을 받기도 했다. 그는 만성적인 영양실조에 걸려 있었고, 1936에는 대장암 진단까지 받았다. 이후 그는 죽을 때까지 끊임없는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1937년에는 콩 통조림과 아이스크림만 먹는 등 기괴한 식생활을 보였다. (이유는 가난으로 추정된다.)

1937년 3월 15일, 프로비던스에서 영면.

러브크래프트의 유해는 필립스가의 가족 묘지에 양 부모 사이에 안치되었다. 이것은 팬들 사이에서는 불충분한 것으로 여겨졌고, 그리하여 일련의 팬들이 러브크래프트만의 비석을 사기 위한 돈을 모금했다. 그 묘비에는 러브크래프트의 이름, 탄생일과 사망일, 그리고 그의 사적인 편지에서 인용한 "I AM PROVIDENCE."라는 문장이 새겨졌다.

1997년 10월 13일에는 누군가가 무덤에서 러브크래프트의 유해를 파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러브크래프트의 유해가 새로운 묘 밑에는 없다는 사실을 몰랐던 듯 하다.

Image:러브크래프트 묘지.jpg

[편집]러브크래프트의 작품세계

선입견으로 가지기 쉬운 생각과는 달리 현대에 흔한 경우처럼 생전의 러브크래프트가 자신이 창작한 신화를 정리하여 "설정집"을 쓴 것은 아니고, 오히려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에서 고대신들에 관한 신화가 직접적으로 상세히 묘사되는 소설은 적은 편이다. 러브크래프트의 신화가 정리된 것은 그가 사망한 후의 일이다. 또한 러브크래프트와 친분이 있는 여러 작가들이 교류하며 서로의 창작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정리에는 논란이 많다. 대표적인 경우로 『코난 사가』의 작가 로버트 하워드와 러브크래프트는 펜팔 친구였기 때문에 서로의 세계관에 영향을 준 것이 많다.

크툴후 신화를 축약하자면, 크툴후는 인간도 포유류도 없던 과거 지구를 지배하며 살던 고대신들로, 그 고대신들이 다시 깨어나기 시작하며 인간들에게 공포를 선사한다는 내용이다. 톨킨의 판타지가 여러가지 민족의 신화들을 종합해서 엮어낸 세계관이라고 한다면, 러브크래프트는 정말로 독창적인 신화와 세계관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는 평이다.

그의 소설 속에 잘 언급되는 책인 네크로노미콘(Necronomicon) 이라는 책에 대해 의견이 많은데, 이 책은 '실제로는 없는 책'이다. 즉 러브크래프트가 지어낸 책인데, 러브크래프트의 팬들이 이 책을 써낸 적도 있었다고 한다.(물론 팬들의 창작이 덧붙여져서 여러 종류의 이본이 있다.) 일단 작내의 네크로로미콘은 미친 아랍인 '압둘 알하즈레드'의 원작. 알 아지프의의 번역제목이다.

일군의 러브크래프트 신화작가군에 의해 만들어진 네크로노미콘의 행적 덕분에, 전 세계의 대형 도서관은 연례행사처럼 네크로노미콘에 대한 문의전화를 받는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네크로노미콘의 저자인 미친 아랍인 '압둘 알하즈레드'는 아랍식의 작명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이름이라고 한다. 러브크레프트가 아람어에 대해 잘 몰라서 벌어진 상황.

하지만 러브크래프트의 가치가 재조명 된 것은 러브크래프트 사후 50년가량이 지난 1980년대부터의 일이다. 러브크래프트 자신은 생전에 그렇게 유명세를 떨치지 못했다. 그의 작품들은 Weird Tales와 같은 유명한 펄프 잡지들에 수록되었고, 때때로 잡지의 애독자들로부터 분노에 찬 (outrage) 편지들을 받기도 했지만 독자 대다수는 러브크래프트의 이름에 관심이 없었다. 다만 클라크 애쉬턴 스미스와 어거스트 덜레스와 같은 현대 작가들과 지속적으로 교류를 했을 뿐이다. 이 서신 교환자 그룹은 "러브크래프트 서클"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들은 러브크래프트의 축복과 격려 아래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에 등장한 요소들을 자유롭게 공유하였다. 러브크래프트의 사망 후에도 러브크래프트 서클은 계속되었다.

그 중 어거스트 덜레스의 작업물이 가장 잘 알려져 있는데, 덜레스의 창작에 대해서는 다소 논란거리가 남아 있다. 그가 만든 설정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선(善)한 '선대의 신(Elder Gods)'과 악(惡)한 '바깥 신들(Outer Gods)'·'위대한 옛것들(Great Old Ones)'들이 대립한다는 것이다. 본래 '우주적 중립성'을 지키고 있었던 러브크래프트 소설에 선악 대립 구조를 가져왔던 이 설정은 많은 이들에게 '러브크래프트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거부되어 왔다.

하지만 위대한 옛것들에 적대적이라고 하여 이 존재들이 그런 인간적 개념에서의 선악관(옳고 그름)에 전적으로 합당한 것은 아니다. 선한 신이라고 해도 인류를 벌레처럼 취급하는 것보다는 좀 더 너그럽고 온건하게 대하는 위치에 서있을 뿐이다. 즉 크툴루 신화의 모든 신들은 인간을 대함에 있어 정도차이만 지니고 있을 뿐 인류의 입장에선 아무래도 위협과 공포로 자리매김될 수밖에 없는 본원적으로 적대적 존재들인 것이다.

[편집]러브크래프트의 인종차별주의

러브크래프트는 심각한 백인우월주의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히틀러에 대해 호감을 표한 일기도 있다.) S. T. 조쉬는 "러브크래프트가 인종차별 주의자였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그 당시에는 일반적이었다.'는 식으로 지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러브크래프트는 당대 사람들에 비해서도 훨씬 분명하게 자신의 견해를 주장했다. 또한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에 인종차별주의가 깃들어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라고 적고 있다. 미셸 우엘벡은 자신의 저서에서 러브크래프트의 "인종 혐오"는 러브크래프트가 대작을 쓸 수 있게 해주는 감정적 원동력을 제공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막상 결혼은 유태계 이민자와 한 탓에, 인종에 대한 얘기를 할 때마다 유태계였던 아내가 자신도 유태인이라는걸 계속 말해주어야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혼 파경은 부부 싸움보다는 러브크래프트가 도시 생활을 견디지 못한 것이 주된 이유였고, 이혼 후에도 계속 편지를 나눌 정도의 사이는 유지했다.

L. 스프레이그 디 캠프의 전기에 따르면, 러브크래프트도 말년에 가서는 자신의 견해를 다소 누그러뜨렸다고 한다. 그는 폭력을 '비이성적인 것'이라 하여 혐오했는데, 1930년대에 독일에서 벌어진 반 유태인 폭력 사태에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자신의 작품에 "혐오스러운 에스키모인의 혼혈" 등의 묘사를 할 정도로 타 인종을 혐오했던데다 히틀러를 찬양하기까지 했던 그도, 타인종을 폭력으로 없애버려야 된다고까진 생각하지 않았던 듯 하다.

러브크래프트의 작품들에 보면 늘 다른 인종이나 다른 무언가에 대한 공포, 혐오등이 보인다. 어쩌면 그의 인종차별은 사실 타 인종에 대한 혐오라기보다는 어려서부터 늘 혼자 틀어박혀 살았던지라 생긴, 자신이 잘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다.

[편집]서구의 진보에 대한 러브크래프트의 냉소주의

러브크래프트는 독일의 보수 혁명 이론가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저작을 탐독하기도 했다. 『서구의 몰락』에서 보여주는 근대 서구의 쇠락에 대한 슈펭글러의 비관적 명제는 러브크래프트의 종합적인 반(反)근대적이고 보수적인 세계관 속 중대한 요소를 형성했다. 부패의 순환에 대한 슈펭글러의 발상은 『광기의 산맥에서』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S. T. 조쉬는 러브크래프트의 정치·철학적 관념에 대한 토론의 중심에 슈펭글러가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 외에도 러브크래프트는 문명의 쇠락에 대해 다룬 니체의 저작에 대해서도 정통했다.

러브크래프트는 문명이 보다 야만적이고 원초적인 요소와 맞서 싸우는 문명과 싸운다는 소재를 자주 쓰곤 한다. 이 투쟁은 대부분 개인적인 차원에서 머물러 있다. 그가 창조한 주인공들 대부분은 교양이 있으며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지만 불분명하고 두려운 힘에 의해 점차 무너져가는 역할을 맡고 있다.

[편집]러브크래프티안 호러와 대중문화에서의 크툴후 신화

"크툴후 신화"를 비롯한 러브크래프트의 작품들은, 다른 작가들에 의한 직간접적 변주를 통해 대중문화에 깊은 인상을 남겨왔다. 이른바 '러브크래프트적인' 요소들은 수많은 소설, 영화, 음악, 만화 등에서 발견된다.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사람은 러브크래프트의 친구, 동료, 편지 교환자였던 동시대 작가들이다. (어거스트 덜레스로버트 하워드로버트 블록프리츠 라이버 등) 후대의 수많은 창작자들 또한 러브크래프트의 영향을 받았다. 이 외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이들 또한 무수하다.

[편집]러브크래프트로부터 영향을 받은 작가들

이 외에도 영화감독(존 카페터, 스튜어트 고든, 길레르모 델 토로), 게임 디자이너(샌디 피터슨, 토야마 케이치로), 호러 만화가 (이토 준지), 화가(H.R.기거) 등이 러브크래프트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보르헤스는 러브크래프트의 소설 기법을 흉내낸 단편 「더 많은 것들이 있다」를 쓰기도 했다. 『독서의 역사』의 저자이며, 눈 먼 보르헤스에게 책 읽어주는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던 알베르토 망구엘은 보르헤스가 러브크래프트를 "어찌나 짜증스러워 했는지"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을 대여섯번이나 읽어달라고 하면서도 매번 중도에 포기했고, 급기야 그의 문체를 패러디해서 단편을 쓰기도 했다고 전한다. 보르헤스와는 달리 팬을 자처하는 스티븐 킹도 러브크래프트의 엉성한 문체에 대해 투덜거린 적이 있다.

현대 프랑스 작가 미셸 우엘벡은 러브크래프트의 문학 전기를 썼으며 미국 작가 조이스 캐럴 오츠는 러브크래프트 작품선의 서언을 쓰기도 했다. Library of America는 2005년에 한권짜리 러브크래프트 작품집을 내기도 했다. 이 책에서는 러브크래프트가 정전으로 인정받은 미국 작가로 언급된다. 사실 크툴루 신화와 관련없는 단편 중에도 유명한 것이 있다. 일세를 풍미한 좀비 영화인 좀비오(Reanimator)의 원작이 그것인데, 이름하여 『허버트 웨스트의 소생 실험』(Herbert West-Reanimator)이다.

[편집]번역서

한국에서는 동서문화사가 전 5권인 러브크래프트 전집을 펴냈지만 형편없는 번역으로 인해 별 대접은 못받고 있는 상황이다. 추리 전문가 정태원 씨가 러브크래프트 전집 출간을 위해 여러 출판사를 타진했지만 출판사들이 난색을 표해 출간되지 못했고... 이후 황금가지에서 출간을 준비 중이라는 말만 무성하다가 결국 2009년 8월에 『러브크래프트 전집』 1,2 권이 출간되었다.

[편집]참고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도서 > 인명' 카테고리의 다른 글

H. P. 러브크래프트  (0) 2010/08/18
찰스 디킨스  (0) 2010/06/02
아서 코난 도일  (0) 2009/12/13
테드 창  (0) 2009/12/13
Posted by 최진석

트랙백 주소 : http://abraxas.pe.kr/trackback/320 관련글 쓰기

찰스 디킨스

도서/인명 2010/06/02 20:40

※ 이 문서는 북시 위키(http://www.booksea.pe.kr)의 '찰스 디킨스' 항목의 백업입니다.

Charles John Huffam Dickens(1812.2.7-1870.6.9)

영국의 소설가. 빅토리아 시대에 활동한 소설가 중 가장 유명하며 가장 인기 있는 작가이다. 영미권에서는 그의 작품이 단 한번도 절판된 적이 없을 정도이다. 올리버 트위스트 등 문학사에 남을만한 캐릭터들을 여럿 창조한 인물이기도 하다. 디킨스의 작품을 각색한 영화와 TV판만 해도 최소한 180편 이상 제작되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그의 생전에 연극으로 각색되었으며, 1913년에는 《The Pickwick Papers》의 무성 영화가 제작되었다.

그의 소설 대부분은 당시의 관행대로 잡지 등 정기간행물에 연재되는 형태로 발표되었다. 당시에는 일단 연재할 소설을 완결지은 후 발표하는 게 일반적인 형태였지만 디킨스는 연재와 집필을 병행하였다고 한다. 이 점은 그의 소설에 독특한 리듬을 부여하였다. 즉 중요한 부분에서 그날의 분량을 끊어버리는, 일종의 클리프헹어기법을 썼던 것이다. 조지 기싱이나 길버트 케이스 체스터튼과 같은 비평가·동료 작가들은 그의 숙련된 산문과 영어권의 문학적 교양에서 퍼올려진 독특한 캐릭터들에 경탄하곤 했다. 한편으로는 헨리 제임스나 버지니아 울프같은 작가들이 그의 감상주의를 문제삼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디킨스의 명성은 자신의 체험에 기초한 사회 하급계층의 생활상과 그들의 애환을 생생히 묘사하는 동시에 적절한 유머를 도입하여 사회의 온갖 모순과 부정을 신랄하게 비판한 데 있다. 그는 소설을 통하여 당대에 필요한 사회 개혁을 호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작가로서 인정을 받아 부유한 생활을 하게 된 뒤에는 동전을 구걸하는 빈민가의 어린이들을 지팡이로 쫓아 버리곤 했으며, 소설을 쓸 때 외에는 사생아를 양산하는데 열중했다고 한다.

찰스 디킨스는 자신의 작품을 대중 앞에서 낭독하기를 즐겨했으며, 사실 말년에 디킨스를 유명하게 만들었던 것도 이런 대중 낭독회였다. 디킨스는 한 작품의 낭독과 몸짓을 연습하는데 적어도 2개월 이상의 시간을 들였다. 그러나 정작 낭독회가 끝나고 들어오는 찬사에는 그저 고개를 한번 까닥이는게 전부였다고 한다.

상세한 내용 더보기(클릭)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도서 > 인명' 카테고리의 다른 글

H. P. 러브크래프트  (0) 2010/08/18
찰스 디킨스  (0) 2010/06/02
아서 코난 도일  (0) 2009/12/13
테드 창  (0) 2009/12/13
Posted by 최진석
TAG 디킨스

트랙백 주소 : http://abraxas.pe.kr/trackback/315 관련글 쓰기

※2010년 1학기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과 현대문학작가론 수업에 제출한 레포트입니다.

세계의 폭력에 저항하는 힘

1인칭 시점의 미학

다니엘 디포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1719)는 출간되었을 당시에는 이 작품을 소설이 아닌 '로빈슨 크루소라는 사람의 조난 수기'로 생각한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당시만 하더라도 1인칭 시점을 채택한 소설이 흔하지 않았기에 생긴 해프닝이다.

소설의 1인칭 시점은 다분히 고백적·회고적 성격을 띤다는 점에서 여타의 시점과 차이를 보인다. ‘등장인물’들의 사건을 ‘묘사’하는 3인칭 화자와는 달리 1인칭 화자는 그 자신이 극중 사건을 경험했던 사람으로서 자신의 ‘기억’을 풀어낸다. 『로빈슨 크루소』의 독자들이 일으킨 착각도 여기에서 유래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3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로빈슨 크루소』를 수기로 착각하는 독자는 거의 없다. 그러나 1인칭 시점 특유의 회고적·고백적 서술이 당시의 독자들에게 선사했을 남다른 충격은, 그 신선함을 잃은 현재까지도 유효하다.

1인칭 서술자들은 3인칭 서술자들이 다가가지 못하는 곳까지 다가가서는 그들이 집어내지 못하던 주인공의 심리와 기억과 감정을 집어낸다. 보다 인간의 경험과 내면에 가까운 서술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성장소설장르에서 유난히 1인칭 시점을 많이 사용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주인공의 내면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두 양식은 서로 닮은 점이 많다.

1인칭 시점의 사용에 익숙한 현대 독자들은 더 이상 1인칭 화자를 실존 인물로 착각하지 않는다. 그 대신 독자들은 ‘실존 인물’의 자리에 자기 자신을 집어넣는다. 주인공의 경험과 자신의 경험을 비교하고, 주인공의 정서와 자신의 정서를 비교하게 된다. 소설이 1인칭 시점을 통해 주인공의 내면을 돌아보듯이, 독자 또한 소설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파멸의 경험

공감

독자들이 박민규의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서 공감할만한 부분을 찾아내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개인들에게 - 그 전 시대에 비하면 - 가혹하리만큼 많은 것을 요구해왔다. 원래는 기계 장비 등의 성능에나 쓰이던 ‘스펙’이라는 말이 어느 순간부터 사람의 ‘성능’을 가리키는 은어로 통용되기 시작한 상황을 보라. 한 사회의 자본주의적 경향이 심화되면, 사람은 가축이나 기계 장비 따위와 하등 다를 게 없어진다. ‘스펙’, 곧 일정한 자격 요건을 갖추지 못하면 사람으로건 인적 ‘자원’으로건 인정받지 못하게 된다.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소재로 삼은 외모지상주의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소설에 나오는 두 여인, 화자의 연인과 화자의 어머니는 '스펙 권하는 사회‘의 가장 큰 피해자들이다.

부부가 나란히 서 있는 풍경은

그래서 늘, 보는 이로 하여금 묘한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배우라는 신념으로 똘똘 뭉친 미남과 그 곁에서 어딘가 모르게 머뭇하던 박색(薄色)의 여인... 작지만 날렵한 아버지와 크고 펑퍼짐한 어머니의 체격 차이도 분명 한몫을 했으리란 생각이다. 이상하리만치 남아 있지 않은 두 사람의 사진도, 그런 부조화(不調和)를 아는 어머니의 <기피>가 가장 큰 원인이었을 것이다.

더없이 희생을 하면서도 그래서 늘 어머니는 숨거나, 가려진 느낌이었다. 아니 언제나 아버지에게 미안해 한다는 느낌을 나는 지울 수 없었다.(47~48p)
원서를 넣었던 곳에서 저는 모두 탈락했습니다. 문제는 성적이 아니라... 면접이었습니다. 그나마 한 곳에서 이유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성적은 참 좋은데... 우리 업무가 대인관계가 중시되는 일이라 말이지... (중략)

고요하던 교무실과, 그중 어느 한 곳의 담당자에게 전화까지 걸던 선생님의 노력도 떠오릅니다. 좋은 애 보내달라고 해서 제가 추천서까지 넣었지 않습니까? 에이, 그래도 보통은 되어야지...(276~277p)

소설 속의 두 여인들은 결코 무능한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어떤 국면에서는 우수하기까지 하다. 화자의 어머니는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남편을 대신하여 온 집안 살림을 감당했고, 화자의 연인은 탄탄한 교양과 성적으로 스스로를 단련시킨 재원이었다. 단지 ‘외모’라고 하는 스펙에서 통과하지 못했을 뿐이다. 시험으로 치면 ‘과락’(科落)인 셈인데, 이 한 과목의 과락은 사회가 그들을 ‘못생긴 여자’로 낙인찍고, 인생의 낙오자로 취급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또한 자본주의 사회 시스템의 본질이다. 다른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더라도 사회가 중요하게 여기는 하나의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여지없이 낙오자의 낙인을 찍는 것 말이다.

경험

소설 속에서 외모 지상주의의 폭력성은 크게 두 명의 여성을 통해 나타난다. 화자의 어머니와, 화자의 연인이다. 연령대는 다르고 작중에서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은 단 한 번도 없지만, 두 여성은 지독한 박색(薄色)이라는 상처를 공유해야 했다는 점에서 서로 닮았고, 동지라 할만하다.

화자의 어머니는 젊었을 때 무명배우였던 사내에게 반해 결혼한 인물이었다. 화자의 어머니가 그 사내에게 반했던 것은 순전히 외모 때문이었다. 소주잔을 내려놓을 때의 우아함, 짜장면을 먹을 때라도 잃지 않았던 품위 따위가 화자의 어머니로 하여금 결혼까지 결심하게 만든 원인이었다. 박색이라는 어머니 자신조차도 외모지상주의에서는 딱히 자유롭지 않았던 셈이다. 하지만 자신의 추모(醜貌)에서 비롯된 열등감은 남편이 연기를 한답시고 한없이 ‘비현실을 추구하는’(47p) 가운데서도 군말없이 수발을 들게 만들었다. 그런 부모의 관계를 화자는 ‘아마도 아버지는 어머니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미남이었고, 어머니는 희망이라곤 보이지 않았던 삼류 배우가 발견한 최고의 숙주였을 것이다.’라고 정리한다.

우연한 기회를 통해 배우로 성공한 남편이 자신과 자식을 내버리는 와중에도 화자의 어머니는 그러한 취급을 묵묵히 감내해낸다.

실은 그때부터 어머니는 서서히 아버지를 포기해 간 것이 아닌가, 나는 생각한다. 확실히 그런 느낌이다. 막연했던 불안이 현실로 드러난 그날 밤까지, 얇게 오이를 썰듯 조금씩, 또 조금씩... 어머니는 아버지를 포기해 갔다는 생각이다. 어느 노래의 슬픈 가사처럼 못생긴 여자는 스스로의 운명을 미루어,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51p)

이 묵묵한 감내는 화자의 연인에게서도 보인다. 화자가 ‘세기를 대표하는 추녀’(81p)라고 평할 정도로 못생긴 그녀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과한 업무와 말도 안되는 취급을 받아가면서도 거기에 단 한 번의 항변도 하지 않는다.

누구 하나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누구도 그녀가 그 자리에 존재함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83p)

그녀 또한 자신에게 가해지는 외모지상주의의 폭력을 그대로 수용하는 모습을 보이며, 스스로를 위축시킨다. 번드르르하지만 무능력한 남편을 수발하던 ‘어머니’와 늘 고개를 숙인 체 묵묵히 짐을 옮기는 ‘연인’의 모습은 분명 닮았다. 소설의 중반부에 이르면 ‘연인’은 화자에게 자신이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는 편지를 보낸다. 이 편지를 통해 독자들은 비로소 ‘못생긴 여자들’이 스스로를 ‘못생긴 여자’로 규정하고 상처 속에 스스로를 몰아넣기까지의 과정을 이해하고 공감하게 된다.

소설에서 적나라하게 묘사되는 ‘못생긴 여자들’의 모습은 비단 소설 속 인물들만의 경험과 정서가 아니다.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주의가 늘 강조되는데도 정작 이야기되지는 못했던, 피해자들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외모 ‘스펙’의 기준이 터무니없이 높은 만큼 그로 인한 피해자들 또한 수없이 많기 마련이다. 기실, 소설 속에서 ‘못생긴 여자들’이 당하는 폭력적인 언어나 상황, 그에서 비롯되는 자기모멸감 따위의 경험에서 자유로웠을 독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소설은 독자가 자기 상처에 함몰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애당초 소설이 독자를 자기 연민의 신파로 몰아넣고자 했다면, 외모 콤플렉스 없는 - 오히려 배우인 아버지를 닮아 수혜자가 됨직한 - 남자를 화자로 설정할 필요가 없었다. 차라리 주인공의 연인이나 주인공의 어머니와 같은 ‘못생긴 여자’가 소설의 화자였던 편이 독자들로부터 눈물을 뽑아내기는 보다 쉽다. 소설은 그러한 쉬운 길을 택하지 않았다.  적어도 신파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주려 했다는 의미가 된다.

화자의 시선은 물론 기본적으로 ‘못생긴 여자들’의 삶에 주목한다. ‘못생긴 여자들’의 삶에 가해지는 적나라한 폭력은 때로는 화자의 어머니, 때로는 화자의 연인에 대한 관찰을 통해 비춰진다. 이 ‘관찰’이란 수사는 상당히 중요하다. 폭력의 피해자들은 물론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적나라한 폭력에 대해 누구보다도 더 잘 알지만, 동시에 그 경험에 얽매이기 쉽다. 폭력의 경험을 넘어 폭력이 작동하는 구조를 파악하는 일은 늘 피해자가 아닌 증인에게 맡겨진다. 소설은 우리에게 ‘못생긴 여자’들을 바라보는 화자와의 공감을 요구한다. 그들을 연민하고 사랑하며 그들에게 그러한 폭력을 안겨준 이들에 대해 분노하는 화자의 시선을 보여준다. 요컨대 소설의 작자가 독자들에게 바란 것은 피해자들끼리의 상처 핥기가 아니라, 폭력의 구조 파악을 통한 굴레 벗기였을 것이다.

폭력의 구조

소설에서 화자의 어머니나 화자의 연인이 외모지상주의의 피해자임은 명백하지만, 그 가해자는 명확하지 않다. 화자의 아버지는 외모지상주의의 수혜자이고, 그 시스템에 편승하여 어머니를 버린 사람이긴 하지만 엄밀히 말해 그 시스템을 만들어낸 사람은 아니다. 화자의 연인이 고백하는 과거 속에서도 현재의 그녀를 만들어낸 명백한 가해자는 등장하지 않는다. 자신들을 조롱하고 비웃던 ‘사람들’이 제시될 뿐이다. 사람들이 큰 의미를 두지 않고 던진 말들이 그리 처참한 피해자들을 만들어낸 것이다.

가해자들에게 그 책임을 묻는다면 그들은 정색할 것이다. 별 생각 없이 던진 한 마디의 농담, 한 마디의 조롱이 그렇게 큰 상처가 되었단 말인가? 그런 말 따위에 꽁해서 상처를 입는 쪽이 소심한 거 아닌가? 그러나 이것이 외모지상주의의 폭력이 발동하는 방식이다. 딱히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사소한 조롱들이 모여 거대한 폭력을 구성해낸다.

외모 지상주의의 피해자들 또한 가해자가 느끼는 정도의 폭력만을 당했다면, 즉 어떤 한 사람이 조롱과 폭언을 퍼붓는 정도였다면 참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폭력이 그런 식으로 발동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가해자 1인의 입장에서는 소소한 ‘장난’이지만, 피해자 입장에서는 그게 단순한 한 명의 조롱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건 그와 같은 폭력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해자가 소수자인 한, 내가 잘못해서 당한 게 아니라는 믿음은 유지할 수 있다. 한 명의 조롱은 조롱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열 명의 조롱은 폭력이고, 백 명의 조롱은 파멸을 가져다주기 충분하다.

우선 사람들은... 또 세상은 저의 상처를 아물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번갈아 끊임없이 할퀴고 찍고 짓누른 것입니다. 저 같은 여자들은 결국 스스로를 마취해야 합니다. (중략) 얼굴이 무기인 그녀들에게도 두려움이 있다는 사실을... 막춤을 추는 그녀들에게도 영원한 사랑의 발라드가 있다는 사실을 세상은 결코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272~273p, 강조는 인용자)
그렇습니다. 진정한 고통은 그것이었어요.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다는 사실... 누구도 날 사랑해 주지 않을 거란 절망감...(274p)
미소 짓던 다수의 시선 앞에 저는 늘 굴복해야 했습니다. 어떤 개인도 세상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자리를 피하고 자리를 피해도 저는 늘 혼자였습니다.(276p)

한 순간의 조롱이나 놀림 따위는 폭력의 축에 끼지도 못한다. 내가 당한 폭력을 어느 누구에게도 호소할 수 없으며, 그 폭력이 부당한 것이었노라고 공감해주는 사람이 없을 때야말로, 진정한 폭력은 시작된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경멸하고 깔본다는 것은 내가 아는 세계 전체가 나를 경멸한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세계의 경멸, 그것은 피해자로 하여감 폭력에 대한 책임을 가해자들이 아닌 스스로에게 묻게 만든다. 폭력을 가하는 세계가 잘못되지 않았다면 내가 당한 고통은 대체 누구의 잘못 때문에 비롯된 것이란 말인가? 결국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자기 모멸, 자기 학대 등의 자기 파괴적인 행태들은 그 기괴한 면모와 달리 실제로는 생존을 위한 가장 처절한 몸부림인 경우가 많다. 자기 주변 세계가 자신을 쓸모 없는 존재, 추한 존재라고 규정하는 감당할 수 없는 사태에 직면했을 때 스스로를 ‘그런 취급을 당해 마땅한 자신’과 그런 자신을 ‘비웃을 수 있는 자신’, 즉 가해자의 일원으로서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는 자신으로 분리함으로서 자신의 부분만이나마 건져보고자 하는 슬픈 몸부림에 가깝다.

작중에서 화자의 어머니는 조강지처 노릇을 다 하고도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사태에 대해서 화를 내지 않고, 화자의 연인 또한 백화점의 동료 직원·상사가 자신에게 가하는 터무니없는 취급 따위를 묵묵히 감내한다. 이들이 그러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들이 결코 무능해서도, 바보여서도 아니다. ‘그런 취급을 당해 마땅한 존재’라는, 가해자의 정의를 스스로가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한 인간이 자신에 대한 경멸을 하나의 수학 공식과 같은 공리(公理)로 받아들이는 과정, 그 잔혹함을 소설은 보여준다.

구원의 경험

스스로를 못생겼다고 규정하며 자신을 상처입히는 사람들이 비단 소설 속에만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이야기했다. 문제는 이들에게 어떤 해결책을 제시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외모지상주의의 전면적인 해체, 가능하다면 그것이 최선의 방안일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이미 스스로 외모지상주의를 뼛속 깊이 받아들인 환자들에게 ‘외모는 중요하지 않다’는 입바른 소리를 해봐야 오히려 동정으로 받아들여질 뿐이다. 그것은 해결책이 아니다. 대신하여 소설은 ‘사랑’을 제시한다.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서 사랑이란 단순히 로맨스 소설을 쓰기 위한 장치만이 아니다. 스스로를 멸시하고 스스로의 가치를 부정하던 이들에게 선사된 사랑의 감정은 ‘너 또한 살아도 된다’는 메시지를 부여한다.

방에 틀어박혀 남편의 배신을 감내하던 ‘어머니’에게 다시 살 힘을 부여한 것은 화자가 전한 사랑한다는 말이었다. 이 때 화자가 어머니에게 했던 ‘아빠도 예전에는 엄마를 사랑했다’라는 말은 물론 화자가 꾸며낸 말이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게 아니더라도 화자가 내뱉은 “죽지마”, 그리고 “사랑해”라는 말은 파란색 필체의 진실성이 담겨 있었다. 당신이 소중하다고, 아버지가 떠나서가 아니라 그 때문에 내가 사랑하던 ‘예전의 엄마’가 사라졌다는 상실감 때문에 슬프노라고 이야기하던 화자의 말은 ‘어머니’를 울게 했고, 다시 삶을 향해 걸어갈 힘을 부여했다. 그 힘이 없었다면 ‘어머니’가 남편의 흔적을 떨쳐내고 재혼하게 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 점은 화자의 연인 또한 마찬가지이다. 소설에서 대체로 말이 없는 ‘어머니’와는 달리 그녀는 사람이 한 인간을 구원하는 방식에 대한 상세한 증언을 제공한다.

그렇습니다. 그 전까지... 저는 한 번도 뜨거운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습니다. 눈물은 더없이 차가운 것이었고, 그때의 제 마음도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알 수 있었습니다. 냉대를 받은 인간의 마음은 차가운 눈물을 흘린다는 사실을... 관심과... 사랑을 받은 인간의 마음만이 더없이 뜨거운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말하자면 당신은 한 여자의 체온을 바꿔주었고, 한 여자를 둘러싼 세상의 기후를 바꾸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달의 뒷면처럼 어둡고 어두웠던 저라는 여자를 바꾸어놓았습니다. 어느새 저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난날의 모든 상처가 사라졌음을... 그리고 이제는 튼튼하게 아물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285~286p)

열아홉 혹은 스물의 시점에서는 ‘세기의 추녀’였던 그녀가 세월이 지나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된 시점에서는 그럭저럭 평범한 얼굴이 되었다는 묘사는 참 많은 점을 시사한다. 링컨이 그랬던가. “마흔을 넘긴 사람은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라고. 잘났건 못났건 한 인간이 살아온 궤적은 얼굴에 담기기 마련이고, 마흔쯤 되면 외모를 통해 그 사람의 인생을 짐작할 수 있다는 말일 터이다. ‘세기의 추녀’가 ‘평범한 동양인 여자’로 변하는 과정은, 단순히 세월의 흐름에 따라 외모가 변한 것이 아니라, 화자와의 만남을 통해 그녀가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러한 자기애가 인상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봐야할 터이다.

화자의 어머니와 연인의 변화를 이끌어낸 것은 외모지상주의 혁파나 개인의 경쟁력 강화와 같은 거창한 수단이 아니었다. 세상에 부정당한 그녀들에게 사랑한다고 해준 것, 그런 사소한 기적들이 그녀들의 변화를 이끌어낸 것이다.

한 인간의 완전한 파멸을 위해서는 그 인간을 둘러싼 세계 전체가 동원되어야 한다. 세계 전체가 동원된 폭력이란 그만큼이나 가공할 위력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만한 힘을 동원하지 않으면 인간을 굴복시킬 수 없다는, 스스로를 포기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설령 그러한 시도에 성공한다고 해도, 어느 누군가가 그에게 ‘당신은 살 가치가 있다’라는 확신을 주는 순간, 그 압도적인 폭력은 예상외로 쉽게 허물어지게 된다. 남아있더라도 예전과 같은 파괴력은 지니지 못한다. 탈출구가 뚫린 포위망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이 소설에서 박민규는 자신의 장점이라고 평가받았던 웃음을 거의 포기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이 소설에서 작가가 웃음거리로 삼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세계의 압도적인 폭력에 짓눌린 ‘그녀’들을 비웃을 수는 물론 없다. 그렇다고 시스템의 억압 구조에 놓여 있기는 매한가지인 가해자들, 평범한 악당들을 조롱할 것인가. 물론 조롱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웃음이 세계의 폭력에 신음하는 자들에게 어떤 위안과 어떤 희망을 줄 것인가. 소설에서도 나오지만 문학과 음악의 세계로 도피했던 여인은 번번히 현실에 끌려나오며 괴로움에 몸부림쳐야 했다. 억압에 대한 대안 없는 조롱과 유머는 그만큼의 공허함을 선사한다. 결과적으로는 피해자들을 더욱 괴롭힐 뿐이다.

박민규의 시도는 이러한 차원에서 시도되어야 한다. 그는 자신의 장기조차 버려가며 억압과 폭력과 사랑을 강조했다. 한 인간을 짓뭉갤 수 있는 억압과 폭력에 저항할 수 있는 힘으로서의 사랑을 제시했다. 그리고 그것이 세계로부터 소외된체 고통하던 사람들에게 얼마나 기적같은 선물일지를 이야기한다.

소설이 시작되는 시점인 1980년대는 한국에서도 자본의 힘이 급격하게 강화되던 시기였고, 자본의 폭력이 본격적으로 강화되던 시기이기도 하다. 비단 외모지상주의만을 지적하지 안허라도 자본이 오늘날의 인간에게 강요해왔던 여러 가지 ‘스펙’들은 사람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인간들을 더더욱 양산해왔다. 이 상황에서 작가는 묻는다. 젊은이들을 백화점 아르바이트 같은 비정규직으로 몰아넣는 자본에는 저항할 수 없더라도, 당신들 주변의 사람들을 돌아보고 그 사람들에게서 인간을 발견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 않겠냐고. 당신이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시선과 언어들이 얼마나 거대한 폭력이 될 수 있는지 실감하고, 거꾸로 당신이 얼마나 사소한 계기로도 기적 같은 구원자가 될 수 있는지 아느냐고 묻는다. 작가는 그것을 호소한다.

스스로를 죽은 자들로 생각했던 왕녀들이 경쾌한 무곡(Pavane)을 배경으로 춤출 수 있느냐의 여부는 결국 독자 당신에게 달려있노라고 말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도서 > 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래경》(일본 SF 특집)  (2) 2010/10/06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과제)  (0) 2010/06/01
『타워』(발표)  (1) 2010/05/25
《판타스틱》 휴간/폐간?  (11) 2010/03/22
Posted by 최진석

트랙백 주소 : http://abraxas.pe.kr/trackback/314 관련글 쓰기

※ 본 자료는 2010년 05월 14일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과 현대문학작가론 수업에 쓰인 발제문입니다. 발표는 저 외에 두 명의 학우와 함께 진행했고, 그 학우들이 쓴 부분은 대부분 삭제했습니다. 

타워, SF로 현실을 말하는 방법

“우리 노동을 그렇게 하자!

우리 재미를 위한 혁명을 하자!”

- T.H.로렌스


(발표자 이름은 생략)


목차


1. 들어가며                                                                          

2. 작가 소개                                                                         

가. 약력                                                                           

나. 『타워』의 줄거리                                                              

3. 작가론 - 누가, 왜 배명훈을 읽는가?                                                

가. 배명훈은 왜 SF 작가인가?                                                      

나. SF라는 장르의 목적                                                            

4. 작품 분석                                                                         

5. 배명훈의 ‘빈스토크’                                                                

가. 타워의 의미                                                                    

나. 타워의 권력이 돌아가는 방식                                                    

다.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인가                                                        

라. 타워의 주인에게 묻는다                                                         

6. 다중의 자율성에 거는 희망                                                         

7. 참고 자료                                                                         



1. 들어가며


배명훈의 『타워』는 쉽게 읽힌다는 의미에서 이번 수업 시간에 소개되었던 작품 중에서 가장 환영받는 작품이었을 것이다. 빈스토크라고 하는 가상의, 그러나 현실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무대에서 딱히 불편하지 않게 유쾌하게 진행되는 풍자와 유머들은 높은 점수를 줄만하다.

본 발표에서는 배명훈이 소설 창작에 SF 기법이 사용된 맥락과 배명훈이 가상의 무대 건설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바에 중점을 두어 살펴보고자 한다.


2. 작가 소개


가. 약력


1978년 부산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우수논문상 수상). 그 어떤 창작 모임과도 연결되지 않은 채 혼자 글을 써오다가 학부 재학 중이던 2004년에 제출한 「테러리스트」가 ‘대학문학상’을 받으면서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이 당시 자신이 썼던 작품 중에서 가장 문단문학에 가까운듯한 작품을 냈는데도 심사평에서 SF 운운하는 것을 보고 비로소 자신의 소설이 SF와 연결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2005년 '스마트D'로 '제2회 과학기술창작문예' 단편 부문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SF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 당시 수상자 모임을 통해 SF 소설가 및 번역가인 정소연을 통해 ‘환상문학웹진 거울’을 소개받았으며, 이 웹진의 필진으로 활동하게 된게 주요한 영향을 끼쳤다.

이후 환상문학웹진 거울을 비롯한 여러 인터넷 지면과 동인지를 통해 꾸준히 작품을 발표해왔다. 2007년에는 공동 단편집 『누군가를 만났어』를 통해 메이저 출간에도 본격적으로 끼게 된다. 잡지 『판타스틱』 등에 단편을 수록한 바 있다. 첫 소설집으로 연작소설집 『타워』를 출간했으며 현재는 장편 소설 집필 중. 「에스콰이어」2007년 1월호 "The Newest: 2007년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중문화 예술의 첨병 14인"에 선정되었으며, 단편 {안녕, 인공존재}로 제1회 문학동네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나. 『타워』의 줄거리


(생략)


3. 작가론 - 누가, 왜 배명훈을 읽는가?


가. 배명훈은 왜 SF 작가인가?


약력에서도 확인되듯 배명훈은 그의 독자들에게 주로 SF 작가로 소개되었고, 그의 소설 또한 SF라는 틀 안에서 읽혀왔다. 작가 자신이 SF팬덤 내부에서 활동하면서도 스스로의 작품을 소위 ‘장르 소설’이라는 테두리로 이야기하려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상당히 특이한 요소라 할만하다. 따라서 배명훈의 소설을 SF라고 규정할 때, 『타워』는 대단히 기묘한 위치를 얻게 된다. 배명훈을 SF작가로 만든 것은 배명훈이 아니라 그 독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한국의 SF 독자들이 ‘한국 SF 작가’들에 대해 대체로 냉소로 일관해온 것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라 할만하다. 80년대 초반부터 해외 원서를 구해다 읽으며 자생한 SF 독자들이 한국 작가를 ‘제대로 된’ SF 작가로 인정하는 경우는 대단히 드물었으며, 특히 문단 쪽에서 “SF적 상상력”을 차용하여 썼다는 작품들은 외려 SF독자들로부터 “그들은 SF를 모른다”며 조소를 당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각주:1] 그 정도의 폐쇄성을 보이던 SF 독자들이 한 작가를 문단 쪽과 한 마음이 되어 지지한다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라 할만하다. 배명훈과 같은 작가들이 문단과 기존 SF 팬덤 양측의 관심을 모으는 현 상황은 상당히 유념해볼만하다. 배명훈이 문단과 SF 팬덤의 경계지역에 서 있으며, 이들을 매개할만한 위치에 서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나. SF라는 장르의 목적


SF라는 장르에 대해 정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SF 독자들끼리도 SF란 장르가 무엇인가에 대한 견해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본토라 할만한 미국에서조차도 작가들이 “SF란 SF팬들이 ‘이건 SF야’라고 가리키는 것들”(프레드릭 폴), “SF란 우리가 SF라고 부르는 것”(데먼 나이트), 심지어는 “SF라고 출판되는 모든 책은 SF다”(노먼 스핀라드)라고까지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SF란 무엇이다-라고 말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각주:2] 다만 SF의 하위 분류 방식에 대해서는 대체로 합의되는 바는 있다. 크게는 두 가지로 나눈다.

첫 번째는 ‘오락물’로서의 SF이다. 영화 《스타워즈》와 같은 우주 활극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흔히 SF라고 하면 이러한 경향의 작품을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정작 SF계 내부에서는 이러한 작품들을 SF로 인정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현재까지도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상태다. 미국의 하드 SF 작가 테드 창이 《스타워즈》류의 작품을 "우주선과 레이저가 등장하지만 핵심은 500년 전, 또는 1000년 전 쯤에 모험 이야기"라고 평가하면서 SF가 아니라고 주장한 것은 이러한 경향을 대표한다.

두 번째는 ‘문학’으로서의 SF이다. SF가 결국은 문학이며 문학의 본질을 실현하는 장르라는 점에 주목하는 셈이다. 전자와의 차이점은 SF를 통해 ‘경이감’(Sence of Wonder)이라는 감성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경이감이란 SF 독자들이 SF를 읽음으로서 세계가 종전과는 다르게 보이게 되는 순간, 기존에는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감각·감성을 자각하게 되었을 때 느끼는 ‘충격’을 이야기한다. 랑시에르가 ‘문학의 정치’라는 개념을 통해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이게 하며, 킁킁대는 동물로 취급되었던 사람을 말하는 존재로 만든다.”[각주:3]고 주장했던 것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물론 ‘경이감’에 대한 추구는 비단 SF만의 것이 아니다. 그 점에 대하여 SF는 SF만의 경이감이 ‘과학적 상상력’에서 비롯되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즉 과학이 세계를 사유하는 방식에 따라 세계를 해석하고, 거기에서 비롯된 상상력을 통해 경이감을 불러일으킨다면 그것이 훌륭한 SF 소설이라는 것이다. 물론 핵심은 여전히 ‘과학적 상상력’이 아니라 ‘경이감’이다. 유전자 복제나 우주여행 같은 자연과학적 소재를 끌어다 쓴다 해도 그것이 현재의 독자들에게 세계 인식의 변화, ‘경이감’을 안겨주지 못한다면 그 작품은 훌륭한 SF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 ‘문학적 SF'를 지지하는 작가/독자들의 입장이다. SF 또한 현재의 독자들에게 현재에 대한 이야기를 이야기하기 위한 문학양식이라는 것이다.[각주:4]

『타워』또한 마찬가지다. 이 작품이 SF라고 해서 이 작품이 얼마나 참신한 무대를 마련했는가, 얼마나 기발한 상상력을 보였느냐에 주목하는 것은 그다지 권장할만한 독법이 아니다. 빈스토크 타워가 정확히 몇 층짜리 건물인가, 현실에서도 구현 가능한 건물인가 따위의 문제는 이 소설에서 굉장히 사소한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그 대신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상은 빈스토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거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4. 작품 분석


사람들을 억압하는 완강한 권력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권력의 중심에 누가 있는지 알 수 없고 때문에 저항할 대상도 분명하지 않은, 빈스토크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통해 배명훈은 그 불명확한 대상이 주는 억압에 저항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지금부터는 각각의 이야기에서 나타나는 우리 사회의 모습과 각 이야기에서 찾아낼 수 있는 권력에 대한 대응법을 중심으로 작품을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생략)


5. 배명훈의 ‘빈스토크’


가. 타워의 의미


『타워』의 무대인 빈스토크에서 빚어지는 군상은 우리가 사는 사회의 모습과 닮아있다. 그러나 『타워』의 무대인 ‘빈스토크’를 곧 한국 사회의 풍자를 위한 수단으로 이해하는 것도 온전히 타당해보이지는 않는다. 어떤 식으로건 모든 소설은 현실에 대한 은유를 담기 마련이다. ‘빈스토크’라는 무대 자체는 한국 사회일 수도 있고 미국일 수도 있으며 또 다른 어떤 나라일 수도 있다.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사회에 시사하는 바를 읽어낼 뿐이다. 타워는 넓게는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세계의 모습 그 자체를, 좁게는 한국 사회를 대변하는 공간이다. 개개인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와 그 내부의 권력관계를 지닌 사회라면 타워와 비슷한 양상을 띠게 마련이다. '타워'라는 모호한 제목 또한 그러한 점을 상징하는 듯 보인다.


나. 타워의 권력이 돌아가는 방식


물론 작품에서는 빈스토크 상류층의 볼썽사나운 모습이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동원 박사 세 사람」에는 지도자층(시장과 정박사)의 성적 타락 및 돌고 도는 양주 선물을 통한 애매하고 미묘한 뇌물 문제 등이 나타나고 있다. 「자연 예찬」에는 언론인 및 지식인들의 비양심적인 침묵 및 청탁 비리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다. 코스모마피아에 대한 선제공격 및 민간 지역에 대한 무차별 폭격 등 국제적 만행을 저지르면서도 의회는 책임을 회피하고, 용역 업체의 직업군인의 생명권은 방기된다. 바벨탑 아닌 바벨탑, 선한 사람이 최소 열 사람 이상 거주하고 있음으로 인해 신으로부터 멸망을 유예 받은 소돔과 고모라처럼 취급되던 공간(「샤리아에 부합하는」)이 바로 빈스토크 타워의 현재다.

시장이나 시의회를 비롯한 권력 상층부에 대한 작가의 시선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 그들은 국가를 대표하고 국가를 책임져야 할 존재들임에도 국가의 안위에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타워를 떠나려 하는, 한마디로 국가에 대한 권리만을 보장받을 할 뿐 책임은 지지 않는 존재들로 묘사된다. (시장 전용 엘리베이터의 존재 「엘리베이터 기동 연습」, ‘무슨 문제만 생겼다 하면 제일 먼저 달아나버릴 인간들’ 「샤리아에 부합하는」, 시위대 승리 후엔 이미 지구 반대편에 가 있던 시장 「광장의 아미타불」)


“최 행정관님. 도대체 누가 최종 명령을 내렸죠?”

최신학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답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최종 명령권자는 당연히 의회였다. 상대인 코스모마피아가 국가는 아니므로 의회에서 선전포고를 의결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늘 병력이 주둔해 있던 지역에서 벌어진 일이라 새로 파병 절차를 밟지도 않았다. 하지만 작전 개시 이면에는 분명히 정치권의 광범위한 승인 혹은 압력이 있었고, 보나마나 그 뒤에는 인공위성 관련 기업들의 어마어마한 이권 문제가 개입되어 있었을 것이다.

(중략)

질문에 답해야 할 사람들이 질문을 던지는 위치에 몸을 숨기려 하기 때문이었다.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책임을 지지 않기로 한 날. 그렇게 심판의 날이 다가왔다. (「샤리아에 부합하는」, 타워 189-190p)


그러나 소설 속에서 묘사되는 모습들은 대부분 우리가 상류층에 대하여 이미 알고 있었거나 혹은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습들의 재현이다. 우리는 상류층이 마땅히 사회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에 있고 그에 대한 권리를 누리면서도 정작 책임을 지지 않는 사태에 대해 분노한다. ‘윗것들이 윗것답게 행동하지 않는다’라는 인식으로 요약될텐데, 이러한 인식에서는 배명훈 또한 독자들의 인식 수준에서 크게 앞서 나가지 않는다. 독자들과 눈높이를 같이하는 것이다. 그러나 배명훈의 문제의식은 그러한 눈높이 맞추기, 권력에 대한 냉소적 풍자 수준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의 시선은 시스템을 돌아가게 하는 구조, 시스템의 전체로 향한다.

권력의 사용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것은 비단 권력 상층부만이 아니다. 관료제 내의 중간 관리자들을 통해서도 보여진다. 중간 관리자들, 혹은 말단 직원들은 상부에서 내려오는 명령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며 기계적으로 일을 진행시킨다. 「엘리베이터 기동 연습」의 주인공은 이유도 모른 채 상부의 명령에 따라 520층으로 군 병력을 이동시키면서 자신을 기계에 비유한다. 「광장의 아미타불」에 등장하는 주인공 역시 기마경비대에서 일하면서 시위대를 진압하는 폭력 행사 - 코끼리, 최루탄을 섞은 물 폭탄 등등 - 에 거리낌 없이 참여한다.

권력에 참여하지 않는 일반 시민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작중에서 ‘현대 도시인이라면 누구나’ 가진 것으로 묘사되는 먼지는 현대 시민들 또한 시스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시스템의 부조리에 대해 이야기해야 함에도 자신의 ‘먼지’ 때문에 침묵하고, 결과적으로는 부조리의 안정적인 고착화에 기여한다.


현대 도시인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존재의 흔적. 초고층 문명의 사회계약은 누구든 털면 먼지가 나기 때문에 서로 털지 않는게 합리적이라는 암묵적 합의 위에서 이루어졌음. 그러나 이 사회계약이 법률상 책임까지 면제해주지는 못함. 예) 그러자 시 정부에서는 비판하는 사람들을 불러다가 먼지를 털었다.(「자연예찬」중에서)[각주:5]


요컨대 시스템의 억압은 무능하고 부패했으며 무책임하기까지 한 권력 상층부에 의해서만 행해지지 않는다. 시스템의 약자들조차도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각자의 방식에 따라 시스템을 지탱한다. 문제는 그 시스템 전체에 대한 책임을 가진 자가 아무도 없다는 점이다. 결국 타워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그 소유주가 뚜렷하지 않은 권력이다.


시위대는 아미타브의 이름을 부르면서 컨테이너 가건물같이 생긴 방어선을 뚫고 정부 청사 쪽으로 몰려 들어갔어. 대승이었지. 하지만 그러면 뭐해. 빈스토크에 그런 난리가 날 때마다 늘 그랬듯이 시장은 그때쯤 지구 반대편에 가 있었는걸. 전략적으로는 별 의미 없는 승리였어. 전술적으로는 완승이었지만. 시위대가 그 싸움을 통해서 얻어낼 수 있는 건 별로 없었거든.(p.184)


전근대의 왕조 사회나 독재 국가에서라면 시위대의 싸움에 저런 낮은 평가를 내리지는 못할 것이다. 그 무렵에는 책임을 물어야 하는 대상이 명확했다. 모든 권력은 중앙의 1인자에게 책임이 집중되었고, 그가 잘못했기 때문에 - 혹은 사악하기 때문에 - 시스템의 억압이 지속된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폭군이나 독재자의 목을 치는 희생 제의를 통해 국가는 정화되고 새로운 생명력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빈스토크와 같은 대의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그러한 책임 전가가 불가능하다. 사회 모순은 이제 더 이상 권력 상층부만의 책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위대가 정부에 그 책임을 물으려 하는 한, 그들의 투쟁은 정부 청사 진입 여부와 관계없이 늘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요행히 시장을 사로잡는데 성공해서 정부를 전복하는데 성공한다 해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대의 민주주의 자체가 유지되는 한 시장과 시의회는 몇 번이고 다시 구성될 테고, 그 권력 상층부를 지탱하는 관료제 조직 또한 재건될 것이다. 결국 그들은 시스템을 통제할 수 없을 것이다. 빈스토크의, 그리고 우리 사회의 문제는 더 이상 어느 누구만의 책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러한 판단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들 중 그 누구도 시스템이 부여하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현실 인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아니 이미 우리도 시스템의 일부이다. 이러한 냉소적인 묘사들은 2000년대 작가들에 대한 정혜경의 지적을 떠올리게 한다.


최근 작가들의 사유 속에는 그 누구도 자본주의적 네트워크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깊은 허무주의가 깔려 있다. 이 허무주의는 현실 도피의 결과가 아니라 현실을 직시한데서 생겨났다는 점에서 타당하다.[각주:6]

 

그러나 배명훈은 정혜경이 말하는 ‘최근 작가들’과 같은 허무주의로 향하지 않는다. 시위대의 성과를 ‘전략적으로는 별 의미 없는 승리’였다고 평가하지만 한편으로는 시스템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그려낸다. 「자연예찬」에서는 개인적 비리가 노출될 것을 감수하고서 결국 사회 비판을 하고 마는 작가를, 「타클라마칸 배달사고」에서는 경위야 어떻든 사막에 떨어진 조난자를 구해내는 네티즌들을, 「샤리아에 부합하는」에서는 수색영장을 받아내지 못하자 직접 난동을 부려서라도 빈스토크를 구해내려 하는 공무원이 나온다. 자기가 사랑하는 공간의 문제를 더 이상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스스로 책임지려 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누구나 ‘먼지’를 가졌기에 시스템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그 먼지를 가진 사람들이 뭐든 하지 않으면 세상은 아름다워지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려 한다.


라. 타워의 주인에게 묻는다


왜 시장이나 시의회가 책임지지 않는 문제를 시민들이 책임져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누리는 이 공동체의 주인이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빈스토크 타워의 주인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최고 권력자인 시장이라고 단정 지을 수도 있겠다. 타워의 권력 장의 중심에는 시장이 있으며, 의회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시장은 권력만 있을 뿐 책임-주인의식-을 지려 하지 않기 때문에 실제적 주인이 아니다.

당위적으로는, 타워에 사는 주민들 개개인이 실질적인 주인이 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것은 시민들이 투표권을 통해 타워에 대한 권력을 행사하는 존재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작중에 나오는 빈스토크 시민들이야말로 빈스토크라는 무대, 공동체에 대한 애정을 느끼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주인됨은 주인의식, 다시 말해 공동체에 대한 애정과 책임의식을 가지지 않은 사람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권리다.

빈스토크 시민들이 보여주는 공동체에 대한 애정은 국가가 부여하는 ‘애국심’이나 권력욕 따위와는 무관한 영역에서 발휘된다. 오히려 빈스토크 시민들은 국가의 존재에 대해 냉소적이거나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 대신 빈스토크 시민들의 내면에 가득찬 것은 그들이 일상생활을 하고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무대, 빈스토크라는 세계 그 자체에 대한 애정이다. 타워를 제2의 바벨탑이라고, 빈스토크를 소돔과 고모라로 보았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조차도 결국에는 타워를 멸망시키기 위한 폭탄을 기폭시키지 않았던 것에는 이들의 신앙이 약화되어서도, 빈스토크 정부에 회유되어서도 아니다. 이웃에 대한 애정이 이념과 종교조차 초월한 것이다.

따라서 빈스토크 타워의 실제적 주인은 마땅히 타워에 대해 주인 의식, 주권 의식을 지닌 개인 혹은 집단이라야 한다. 타워를 ‘아름답게 만들 책임을 가진 사람’은 바로 타워라는 무대와 그 무대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애정을 느끼는 사람들 자신들이다. 배명훈은 그러한 개개인들에게 호소하고자 한다. 작중의 표현을 빌린다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책임’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 당신들이 정말로 이 세계를 사랑하고, 시스템이 문제라고 여긴다면 단순히 앉아있기만 해서는 안된다고 이야기하고자 한다. 더 이상 시스템의 문제를 부패한 권력층에게만 묻는 대신, 스스로의 책임을 회피하는 대신 직접 시스템을 개선하기 위해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먼지’를 신경쓰면서 자신의 책임을 방기한다면 시스템의 억압은 계속되기 마련이라는 것이 배명훈의 소설에서 전달되는 메시지다.

그는 여섯 개의 장을 관통하면서 수평파들의 폭탄 테러며 시민들의 반전 시위는 수박 겉핥기 식으로 언급만 한 채 대부분을 개개인들 각자의 판단과 양심적 행동에 맡긴다. 정부의 통제나 간섭 없이 자율적이고도 효율적으로 돌아가는 운영 체제는 대부분 시민들 개개인의 연합과 협력에 의한 것이다. 그것도 열의나 구호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개인화된 시민들 각자의 ‘개인적 기호에 따른 판단’에 의한 것이다.

「타클라마칸 배달 사고」에는 타워의 우편 시스템에 대한 묘사가 이루어진다. 정부가 운영하는 엘리베이터에 의한 우편배달이 훨씬 비싸기 때문에 타워의 시민들은 대부분 파란 우편함을 이용하는데, 이 우편함에 편지를 가져다 놓으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우편배달의 업무를 이행한다. ‘익명 사회에서 익명 사람들끼리만 통하는 나름의 신뢰’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빈스토크는 개인을 신뢰한다.’

같은 장에서, 용역 회사 직원에 대해 정부가 구출을 방기하고 있을 때 힘을 발휘하는 것은 전 세계 곳곳에 있는 개개인들이었다. 사람들은 약간의 홍보만으로도 자발적으로 사이트에 접속해 실종된 민소를 찾는다. 그런데 그들의 이러한 선택은 선동적인 구호에 의한 것도, 민소에 대한 인류애에 의한 것도 아니다. 그저 기분 내키는 대로의 개인적 취사선택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재미’는 결국 국가가 포기했던 구성원을 구해냈다. 그게 바로 국경과는 무관하게 움직이는 제 나름의 공동체의 힘이다.


병수는 잠이 확 달아났다.

“왜? 지금 이 시간에 이만 칠천 명이 어딨어? 한밤중에.”

“아, 어디 보자. 빈스토크에서 육천 명 조금 넘고, 우리나라에서 오천 명쯤 되고, 나머지는 다른 나라에서 접속했어요.”

“왜?”

“왜는 무슨 왜요? 그냥 찾는 거지.”

“그러니까 걔들이 왜? 뭔가 오류 생긴 거 아니야?”

“오류 같은 거 없어요. 뭐가 있어야 오류가 나죠. 사진하나 달랑인데. 은수 씨가 빈스토크에 돌린 편지가 번역이 돼서 외국으로 갔어요. 그래서 그냥 찾는 거예요, 그냥. 이유가 필요한가? 원래 인터넷에서 하는 일이 그렇잖아요. 그냥 해요, 그냥.”(「타클라마칸 배달 사고」, 타워 109p)


이밖에도 청탁 뇌물 수수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양심적으로 글을 쓰는 작가 K, 무비판적으로 명령을 수용해 군을 이동시켰다가 520층 폭발 후 후회하는 남자 주인공 등을 통해 작가는 개개인의 선택에 대해 계속해서 ‘보여준다.’ 결국 마지막 순간 타워를 지켜내는 것은 샤흐리반 및 열다섯 군데의 가게 주인들의 선택이었다. 열다섯 사람 개개인의 선택은 타워의 멸망을 유예시킨다. 이를 통해 짐작하건데, 작가가 거대한 시스템을 혁파하는 방법으로 제시하는 것은 ‘개인의 정치’다. 개개인이 시스템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에 대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거나 행동하는 것, 그것만이 시민 개개인이 마땅히 지니고 행사해야 할 권력을 소유하고 시스템을 통제하는 방법이다.


(생략)


「타워」는 익명성이 다분한 대중에게 희망을 건다. 이는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아우또노미아의 ‘다중의 자율성’과 맥락을 같이 한다. 민족 국가의 강화나 국가 권력 장악이라는 주권 형식 안에서의 혁명 전략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언제나 같은 패턴의 반복이 거듭될 뿐이다.(독재자 다음의 독재자, 결함 다음의 같은 결함의 탄생) 국민 국가적 주권 형식 안에 권리를 양도하는 네이션=스테이트의 강화가 아니라 양도할 수 없는 자율성의 개화로서 민주주의를 구성해야 하는 것이다.

 「타워」는 여섯 장에 걸쳐서 권력이라는 것의 불합리성, 부실함, 허점에 대해 보여준다. 권력과, 권력에 의해 운영되는 사회적 시스템은 이러한 허약함으로 인해 단 한곳의 빈틈으로도 쉽사리 무너질 수 있을 만큼 불안정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배명훈은 바로 이러한 권력-시스템적 허약함을 인지하고, 다중의 자율성이 이 빈틈을 노려 언제든지 시스템을 전복시킬 수 있다는 데 희망을 두었다고 볼 수 있다. 작가 K, 엘리베이터 기동 팀의 관리자, 아미타브를 맡은 용역 경비대원, 샤흐리반과 열 다섯명의 가게 주인들, 민소를 찾아 밤새도록 사진을 뒤진 전 세계 네티즌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율적 결정과 그로 인한 결과를 통해 ‘개인의 자율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시스템에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 스스로가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다.


6. 다중의 자율성에 거는 희망


배명훈의 소설에서는 적나라한 풍자도, ‘혁명’에 대한 의지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권력의 압제에 따른 절망 또한 없다. 이 점에서는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하 ‘난쏘공’)과 상당히 다른 면을 보인다. 기존의 한국 문단이 보여왔던 리얼리즘에서 벗어난 기법을 사용하여 옳지 못한 현실에 대해 그리고자 했다는 점에서 두 소설은 매우 닮았다. 그러나 그 기법의 활용법에 대해서는 두 소설이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난쏘공』의 ‘행복구 낙원동’은 풍자는 있으되 유머는 가능하지 않은 공간이었다. 낙원동 주민들에게 있어 시스템의 억압은 너무나도 압도적이었기에, 도저히 그들을 상대로 웃어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행복구 낙원동은 이름과는 달리 절망만이 가득한 곳이다. 지식인 지섭은 시스템적 문제를 언급하며 노동자를 계몽하는 지식인과 시스템 자체를 바꾸기 위해 노동 운동에 나설 것을 촉구한다. 지섭과 같은 지식인층의 계몽에 각성한 난쟁이의 자식들은 노동조합을 만들어 시위에 나서지만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한다.[각주:7] 난쟁이의 첫째 아들이 사형당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난쏘공』에 희망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방식으로 저항하고 투쟁하건 간에 절대로 변하지 않는 사회적 시스템이 굳건하게 버티고 있을 뿐이다.

반면에 『타워』의 ‘빈스토크 타워’는 풍자와 유머가 모두 가능한 공간이다. 배명훈의 유머러스한 말솜씨는 체제의 강고함을 묘사하면서도 체제의 허술함 또한 함께 보여준다. 빈스토크는 무책임한 권력이 터무니없는 힘을 휘두르는 공간이지만, 동시에 ‘무책임’의 허술함 속에 지탱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타워』는 ‘권력장’이라는 개념을 통해 권력이 움직이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하고(「동원박사 세 사람」) 권력이 굉장히 엉성한 임기응변으로 움직이기도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엘리베이터 기동연습」) 즉, 소설은 현실의 모습을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현실을 억압하는 시스템의 구조에 대해 파악하고자 한다. 권력의 구조를 파악하면 그 사회의 주인들이 자기 현실을 보다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는 믿음, 거기에서 비롯된 희망이 빈스토크 타워를 지탱하는 힘이다.

배명훈은 전근대적 공동체의 상실과 개인의 파편화를 비관하지 않는다. 그런 비관은 굳이 소설을 통해서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가능하다. 소설을 읽기 이전에 현대인 누구나 지독하게 실감하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 상황 자체는 이미 돌이킬 수 없다. 그러나 상황을 절망하고, ‘세상을 이따위로 만든 누군가(남)’을 조롱한다고 해서 상황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익명 사회에서는 익명의 사람들끼리만 통하는 나름의 신뢰”(p.82)의 한계는 분명하지만, 우리의 조건이 이렇다면 변화는 이 조건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래서 배명훈이 꺼낸 카드가 바로 ‘웃음’이다. "조롱과 비웃음은 억압적 권위를 겨냥하는 무기이면서 만인을 유쾌하게 만“[각주:8]든다. 유머를 통해 권력이 지닌 권위를 벗겨내고 권력의 구조와 허위를 폭로한다.[각주:9]

배명훈이 웃음을 활용하는 방식은 바흐친이 주창한 ‘카니발’의 개념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카니발이란 “대화와 공동체의 의식이며 사람들을 해방시키고 함께 참여케 함으로써 공동생활에 참여하도록 만든다. 폭력적 파괴의 형태인 혁명과 달리 카니발은 대화 속에서 이루어지며 반항의 유쾌한 몸짓이다.”[각주:10]라고 주장했다. 바흐친은 웃음의 장인 축제를 통해 모인 사람들이 체제와 억압에 대해 - ‘사유’하는 대신 - 비웃음으로서 그 권위를 추락시키는 것, 그리고 그렇게 모인 사람들끼리 하나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웃음’의 기능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바흐친의 시대에 비해 훨씬 파편화되고 시스템의 억압 또한 보다 막강해진 우리네 시대에 바흐친이 기대했던 것과 같은 카니발이 이루어질 수는 없다. 지금의 우리 사회는 어떤 정체성을 공유하는 하나의 공동체 사회라기보다는 익명성 아래 침묵하는 개개인들의 군체에 가깝다. 거기에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익명 사회에서는 익명의 사람들끼리만 통하는 나름의 신뢰’ 정도 밖에, 혹은 한국이라는 거대한 사회 아래에서 만들어지는 여러 군소 공동체 관계 뿐이다. 어차피 시스템 전체에 대한 저항이 불가능하다면, 개인에게 뭔가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면 그 정도 선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이야기해주면 될 뿐이다. 즉, 신랄하게 풍자하고 비꼬지만 행동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타워』에서 드러나는 배명훈 식 화법이다.


7. 참고 자료


민유기,「폭력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과 2008년 촛불신화의 역사적 의미」,『실천문학』2008년겨울호.

배명훈, 『타워』, 오멜라스, 2009.

연합뉴스, <네그리 : 제국, 다중, 그리고 아우또노미아>, 2003, 10, 02

자하, 「독점 인터뷰 - 작가 배명훈을 만나다 2/2」, 『환상문학웹진 거울』 73호, 2009.

자크 랑시에르, 유재홍 역, 『문학의 정치』, 인간사랑, 2009.

정혜경, 「백수들의 위험한 수다」, 『문학과 사회 2005년 여름호』, 문학과지성사, 2005.

정화열, 박현모 역, 『몸의 정치』, 민음사, 2000.

  1. 배명훈 이전에 SF 독자들에게 인정받던 한국 SF 작가는 『비명을 찾아서』의 복거일과 듀나(이영수) 정도가 거의 유이했다. 그러나 이들은 SF작가이기 이전에 지독한 (해외) SF 독자였으며, SF 독자들의 외서 취향과 맞는 면이 많았다. 예컨대 듀나는 하이텔 과학소설동호회 시절부터 창작과 번역으로 유명했고, 복거일 또한 미군기지에서 흘러나온 SF를 읽으며 성장했다. [본문으로]
  2. 특히 국내에서는 ‘공상과학소설’이라는 용어(Fantasy & Science Fiction의 오역. 원래는 두 장르를 한데 묶어 부르던 이름이다)가 널리 퍼지면서 혼란이 더욱 가중된 감이 없잖아 있다. [본문으로]
  3. 자크 랑시에르, 유재홍 역, 『문학의 정치』, 인간사랑, 2009, 12p [본문으로]
  4. 이러한 점을 강조하다 보니 1960년대 이후 미국에서 이른바 뉴웨이브 운동이 제기되기도 했다. 대체로 좌파 성향의 작가들이 주도했던 뉴웨이브 진영은 종전의 SF가 주로 ‘자연과학적 상상력’을 추구해온 반면 인문과학이나 사회과학을 통해서도 ‘SF적 경이감’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때 이후로 페미니즘이나 좌우갈등, 인종차별주의 등을 이야기하는 작품들이 활발히 창작되었다. [본문으로]
  5. 배명훈, 「부록-타워 개념어 사전」, 『타워』, 오멜라스, 2009, 264p. [본문으로]
  6. 정혜경, 「백수들의 위험한 수다」, 『문학과 사회 2005년 여름호』, 문학과지성사, 2005, 174p. [본문으로]
  7. 이 시위대의 실패는 「광장의 아미타불」에서 등장하는 타워 시위대를 연상시킨다. [본문으로]
  8. 민유기, 「폭력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과 2008년 촛불신화의 역사적 의미」, 『실천문학』 2008년 겨울호, 340쪽. [본문으로]
  9. 자하 “근데 또 보통 정치풍자 하는 분들은 글이 재미없거든요. 이야기가 없어요. 껍질만 있어요.” 명훈 “알라딘에 실은 인터뷰에 썼는데, 그냥 500층, 600층 이렇게 백 단위로 딱 떨어지면 풍자하긴 더 좋은데, 그럼 대안을 못 만든다는 거죠. 비웃기는 더 좋아요, 백 단위로 떨어지는 상징적인 숫자면. 근데 그 안에 사람을 살게 만들어야 하니까, 나는. 그래야…… 비판하고 나서 어쩔 건데? 하는 문제가 나오니까. 그래서 그걸 쓴 것 같고.” 자하, 「독점 인터뷰 - 작가 배명훈을 만나다 2/2」, 환상문학웹진 거울 73호, 2009. [본문으로]
  10. 정화열, 박현모 역, 『몸의 정치』, 2000, 81p. [본문으로]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도서 > 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과제)  (0) 2010/06/01
『타워』(발표)  (1) 2010/05/25
《판타스틱》 휴간/폐간?  (11) 2010/03/22
《판타스틱》  (0) 2010/03/03
Posted by 최진석

트랙백 주소 : http://abraxas.pe.kr/trackback/313 관련글 쓰기

지난 3일에 《판타스틱》에 대한 글을 썼었다. 그러고 난 2주쯤 뒤에 《판타스틱》이 휴간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블로그에 상당히 냉소적인 글을 썼고 사석에서야 "이렇게 할 거면 빨리 망하는 편이 낫다"라는 둥의 극언도 내뱉곤 했었지만, 막상 그 소식을 듣고 나니 기분이 영 개운치 않았다. 그런데 요새는 아예 폐가뇐다는 말까지 도는 모양이다. 휴간 소식이 비공개 게시판을 중심으로 돌던 것과는 달리 폐간 소식은 트위터 같은 공개 게시판에서도 언급될 정도.

무슨 일인가 싶어서 간만에 판타스틱 홈펭지/블로그에 가봤으나 죄다 2010년 1월 이후 기능이 정지된 상태. ...뭐냐, 이거?

일단 루머(?)에 따라 폐간이 확정되었다고 가정해보자. 어찌 된 일일까. 시공사가 페이퍼하우스로부터 《판타스틱》을 인수한지 고작 석달만이다. 시공사가 원래도 사업 철수로 유명한 회사긴 했지만 이건 좀 이상할 정도다. 시공사 경영진의 인내심이 예전에 비해 악화된 것이 아니라면 《판타스틱》의 문제가 예상보다 심각했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자본의 문제이건, 내부 역량의 문제이건.

《판타스틱》은 망할 수도 있고 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망한다면 망할만한 이유가 있었으니 망했을 테고, 망하지 않고 버틴다 해도 그 원인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위기는 다시 반복될 수밖에 없다. 판타스틱이 휴간된다 만다 하는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 않은가. 상황 자체는 그 때와 다르지 않고, 별 일이 없다면 앞으로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저번처럼 이번 위기 또한 어찌어찌 버텨낸다 해도 다음에 같은 위기가 발생한다면, 그 때가서도 이번만 버텨주길 간절히 기도나 할 셈인가. 그보다 필요한 건, '장르문학 전문지' 판타스틱의 상황에 대한 총체적인 분석이다. 

장르문학 잡지는 어떠한 성격을 갖춰야 하는가, 판타스틱은 그러한 성격에 충실했는가를 분석해야 한다. 요컨대 '판타스틱의 폐간을 장르문학진영의 책임으로 돌릴 수 있느냐'의 문제가 된다. 조악한 비유이긴 하지만 소련(국가사회주의)의 패망을 거의 모두가 사회주의 전체의 실패로 받아들였다는 점을 생각해보라. 《판타스틱》에 대해서도 비슷한 현상이 발생할 거다. 그 잡지의 문제를 곧 장르문학의 문제로 연결시켜서 '역시 장르문학 잡지는 안된다'는 식의 헛소리가 반드시 제기되지 않을까. 판타스틱이 장르문학 잡ㅈ지로서 얼마나 충실했는지는 이야기하지 않고서 장르문학 독자들이 판타스틱을 안사줘서 망했다는 식의 - 애국심 마케팅과도 유사한 - 개드립을 막기 위해서라도 《판타스틱》에 대한 분석은 필요하다.

그래도 뭐 《판타스틱》 쪽에서 무슨 공식 발표를 해야 이야기가 되지 이건 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도서 > 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타워』(발표)  (1) 2010/05/25
《판타스틱》 휴간/폐간?  (11) 2010/03/22
《판타스틱》  (0) 2010/03/03
『끝없는 이야기』  (1) 2009/12/05
Posted by 최진석

트랙백 주소 : http://abraxas.pe.kr/trackback/308 관련글 쓰기

얼마 전에 모 커뮤니티에서 판타스틱이 대화 주제로 나왔었습니다. 저도 평소 그 잡지에 대해 가졌던 생각을 풀어냈었죠. 2010년 2~3월호는 딱히 의식하지 않았고요. 글을 쓰다 보니 현재 상태가 지속되는 한 제가 《판타스틱》에 관심을 가질 일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마지막으로 《판타스틱》에 대한 견해를 정리하는 차원에서 그 때 썼던 글을 고쳐 내놓습니다.




0. 기획 : 방향성/정체성이 없다

따지고 보면 판타스틱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기획과 정체성의 부재입니다. 

판타스틱이 창간된게 2007년 4월입니다. 기간으로만 치면 나온지가 거의 3년이 다 된 잡지죠. 그런데도 저는 아직까지 판타스틱이 무슨 잡지인지 모르겠습니다. 장르문학 잡지라고는 하지만 판타스틱이 장르문학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진 잡지인지, 어떤 장르를 다루고자 하는지, 또 잡지를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가고자 하는지를 느끼지 못하겠다는 거죠. 

이런 현상을 두고 예전에 판타스틱 측에서는 '여러 가지 실험을 하는 중'이라고 하기도 하던데, 말도 안되는 소리죠. 독자들에게 내놓을 말이 아닙니다. 베타 서비스판을 돈 받고 파는 회사도 있습니까. 애당초 잡지의 지향점에 대해 고민하지 않은 결과가 방향성 상실, 우왕좌왕, 좌충우돌이라는 결과로 나타났을 뿐인데 그걸 '실험'이라는 말로 떼우려 한다면 너무 안일한 거죠.

그 '실험'들이 문제되는 이유는 하나 더 있습니다. 고정 독자층이 안생기거든요. 요즘의 '장르문학' 독자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장르만을 소비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근래 들어 SF도 보는 판타지 독자들이 늘었다지만 그거야 요새 판타지가 하도 죽다 보니까 궁여지책으로 넘어오게 된 것이고요. 그렇다면 '다양한' 장르를 취급한다는 판타스틱은 장르문학의 독자들에게 큰 매력을 주지 못합니다. 앞으로 나올 권에서 어떤 장르를 다뤄줄지 알지도 못하겠는데 무슨 깡으로 정기 구독을 합니까. 장르문학에 막 입문해서 정보가 절실한 초보 독자나 아예 후원 차원에서 정기 구독을 해주는 파워 유저 아니면 굳이 정기 구독을 할 필요가 없는 거죠.

왕년에 판타스틱이 휴간하기 전에 정기 구독자를 늘리기 위해서 이런 저런 경품을 제공하는 등 상당히 많이 애를 썼었는데... 생각해보면 그게 다 헛짓이죠. 왕년에야 장르문학이라는 이름 하에 SF 독자가 판타지도 보고 추리도 보고 그랬다지만 그거야 정말 전설 같은 이야기죠. 장르문학 진영 자체가 워낙에 협소하던 시절의 이야기기도 합니다. 지금 상황에서 그런 독자들을 기대하기는 어려워요.

이번에 판타스틱에서 라이트노벨 특집을 내면서 상당히 이례적인 표지를 쓰기도 했지만, 그게 판타스틱의 독자층 확대로 이어지진 못할 겁니다. 이번 호에 관심을 갖고 사본 독자라 하더라도 그 다음호에 라노베 관련 기사가 없다면 안사겠지요. 그 사람들이 바보는 아니니까요.

1. 기사 : 내용이 부실하다

그러한 정체성의 문제는 기획 기사의 부실함으로도 연결됩니다. 딱히 집중하는 장르가 없으니 역량이 집중되지 않고, 그러다보니 기사도 좌충우돌인거죠. 원체 실린 기사 자체도 적지만 그나마도 볼만한 기사가 많지 않습니다. 몇호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커피 관련 기사가 실렸을 때는 정말 골때렸었죠. 그래도 2009년 봄호의 김내성 특집은 괜찮았지만, 그걸로 끝이었죠. 그나마 중국 전설 관련 기사와 아서왕 전설 관련 기사가 종료된 뒤에는 뭐 볼게 있나 모르겠습니다. 어쩌다가 운좋게 내공 좋은 필진이 걸린 경우라면 모를까 그 외에는...

이를테면 지난 호에는 외국의 장르문학상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더군요. 저야 지난호를 보지 않아서 기사가 어떤 식으로 구성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주변의 평으로는 대충 이러저러한 상이 있다고 소개하는 수준이었던 모양이더군요. 그게 큰 의미를 지닌다고 보긴 어렵죠. 막말로 인터넷만 뒤져도 다 나오는 정보입니다. 판타스틱까지 사볼 정도의 SF 독자라면 거기에 대해 대충은 알기 마련이고요. 설령 아무것도 모르는 독자가 있었다고 해도 그 기사에 무슨 의미가 있었겠어요. 휴고상이니 네뷸러상이니 하는 걸 수상했다고 (장르 밖의) 독자들이 눈길이나 주던가요? 굳이 장르문학상에 대한 기사를 싣고자 했다면 한국에서 명멸해간 수많은 장르문학상과의 비교를 통해 한국 장르문학계의 과제가 무엇인지 살펴보는 작업이 더 유효했을 겁니다.

예전에 거울에 실린 판타스틱 2009년 여름호 비평 기사에서 "이따위로 할 거면 차라리 소설 번역할 고료로 외국 장르 칼럼이나 번역하라"는 식으로 이야기하기도 했는데, 가벼이 넘길 말이 아닙니다. '장르문학' 잡지로서의 명확한 정체성도 없는 상황에서 값싼 가격에 후려친 원고나 실어대는 잡지라면 굳이 오프라인에서 나올 필요도 없기 때문이죠.


2. 소설 : 수록이 절실하진 않고, 작가에 대한 다른 방식의 보상이 필요하다

제 주변에서는 판타스틱의 소설 비중에 대한 말이 좀 많이 오가는 편입니다.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의견이 분분한데, 저는 일단 판타스틱이 굳이 소설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판타스틱이 아니더라도 소설을 연재할 공간은 충분하니까요. 크로스로드, 문장, 다음, 네이버... 비정기 공모전도 많이 늘었습니다. 고료를 주지 않는 연재공간까지 더한다면 훨씬 많아지고요. 굳이 판타스틱까지 소설 연재 공간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할 필요는 없다는 거죠.

물론 그렇다고 판타스틱에 소설이 실리지 않아도 된다는 건 아닙니다. 그랬다간 잡지 못팔죠. 다만 굳이 거기에 집착할 필요가 없고, 굳이 소설을 싣겠다면 잡지, 특히 오프라인 잡지만의 강점을 살려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판타스틱이 그러한 자신들의 특색을 잘 살리는지는 실로 의문입니다. 가령 장편 연재가 주를 이루는 상황부터가 그렇죠. 이건 판타스틱이 자신들의 장점을 살리기는 커녕 단점조차 분석하지 못했던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대체 무슨 깡으로 장편 비중을 늘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장편 비중이 커질수록 신규 독자의 진입 장벽은 더 커질 텐데요. 

또 한가지, 판타스틱이 좋은 원고를 끌어모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소설가들이 작품에 대한 보상으로 가장 원하는게 뭘까요? 돈과 평가입니다. 창작에 대한 경제적 보상의 필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겁니다. 글을 쓰겠다고 마음 먹은 사람들인만큼 자신의 작품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평가받고 싶어하는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판타스틱이 작가들에게 안겨줄 수 있는 비금전적 보상은 뭐가 있을까요.

판타스틱은 정부 지원을 등에 업은 크로스로드도 아니고 막강한 조회수를 안겨줄 포털 사이트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문장처럼 투고한 작가들을 '작가 지망생' 취급하는 피드백을 해줄 수도 없어요. 그렇지만 오프라인 잡지인 판타스틱만이 가능한 영역이 분명 존재할 겁니다. 수록된 작품에 대한 분석 기사나 토론회(합평회?)를 제공할 수도 있겠고, 판타스틱과 관계된 작가들끼리의 워크샵을 열 수도 있겠죠. 미국에서야 테드 창을 배출한 클라리온 워크샵이니 하는게 활발하게 이루어지지만 한국에서는 그런 워크샵이 그렇게까지 크게 이루어지지는 않는게 현실이죠. 물론 저도 판타스틱이 그러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그러한 시도를 해볼 명분은 있을 겁니다.

3. 서평 : 홍보 기사 수준 좀 넘어서라

현재 실리는 서평 관련 기사라고는 박도빈 씨가 그리는 만화 정도가 전부인데... 말이 서평 기사지 사실은 책 광고라고 봐도 무방하죠. 특정 작품에 대한 심도 있는 비평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일전에 판타스틱에서 『싸우는 사람』의 서평 기사를 써줄 사람을 찾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결과물이 어찌 나왔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청탁해서 받은 작품도 투고작 취급한다는 그네들만의 관례를 생각해보면 썩 좋은 의도에서 받았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신간 홍보 기사나 써달라는 식이었겠지요.

따지고 보면 장르문학계에서 비평 기사가 필요한 건 그런 신간이 아닙니다. 장르문학 시장, 특히 SF&판타지 쪽이 원체 홍보가 부실한 편이라지만 그나마 신간은 사정이 낫습니다. 팬들이 열심히 소식을 퍼날라주니까요. 하지만 출간된 후 일정 시간이 지난 구간 서적들은 그나마의 관심도 받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절판된 다음에야 어쩌다 누구 눈에 띄어서 희귀본이니 절판본이니 하는 소리 듣고 끝인 거죠.

특히 SF 계열의 출간이 급속도로 증가하면서 작품들이 소모되는 경향이 훨씬 심해졌어요. 심지어는 SF 팬들조차 출간 사실을 모르는 상태에서 툭 튀어나왔다가 사라지는 작품도 있을 정도죠. SF가 기본적으로 팬덤 마케팅에 기대는 면이 크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책이 나올 때마다 무슨 분야의 거장이니 무슨 상을 수상한 걸작이니 하며 떠들어대지만 그 '거장'의 '걸작'들은 나오자마자 잊혀집니다. 팬덤 외부는 차치하더라도 팬덤 내부에서조차 그에 걸맞는 대접과 관심을 쏟아주는 경우가 과연 얼마나 됩니까? 지금의 장르문학 팬덤에게 필요한건 어느 작가의 작품이 새로 출간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출간된 작품에 대한 관심과 분석입니다. 장르에 대한 이런저런 대화와 평론을 통해 평가를 축적하고, 그렇게 하여 '장르의 고전'을 형성해야 하는 것이지요.

마크 트웨인이 고전을 두고 '모두가 좋다고 말하지만 모두가 읽지 않는 책' 뭐 이런 식의 시니컬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지만, 고전의 가치는 가볍지 않습니다. 고전은 해당 장르의 성격을 말해주는 존재이면서, 독자들에게 해당 장르의 독서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 알려주는 가이드라인도 하거든요. 그렇기에 고전은 매 시대마다 새로 정의되는 겁니다. 그런데 한국의 SF 팬들은 여전히 그리폰 북스니 아이디어회관문고니 하는 전설이나 회상하는 판국이지요. 중고시장에 가봐도 이제는 절판본으로 장사해보려고 환장한 장사치들이나 돌아다니는 판국이고요. 우리가 언제까지 똑같은 염불이나 외야 합니까. 

그나마 이런 풍토에서는 '그리폰 북스'의 전설 같은건 재현되지 못합니다. 알아야 대접도 해주죠. 

따라서 판타스틱이 관심을 쏟아야 하는 부분은 신간 소개가 아닙니다. 물론 그 부분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자칫 묻히기 쉬운 작품들을 자꾸 발굴해내야 한다는 거죠. 그렇게 함으로서 한국 SF 팬덤의 '고전'을 형성하고, 장르의 성과를 축적해야 한다는 거죠. 그건 장르 커뮤니티나 블로그 등에서 이루어지기 어려운 영역입니다. 그런 게시판에는 써봐야 금새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버리고, 그나마의 반향도 해당 공간 안에서밖에 이루어지지 않으니까요. 이런 심도있는 작업은 오프라인 잡지가 더 효율적입니다. 판타스틱은 판타스틱 2009년 봄호의 '김내성 특집'에 대해 사람들이 보여준 호평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4. 인터뷰 : 업계 전반이 다 부실하다

판타스틱의 인터뷰 수준에 대한 불만도 의외로 크더군요. 왕년의 홍정훈 씨 인터뷰라던가. 사실 인터뷰 기사들이 시원찮은 거야 그리 놀랄 일도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판타스틱만의 문제도 아니니까요. 장르문학 작가를 데리고 쓸만한 인터뷰를 뽑아낼만한 리포터 자체가 얼마 없습니다. 장르문학에 대해 깊이 아는 사람 자체가 별로 없으니 당연한 노릇이죠. 판타스틱의 문제라기보다는 기본적으로 이 바닥 자체의 역량이 부족한 탓이라고 봐야 합니다.

예전에 다치바나 다카시가 인터뷰 대상과 그 분야에 대한 기자의 이해 수준에 따라 인터뷰의 질도 천지차이로 달라진다고 했는데, 장르문학판이라 해서 별 다르지 않아요. 리포터가 해당 작가에 대해 잘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인터뷰의 질문과 답변 내용은 천지차이로 달라집니다.

특히 거울 작가들에 대한 인터뷰를 보면 확실히 드러납니다. 거울에 실린 인터뷰 기사와 외부 기사의 질적 수준이 민망하리만큼 차이나는 경우를 많이 보고, 인터뷰하는 작가들도 거울 인터뷰와 다른 공식적 인터뷰와의 차이를 많이 거론하곤 합니다. 그렇다고 거울에서 인터뷰를 진행하는 분들이 전문 리포터는 아닙니다. 단지 평소 사적인 교류를 해왔고, 작품에 대해서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던게 인터뷰에도 깊게 반영되었을 뿐이죠. 잘 모르는 사람이 만들 수 있는 질문은 한정되기 마련이거든요. 『타워』 출간 후 배명훈 씨가 외부 인터뷰만 20회 이상 하다 보니 이젠 무슨 질문이 나올지 짐작할 정도가 되었다고 했는데, 이 역시 생각해봐야 할 대목입니다.

그렇다면 판타스틱은 뭐 잘못한 게 없단 말인가. 많죠. 장르문학 잡지라면서 왕비호, 레진, 쿄코 등을 인터뷰했다는 것 자체가 미쳤다는 반증 아니겠습니까. 그나마 레진이나 쿄코는 장르문학에 대한 포스팅을 '어쩌다가' '가끔'이라도 하는 수준이 되었으니 어떤 경위에서 인터뷰에 들어갔는지 이해는 되는데 왕비호는 대체 무슨 짓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생각해보면 왕비호 그 사람도 딱해요. 무슨 잡지랑 인터뷰하는지는 알았을까요?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도서 > 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판타스틱》 휴간/폐간?  (11) 2010/03/22
《판타스틱》  (0) 2010/03/03
『끝없는 이야기』  (1) 2009/12/05
『뱀파이어 레스타』  (4) 2009/12/01
Posted by 최진석

트랙백 주소 : http://abraxas.pe.kr/trackback/304 관련글 쓰기

한국 근현대사와 기독교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류대영 (푸른역사, 2009년)
상세보기

1. 신학(神學)은 교양일 수 있을까?

경제학이나 정치학을 공부하기 위해 반드시 그 학문의 전공자가 될 필요는 없다. 철학이나 정치학을 '교양 삼아' 공부한다고 해서 말리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다만 그것을 왜 배우려 하느냐는, '질문'을 받을 뿐이다. 말하자면 신학이나 종교학이 아닌 여러 세속 학문 분야에 대해서는 비전공자로서 해당 학문을 공부하는 행위에 대한 반발이 생기지 않는다. 그것이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하나의 '교양'임이 인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형이상학에 속한다고 '간주되는' 학문들, 특히 신학에 대해서는 이러한 관대한 태도를 찾아보기 어렵다. 특히나 비신앙인으로서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장애물과 마주해야 한다. 공부에 들어가기 전에 예상했던 바와 맞지 않는 부분도 비신앙인을 곤혹스럽게 하지만 이는 어느 학문에서건 비전공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직면하기 마련인 문제라고 이해할 수나 있다. 무엇보다도 그 비신앙인을 괴롭히는 부분은 '믿지도 않으면서 그걸 배워 뭐에 써먹겠느냐'는 냉소어린 시각이다. 세속 학문식으로 말하자면 '전공 중심주의'를 넘어서는 '전공 근본주의'를 전공자(신앙인)도 아닌 비전공자들이 부리는 셈이다.

나는 신에 대한 영역이 비단 해당 신앙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믿는다. 그 어떤 문제이든지간에 이 땅의 인간과 무관할 수는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신앙과 신학, 종교도 예외는 아니다. 방식은 다를지언정 신에 대한 물음이 듣고자 하는 것은 결국 인간과 세계, 신에 대한 관계이다. 신앙은 인간의 세계관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그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과 세계에 기여하고자 하는 방식을 규정한다. 투철한 신앙인일수록 자기 신앙에 근거하여 세상의 모든 일을 해석하고, 신앙을 자기 행동의 근거로 삼기 마련이다. 함석헌이나 장준하의 예가 그것이다.

탁월한 사회 운동가이자 한 종교의 독실한 신자였던 그들의 세계관에서 기독교 신앙과 사회 운동에 대한 신념은 분리되지 않는다. 그들은 기독교 신자로서 사회 운동에 헌신했고, 운동에 대한 근거를 신에 대한 믿음에서 찾았다. '주께서 나의 정의로움을 보증하신다'. 사회운동가이자 신앙인이었던 그들에게 그만큼이나 큰 격려가 있었으리라 생각하기는 어렵다. 기독교의 신은 그 두 사람에게 비신앙인들은 갖지 못하는, 사회 운동에 대한 가장 강력한 동기를 선사한 셈이다. 물론 이러한 사례는 분명 기독교 신앙인 전체에 적용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칸트의 발언을 생각해라. 그는 신앙이 인간으로 하여금 보편 윤리를 실천하고 나아가 보편 윤리 자체가 되고자 하는 의지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그 또한 유효하다고 이야기했었다.

신앙이 세계관을 구성한다면 거기에서 비롯된 신학과 종교는 보다 현실적인 영역에서 신앙인과 사회를 연결시킨다. 종교는 그러한 신앙인들이 모인 사회 공동체로서 하나의 사회적 기능을 담당했고, 신학은 신의 섭리가 지상과 관계맺는 방식을 학문의 형식으로 이해하고자 했던 노력을 보여준다. 신앙인들이 비신앙인들과는 고립된 세계에서 살지 않았듯이 비신앙인들 또한 신앙인들에게서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2. 한국 근현대사와 기독교, 한국 기독교사와 근현대

나는 종교를 신화나 의례와 연결시켜 해석하는 엘리아데의 종교학 이론에 단 한 번도 매력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보다는 마르크스나 트뢸치가 종교현상의 본질을 훨씬 깊게 통찰했다고 믿는다. 종교의 진면목은 신화나 의례, 혹은 상징을 분석하기보다는 정치-경제-사회와 만나는 지점을 관찰하면 더 잘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어느 때부터인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역사를 공부하면서 나는 순결하게 고유한 종교의 영역이 있다고 믿지 않게 되었다. (책을 내면서, 5p)

『한국 근현대사와 기독교』는 한 종교의 역사를 세속적인 관점에서 증명하려 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의를 갖는다. 이 책은 '기독교사'를 이야기하고자 하지 않는다. 이 책의 제목부터가 기독교 대신 '한국 근현대사'를 앞세우는 점을 상기해보라. 그것은 종교를 정치·사회·문화적 맥락에서 탈락시키지 않으려 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물론 저자의 글이 완벽하진 않다. 종교의 사회 공동체적 성격과 그 긍정적인 면을 강조하려다 보니 군데 군데 빈 부분이 있는 건 사실이다. '기독교'를 이야기하는 제목과는 달리 실제 지면은 거의 개신교, 그 중에서도 특정 종파의 내용에 치중된 점도 눈에 걸린다. 그러나 종교와 사회와의 관계를 비추고자 한 원칙 자체는 책 내용 전체를 일관한다. 그 의의를 무시하기란 어렵다.

딴에는 신앙인 내부에서 기독교사를 이 정도나마 세속적인 시선에서 바라본 책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복된 일일지도 모른다. 얼마 전에도 어느 노 학자가 전후 남한 지역에 개신교가 빠르게 자리잡은 상황에 대하여 "기독교가 풍류도 등 한국 고유의 전통 사상과 합치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따위의 황당한 분석을 내놓았던 사정을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텍스트에서는 가장 비세속적이고 가장 신앙적인 상황조차도 당대의 정치·사회·문화적 상황과 밀접하게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해낸다. 개신교는 구한말에 처음 소개될 때부터 서구 근대 문명을 상징하는 가치 체계로 이해되었고, 근대적 가치관에 대한 조선인들의 이해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1900년대 초 선교사들이 발행했던 신문에서 상당한 지면을 종교적 내용이 아닌 '계몽'에 할애하였다는 점은 당대 개신교가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자 했는지를 보여준다.

1900년대에 평양에서 수행되었던 '대부흥운동'는 종교적 목적과 세속적 이해가 결합된 흥미로운 사례로서 제시된다. 수많은 비신자가 개종을 하고 많은 수의 신자들이 성령을 체험하는 등의 현상이 일어났던 이 자리만큼이나 종교적인 자리는 드물다. 그러나 조선인 참가자들은 영미권에서 일어났던 부흥회와는 사뭇 다른 반응을 보였다. "기독교에서 죄란 신 또는 인간과의 관계에서 맺어진 법이나 계약을 어기고, 그 결과로 신이나 인간과의 관계가 파괴되는 현상을 말한다. 그런데, 부흥운동 기간에 한국인 개종자들이 보였던 회개는 거의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것이거나 개인의 행위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3장 20세기 초 한국 교회부흥현상에 관한 재검토, 120~121p)

죄의 개념에 대하여 당시 대중은 다분히 세속적인 이해를 보여주지만, 그리 놀랄 아니다. 대중이 기독교를 접하기 전에 몸에 베였을 유학적 세계관은 본래 대단히 현세지향적이며 공동체지향적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형이상학적 죄라는 개념이 전하는 신을 통한 개인적 차원의 구원이라는 테마는 당시 대중에게 상당히 낯설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적 세계관의 보급은 종래의 유교에서 죄로 규정하지 않았던 항목들을 죄로 볼 수 있게 하였고, 이것이 '대부흥회'라는 현상으로 나타난 셈이다.

대부흥회라는 행사가 선교사들을 비롯한 교인들의 철저한 계획하에 기획되었고, 그 기독교 세계관의 보급 또한 대부흥회같은 거대한 종교 체험이 아니라 거기에 자극받은 한국 교인들의 사역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분석 또한 주목해볼만 하다. 신의 역사함은 이렇게 인간의 힘을 통해 이루어진다.

초기에는 사회운동의 수단으로서 수용되었다는 점에서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수용사는 맥을 같이한다. 이러한 상황이 갈리고 기독교와 사회주의가 반목하기 시작한 것은 1900년대 초반, 특히 1906년과 1920년대를 기점으로 한국 기독교가 급격히 계몽적 색채를 잃으면서부터이다. 이후 사회주의가 기존에 한국 기독교에 의해 수행되었던 계몽을 수행하게 되면서 사회주의자들에 의한 종교 비판이 이루어졌고, 여기에 기독교 내부에서 다양한 반향이 이어지면서 기독교 진영은 다양한 정치적 색채를 가진 집단으로 구분된다.

초기 북한 정권과 기독교 목사들과의 유착 관계는 한국 기독교와 한국 사회주의의 관계를 보여주는 특이한 사례로서 유념해볼만 하다. 김일성 자신이 남긴 회고록에 따르면 김일성은 본인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 집단에서 자랐고,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도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이러한 성향은 초기 북한 정권의 종교 정책으로도 이어졌다. 건국 당시에는 북한 정권에 여러 기독교(주로 감리교 계열) 목사들이 참여하였고, 이어진 반종교 정책도 러시아나 중국의 사례에 비하면 '비교적' 온건했다. 북한의 종교 정책은 '신앙은 인정하나 (국가에 반하는) 종교는 금지한다'로 요약된다. 신앙 자체는 인정하나 신앙인들의 반국가행위는 처벌하겠다는 것이다. 이후 북한은 기독교와의 유착 관계를 정리하고 '주체사상'의 길을 걷지만, 이 주체사상 또한 기독교 교리에서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음이 지적된다.

북한 정권을 적그리스도로서 규정하는 보수 기독교의 선언에만 매몰된다면 김일성 정권의 성격에 대해 명확하게 짚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보수 기독교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신학적 판단만이 아닌 세속에 대한 그들의 입장에서도 찾아야 한다. 기독교 좌파, 기독교 우파, 그 안에서도 나뉘는 복음주의 좌파와 복음주의 우파 등의 구분은 신학에 대한 이해 이전에 세속에 대한 그들의 가치관 차이에서 비롯된다. 

오늘날의 한국 기독교 진영은 그 가치관에 따라 신학을 서로 다른 방식에서 이해하는 집단의 집합에 가깝다. 기독교 진영은 기독교 좌파라 칭할만한 기독교 사회주의자부터 극우적 근본주의자까지 다양한 입장을 보인다. 심지어 '복음주의'조차도 기독교 근본주의자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복음주의는 다양한 비종교적 요소와 결합하여 복음주의적 여성주의, 복음주의 좌파 등 다양한 진영을 형성해낸다. 성경이라는 권위에 의존하기는 매한가지면서도 그 적용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를 보이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가 보수적인 집단이라고 말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그리 타당한 분석이 아니다. 

이러한 분화 현상은 성경이라는 권위 자체가 수천년에 걸쳐 축적된 다양한 견해의 집합에 가깝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성경의 독자들이 성경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기도 하다. 신학적 해석의 차이보다는 성경 읽기를 유도했던 당대 상황에 대한 고민들이 그러한 다양한 성경 읽기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3. 신앙인의 세계와 비신앙인의 세계는 다르지 않다.

맹자는 "하늘이 보는 것은 우리 백성들을 통해서 보고, 하늘이 듣는 것은 우리 백성들을 통해서 듣는다."고 하였다. 요 임금이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고 순에게 양위했다는 고사에 대해 한 말이다. 『맹자』「만장장구」에 그 기록이 보인다. 전승에 따르면 당시 모든 사람들이 양위를 환영하며 순 임금을 따랐다고 하는데, 맹자는 당대의 통념이었던 장자 승계와 대치되는 이 고사를 '하늘이 시킨 것'이었다며 지지한다. 물론 맹자에게 하늘은 곧 백성과 동의어가 된다.

유일신 신앙에 대해 대단히 냉소적이었던 유학자들의 하늘(天) 관념은 물론 기독교의 유일신 세계관과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백성의 뜻을 '하늘'의 뜻과 동일시했던 세계관 자체는 대단한 시사점을 준다. 섭리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가 서로 다르지 않다는 점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이해할 때 비로소 종교적 세계관과 비종교적 세계관이 하나가 된다.

신앙이 사회 공동체나 사회 담론에서 일정 영역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이상, 비신앙인 또한 신에 대한 물음을 끊임없이 던져야 한다. 신앙을 이해하기 위해 자신의 비신앙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단지 신앙인들과는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할 뿐이다. 그것은 우리 세계를 보다 잘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으로서 우리 자신에게 기여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도서 > 사회과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 근현대사와 기독교』  (0) 2010/02/19
『최고의 변론』  (1) 2009/02/23
『부동산 계급사회』  (0) 2009/02/23
『정치교회』  (0) 2008/12/22
Posted by 최진석

트랙백 주소 : http://abraxas.pe.kr/trackback/302 관련글 쓰기

《원피스》

도서/만화 2010/02/15 18:48
낭만적 무법자들에 대하여

《원피스》는 해적 만화라고 합니다. 초장부터 해적왕의 죽음으로 시작했고, 주인공인 루피부터 하여 해적이라 자칭하는 캐릭터들이 한둘이 아니지요. 그런데 우리의 주인공 해적들이 '해적'으로 불리는 이유는 그리 명확하지 않습니다. 루피 일당이 새로운 마을에 도착했을 때를 생각해보세요. 그 때마다 항해사인 나미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식량이나 물을 '구입'하는 일입니다. 여의치 않을 때는 '수렵' 활동을 통해 이를 해결하고요. 세상에 물품을 돈 주고 사는 악당도 있습니까? 겉으로만 본다면 루피 해적단은 해적단이라기보다는 그냥 평범한 선원들처럼 보이지요. 한마디로 말해 원피스의 주인공 해적들은 우리가 아는 해적, 즉 소인배적 약탈자로서의 면모를 거의 드러내질 않습니다. 

비단 루피 일당만이 아닙니다. 루피 일당에게 우호적인 샹크스 해적단, 흰수염 해적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이 민간인을 괴롭히는 장면은 거의 전무하고, 심지어는 일반 마을 사람들과 공존하는 모습마저 보이지요. 물론 원피스의 무대가 이런 낭만적인 반역자들만 가득찬 세계는 아닙니다. 버기 해적단이나 클리크 해적단같은 소인배적 악당들도 명백히 존재하지요. 그러나 루피 일당은 이런 현실적인(?) 해적단과 어울리기는커녕 오히려 반목하고, 심지어는 토벌(?)하기까지 합니다. 어떻게 보면 해군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하는 셈인 거죠.

루피 일당이 이런 악당 토벌을 의식적으로 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루피 일당 자신은 의적질(?)을 한다는 의식 자체가 없어요. 그냥 내 '동료'가 괴롭힘당하는게 보기 싫으니 때려눕힌다는 식일 뿐입니다. 하지만 루피 일당의 의적질이 '동료'만을 구원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동료의 아픔을 씻어내기 위해서는 그 동료와 아픔을 공유했던 수많은 사람들까지 함께 구원해야 합니다. 결과적으로는 그 동료와 마찬가지로 불합리한 폭력과 터무니없는 억압에 신음해야 했던 민중까지 구원하게 되지요. 루피는 거의 본능 레벨에서 정의를 구현하는 자인 셈이지요.

따지고 보면 루피만큼이나 희안한 캐릭터도 없습니다. 흔히 이영도 소설을 두고 캐릭터가 작가의 장기말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불평하는 독자를 꽤 많이 봅니다만 원피스의 독자들이 루피에 대해 그러한 불평을 하지 않는다는게 신기할 정도에요. 따지고 보면 후치나 미 그라시엘, 정우의 기계새가 수행하는 정도 이상으로 작가의 뜻을 대변하는 캐릭터인데요.

루피는 살아있는 캐릭터로서의 성격을 거의 보여주지 않습니다. 눈물짜는 과거들을 가진 다른 동료들에 비하면 이상할 정도로 과거에 대해 알려진게 없고, 특별히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도 없습니다. 소년만화의 주인공으로서 으레 보이기 마련인 특징들(바보 속성, 식탐 등)을 보여줄 때를 제외하면 루피는 늘 '동료!'라는 단어를 입버릇처럼 내밀면서 악당을 거꾸러뜨리는 캐릭터일 뿐입니다. 부패와 폭력에 억압된 자가 보이면 달려가서 악당을 두들겨팬 뒤 구원해주는 영웅이자 대속자이지만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때론 '정의'(justice)라는 가치에 대한 상징 외엔 아무것도 아닌 인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여담이지만, 그 때문에 루피가 고잉메리호의 처분을 두고 우솝과 반목하는 장면을 볼 때 굉장히 생경했었습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제게 루피는 살아 움직이는 캐릭터가 아니었습니다.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 곧 정의의 구현에 대한 수단이자 상징에 불과했지요. 그런 캐릭터가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고 편견을 가지는 걸 보니 참 낯설더군요.)

루피의 목표, 곧 해적왕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루피 해적단이 지금까지 걸어온 여정을 보면 추측 가능합니다. 루피는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민중을 구원하면서 동료들을 얻으며 또다시 다른 민중을 구하러 가는 모습을 보여왔습니다. 의도하진 않았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그랬지요. 그리고 루피의 동료들은 루피가 구원했던 민중을 대표하는 자로서 루피와 함께 합니다. 즉, 루피가 - 세계 정부는 가져다주지 못하는 - 정의와 평화를 상징한다면 루피의 동료들은 그러한 정의에 희망을 거는 자들을 상징한다고 봐야겠지요.

따라서 루피 일당이 선장에 대해 보여주는 절대적인 신뢰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겁니다. 설령 본인이 의도하진 않았다고 해도 루피는 자신들을 괴롭히던 억압을 구축하고 정의를 실현해주었습니다. 루피와 함께 여행을 하고, 루피가 해적왕이 되면 그러한 정의로운 세계가 구현되리라고 믿는 거죠. 그 캐릭터들은.

모험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루피가 대적해야 하는 악(惡)의 규모가 커지고, 루피가 구원해야 하는 사람들의 규모도 커지지다. 처음에는 시골 마을에 앉은 껄렁패들이나 두들겨패는 정도였지만 나중에는 부패한 국가 권력(쵸파 영입 에피소드)이나 국가에 대한 반역자(알라비스타 왕국 에피소드), 심지어는 세계 정부 전체에까지 확장됩니다.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혁명군의 활동과 궤를 같이하게 되는 거죠.

듣자하니 작년에 오다 에이이치로가 "루피에게 두 명의 동료가 더 생길 것"이라고 했는데, 아마 루피는 그 동료들을 얻기 위해 드럼 왕국이나 알라비스타 왕국보다는 훨씬 큰 무대에서 훨씬 많은 민중을 구원해야 할 겁니다. 그러면서 해적왕의 길을 걷겠지요. 말하자면 해적왕이란 세계 정부를 대신하여 세계에 평화와 정의를 가져다줄 새로운 질서를 상징하는 존재입니다. 이로서 루피네가 해적, 곧 무법자로서 띄는 성격이 분명해지지요. 무법자란 본디 법과 무관하게 움직이는 자이고, 그로서 안정된 체제를 위협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부패한 권력 그 자체의 입장에서 본다면 최악의 '악당'인 셈이고요.

세계 정부가 선한 집단이 아니라는 사실은 시리즈 전체를 통해 상당히 자주 암시됩니다. 아론 해적단 같은 무뢰배들을 제대로 청소하지도 못했고, 와포루 국왕 같은 악당 군주도 세계 정부의 한 축을 차지하지요. '버스터 콜'의 사용이나 세계 정부 고위 간부들, 귀족들이 보여주는 행패 등은 참으로 여러가질 시사합니다. 흰수염 해적단이나 샹크스 해적단 등은 이런 부패한 구질서에 저항하는 일종의 레지스탕스입니다. 따지고 보면 이들이 그냥 '무뢰배'에 불과한 '젊은' 해적들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것도 당연하죠. 

원피스라는 만화가 처음부터 이랬을까요? 그건 모르지요. 하지만 저는 적어도 드럼 왕국 에피소드나 알라비스타 왕국 에피소드를 기점으로 원피스라는 만화가 완전히 달라졌다고 생각합니다. 그 에피소드들을 기점으로 원피스의 주인공들이 대적해야 하는 상대들의 규모 자체가 완전히 달라졌고, 작가가 간간히 던져주던 설정이나 문제 처리 방식도 그 전에 비해 상당히 묵직해졌습니다.

그 전까지의 에피소드는 대체로 이런 식의 전개로 진행됩니다.

1. 독재 권력의 폭압에 신음하는 민중(혹은 동료) 제시
2. 루피 일당의 등장
3. (루피 일당의 동료 영입)
4. 루피의 악당 정벌
5. 무대 이동

하지만 드럼 왕국 에피소드를 기점으로 4번과 5번 사이에 '새로운 질서 확립'이라는 순서가 들어갑니다. 루피 일당이 와포루 국왕을 쓰러뜨리자 드럼 왕국에 '새로운' 국왕이 즉위함으로서 새로운 질서가 확립되는 모습이 분명히 제시되었고, 알라비스타 왕국에서는 처음부터 '혁명군'이라는 존재들이 제시되었지요. 그 전까지의 원피스 세계에서 민중이란 그저 폭압에 신음하는 존재였을 뿐입니다. 이어지는 하늘섬 에피소드에서도 억압자인 갓 에넬에게 저항을 하는 민중들이 제시되었고, 갓 에넬의 실각 후 다시 새로운 질서가 확립됩니다. (물론 새로 즉위한 왕은 예전의 그 인물이지만, 루피 해적단과의 활동을 거친 뒤의 그 왕국은 예전의 왕국으로 되돌아갔다고 보기가 어렵지요)

따라서 최근의 원피스는 단순히 소년만화라고만 보기 어렵습니다. 소년 만화라는 틀 안에서 부패 권력과 민중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만화라고 봐야지요. 『브이 포 벤데타』같은 작품보다는 덜 직접적이지만 충분히 그 기능을 소화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청소년 소설이라는 틀 속에서 묵직한 주제를 던지고 했던 어슐러 K. 르 귄 같은 작가들을 떠올리게 하는 면도 있지요.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도서 > 만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원피스》  (1) 2010/02/15
청춘도로로  (0) 2009/01/11
Posted by 최진석

트랙백 주소 : http://abraxas.pe.kr/trackback/301 관련글 쓰기

※ 이 포스팅은 북시 위키의 '아서 코난 도일' 항목(http://booksea.pe.kr/index.php/아서_코난_도일) 백업용 문서입니다.



Arthur Conan Doyle (1859.5.22~1030.7.7)

영국의 소설가. 중간 이름이 없고 '아서'가 이름, '코난 도일'이 성이다. 즉 '아서 도일'이나 '아서 C. 도일' 등의 표기는 불가능하다. 그의 중간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는 정확치 않다. 사실 아서 코난 도일의 이름은 그의 생전에도 꽤나 많은 착각을 일으켜서, 생전의 아서 코난 도일은 자신의 성을 제대로 불러달라고 끊임없이 강조하고 다녔다고 한다.

범죄 소설 장르에 혁신을 가져온 『셜록 홈즈』 시리즈가 대표작이며, 이 외에 SF와 모험 소설 장르에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 셜록 홈즈 시리즈로 탐정-추리 소설을 반석에 올려 놓았고, <잃어버린 세계>등의 SF 작들은 이후 다른 SF물들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영화 <킹콩>은 스토리 적으로도 <잃어버린 세계>와 연관이 있으며, 최초의 킹콩영화는 아예 <잃어버린 세계>영화 소품을 그대로 갖다 쓴 영화였다.

사실 작가가 정말로 심혈을 기울였던 분야는 어디까지나 역사 소설이었지만 코난 도일이 쓴 역사 소설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셜록 홈즈』시리즈에 비해 훨씬 박하며, 심지어 말년에 몰두했던 심령 소설에 이르면 아예 대작가의 노망 정도로 치부되는 실정이다.

목차

 [숨기기]

[편집]생애

[편집]유년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 태생. 부모는 모두 아일랜드 인이었다. 아버지는 화가였던 찰스 알타몬트 도일. (훗날 「최후의 인사」에서 셜록 홈즈가 '알타몬트'라는 코드네임을 쓰기도 한다) 화가로서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한 인물이었으며 이 때문에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에 시달렸었다 한다. 그의 그림은 주로 요정에 관련된 판타지 풍의 삽화가 많았다. 그가 사망하기 전에 출간된 『주홍빛 연구』에는 그의 삽화가 실리기도 했다.

아버지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사실 아서 코난 도일의 윗대까지만 이 가문의 성은 '도일'이었다. 아서 코난 도일의 대에 이르러 성 자체가 '코난 도일'로 바뀐 것인데, 왜 그가 이러한 성을 썼는지는 확실치 않다. 일단 출생지의 세인트 메리 대성당에 기록된 세례명은 '아서 이그나티우스 코난'(Arthur Ignatius Conan)이었고 이 뒤에 '도일'이라는 성이 붙었다. 이 때의 코난은 그의 대부였던 마이클 코난에게서 따왔다.

아홉 살이 되던 해에는 로마 가톨릭 예수회의 예비학교를 다녔고, Stonyhurst College에 진학했지만 1875년에 자퇴를 하면서 무신론자로 돌아섰다.

1876년부터 1881년까지는 에딘버러대학교에서 의학을 배웠으며 대학 시절부터 단편들을 쓰기 시작했다. 그가 스무살 이전에 발표한 데뷔작은 Chambers's Edinburgh Journal에 수록되었다. 재학 중 서아프리카 해안 행 항해에 한 배의 선의로 참석하기도 했다. 1885년에 척수로(雌部類)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 졸업후 의사의 자격을 얻자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있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사실상의 가장으로서의 무거운 책임을 지게 되었다. 이 무렵의 찰스 도일은 간질까지 앓았으며 화가로서 성공하지 못한 것에 대한 절망감이 더욱 깊어져 병원에서도 탈출을 시도하려 하기도 했다.

[편집]의사 개업과 셜록 홈즈의 시작

1882년, 대학 동기였던 조지 버드와 함께 플리머스에서 개업을 했지만 조지 버드와의 사이가 나빠지는 바람에 결국 포츠머스의 변두리인 사우드시에서 혼자 병원을 개업하게 된다. 하지만 도무지 환자가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힘든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 환자가 없을 때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다시 창작을 시작하게 된다. 환자가 거의 없는 시간 코난 도일은 글 쓰는데 그 시간을 이용했는데, 사우스시 시절 구입해놓고 한 번도 쓰지 않은 타자기는 제쳐두고 직접 손으로 원고를 썼다. 그 자신의 추산에 의하면 하루 작업량은 대략 3,000단어 정도였다. 어쩌면 좀 과장된 분량일지도 모르지만, 그가 의뢰받은 원고 양을 감안하면 대체로 사실이었을 것이다. 이는 코난 도일이 펜과 잉크만으로 오늘날 작가들이 워드프로세서로 작업하는 속도를 낼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게다가 이 수치에는 글을 쓰기 위해 구상하는 시간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필적이 달라진 것도 아니었다. 여간해서 깔끔한 필적이 달라지는 법이 없으면서도 속필작가인 그는 초인종이 울리는 순간 글쓰기를 멈추었다가 방해의 요인이 사라지면 중단했던 지점에서 다시 글을 쓸 수 있는 부러운 기술의 소유자였다. 게다가 원고에 정정이나 내용 변경이 거의 없는 것으로 봐서 초고가 거의 최종본으로 확정되었다.

제롬 K. 제롬은 이런 기록을 남겼다.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주위에서 웃고 떠드는 동안에도 (코난 도일은) 자기 집 거실 구석에 놓인 작은 책상에 앉아 소설을 쓰곤 했다. 그는 홀로 서재에 박혀 글을 쓰는 것보다는 그 편을 더 좋아했다. 어떤 때는 책상에서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무슨 말을 하곤 했는데, 그것으로 봐서 우리의 대화를 계속 듣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동안에도 펜을 멈추는 법이 없었다."

처음에는 모험, 괴기, 역사소설 등을 썼지만, 출판사로부터 큰 환영을 받은 작품은 없었다. 그러다가 1887년에 셜록 홈즈 시리즈의 첫 작품인 『주홍색 연구』를 발표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코난 도일의 대학 시절 은사인 조셉 벨 교수와, 애드거 앨런 포의 캐릭터인 C. 오거스트 뒤팽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셜록 홈즈와 조셉 벨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조셉 벨의 오랜 친구이자 당시 사모아에서 살던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관심까지 끌었다.

홈즈시리즈의 왓슨은 사실상 작가 자신의 반영이며, 그의 가족사까지도 왓슨의 가족사에 반영되어있다. 실제로 코난도일의 부친이 알콜중독으로 사망한 것 처럼 극증의 왓슨박사도 알콜중독으로 사망한 형이 있고, 심지어는 똑같이 결혼도 두 번한 것으로 되어 있다. 왓슨이 개업 의사를 차리는 것도 작가의 경험이 반영된 것인데, 병원 경영이 좋지 않았던 작가와 달리 왓슨은 잘나가는 개업의가 된 것으로 묘사되어있다. 작가가 대리만족한 상황이라 볼 수 있겠다. 다만 역시 홈즈 옆에는 왓슨이 있어야했던 모양인지 왓슨의 아내가 죽은 이후 왓슨이 좋은 값에 병원을 팔아버리고 홈즈의 옆에와서 예전과 같은 친교관계를 지속하는 식으로 묘사되었다. 덧붙여 그 병원을 산 사람은 대리인이었을 뿐, 실상 병원을 구입한 건 홈즈였다.

하지만 반응은 거의 절망적이었다. 이 무렵 다른 역사소설을 집필 중이던 코난 도일은 급기야 자신의 나아갈 바가 역사문학이라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그러던 중에 코난 도일은 『주홍색 연구』의 속편을 써 달라는 미국 『리핑코트』잡지 편집자의 부탁을 받고 1890년에 『네 사람의 서명』(The Sign of Four)을 발표하는데, 이 작품이 굉장한 호평을 받았다.

한편, 사우드시에 사는 동안에는 Portsmouth Association Football Club 소속의 아마추어 골키퍼 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 때의 이름은 'A.C.스미스'. (이 클럽은 1894년에 해산되었고, 1898년에 설립된 포츠머스 F.C.와는 전혀 무관하다) 또한 꽤 훌륭한 크리켓 선수이기도 해서 1899년부터 1907년까지 크리켓 선수로 뛰기도 했다. 최고 득점은 런던 카운티와의 1902년도 경기에서 거둔 43점. 골프에도 제법 능했다고 한다.

[편집]결혼과 가족

1885년에는 자신의 병원에 입원한 환자의 누이였던 루이자 호킨스와 결혼했다. (환자는 입원 중에 사망) 병원의 매출이 시원치 않았던 까닭에 부유하지는 않지만 나름 행복한 생활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 1897년부터 이미 14세 연하의 지인인 진 엘리자베스 레키라는 여성과 사랑에 빠졌었고, 1906년에 루이자가 결핵으로 사망하자 이듬해에 결혼했다. 다만 루이자와의 결혼 생활 중에는 아내에 대한 신의를 지키기 위해 레키와는 플라토닉한 관계만을 맺었다고 한다.

슬하에는 첫 아내와의 사이에서 낳은 두 자녀와 두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낳은 세 자녀가 있다. 그런데 아서 코난 도일은 오로지 두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만을 편애하였고, 《셜록 홈즈》시리즈로 쌓은 막대한 부는 전처의 자식들에게 한 푼도 물려주지 않았다. 심지어는 학교도 보내주지 않아서, 전처 사이에서 낳은 딸의 경우는 평생을 하녀로 떠돌다 아버지를 원망하며 죽었다.

그런가 하면 두번째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은 그루지야의 니나 미더바니 공주의 두번째 남편이 되거나(셋째), 코난 도일이 사망한 후에는 《셜록 홈즈》시리즈의 인세로도 모자라 추리소설가 존 딕슨 카를 고용하여 후속편을 쓰게 하는 등(넷째와 다섯째) 아버지가 남긴 부를 독차지했다.

[편집]셜록 홈즈의 죽음

1890년에 비엔나에서 안과 공부를 한 후 1891년 3월 런던으로 옮겨 안과병원을 개업햇다. 하지만 역시 매상이 별 볼일 없었고, 자서전에서는 "한 명도 문 앞을 지나가지 않았다"고 쓸 정도였다. 대신 《셜록 홈즈》시리즈 등의 소설들이 인기를 끌자 코난 도일은 아예 저술 쪽에 전념하기로 결심하고는 『스트랜드 매거진』(The Strand Magazine)에 줄줄이 단편소설을 발표해 나간다. 그는 매달 1편씩 1년에 걸쳐 작품들을 연재했다.

코난 도일은 자신은 홈즈로 인기를 얻었고, 또 경제적인 여유도 얻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탐정소설 작가라고 불리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이에 셜록 홈즈 시리즈 집필 초기인 1891년 11월에도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내 셜록 홈즈를 그만 죽여버리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죽이고자 했던 적이 있다. 이 때 코난 도일의 어머니는 "네가 맞다고 느끼는 걸 해야겠지만 대중들은 그걸 달가워하지 않을 거다"라는 답장을 보내며 그를 만류했다. 이 때는 코난 도일도 어머니의 지시에 따랐지만 결국에는 2년 뒤에 발생한 '셜록 홈즈 사망 스캔들'을 통해 어머니의 조언이 탁월한 식견이었음이 드러난다.

1892년에는 처음 발표된 12편의 단편을 모아 『셜록 홈즈의 모험』(The Adventures of Sherlock Holmes)을 출간한다. 사실상 셜록 홈즈의 본격적인 등장은 바로 이때부터라고 볼 수 있다.

1893년에는 알코올 중독이 심해져 수용소에 들어갔던 부친이 사망했다. 이 때부터 부친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움으로 심령연구학회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1893년에는 결국 셜록 홈즈의 숙적인 제임스 모리어티 교수가 등장하는 단편, 「마지막 사건」(The Last Adventure)을 통해 홈즈를 죽여버리기에 이른다. 이유는 역시 그 전부터 애착을 둬 오던 역사 소설의 집필과 당시 결핵에 걸렸던 아내의 요양에 전념하기 위해서였다고 추측된다.

그러나 이에 대한 셜로키언들의 분노는 그야말로 엄청났다. 유럽 전역의 독자들이 아서 코난 도일에게 이를 항의하는 편지를 보내는가 하면 검은 상장(喪章)을 단 런던 시민들이 아서 코난 도일의 집 앞에 모여 "홈즈! 홈즈!"를 연호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심지어 아서 코난 도일이 근처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가 검은 상장을 맨 노부인에게 지팡이로 두들겨맞을 뻔하는가 하면 그의 집에 피묻은 칼날이 배달되기까지 했다. 이런 무시무시한 협박 속에서도 코난 도일은 「마지막 사건」이전의 이야기라는 조건을 달아 장편 『바스커빌 가문의 개』(The Hound of Vaskervilles)를 써가며 무려 9년이나 버텼지만 결국에는 이것이 꼬투리가 되어 '극적으로 살아 돌아온' 홈즈에 대한 이야기인 『빈집의 모험』(The Adventure of Empty House)을 통해 셜록 홈즈를 살려낼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추리문학사 최대의 스캔들 중 하나로 회자되는 이 사건은, 코난 도일이 셜록 홈즈에 대해 갖고 있던 혐오감과 팬들의 집념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한편 코난 도일은 『[[피터 팬』의 작가 제임스 배리와 절친하여 공동으로 오페라 가사 작업을 시도했었다. 배리가 초안을 잡고 완성시킨 1막을 본 코난 도일은 '너무 진부하고 어설퍼서 크게 실망했다.'고 한 후 1막 가사를 새로 쓰고 줄거리를 일부 수정하며, 악보 작곡가인 어니스트 포드와 함께 2막을 썼다.

여학교에 침입했다가 교장에게 쫓겨나는 두 젊은이의 위업을 다룬 이 작품, <제인 애니 또는 선행상> 새롭고 독창적인 영국식 희가극 이었지만, 줄거리는 천박했고 가사는 어울리지 않았으며 음악은 들을 만 했지만 특출나지 않았다. 1893년 5월 13일부터 7주 동안 사보이 극장에서 공연된 그 오페레타는 코난 도일과 배리의 최악의 작품 가운데 하나로 기록되었다. 공연은 완전히 실패했고 비평가들은 무자비하게 작품을 씹어댔다. 아일랜드가 낳은 최강의 명언 제조기 조지 버나드 쇼는 잡지에서 "존경할 만한 두 시민이 공공연하게 범할 수 있는 가장 뻔뻔하고 멍청한 짓거리"라며 씹어 댔는데, 그럴만 한다는 것이 거의 모든 사람들의 평이었다.

1899년 10월 23일 뉴욕 주 북부 버팔로의 스타 극장에서 처음 시연된 연극 《셜록 홈즈》는 미국 전역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영국에는 1902년 1월 30일, 빅토리아 여왕의 상을 마친 에드워드 7세와 알렉산드라 왕비 앞에서 어전 공연으로 초연되었는데, 하필 에드워드 7세는 지독한 셜로키언이었다. 《셜록 홈즈》가 국왕이 끝까지 읽은 유일한 소설이란 소문도 있었다. 에드워드 7세는 연극이 너무 마음에 든 나머지 셜록 홈즈 역의 윌리엄 길레트를 귀빈석으로 초대해 그와 너무 오래도록 사담을 나누는 덕에 관객들은 안절부절 못하다가 짜증을 내기까지 하였다. 공연이 끝나자 길레트와 코난 도일이 막 앞으로 나와 관객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이 연극 초연이 연극사에 기록된 이유는 이 이야기들 뿐만이 아니라 1903년 열네살이 된 찰스 스팬서 채플린이 급사 역할을 맡아서 연기했던 이유도 있었다. 그게 바로 찰리 채플린의 첫번째 무대 연기였다.

[편집]정치적 활동

20세기 초에 남아프리카에서 보어 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영국에 전세계의 비난이 쏟아졌는데, 코난 도일은 이 때 영국 정부의 행실을 옹호하는 팜플렛을 쓰기도 했다. 코난 도일은 1900년 4월 2일 보어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남아프리카 공화국 블룸폰테인에 도착 했는데, 그때 블룸폰테인에는 막 4세가 된 존 로널드 루엘 톨킨, 통칭 J.R.R.톨킨이 살고 있었다. 부친인 아서 톨킨이 블룸폰테인 은행장으로 임명 받은 후 그곳에서 톨킨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코난 도일이 7월 6일까지 블룸폰테인에 있었고 은행을 이용한 기록이 남아 있으니 둘의 조우가 이뤄졌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또한 1900년에는 아예 보어 전쟁에 대한 책까지 썼는데, 1902년에 기사 작위를 받았을 때도 코난 도일은 이것이 자신의 정치적 활동에 대한 보상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수여식 자체에 대해서는 강한 불만감을 드러냈다. 수여식 때 입어야 할 예복이 비쌀 뿐 아니라 '금실 견장과 뿔 달린 모자까지 있어 너무 복잡하다'고 불평한 것이다. 게다가 작위식 자체의 위엄도 전혀 없다며 불평했다.

기사 작위를 받은 뒤에는 국회의원선거에 두 번 출마하기도 했다. 선거에는 모두 낙선했지만 아일랜드에 자치정부를 수립시켜야 한다는 기고는 상당한 반향을 얻는다.

앞서 이야기했듯 코난 도일은 스포츠에도 꽤나 관심이 많았고, 1908년 런던 올림픽에서 마라톤 심판위원을 맡기도 했다. 이 경기는 종래 40km 코스로 진행되던 마라톤이 출발점이 윈저궁으로 바뀌면서 2.195km 늘어난 최초의 경기이기도 했는데, 이 때문인지 선두로 달리던 이탈리아의 피에트리 도란도가 스타디움에 들어오자 완전히 탈진해 쓰러져버렸다(쓰러지기 직전 400m를 무려 10분에 걸쳐서 뛸 정도였다). 그러나 코난 도일을 비롯한 심판진들이 몰려나와 도란도를 부축해 결승선에 골인시켰다. 그들은 인도적인 감정에서 저지른 일이었다고 강변했으나 실은 2위로 추격하던 선수가 미국의 존 헤이즈였기 때문에 양키가 우승하는게 눈꼴시어서 그랬다는게 중론. 당연한 얘기지만 도란도는 실격당했다.

저널리스트 E.D.모렐과 외교관 로저 케이스먼트가 주도한 콩고 자치구 개혁 캠페인에 참여하기도 했다. 1909년에 쓴 긴 팜플렛 「콩고의 범죄」를 통해 이 나라의 공포를 고발한다. 이 때 친해진 모렐과 케이스먼트는 『잃어버린 세계』의 캐릭터들에 반영되기도 했다. 이후 1차 세계 대전 중 모렐이 평화주의운동에 나서면서 그와 결별했다. 로저 케이스먼트가 아일랜드 독립을 주장한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는 조지 버나드 쇼 등과 함께 이를 막으려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편집]심령술

부친 사망 후 보였던 심령학에 대한 관심은 1906년에 첫 부인이 사망한 후 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여러 일가 친척들까지 잃으면서 점점 점점 커지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만 장남 킹슬리, 자신의 형제인 인네스, 두 처남(그 중 한 사람은 신사 도둑이 주인공인 레플스 시리즈로 인기를 끌었던 어니스트 윌리엄 호넝이었다), 두 사촌 등이 사망했다. 이로 인해 원래 영국적 양식의 소유자였던 아서 코난 도일은 미신에 빠져 심령술사를 후원하고, 사후세계가 존재한다는걸 증명하려 애썼다. 그러한 상태로 집필된 소설이 첼린저 교수가 등장하는 『안개의 땅』이다.

코난 도일이 심령론을 신봉할 것을 공언하고 그 선전과 전도에 나선 것은 제 1 차 대전 끝무렵부터였으므로, 영국적 양식의 소유자인 그가 미신적인 세계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은 전쟁중에 장남 킹슬리를 비롯한 많은 친지를 잃고 마음의 균형을 잃은 탓이라는 이야기도 많다.</span>

심지어는 당시 유명 마술사 해리 후디니에게 " 당신의 탈출 기술이 몸을 에테르화하여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냐?"는 헛소리 질문을 하기도 했다. 후디니는 어머니가 사망한 후 1920년대에 시령술사 운동에 대한 가장 유명한 적으로 나섰던 사람으로, 자신의 마술을 통해 심령술사들이 보여주는 심령술이 사실 사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증명하려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후디니는 자신의 기술이 단순한 마술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끝내 코난 도일에게 납득시키지 못했고, 오히려 코난 도일이 후디니를 "당신도 모르는 초자연적 힘을 갖고 있다"며 설득하려 들었다. 그러한 심령에 대한 관심으로 결국 1922년 코팅리 요정사건을 지지하는 글을 발표하였다가 곤욕을 치르게 된다. 1917년 코팅리 지방에 사는 두 소녀가 소위 "요정사진" 다섯 장을 기고한 이 사기사건은 훗날 그 사진들이 잡지에서 오린 그림들이었던 것으로 밝혀졋다.

심령술 분야에 대한 관심은 그의 단편집 중 하나인 『셜록 홈즈의 모험』에까지 반영되었고, 1929년 소련에서는 이 작품이 오컬트주의를 옹호한다는 이유로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다. 물론 스탈린주의가 퇴조하면서부터는 이 조치도 풀렸고, 러시아 배우 바실리 리바노프는 훗날 셜록 홈즈를 연기한 공로로 대영 제국 훈장까지 받았다.

미국의 과학사가인 리처드 밀너는 1912년에 영국에서 발생했던 필트다운인 사건의 범인으로 코난 도일을 지목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1912년 영국 루이스 부근의 필트다운코먼에 있는 바컴 장원의 사력층(沙礫層)에서 유사 이전의 인류로 추정되는 '필트다운인'의 유골이 발견된 사건이었다. 이 유골로 인해 인류의 기원에 대한 논란이 일었으며 40여 년간 유골의 진위를 놓고 학문적 논쟁이 벌어질 정도였다. 결국은 현대인의 두개골 및 유인원(오랑우탄)의 턱뼈를 정교하게 조작한 유골이었음이 밝혀져 관련 논쟁이 일단락되었다. 밀너는 코난 도일이 심령학의 정체를 폭로하곤 했던 현대 과학에 대한 복수로 이와 같은 짓을 저질렀으며, 『잃어버린 세계』에 코난 도일이 이 날조에 참여했음을 보여주는 여러 암호들이 들어있다고 주장했다.

그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두번째 부인의 친정 부근에서 이구아노돈의 화석이 발견된 후 코난 도일이 고생물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이로 인해 『잃어버린 세계』가 탄생되기는 했다.

[편집]죽음

도일은 1928년 69세의 나이로 아프리카에서 유럽까지 돌며 강연하다가 1930년 북유럽의 여행에서 돌아온 후 심장 발작을 일으켰는데 그 뒤 끝내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유언은 아내에게 한 말인 "You are wonderful." 묘지는 햄프셔주 뉴포레스트의 민스테드에 있는 묘지에 마련되었다. 그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STEEL TRUE

BLADE STRAIGHT

ARTHUR CONAN DOYLE

KNIGHT

PATRIOT, PHYSICIAN & MAN OF LETTERS

코난 도일이 적어도 10년 이상 거주했던 런던 남부의 집은 1924년부터 2004년까지 호텔과 레스토랑으로 활용되었다. 현재는 개발업자에게 매각되었는데, 이로 인해 이를 재개발하기 원하는 업자와 이를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코난 도일 팬덤의 싸움으로 인해 현재는 비어있는 상태다.

코난 도일이 마지막으로 거주했던 저택은 코난 도일 사후 더욱 유명해 졌는데 다음과 같은 일 때문이었다. 1960년에 그 집에 새 주인이 된 사람들은 모두 에든버러 의대 출신으로 코난 도일의 후학들이며 그 중 한 사람의 부친은 대학 시절 코난 도일과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이 그 집에서 코난 도일의 귀신이 나온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다락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기도 했으며 콧수염을 기른 키가 큰 노인이 집 안에 나타나기도 했던 것이다. 분명 코난 도일의 모습이었다. 그 유령은 빨간 표지에 까만 고무줄로 묶은 일기책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1961년 여름에 유령 쫓는 의식을 벌이고 나서야 더이상 유령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 직후 도일 집안의 찬 친척의 입을 통해서 코난 도일에게 정말로 빨간 가죽을 씌운 비밀일기가 있었으며 그 일기장이 어디론가 없어진 일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사건으로 인해 코난 도일은 죽어서도 심령술을 증명하기 위해 분투한다는 우스개소리가 돌기도 했다.

1930년 10월 7일,영국 심령협회에서는 영매 아이린 가렛을 초청해 석달 전에 죽은 코난 도일의 영을 불러내기로 했는데, 나오라는 코난 도일은 나오지 않고 당시 영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비행선 R101호 추락사건의 비행선 선장 카마이켈 어윈의 영을 소환해 당시 사건의 진상을 듣게 되었다. 참고로 추락사건은 이 행사의 사흘 전.

[편집]작품

[편집]셜록 홈즈》 시리즈

[편집]챌린저 교수》 시리즈

[편집]기타

그가 썼던 역사소설이나 심령소설, 정치적 팜플렛 등은 번역되지 않았다.

[편집]참고

'도서 > 인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찰스 디킨스  (0) 2010/06/02
아서 코난 도일  (0) 2009/12/13
테드 창  (0) 2009/12/13
조지 R. R. 마틴  (0) 2009/12/13
Posted by 최진석

트랙백 주소 : http://abraxas.pe.kr/trackback/288 관련글 쓰기

테드 창

도서/인명 2009/12/13 15:54
※ 이 포스팅은 북시 위키 '테드 창'(http://booksea.pe.kr/index.php/테드_창) 항목의 백업용 문서입니다.



Ted Chiang姜峯楠(1967.10.20~)

미국의 과학소설가. 중국계 이민 2세로 뉴욕 주 포트 제퍼슨 태생이다. 중국계 이민 2세지만 중국어는 전혀 못한다고. 1990년에 데뷔한 이래 겨우 12편의 중단편만을 써왔으면서도 SF 팬덤 전체에 명성을 떨친 작가이다. 주로 하드 SF에 해당하는 작품들을 써왔으며, 《스타워즈》류는 "우주선과 레이저가 등장하지만 핵심은 500년 전, 또는 1000년 전 쯤에 모험 이야기"일 뿐 SF가 아니라는 견해를 표방하였다. 문학적으로 영향을 받은 작가로는 SF작가인 존 크로울리와 진 울프가 있으며, 가장 마음에 드는 작가로는 카렌 조이 포울러와 그렉 이건을 꼽는다. 현재 테드 창은 워싱턴 주 벨뷰에서 작가 생활과 프리랜서 일을 병행하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아서 클라크나 아이작 아시모프 등 유명 SF 작가들의 작품을 읽으며 SF 작가의 꿈을 키웠다. 십대 때부터 브라운대학교(물리학, 컴퓨터공학) 재학 시절까지 꾸준히 습작을 써서 잡지에 투고했지만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한 때는 절필을 고려하였으나 대학을 졸업한 후 심기일전한다는 각오로 참가한 클라리온 워크샵에서 동료 SF 작가들을 만난 후 계속해서 글을 쓰기로 결정했다.

이후 시애틀의 컴퓨터 관련 회사에서 테크니컬 라이터로 취직하여 일하면서 틈틈히 글을 썼고, 결국 1990년에 Omni 잡지에 「바빌론의 탑」(1990)을 게재하면서 데뷔한다. 이 작품은 잡지에 실리자마자 격찬을 받았으며 그해 네뷸러상 최우수 단편상을 수상한다. 데뷔작으로 네뷸러상을 수상한 사례는 그가 처음이었거니와 역대 최연소 수상이기도 했다. 이듬해 발표한 단편 「영으로 나누면」(Division by Zero)는 로커스상 후보에 올랐고, 같은해 발표한 단편 「이해」(Understand)는 아시모프 과학소설잡지의 독자투표상을 수상하는 한편 휴고상과 네뷸러상 후보에 올랐다. 1992년에는 최고의 신인 작가에게 주어지는 존 캠벨상을 수상한다. 그 이후 테드 창은 무려 6년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1998년 드디어 그의 최고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 중편 「네 인생의 이야기」(Story of Your Life)를 발표한다. 이 작품은 호머상휴고상로커스상팁트리상 모두에 후보로 오르는 한편, 네뷸러상과 스터전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린다.

다시 2년 뒤 세계적인 과학 학술지인 네이처에 발표한 논픽션풍의 엽편 "The Evolution of Human Science"(게재시의 제목은 "Catching Crumbs from the Table")는 로커스상 후보에 올랐고, 같은해 발표한 중편 「일흔두 글자」는 휴고상스터전상세계환상문학상 등 무려 다섯 개 상의 후보에 오른 후, 대체역사소설을 대상으로 하는 사이드와이즈상을 수상한다. 그리고 2001년작인 「지옥은 신의 부재」로 마침내 휴고상과 네뷸러상로커스상을 한꺼번에 거머쥐게 된다. 2002년에 Tor를 통해 출간한 단편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로커스상 단편집 부문을 수상한다.

2006년에 발표한 「인류과학의 진화」는 네이쳐지에 게재되었고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은 2007년 네뷸러상/휴고상 수상, 최신작인 「숨결」역시 네뷸러상과 휴고상을 수상했다. 

2009년 7월 18일,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주최한 행사 환상교실의 일환으로 초청받아 방한, '하드 SF - 서사의 논리와 글쓰기의 미학'라는 제목의 강연회를 개최했다. 이후에는 장소를 옮겨 미공개 중편인 〈Life Cycle of Software Objects〉의 낭독 및 사인회도 열렸다.

[편집]참고

가상 인터뷰. 재미로 읽되 낚이지는 말 것. 아울러 이 가상 인터뷰는 김상훈을 통해 테드 창 본인에게도 전달된 듯 싶다.

'도서 > 인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서 코난 도일  (0) 2009/12/13
테드 창  (0) 2009/12/13
조지 R. R. 마틴  (0) 2009/12/13
존 르 카레  (0) 2008/09/24
Posted by 최진석
TAG

트랙백 주소 : http://abraxas.pe.kr/trackback/287 관련글 쓰기

※ 이 문서는 북시 위키 '조지 마틴'(http://booksea.pe.kr/index.php/조지_마틴) 항목의 백업용 문서입니다.




George Raymond Richard Martin (1948.9.20~)

미국의 소설가, 시나리오 작가. 흔히 '조지 R. R. 마틴'이라 불리며, 영미권의 팬 사이에서는 'GRRM'이라는 약어도 쓰이는 듯 하다. 주로 판타지, 호러, SF 분야에서 활동해온 작가로, 현재 집필 중인 에픽 판타지 《얼음과 불의 노래시리즈로 유명하다.

[편집]생애

미국 뉴저지주 바요네 태생. 어렸을 때부터 책을 무척 좋아했으며 만화책 수집가이기도 했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 《판타스틱 포》코믹스 20호(1963년 11월호)에 독자 투고를 했다가 실리면서 창작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대학에서는 저널리즘을 전공했고, 70년대초에 단편을 쓰기 시작했지만 작가로서의 데뷔가 순탄치는 않았다. 그의 단편 중 하나는 서로 다른 잡지에서 무려 42번이나 거절당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창작을 계속한 결과 1973년에 아날로그 매거진에 실었던 단편 《With Morning Comes Mistfall》이 휴고상과 네뷸러상의 후보에 오르는 성과를 거둔다. 수상에는 양쪽 모두 실패했지만 이를 괘념치는 않았고, "휴고&네뷸러 루저스" 클럽에 끼게 된 것만으로도 크게 만족했다고 한다.

판타지나 호러 계통의 작품으로 명성을 날린 작가이지만 초기작들 상당수는 SF(특히 미래 역사물)였다. 이 외에는 정치-밀리터리 픽션을 쓰기도 했다.

1980년대에는 TV 쪽과 책 편집자로 전업하였다. TV에서는 새 『트윌라잇 존』과 『미녀와 야수』시리즈에서 일하였다. 편집자로서는 로저 젤라즈니 등 여러 작가들이 참여했던 《와일드 카드》시리즈를 관리했으며, 그 자신도 해당 세계관에 몇 가지 설정을 집어넣곤 했다.

1987년에는 그의 중편 《Nightflyeres》가 영화화된다.

1991년에는 잠깐 장편 소설을 쓰려하였는데, 이 작품에서 채택하지 못한 아이디어에다 중세사에 관련된 자신의 교양을 결합하여 《얼음과 불의 노래시리즈를 탄생시키기에 이른다. 이 시리즈는 평단과 대중 양측의 호평을 받으며 승승장구를 거두었고, 급기야 당초 3부작으로 예정했던 조지 마틴은 집필 계획을 수정하여 7부작으로 완성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게 된다. 현재는 《얼음과 불의 노래》시리즈 집필 중.

이 외에 저널리즘 박사학위까지 받은 후 강사 생활을 하기도 했고, 체스 경기 감독자이기도 하다. 여가 시간에는 중세 테마 미니어쳐와 만화책을 수집한다고 한다. 그의 콜렉션에는 『스파이더 맨』과 『판타스틱 포』코믹스의 초판도 있다. 인터넷을 활발히 이용하지만 보안상의 이유로 인해 집필용 컴퓨터는 따로 운용한다고 한다. 문제의 집필용 컴퓨터는 무려 완전한 도스 시스템.

[편집]테마

비평가들은 마틴의 작품이 상당히 어둡고 시니컬하다고 지적해왔다. 그의 장편 데뷔작인 《Dying of the Lights》만 해도 태양이 점점 멀어지는 통에 점차 생물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해가는 버려진 행성을 무대로 한 작품이다. 그가 쓴 작품들은 대체로 음울한 분위기를 풍긴다. 그의 캐릭터들은 대부분 불행하거나 최소한, 무자비하게 냉소적인 세계에서 이상을 지키려 노력하느라 현실을 불만족스러워하는 인물들이다. 주인공들 대부분이 비극 영웅의 특징을 지니기도 한다.

또한 주요 인물들에게 인정사정없이 험한 꼴을 보이게 하거나 죽여버리는 경우도 빈번한데, 이에 대해 조지 마틴은 독자들이 페이지를 넘길 때 주인공들의 운명에 실감나게 두려워하길 바란다고 이야기하였다.

[편집]팬들과의 관계

이 외에 조지 마틴은 SF 컨벤션에 정기적으로 참여하여 장르문학 팬덤과 자주 교류하는 걸로 유명하다. 70년대 초에 비평가이자 작가인 토마스 디쉬가 마틴을 비롯하여 월드콘에 매년 참가하는 작가들을 두고 "노동절 그룹"이라고 이름붙인 일도 있다. 매년 월드콘이 노동절인 5월 1일 즈음하여 열리는 것에 빗댄 이름이다.

자신의 공식 팬클럽인 Brotherhood without Banners과도 관계가 좋은 편이다. 팬클럽에서 주최한 파티에 축전을 보내기도 했다. 2006년 12월에는 이 단체의 웹사이트에 등록된 회원 수가 1,000명을 돌파했다. 다만 팬픽에 대해서만큼은 상당히 완고한 편이다. 팬픽션이라는게 저작권 침해일 뿐만 아니라 상승하는 작가에게 해로운 결과를 주기 때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그는 자신의 작품과 관련된 그 어떠한 사항도 팬픽에 활용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도서 > 인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서 코난 도일  (0) 2009/12/13
테드 창  (0) 2009/12/13
조지 R. R. 마틴  (0) 2009/12/13
존 르 카레  (0) 2008/09/24
Posted by 최진석

트랙백 주소 : http://abraxas.pe.kr/trackback/286 관련글 쓰기

...에 이은 2009년에 읽은 책. 만화나 과제 도서는 제외했다.

사실 '2009년에 읽은 책'을 말하기엔 조금 이른 때이기야 하다. 내 독서 패턴 상 월 말쯤 되면 이왕의 목록에 못해도 7,8권쯤은 더 추가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하지만 한해 독서 현황을 정리한다는게 하루 이틀로 될 일도 아니고 하니 일단 공개부터 해서 기정사실화한 다음 차차 수정해나갈 생각이다.

예년과는 달리 각 작품에 대한 별도의 코멘트는 일일히 달지 않기로 했다. 대신 기왕에 이 블로그나 거울 웹진, 북시 위키 등에 썼던 해당 작품 관련 글들을 링크하고자 하니 해당 작품에 대한 내 코멘트가 궁금한 분들은 그 링크를 찾아보면 되겠다. 제목에 링크된 것은 블로그에 썼던 '서평'이고, 그 뒤에 괄호쳐진 '(북시)', '(거울)' 등의 링크들은 해당 공간에 썼던 글들을 지칭한다. '(잡글)'은 그 작품에 대해 이 블로그에 썼던 잡설을 이야기한다. 아예 따로 그 작품에 대해서 언급한 경우만 링크했고, '근황' 류의 글에 넣었던 코멘트는 링크하지 않았다.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경우처럼 여러 곳에서 언급했다가도 그 성과를 북시 위키 등으로 집약시킨 경우에는 '최종 버전'만을 소개했다. 

'올해의 베스트 5'는 현재로서는 다음과 같다. 제시 순서는 순위와 무관하다.

머나먼 바닷가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어슐러 K. 르귄 (황금가지, 2006년)
상세보기
로캐넌의 세계(환상문학전집 5)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어슐러 K. 르귄 (황금가지, 2005년)
상세보기
어둠의 속도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엘리자베스 문 (북스피어, 2007년)
상세보기
거장과 마르가리타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미하일 불가코프 (문학과지성사, 2008년)
상세보기
유년기의 끝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아서 클라크 (시공사, 2002년)
상세보기







미분류
문학

문학총류

앤솔러지

한국문학

영미문학

독일문학

프랑스문학

러시아문학

더보기

철학
  • 리쩌허우『중국고대사상사론』정병석, 한길사
  • 정도원 『유학과의 짧은 만남』문사철
사회과학

경제학

정치학

교육학

법학

기타 사회과학

'도서 > 통계'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0년에 읽은 책  (8) 2010/12/27
2009년에 읽은 책  (0) 2009/12/08
끝까지 다 못 본 소설들...  (7) 2009/01/22
2008년에 읽은 책  (0) 2008/12/24
Posted by 최진석
TAG 《미래경》, 《뱀파이어 연대기》, 《서부 해안 연대기》, 《아발론 연대기》, 《어스시》, 《위험한 경제학》, 《타임 패트롤》, 《판타스틱》, 《퍼언 연대기》, 《헤인 연대기》, 『갈라하드와 어부왕』, 『갈릴레오의 아이들』, 『개혁의 덫』, 『거장과 마르가리타』,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 『경계선 성격장애』, 『공기 위를 걷는 사람들』, 『광장』, 『국가의 역할』, 『그리고 죽음』, 『그림자 잭』, 『기형도 전집』, 『낯선 조류』, 『누군가를 만났어』, 『뉴라이트 사용후기』, 『당신 인생의 이야기』, 『독서의 역사』, 『동화가 재미있는 이유』, 『드래곤의 비상』, 『드래곤의 탐색』, 『로캐넌의 세계』, 『만들어진 현실』, 『머나먼 바닷가』, 『민들레 와인』,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바다의 별』, 『바다의 전설』, 『반지의 제왕』, 『백색 드래곤』, 『뱀파이어 레스타』,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별을 쫓는 자』, 『보이지 않는 도시들』, 『부동산 계급사회』, 『부동산의 비밀』, 『빼앗긴 자들』, 『살아있는 우리 헌법 이야기』, 『상아와 원숭이와 공작새』, 『서재 결혼 시키기』, 『성배의 기사 퍼시발』, 『성찰하는 진보』, 『스포츠 코리아 판타지』, 『시간 여행자의 아내』,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 『아누비스의 문』, 『아더 왕의 죽음』,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 『아서 클라크 단편 전집』, 『아투안의 무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 『어둠의 속도』, 『어스시의 마법사』, 『연애 소설 읽는 노인』,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 『오만과 편견』, 『오후 다섯시의 외계인』, 『요정들의 사랑』, 『유년기의 끝』, 『유배 행성』, 『유학과의 짧은 만남』, 『이런 꿈을 보았다』, 『잎 속의 검은 잎』, 『장준하 민족주의자의 길』, 『절망의 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제5도살장』, 『죽은 자들에게 고하라』, 『중국고대사상사론』, 『지방은 식민지다!』, 『최고의 변론』,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커피잔을 들고 재채기』, 『쾌도난마 한국경제』, 『타워』, 『테하누』, 『파우스트』, 『플레바스를 생각하라』, 『하이브리드시대의 문학』, 『학벌사회』, 『한국 환상문학 단편선』, 『한국의 책쟁이들』, 『환영의 도시』, 강준만, 개마고원, 경향신문, 고호관, 괴테, 그라닌, 기형도, 김민혜, 김상봉, 김상훈, 김서정, 김석희, 김성곤, 김안나, 김이환, 김인순, 김정란, 김혜란, 김혜림, 노블레스클럽, 니페네거, 더난출판, 더쇼비츠, 돌베개, , 라이스, 르귄, 르카레, 리쩌허우, 마르칼, 망구엘, 매직하우스, 맥카프리, , 문사철, 문예출판사, 문학과지성사, 문학동네, 민음사, 박경수, 박상훈, 박웅희, 박형규, 배명훈, 뱅크스, 변용란, 보네거트, 부키, 북스피어, 불가코프, 브래드버리, 살림, 삼인, 샘터, 서울대학교, 선대인, 세종서적, 셰퍼, 손낙구, 스미스, 시공사, 시작, 씨앗을뿌리는사람, 아이필드, 앤더슨, 여울, 열린책들, 오멜라스, 오스틴, 웅진, 웅진지식하우스, 워커, 위즈덤하우스, 유은경, 윤지관, 이규현, 이동현, 이미애, 이미지박스, 이상원, 이선주, 이수현, 이인웅, 이정인, 이지연, 이충호, 이현경, 이형식, 임종업, 장하준, 전승희, 정도원, 정명진, 정병석, 정소연, 정영목, 정진영, 정창, 정희준, 젤라즈니, 조국, 조금석, 조성호, 조애리, 주니어파랑새, 지만지, 지만지고전천줄, 지호, , 책세상, 청림출판, 최인자, 최인훈, 최장집, 최준영, 칼비노, 크레이스, 클라크, 톨킨, 파워스, 판타스틱, 패디먼, 페이퍼하우스, 학지사, 한길사, 한상범, 한윤형, 해냄, 해토, 행복한책읽기, 향연, 홍기빈, 홍대화, 황금가지, 황매, 황소자리, 후마니타스

트랙백 주소 : http://abraxas.pe.kr/trackback/249 관련글 쓰기

한 작품만을 읽고서 장르 전체를 판단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도 드물다. 그러나 한 작품을 더 읽음으로서 이미 안다고 생각했던 장르에 대한 견해 자체가 바뀌기도 마련이다. 시어도어 스터전의 말을 빌린다면 "90%의 쓰레기"가 아닌 작품을 읽었을 때 생기는 현상이다. 당연히 내게도 그러한 예로 들 만한 작품이 여러 개 있다. 『어스시의 마법사』, 「오딘의 비애」, 『옥스타칼니스의 아이들』 등.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역시 『끝없는 이야기』를 능가하는 충격을 주었던 작품은 없다.

내가 이계 진입이라 하는 소재 - 혹은 하위 장르 - 를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건 물론 판타지 소설을 처음 접하면서부터였지만, 그 소재에 대해 딱히 좋은 감정을 가져본 적은 거의 없었다. 사실 그럴 만도 했다. 내가 한창 판타지를 읽어 내리던 시절 주변에서 접할 수 있었던 '이계진입물' 중에는 쓸만한 소설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창작되던 '이계진입물'들을 싸잡아 '독자들이 대리만족할만한 요소들을 좀 더 첨가시킨 먼치킨물' 이상으로 보지 않았고, '이계 진입'이라는 소재 자체에 대해서도 호의적이질 못했다. 『끝없는 이야기』를 읽기 전까지는 그랬다는 이야기다.

『끝없는 이야기』의 도입부는 흔한 '이계진입물'과 크게 다를 게 없다. '우연히' "끝없는 이야기"라는 소설을 읽게 된 바스티안 발자타르 북스라는 소년이 책속 세계의 위기를 해결할 영웅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과연 책 속으로 들어간 소년은 세계를 구하고, 그 대신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권능을 부여받는다. 여기서 '무엇이든'이라는 건 말 그대로의 의미다. 현실 세계에서는 뚱뚱하고 작고 힘없는 소년인 바스티안도 이 세계에서는 잘생기고 훤칠하고 힘센 외모를 가질 수 있고, 바스티안이 만들어낸 이야기들은 그 세계의 현실이 된다. 그 뒤 바스티안이 벌이는 활약상. 여기까지가 소설의 전반부이며 사실 작품 내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엔데의 진면목은 오히려 그 뒷부분에서 발휘된다.

바스티안이 갖게 된 힘은 물론 강력하지만, 그만큼의 대가도 뒤따른다. 바스티안이 현실화한 이야기들은 서로 뒤엉켜서 예상치도 못했던 결과를 낳고, 그 후폭풍은 바스티안에게 몰려온다. 그러나 더욱 무서운 대가는 바스티안이 권능을 발휘할수록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어버리게 된다는데 있다. 자잘한 기억부터 시작해서 바스티안이 사랑하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 종내에는 자신의 이름까지. 자기 자신을 잃고 그 환상 세계에 함몰되는 것이야말로 권능의 가장 큰 대가이다. 그 뒤로는 바스티안이 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해 현실로 돌아가기까지의 여정이 그려진다. 여기에는 화려한 재미가 없다. 그러나 여운을 길게 남긴다.

이러한 서사가 남기는 메시지는 매우 간단하고도 명료하다. 환상의 나라는 잠시의 피난처나 성장을 위한 발판이 될 수 있지만, 결국 영원히 안주할 공간은 아니다. 현실의 인간은 현실 속에서 현실과 부딪쳐야 한다. 이토록 정교하고도 매력적인 환상세계를 창조한 작품이 말하는 게 결국은 '현실로 돌아가라'라는 거라니. 현실과 환상세계와의 접점을 다룬 작품에서 충분히 나올 만한, 어쩌면 장르의 특성을 가장 잘 살린 작품 아닐까. 소위 '이고깽'이라 하는 장르에 속하는 작품들과는 명백히 구분될 만한 작품 아닌가 말이다. 내가 최근 들어 '장르나 소재 자체보다는 그걸 어떻게 쓰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주장을 펼 때마다 늘 이 작품을 거론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여기까지가 두 번째 읽었을 때까지의 감상이었고, 몇 해 뒤에 이 작품을 다시 손에 들었을 때는 약간 달라졌다. 여태의 감상 자체가 달라졌다는 뜻은 아니다. 작품의 새로운 면에 주목하게 되었다고 봐야 한다. 바스티안 발자타르 북스야말로 내가 여태 접한 작품 중 가장 부러워해 마땅한 주인공이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떠오른 거다.

이 작품 내에서 바스티안이 들어가는 환상의 세계는 "끝없는 이야기"라는 책 속의 세계이다. 바스티안이 이 책을 덮었을 때 - 모험에서 돌아왔을 때 - 흐른 시간은 고작해야 반나절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바스티안은 창고에 숨어 책 한 권을 읽었을 뿐이다. 그러나 바스티안이 경험한 독서를 '고작' 책 한 권을 읽었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느 누가 바스티안만큼이나 '책 속에 빠져들어' 봤겠는가. 독자라면 누구나 바스티안처럼 되길 바라고, 작가라면 누구나 바스티안 같은 독자를 가져보길 바라지 않을까. 그러니 바스티안을 그리워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P.S.

『끝없는 이야기』를 처음 읽었을 때는 그렇게 높은 평가를 하지 않았었다. 당시 내가 읽어낼 수 있었던 건 이 작품이 '평범한 이고깽물'과는 뭔가 다르기야 하다는 것 뿐이었고, 결국에는 '이고깽물'을 혹평할 만한 근거로 쓰일 만한 작품을 알게 되었다는 선에서 만족했을 뿐이었다. 내가 이 작품을 이처럼 좋아하게 된건 그로부터 적어도 2년 뒤다. 그 때서야 나는 『끝없는 이야기』를 읽어낼 여유를 갖췄던 셈이다.

P.S.2

이 작품을 읽은 뒤에 엔데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보려 했던 적이 있다. 물론 1순위는 어렸을 때 이미 읽었던 『모모』였고. 워터가이드에서 당시 절판 중이었던 『거울 속의 거울』인가가를 당시 대학 강사 생활하던 모님이 제본하여 뿌렸을 때(물론 복사비는 내야 했지만) 나 역시 받으려 했지만 서울 사는 사람 한정이어서 결국 수령해지 못했던 적이 있다. 내 대신 책을 받아주셨다가 결국 책 두 권을 떠안게 된 모 님께는 늘 죄송하게 생각했었는데, 작년엔가 수년 만에 뵈었을 때 여쭤보니 다핻히도 이미 선물용으로 쓰셨다고 했다.

그 이후에는 『자유의 감옥』이라는 중단편집을 사서 읽어봤지만 『끝없는 이야기』에 비하면 아무리 생각해봐도 별로. 지금 읽으면 또 어떨지 모르겠지만 지금 감상 같아서는... 이 외에 『짐 크누프』를 비롯한 다른 책들은 소개문만 읽어봐도 아동 서적이라는 느낌이 너무나 짙게 풍겨나오는지라 차마 건드리고 싶지 않다. 이러니 엔데는 나에게 『끝없는 이야기』와 『모모』의 작가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P.S.3
가만 생각해보면 내가 『끝없는 이야기』를 읽게 된 계기 자체도 작품 자체의 가치와는 무관했다. 이름 자체는 워터가이드에 올라왔던 '벌거지 팬터지 목록 2.0'을 통해 알고 있었지만 - 이름이 꽤 멋지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 읽어볼 생각을 하게 된 건 누군가가 워터가이드에 『끝없는 이야기』 번역본 선택에 대해 올렸던 질문글을 본 뒤였다. 당시 어느 답변자가 저자인 엔데와 초역자인 차경아 사이에서의 인연에 대해 거론하며 차경아역을 추천했었는데, 그 사연이라는게 퍽 인상깊었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의 미담이 나로 하여금 엔데라는 작가의 팬으로 만든 셈이다. 그러고보면 '가십거리'의 기능이라는 것도 꼭 그렇게 무시할만한 건 아니다.

이때의 경험은 내가 거의 처음으로 '외국 판타지'를 읽게 만들면서 한편으로는 '번역본'과 '가십거리'에 대하여 그리 집착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리플로 장문의 썰을 풀어내던 그이의 모습이 그렇게 부러울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훗날 내가 '판작안'과 '작가들에 대한 가십거리'를, 그리고 '북시 위키'를 만들게 되는 단초를 제공한 원흉(?)이랄까. 하지만 작품 자체는 정말 좋았고, 탈도 많기야 했지만 '판작안' 등의 기획도 결국 내가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으니 딱히 그에게 악감정은 없다. 아니, 악감정 가지는 쪽이 이상한 거던가.

'도서 > 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판타스틱》  (0) 2010/03/03
『끝없는 이야기』  (1) 2009/12/05
『뱀파이어 레스타』  (4) 2009/12/01
「빈 집」  (0) 2009/12/01
Posted by 최진석

트랙백 주소 : http://abraxas.pe.kr/trackback/282 관련글 쓰기

예전에 썼던 포스팅인데, '공개' 옵션을 누르질 않았던 모양이다. 다소 늦긴 했지만 여전히 유효하므로 늦게나마 공개글로 돌린다.



SF와 판타지를 만들기 위해 이방인이 되는 방법
강사: 김창규 / 기간: 2010년 1월 15일부터 10회 / 시간: 매주 금요일 19:00~21:30

 

사회문학으로서의 과학소설: SF와 마이너리티
강사: 정소연 / 기간: 2010년 1월 7일부터 8회 / 시간: 매주 목요일 19:00~21:00


요즘은 1시 이전에 잔다는 내용의 글을 쓴지 몇 시간이나 되었다고 이 새벽에 이런 글을...

각설하고,

문지문화원 사이에서 이번 겨울 학기에 SF 관련 강좌 두 개를 진행한다는 모양이다. 이 강사 두 분은 지난 학기에도 같은 장소에서 SF 강의를 하셨는데, 폐강되지 않고 강의가 이어지는걸 보면 나름 문지문화원 측에서 좋게 받아들였다는 뜻 아닐지. 사실 정소연님 쪽이야 같은 학기에 개설된 학기 중에서 가장 먼저 개설이 확정된(=최소 인원이 가장 빨리 찬) 강의라는 이야기를 들어서 크게 걱정하진 않았었지만 김창규님 쪽은 수강생이 심각할 정도로 적단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다소 걱정했더랬는데, 이번 학기에도 개설되어서 다행이다.

사실 이번 학기는 내게 큰 메리트가 없다. 아무리 장르문학 관련 공부가 절실하다고는 해도 지난 번에 강의 하나를 들은 입장에서 지난 학기와 똑같은 강의 주제에 똑같은 커리큘럼으로 진행되는 수업을 또 들을 수는 없지 않나. 그렇다고 현재로서는 창작에 큰 관심이 없는 내가 비싼 돈을 주고 김창규님의 창작 강의를 들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래저래 아쉽기만 하다. 정소연님 쪽 강의를 들을까 말까 고민중인 분들에게는 자신있게 추천드릴 수 있지만. (진짜다! 내 2학기 생활의 활력소였다 이 말씀!)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이렇게 적으나마 관련 강의들이 이루어지는 SF 진영 쪽의 사정이 부럽기만 하다. 판타지 쪽에서는 1억원짜리 공모전이니 뭐니 해가며 요란법석이기야 해도 실속은 하나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작가를 키워내기 위한 정규 교육 코스조차 없는 상황인데 말이다. 설마 문장의 작가평이나 거울 등의 합평회 등이 그 수요를 모두 만족시킨다고 믿는 사람은 없겠지?


'도서 > 소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지문화원 사이의 SF 강의  (0) 2009/12/03
움베르토 에코 마니아 컬렉션 출간..  (0) 2009/10/28
Mr.Know 세계 문학 전집 반값 이벤트  (0) 2009/10/27
문피아 단편제?  (4) 2009/10/26
Posted by 최진석

트랙백 주소 : http://abraxas.pe.kr/trackback/280 관련글 쓰기

뱀파이어 레스타. 1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앤 라이스 (황매, 2009년)
상세보기
뱀파이어 레스타. 2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앤 라이스 (황매, 2009년)
상세보기

앤 라이스의 히트작 시리즈 《뱀파이어 연대기》의 두번째 작품. 두번째 작품이라고는 하지만 무려 9년만에 나온 작품이고, 그만큼이나 전작인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문제는 그 변화가 과연 얼마나 성공적이냐 하는 것인데, 불행히도 그다지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작가가 자신의 히트작에 대한 '팬픽'을 쓰고자 했을 때 어떤 재앙이 초래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까. 프리퀄이라는게 대개 그런 위험을 어느 정도 안고 시작하기는 하지만 이 작품의 경우는 그게 상당히 치명적이었다.

전작에서 레스타가 보여줬던 매력 중에는 그가 실체를 알 수 없는, 불안하고 불안정한 캐릭터였다는 데서 기인하지 않았나 싶다. 루이스가 처음 그를 봤을 때는 정말 대단하고 무엇이든 아는 그런 인물처럼 보였지만 작품이 진행됨에 따라 실상은 천박하고 얄팍한 속빈 건달에 불과하다는게 드러나지 않던가. 그 실상을 허세와 비밀주의로 감추려던 레스타와, 뱀파이어로서의 경험을 쌓아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레스타의 실체에 대해 알게 되는 루이스 사이에서의 긴장... 그 속에서 겉으로는 강한 척 허세를 부리지만 누가 잘못 찌르기라도 하면 그대로 추락해버릴 듯한 아슬아슬한 면모를 보여주던 캐릭터. 그게 레스타 아니었나 하는 이야기다.

『뱀파이어 레스타』를 읽는 내내 입맛이 썼던 건 그런 데서 기인한다. 그러던 레스타가 2권에서는 락스타가 되어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거나 아예 자기 입으로 자기 과거사를 까발리기까지 하니, 이건 작품의 전제부터가 도무지 매력적이기지가 않은 거다. 비밀주의를 벗는다는 것 자체가 레스타의 매력을 상당 부분 벗겨낸다는 의미 아닌가 말이다. 그나마 일개 팬이 쓴 팬픽 같으면 공식 작품이 아니니까 무시할 수나 있는데 이건 작가 자신이 쓴 공식적인 후속작이고 보니 무시해버릴 수도 없고. 참으로 난감했다. 앤 라이스가 공식적으로 팬픽을 금지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는 심정이 참으로 복잡했고.

『뱀파이어 레스타』가 이런 작품이라는 걸 아주 모르지는 않았다. 애초에는 시리즈의 첫 작품인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만을 읽다 마려는 것을, 모처에서 "시리즈의 5권인 『악마 멤노크』가 시리즈 중 절정에 달한다"라는 말을 듣고 5권을 읽기 전에 읽어보려 산 것인데... 그나마 평가가 괜찮은 2권부터 이런 문제가 발생해서야 도저히 5권까지 버텨내지 못할 듯 하다. 게다가 말이 5권이지, 앞으로 남은 3,4,5권을 분량으로 따지면 무려 6권 분량 아닌가. 과연 5권에 이걸 감당할 정도의 가치가 있을까 싶다.

...라고 5권을 추천해주셨던 분께 불평했더니 매우 쿨하게 웃으며 "그러면 읽지 마세요. 세상에 좋은 작품이 얼마나 많은데 싫은걸 억지로 읽어요."라고 대답하셨다. 아, 그렇다면 나는 왜 대체 『뱀파이어 레스타』를 읽었단 말인가.


P.S.

꽤 오래 전에 읽었지만 영 마음에 들지 않은 작품인지라 평을 쓸지 말지 고민했었는데... 역시 쓰는게 낫지 싶었다.

P.S.2

얼마 전에 북시 위키의 내용을 복구하려고 다시 위키피디아에 들렀다가 든 생각인데, 우리 나라에서는 여전히 앤 라이스가 뱀파이어물 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미국에서는 차차 종교물 작가로서도 알려지는 추세가 아닌가 싶다. 분명 몇 달 전까지만 해도 'Anne Rice'항목에 대한 내용은 대개 뱀파이어 작가로서의 내용이었고, 앤 라이스가 쓴 종교물에 대해서는 다소 불평하는 듯한 뉘앙스의 문장이 제법 많았다.

그런데 얼마 전에 가서 확인해보니 앤 라이스가 남편의 사망 후 스트레스로 살이 얼마나 쪘었다는 둥, 앤 라이스 팬들이 앤 라이스의 새벽 미사 외출을 구경하기 위해 집 앞에 텐트치고 기다릴 정도였다는 둥의 가십거리들은 대부분 삭제되고 그를 대신하여 앤 라이스의 종교물에서 가져온 인용구들이 엄청나게 수록된 게 아닌가. 항목의 토론 페이지도 썰렁하기만 한 통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뭐 그 인용구 덕분에 《뱀파이어 연대기》에 대한 앤 라이스의 언급이 점점 황당 일로를 걷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나름 소득이기야 하지만, 항목 자체를 보는 재미는 영 줄었다.

P.S.3

그리고 이 작품의 역자에 대해서도 한 마디. 근래 재간된 《뱀파이어 연대기》시리즈는 과거 여울에서 김혜림 씨의 번역으로 나왔던 책을 그대로 재간한 것이라 들었다. 문제는 새 출판사에서 나온 번역본이 과거 판본을 번역했던 역자와 연락이 닿질 않아 하는 수 없이 과거의 번역을 그대로 가져다 편집을 해서 낸 책이라는 점이다.

김혜림 씨가 《뱀파이어 연대기》시리즈를 번역할 때 모 중학교 영어 교사로 재직중이었던 걸 감안하면 관련 정보가 남지 않았을 리 없거니와, 설령 찾지 못했다 하더라도 허락도 구하지 않은 채 옛 번역자의 글을 그대로 가져다 쓰는 게 정상적인 일인 걸까? 차라리 다른 번역자를 구해서 새로 번역하게 하는게 모양새는 더 좋지 않았겠냐는 말이다. 어차피 출판사의 주장대로 기존에 한국에서 출간되지 않은 6~10권도 번역할 예정이었다고 한다면 새로운 번역자를 구할 수밖에 없었을 텐데.

출판사의 말과는 달리 6~10권은 아직까지 출간되지 않았고, 출판사에서 마련한 뱀파이어 연대기 공식 팬카페도 사실상 2009년 8월 말 이후로는 관리가 전혀 되지 않는 상황이고 보니 (일단 그 이후로 올라온 글 자체가 10월 28일에 올라온 스팸더미밖에 없고, 그나마도 지금까지 삭제되지 않았다) 뭘 탓하는 상황 자체가 우습기도 한데... 

여하간 책 자체만이 아니라 외부 사정을 보더라도 영 씁쓸해지는 시리즈라고 할까.

'도서 > 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끝없는 이야기』  (1) 2009/12/05
『뱀파이어 레스타』  (4) 2009/12/01
「빈 집」  (0) 2009/12/01
『죽은 자들에게 고하라』  (2) 2009/10/20
Posted by 최진석

트랙백 주소 : http://abraxas.pe.kr/trackback/278 관련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