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소설가. 빅토리아 시대에 활동한 소설가 중 가장 유명하며 가장 인기 있는 작가이다. 영미권에서는 그의 작품이 단 한번도 절판된 적이 없을 정도이다. 올리버 트위스트 등 문학사에 남을만한 캐릭터들을 여럿 창조한 인물이기도 하다. 디킨스의 작품을 각색한 영화와 TV판만 해도 최소한 180편 이상 제작되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그의 생전에 연극으로 각색되었으며, 1913년에는 《The Pickwick Papers》의 무성 영화가 제작되었다.
그의 소설 대부분은 당시의 관행대로 잡지 등 정기간행물에 연재되는 형태로 발표되었다. 당시에는 일단 연재할 소설을 완결지은 후 발표하는 게 일반적인 형태였지만 디킨스는 연재와 집필을 병행하였다고 한다. 이 점은 그의 소설에 독특한 리듬을 부여하였다. 즉 중요한 부분에서 그날의 분량을 끊어버리는, 일종의 클리프헹어기법을 썼던 것이다. 조지 기싱이나 길버트 케이스 체스터튼과 같은 비평가·동료 작가들은 그의 숙련된 산문과 영어권의 문학적 교양에서 퍼올려진 독특한 캐릭터들에 경탄하곤 했다. 한편으로는 헨리 제임스나 버지니아 울프같은 작가들이 그의 감상주의를 문제삼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디킨스의 명성은 자신의 체험에 기초한 사회 하급계층의 생활상과 그들의 애환을 생생히 묘사하는 동시에 적절한 유머를 도입하여 사회의 온갖 모순과 부정을 신랄하게 비판한 데 있다. 그는 소설을 통하여 당대에 필요한 사회 개혁을 호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작가로서 인정을 받아 부유한 생활을 하게 된 뒤에는 동전을 구걸하는 빈민가의 어린이들을 지팡이로 쫓아 버리곤 했으며, 소설을 쓸 때 외에는 사생아를 양산하는데 열중했다고 한다.
찰스 디킨스는 자신의 작품을 대중 앞에서 낭독하기를 즐겨했으며, 사실 말년에 디킨스를 유명하게 만들었던 것도 이런 대중 낭독회였다. 디킨스는 한 작품의 낭독과 몸짓을 연습하는데 적어도 2개월 이상의 시간을 들였다. 그러나 정작 낭독회가 끝나고 들어오는 찬사에는 그저 고개를 한번 까닥이는게 전부였다고 한다.
영국 햄프셔주 포츠머스 태생. 아버지 존 디킨스는 해군 경리국에 근무하는 하급 관리였으며 찰스 디킨스는 여덟 형제 중 둘째였다. 세례는 1812년 3월 4일에 포츠시의 세인트 메리 교회에서 받았고, 다섯살 때 켄트 주 채텀으로 이주했다. 열살 때는 가족들과 함께 런던으로 이주되었다.
가난으로 인해 교육은 거의 받지 못했으며 일과의 대부분을 밖에서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독서는 무척 좋아했고, 특히 토비아스 스몰렛과 헨리 필딩의 피카레스크 소설들을 즐겨 읽었다. 훗날 찰스 디킨스는 자신의 유년 시절이 매우 고통스러웠다고 하면서, 그 시절에 봤던 사람들과 일화들에 대한 생생한 기억들이 소설에 반영되었다고 했다.
그래도 집안 경제 사정이 괜찮았을 때는 사립학교에서 약간의 교육을 받기도 했지만, 아버지가 유흥으로 인해 가산을 탕진하고 공직에서도 물러난데다 빚까지 얻어 결국 채무 관계로 수감되는 지경에 이르면서 학교도 그만두어야 했다. 왕립 음악원에 있던 누나 패니가 일요일에 외출을 허락받으면 누나와 함께 아버지가 수감된 감옥에 가서 하루를 보내곤 했다. 이 감옥은 그의 작품 중 《Little Dorrit》의 무대가 되었으며, 그 작품 속에서는 그 아버지가 수감된 캐릭터가 나온다.
아버지가 체포되기 직전(12살)부터는 런던의 한 구두약 공장에서 하루에 10시간의 노동을 하게 된다. 그가 받은 보수는 주급 6실링이었고 이 돈은 디킨스의 하숙비와 그의 가족 부양비로 쓰였다. 하숙집 주인인 로이란스 부인과는 사이가 좋았던 듯 하며 훗날 그의 작품 속에서도 무수히 나오는 하숙집 주인 캐릭터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공장에서의 고된 일은 디킨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이 때의 경험에서 나온 빈민층의 삶의 조건에 대한 분노는 후일 그의 작품의 주된 주제가 된다. 이 때에 대해 디킨스는 "충고도, 조언도, 격려도, 위로도, 도움도 나에게 줄 사람은 떠오르지 않는다. 신이시여 나를 구하소서!" (『데이비드 카퍼필드』)라고 썼다.
찰스 디킨스의 아버지가 수감된지 몇 달 정도 지났을 무렵 찰스 디킨스의 증조할머니가 사망하면서 디킨스의 아버지 앞으로 450파운드의 유산을 남긴다. 이 돈으로 그는 채무자들에게 돈을 갚고 감옥에서 풀려났고, 그의 가족들도 로이란스 부인의 하숙집에서 나오게 되었다. 이 뒤에 디킨스는 결국 웰링턴 기숙 학교에 입학하게 되지만, 디킨스의 어머니는 그를 바로 구두약 공장에서 빼오려 하지 않았었다. 물론 결국에는 학교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훗날 디킨스가 『데이비드 카퍼필드』에서 풍자하거니와, 이 학교도 그다지 좋은 곳은 아니었다) 이 사건은 디킨스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던 듯, 훗날 찰스 디킨스는 "(이 일을) 나는 절대 잊지 않았고, 절대 잊지 않을 것이고, 절대 잊을 수 없다."라는 말까지 남기며 이를 갈았다. 어쨌거나 이 일을 계기로 디킨스는 집안을 아버지가 장악해야 한다는 생각을 확고히 굳혔으며 전반적인 여성관 또한 부정적으로 변하고 말았다.
이후 학교를 2년 정도 다니다가 15세때 변호사 사무실에서 사환을 했으며 다음해 1828년 법원의 속기사를 거쳐서 신문사 속기 기자가 되었다. 먼 친척인 토마스 찰턴은 《Doctors' Commons》의 프리랜서 기자였고, 디킨스는 법정 재판에 대해 취재하기 위해 그의 박스를 공유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그는 세인트폴 인근의 법정에 4년 가까이 출입하며 법정에 대해 취재했다. 이 때 배운 것들은 『니콜라스 니클비』, 『돔비와 아들』, 그리고 특히 『황폐한 집』에 반영되었다. 이 작품들에 담긴 끝없는 음모, 치명적인 술책, 19세기 중반 영국의 사법 체계가 보여주는 꽉막힌 관료제 등에 대한 생생한 묘사는 일반 대중을 각성시켰다. 또한 디킨스는 합법성에 대한 맹목성이 매우 부당한 결과를 낳는다고 보았으며 특히 법에 대한 강조가 가난한 자들에 대한 만성적인 착취의 수단이 된다고 보았는데, 디킨스의 소설들이 대중들 사이에서 널리 읽힘에 따라 그의 견해 또한 널리 보급되었다.
1830년에는 은행가의 딸인 마리아 비드넬과 첫사랑에 빠진다. 마리아 측 부모가 이 관계를 반대하여 마리아를 파리의 학교로 보내버림으로서 관계도 끝나고 말았지만 마리아 비드넬은 훗날 『데이비드 카퍼필드』의 여주인공 도라의 모델이 된다.
[편집]언론과 초기 소설
1833년에 디킨스는 첫 단편 《A Dinner at Poplar Walk》를 런던의 정기 간행지, 《Monthly Magazine》에서 발표한다. 이듬해에는 Furnival's Inn의 방을 빌려 정치 저널리스트가 되어서는 《Morning Chronicle》지에 국회 토론 취재 기사를 보내고, 선거 캠페인으로 인해 역마차를 타고 브리튼 전역을 여행하기도 한다. 이 당시 정기간행물들에 그가 썼던 기사들은 《Sketches by Boz》(1836)라는 책으로 묶여나왔고, 이는 첫 장편 《The Pickwick Papers》(1836)의 연재로 이어졌다. 이후로도 디킨스는 문학적 경력을 이어가면서도 꾸준히 언론계에서의 경력을 이어갔다. 디킨스의 날카로운 지각, 자신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인간에 대한 이해, 입담은 디킨스를 순식간에 세계적 명사로 만든다.
1836년에는 《Bentley's Miscellany》지 편집자 일을 받아들여 3년간 일을 한다. 일을 그만둔 것은 잡지 소유주에게 불만을 품어서였다. 그와는 별개로 소설가로서의 성공은 계속되었다. 『올리버 트위스트』 (1837–39), 『니콜라스 니클비』 (1838–39), 《The Old Curiosity Shop》, 《Barnaby Rudge》 등이 잇달아 성공을 거둔다. 이 작품들은 모두 책으로 나오기 전에 매달 연재되기도 했었다. 1841년에는 디킨스의 애완 갈가마귀가 죽었는데, 디킨스는 이를 박제로 만들어 보관하였다. 현재는 필라델피아 자유 도서관(Free Library of Philadelphia)에서 소장 중이다.
1836년 4월 2일에는 《이브닝 크로니클》의 편집자 조지 호가스의 딸인 캐서린 톰슨 호가스와 결혼한다. 켄트 주 찰크에서의 짧은 신혼 여행을 다녀온 후 이들 부부는 블룸즈버리에 살림을 차렸으며 이후 열 명의 아이를 낳았다.
디킨스와 첫 아내 사이의 자녀들
- 찰스 쿨리포드 보즈 디킨스(C. C. B. 디킨스, 찰스 디킨스 Jr.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짐), 정기간행지 《All the Year Round》의 편집자,.
- 메리 디킨스
- 케이트 맥크리디 디킨스
- 월터 랜도르 디킨스
- 프랜시스 제프리 디킨스
- 알프레드 도로시 테니슨 디킨스
- 시드니 스미스 할디맨드 디킨스
- 헨리 필딩 디킨스 경
- 애니 애니 디킨스
- 에드워드 디킨스(오스트레일리아로 이민)
1837년 3월 25일에는, 가족 전체가 런던 48 도티 스트리트로 이주하여 3년간 거주한다. 찰스 디킨스는 이 거리의 4층 짜리 주택에 3년간 거주하면서 매년 £80를 지불하였다. 디킨스의 남동생인 프레데릭 디킨스가 이들과 동거했고, 캐서린의 17살된 동생 메리 또한 신혼인 언니와 매형을 돕기 위해 Furnival's Inn을 떠나 이들의 신혼집에 합류한다. 당시에는 신혼 부부의 살림을 돕기 위해 여성 쪽의 미혼 자매가 합류하는 일이 그리 이상한 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디킨스는 메리를 굉장히 아끼게 되었다. 메리는 1837년에 디킨스의 품 안에서 병사한다. 메리는 디킨스의 여러 소설의 캐릭터에도 반영되었고, 그 죽음은 Little Nell의 죽음으로 소설화되었다.
[편집]첫 미국 첫 방문
1842년에는 아내와 함께 첫 북미 여행을 떠나 미국과 캐나다를 여행했다. 이 때의 여행을 다룬 여행기에는 노예 제도 폐지를 찬성하는 내용이 실렸고, 제법 성공을 거두었다. 디킨스는 《American Notes for General Circulation》이라는 짧은 여행담을 남겼으며, 이 글에서 묘사된 경험은 《Martin Chuzzlewit》에 삽입된 몇 가지 에피소드의 재료가 되기도 했다. 디킨스는 자신이 취재한 "잔학 행위들"에 대한 "방대한 증거들"을 들어가며 노예제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남겼다. 존 타일러 대통령이 그를 백악관에 초청하기도 했다.
방문 기간 동안 디킨스는 뉴욕에서 저작권법 옹호 강연, 미국에 대한 인상을 담은 녹음 등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디킨스는 이 도시에 한달간 머물렀고, 소설가 워싱턴 어빙과 이브닝 포스트 편집장 윌리엄 컬렌 브라이언트 등의 명사들과 만난다. 1842년 2월 14일, 디킨스의 필명에서 딴 Boz 연회가 그를 주빈으로 하여 Park Theater에서 열린다. 이 연회에는 뉴욕의 3000명의 손님이 초대되었다. 이외에 디킨스는 맨하탄 지역에서 Five Points(유명 슬럼가), 월 스트리트, The Bowery 거리, The Tombs(감옥) 등을 방문한다. 당시 캐서린의 다른 자매인 조지나 호가스가 디킨스 가의 살림에 합류하여 부부가 남기고 간 어린 가족들을 돌보았다. 조지나 호가스는 찰스 디킨스가 사망하는 1870년까지 가정부, 조언자, 친구 역할을 했다.
그 직후, 디킨스는 유니테리언 기독교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명목상 성공회교도로 남긴 했지만 여기에 대한 관심은 디킨스의 평생 동안 지속된다. 디킨스의 작품은 보다 유명해지기 시작했으며, 특히 디킨스의 첫 크리스마스 소설인 『크리스마스 캐럴』(1843)이 큰 인기를 모았다. 사실 이 소설은 디킨스가 아내의 다섯번째 임신으로 인해 수입이 필요해지자 돈벌이용으로 쓴 작품이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이탈리아(1844)와 스위스(1846)에서 잠시 동안 체류한 뒤에는 『돔비와 아들』(1848), 『데이비드 카퍼필드』(1849–50)로 성공적인 경력을 이어간다.
1846년 5월, Coutts 금융 자산의 부유한 상속자인 Angela Burdett Coutts가 디킨스에게 접근하여 몰락한 여인들을 위한 구제소 설립에 대한 제의를 한다. 당시의 복지 단체들은 여인들에게 거칠고 가혹한 통제를 가하였는데, Coutts는 이와는 전혀 다른 단체를 구상하였다. 규율은 제시하되 따뜻한 환경을 제공하고자 했으며 여성들에게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는 등 이 여성들이 사회에 재편입되는데 필요한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자 했다. 처음에는 사양하였지만 결국 디킨스는 Urania Cottage라는 이름의 구제소를 설립하게 된다. 디킨스는 이 구제소의 운영, 구제소 규칙 선정, 수용 대상자 면접 등 여러가지 측면에 관여하였다. 면접 과정에서 만났던 여성들 중 일부는 디킨스의 소설에도 등장한다. 디킨스는 감옥과 구빈원을 돌아다니며 구제소에 입소시킬만한 후보자들을 찾았다. 일단 적격자가 발견되면 디킨스는 서명란에 '당신의 벗'이라고만 싸인한 익명의 초대장을 해당 여성에게 보냈다. 그 여성이 초대를 받아들이면 디킨스는 개인적인 면접을 거쳐 그 여인의 입소 자격을 심사했다. 1851년 11월 말, 디킨스는 타비스톡 저택으로 옮겨 『황폐한 집』 (1852–53), Hard Times (1854) Little Dorrit (1857) 등을 쓰기 시작한다. 이곳은 디킨스가 Forster's Life에서 묘사했던 아마추어 연극들을 공연한 장소이기도 하다.
1856년에는 Gad's Hill Place를 사들였다. 켄트 주 Higham에 있는 이 대저택은 디킨스가 어렸을 때부터 갖고자 했던 집이었다. 이 지역은 셰익스피어의 『헨리 4세』 1부에 나오는 장소이기도 한데, 이러한 문학사적 의미 또한 디킨스에게는 중요했던 듯 싶다.
1857년에는 제자 윌키 콜린스와 합작한 희극 《The Frozen Deep》의 낭독 공연을 준비하면서 여성 파트를 맡을 전문 여배우들을 고용한다. 디킨스는 이들 중 하나였던 엘렌 터난과 이후 평생 동안 관계를 맺는다. 디킨스는 1858년부터 아내 캐서린과의 별거를 시작하지만 이혼은 거의 생각지도 않았었다. 디킨스가 작가로서 너무 유명해져버린게 한 이유였던 것으로 보이며, 별거에 들어간 이후로도 디킨스는 오랫동안 아내를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그들은 처음에야 서로 행복해 보였지만 캐서린은 디킨스가 보였던 끝없는 에너지들을 공유하지 못했던 듯 하다. 그렇지만 캐서린이 유달리 무책임하거나 했던 것은 아니다. 자녀 10명의 육아, 세계적 명성을 누리는 작가와 산다는 중압감, 가사 등 그녀가 감당해야 했던 것들은 결코 가볍지 않았었다. 부부생활에 대해 디킨스가 불만족스러워했던 징조는 1855년에 디킨스가 첫사랑, 마리아 비드넬을 만나러 갔을 때부터 보여왔다. 마리아 또한 다른 사람과 결혼했었지만 이 때의 경험은 첫사랑에 대한 디킨스의 낭만적인 추억을 떠올리게 했던 듯 하다.
낭독 공연으로 수익을 낼 수 없을지 고민하던 중, 디킨스는 재정 위기를 겪던 아동 병원인 그레이트 오먼드 스트리트 병원으로부터 자선 공연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디킨스는 이 요청을 수락한다. 디킨스 자신이 자선으로 잘 알려져 있기도 했지만 디킨스의 친구이자 병원의 설립자인 찰스 웨스트의 요청도 큰 역할을 했다. 디킨스는 이 요청에 진심을 다해 반응했다. 잘 알려진대로 디킨스는 자신이 《Sketches by Boz》와 《The Pickwick Papers》를 연재하기도 했던 주간지 The Examiner에다 1849년에 학대당한 아이들을 돕기 위한 익명의 기사를 투고하기도 했고, 1852년에는 이 병원이 개장했을 때 병원을 홍보하는 기사를 쓰기도 했었다. 디킨스의 자선 공연은 세인트 마틴 인 더 필드 교회 홀에서 열렸다. 낭독된 작품은 『크리스마스 캐럴』이었다. 이 낭독으로 인해 상당한 자선금이 모여, 병원은 인근의 집을 구입하기에 충분한 돈을 벌어들였으며, 입원실의 침대도 크게 늘렸다.
디킨스는 아내와 별거한 뒤인 1858년 여름부터 디킨스는 런던에서 첫 유료 낭독 공연들을 행한다. 이 투어는 6월 22일에 종료되었다. 그러나 공연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아 디킨스는 보다 야심찬 낭독 투어를 기획한다. 이 투어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포함한 영국 전역에서 이루어졌다. 8월 2월 클리프튼에서의 공연으로 시작된 이 투어는 석달 뒤인 11월 13일 브링튼에서의 마지막 공연으로 막을 내린다. 이 투어 동안 디킨스는 87회의 공연을 했고, 어떤 날은 낮/저녁 공연 모두 소화해내기도 했다.
이 시기의 『두 도시 이야기』(1859), 『위대한 유산』(1861)들은 평단과 일반 독자들 양쪽으로부터 큰 호응을 얻는다. 이 기간 동안 디킨스는 출판사와 편집자 일도 하였으며 특히 저널 《Household Words》(1850–1859)와 《All the Year Round》(1858–1870)의 일에 헌신하였다. 1860년 9월 초, 디킨스는 자택 Gad's Hill의 뒤뜰에서 거대한 모닥불을 피워 자신이 주고 받은 편지 거의 대부분을 태워버린다. 업무상 편지만 남았을 뿐이었다. 엘렌 터난이 디킨스의 편지를 모조리 불태워버린 관계로, 두 사람의 내연 관계가 어느 수준까지 갔었는지는 디킨스의 딸인 케이트 디킨스가 아버지와의 관계를 다룬 『디킨스와 딸』(1939)이라는 책을 출간한 뒤에야 공개되었다. 케이트 디킨스는 1929년에 사망하기 전, 작가 Gladys Storey와 함께 이 책을 썼었는데, 이 책에는 디킨스와 터난 사이에 유아 때 죽은 아들이 하나 있었다는 주장이 실렸다. 다만 케이트 디킨스의 증언 외에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없다. 죽을 때 디킨스는 터난에게 연금을 주어 터난이 혼자서도 살 수 있도록 배려하고자 했다. 클레어 토말린의 책 《The Invisible Woman》은 터난이 디킨스의 말년 13년을 같이 살았다는 가설을 세우고 이를 입증해낸다.
같은 기간에, 디킨스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에 대한 흥미를 더욱 심화시켰다. 디킨스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초자연현상 연구 단체인 The Ghost Club의 초기 회원이었다.
[편집]프랭클린 사건
1845년에는 찰스 디킨스의 우상이었던 탐험가 존 프랭클린이 북서항로 탐색을 위한 탐험 중에 실종되는 사고가 발생한다. 이에 프랭클린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프랭클린의 수색을 촉구하였는데, 디킨스 또한 여기에 동참하였다. 결국 1854년에 스코틀랜드 탐험가 존 래 박사가 프랭클린 탐험대의 흔적을 발견하였는데, 존 래 박사의 보고서는 영국 사회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그의 보고서에는 프랭클린 탐험대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식인까지 해가며 연명했었다는 증거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에 대하여 찰스 디킨스는 탐험대원들 자신들끼리 식인을 한 것이 아니라 에스키모에게 살해된 것이리라는 추측을 내놓는다. 이 의견은 식인에 대한 보고자인 존 래 박사에게 반격당하지만, 디킨스는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기를 거부했다.
1865년 6월 9일에는 터난과 함께 파리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던 중에 스테이플허스트 철도 사고에 휘말렸다. 이 사고는 수리 중이던 철교를 건너다가 열차의 첫 7칸이 철로에서 이탈한 사고였다. 디킨스가 탑승했던 1등석 칸만이 무사했다. 디킨스는 구조대가 도착하기 전까지 사상자들을 보살폈다. 떠나기 직전에 그는 집필중이던 《Our Mutual Friend》의 원고가 아직 열차 안에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고, 이를 회수하기 위해 열차로 돌아갔다. 물론 디킨스는 훗날 이 경험을 자신의 소설에 반영하였다. 괴담 단편인 The Signal-Man가 바로 그렇게 만들어진 단편이다. 자신이 겪은 사고 외에도 클레이튼 터널 철도 사고(1861) 등 여러 철도 사고를 참고하였다고 한다.
사고 직후에는 사고 조사 참여 등을 꺼리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사고 당시 터난/터난의 어머니와 함께 여행중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질 경우 스캔들이 될 가능성이 컸기 때문으로 보인다. 사실 사고 당시 몸은 다치지 않았지만 디킨스는 이 사고의 충격에서 끝내 회복되지 못했고, 당시 집필 중이던 《Our Mutual Friend》와 신작 《The Mystery of Edwin Drood》의 집필 또한 지체되었다. 후자는 결국 디킨스가 사망할 때까지도 완성되지 못했다. 집필은 지체되었지만 낭독자로서의 활동은 지속되었다. 사실 그 시절에는 작가들의 강연 자체가 큰 인기를 끌었고, 디킨스는 그런 작가들 중에서도 특히 사랑받는 낭독자였다. 낭독자로서 어느 정도 명성을 쌓은 뒤에는 디킨스가 아예 낭독자로 전업할까 하는 농담을 하기도 했고, 집필 자체도 낭독의 편이성을 고려하는 형태로 진행되었을 정도였다. 해서 디킨스는 집필을 중단한 뒤에도 순회 공연은 지속했다. 1866년에는 영국과 스코틀랜드에서 투어가 있었고, 이듬해에는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더 많은 낭독이 이루어졌다.
[편집]두번째 미국 방문
1867년 11월 9일, 디킨스는 미국으로 두번째 낭독 투어를 떠났다. 리버풀에서 출발한 이 여행은 이듬해에도 계속되었다. 11월 19일에 보스턴에 도착해서는 그 달 말까지 보스턴에서 열린 저녁 연회들을 통해 랄프 왈도 에머슨,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우, 미국에서의 디킨스 소설 출간을 맡은 출판업자 제임스 토마스 필즈 등의 명사들과 교류하는데 집중하였다. 12월 초부터는 낭독회가 시작되었고, 보스턴과 뉴욕을 오가는 생활을 했다. 디킨스는 스스로 "진짜 미국 코감기(true American catarrh)"라고 불렀던 병에 시달리면서도 당초 계획했던 일정을 모두 소화해냈다. 뉴욕에서는 슈타인웨이 홀에서 1867년 12월 9일부터 1868년 4월 18일까지 22회의 공연을 했고, 1868년 1월 16일부터 21일까지는 플리머스 순례자 교회에서 4회의 공연을 했다. 여행 동안 디킨스는 미국의 대중과 환경에 일어난 중대한 변화를 목격한다. 그의 마지막 출연은 4월 18일에 American Press의 주최로 유명 식당 델모니코에서 열린 연회에서였다. 디킨스는 이 연회의 주빈이었다. 이 연회에서 그는 다시는 미국을 비난하지 않으리라 약속하게 된다. 여행 끄트머리에는 딱딱한 음식을 먹을 수 없어 샴페인과 달걀로 연명하였다. 4월 23일에는 미국 투어를 마치고 영국행 배를 탄다.
[편집]계속되는 낭독
1868년에, 디킨스는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지역에서의 낭독 투어를 떠나지만 투어 중간에 디킨스가 쓰러짐에 따라 중단되고 만다. 1869년 4월 22일, 랭커셔 프레스턴에서였다. 증상은 경미한 뇌졸증이었다. 이 사건 이후 디킨스는 이후의 낭독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는 유작, 《The Mystery of Edwin Drood》의 작업을 시작한다. 자료 조사를 위해 섀드웰의 아편굴에서 "Opium Sal"라고만 알려진 늙은 마약상을 취재하기도 했다.
충분한 힘을 회복하고난 뒤 디킨스는 의사의 동의를 얻어 (최후의) 낭독 공연에 나선다. 이는 그가 병으로 누워 있는 동안 잃은 후원자들을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1870년 1월 11일부터 3월 15일 사이에 12회의 공연이 이루어졌다. 마지막 공연은 런던 세인트 제임스 홀에서 열린 오후 8시 공연이었다. 이 당시 그의 건강은 극히 악화되어 있었지만 디킨스는 『크리스마스 캐럴』과 《The Trial from Pickwick》를 낭독한다. 5월 2일에는 영국 황태자 부처가 참석한 가운데서 최후의 낭독 공연을 한다.
하루 종일 유작을 집필하고 난 다음 날인 1870년 6월 8일에, 디킨스는 자택에서 뇌졸증 증세를 느끼더니 다음날인 6월 9일에 사망했다. 스테이플허스트 철도 사고가 일어난지 정확히 5년 뒤였다. 대작가는 독자들로부터 애도를 받았다. 찰스 디킨스 자신은 장례식을 소박하게 치른 뒤 로체스터 대성당에 묻히길 바랐으나 결국은 각계각층의 애도 속에 영국 문인 최고의 영예인 웨스트민스터 사원 '시인들의 묘역'에 안장되었다. 디킨스의 유언장에는 자신을 기리는 그 어떤 기념비도 세우지 말라는 것이 분명히 명시되었다. 다만 프랜시스 에드윈 엘웰이 작업한 실물 크기의 디킨스 동상이 미국 펜실바니아 주 필라델피아의 클라크 공원에 세워져 있을 뿐이다.
[편집]스타일
디킨스는 18세기 고딕 로맨스(Gothic romance)를 몹시 좋아하였다. 사실 이 당시 이 장르는 거의 패러디의 대상으로 전락한게 일반적이었다.
그의 소설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캐릭터'는 런던 그 자체이다. 시외의 역마차 여관에서부터 템스 강 하류에 이르는, 수도의 모든 면들이 그의 작품들에서 다루어졌다.
그의 글은 화려하면서 시적이고, 강한 유머 요소를 갖췄다. 영국 귀족의 속물 근성에 대한 풍자 또한 유명했다. 무슨 작품에선가는 한 캐릭터를 "고귀한 냉장고"(Nobler refrigerator, 빅토리아 시대에 무슨 냉장고냐고 하겠지만 최초의 냉장고는 1748년에 나왔고 1857년부터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제임스 해리슨이 개발한 냉장고가 세계 최초로 시판되기 시작했었다)라고 부른 적도 있었다.
등장 인물들의 이름은 독자가 극중에서의 역할을 짐작할만한 단서를 제공했다. 이를테면 『데이비드 카퍼필드』에 나오는 머드스톤 씨(Mr. Murdstone)의 이름은 '죽이다'(murder)와 '섬뜩할 정도로 냉담함'(stony coldness)의 합성어이다. 또한 그는 판타지와 리얼리즘을 결합한 형태의 글을 자주 썼다. 『크리스마스 캐럴』이 그 예이다.
[편집]캐릭터
디킨스는 노동 계급의 고난에 대한 묘사, 복잡한 플롯, 유머 감각으로도 명성이 높았다. 그러나 디킨스를 가장 유명하게 만들었던 요소는 그가 창조했던 여러 캐릭터들이었다. 디킨스는 자신의 경험을 활용하여 당시의 독자들이 공감할 만한 여러 인물들을 창조해냈었다. 1836년의 Pickwick Papers를 시작으로 디킨스는 상당히 많은 소설들을 썼고, 그 작품들은 각각이 실제같은 개성과 생생한 신체 묘사로 가득찼다. 디킨스의 벗이자 전기 작가인 존 포스터는 디킨스 소설의 리얼한 캐릭터들이 "그들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그들 안으로 들어가 그들 자신을 묘사"한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디킨스의 캐릭터들은 — 특히 이름이 특이했다는 점에서 — 영문학 안에서 기억될 만하다. 에베니저 스크루지, 타이니 팀, 제이콥 말리, 밥 크래치트, 올리버 트위스트, 아트풀 닷저, 페이긴, 빌 사익스, 핍, 미스 하비샴, 찰스 다네이, 데이비드 카퍼필드, 미스터 미카버, 아벨 매그위치, 다니엘 퀼립, 사무엘 픽윅, 웩포드 스퀴어스, 유리아 히프 등은 상당히 잘 알려진 캐릭터들로, 다른 작가들이 이러한 캐릭터들을 직접 인용하여 글을 쓴 예도 있을 정도이다.
디킨스는 삽화가들과도 꽤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삽화가들에게 작품의 요약본과 함께 캐릭터와 설정이 들어간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해주었다. 이런 브리핑은 매달 연재분을 쓰기에 앞서 이루어졌다. 《Our Mutual Friend》의 삽화를 그렸던 Marcus Stone은 디킨스가 늘 캐릭터들의 가장 디테일한 부분까지 묘사할 준비를 갖춰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회고하였다. 디킨스의 집필이 이러한 관계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은 오늘날의 디킨스 독자들에게 상당히 중요한 요소이다. 이 삽화가들은 디킨스의 집필 의도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특히 디킨스의 소설을 영화화하고자 하는 이들은 캐릭터 설정, 복식, 무대 디자인 등에 여전히 이 삽화가들의 그림을 참고하는 판이다.
[편집]에피소드식 글쓰기
디킨스의 주요 장편 소설 대부분은 월간지나 주간지에 연재되었다가 나중에 책으로 묶여 나오는 방식으로 출간되었다. 이 때문에 전개가 다분히 통속적으로 흘러가는 경향이 있었고, 연재분 끄트머리마다 중요한 부분에서 끊어버리는, 클리프행어 기법을 쓰곤 했다. 이 때문에 영국에서 새 연재분이 오길 기다려야 했던 미국 팬들은 심지어 뉴욕의 항구 앞에서 진치고 있다가 배들이 들어오면 승무원들에게 "Little Nell 죽었어요?" 하고 소리쳐 묻기도 했다고 한다.
디킨스가 보여준 연재물 창작 기술은 디킨스가 삽화가들과 보여준 관계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이해될 수 있다. 디킨스는 연재분 집필에 들어가기 전에 앞으로의 진행 상황과 자신의 의도에 대하여 삽화가들과 논의하였는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삽화가들은 대중들 이전에 디킨스의 연재물에 담긴 내용과 의도에 은밀히 관여하였다. 작가와 삽화가 사이에서 오간 편지를 통해, 디킨스의 작품에 깔린 의도가 보다 잘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기능이 가장 잘 발휘된 소설은 월간 연재물이었던 『올리버 트위스트』였다. 이 작품의 어떤 연재분의 결말에서는 어린 올리버가 총에 맞는다. 독자들은 한달만 기다리면 그 결과에 대해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디킨스는 그 다음 연재분에서도 올리버가 어떻게 될지 어떤 단서도 주지 않았다. 그보다는 독자들은 두 달을 기다리고서야 올리버의 생존 여부에 대해 알 수 있었다.
디킨스식 글쓰기가 보여준 다른 큰 특징은 그가 독자들의 의견에 즉각적으로 반응했다는 점이다. 디킨스는 소위 '비축분' 원고를 그리 많이 쌓아놓지 않았고, 최신 연재분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을 살펴서 스토리를 바꾸기도 했다. 이 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는 『골동품 상점』이다. 이 작품의 연재가 끄트머리에 갈 무렵 디킨스의 친구 존 포스터는 주인공의 운명에 대해 이야기하며 "자네는 그녀를 죽여야 한다는 걸 알고 있지. 그렇지 않나?"하고 지적하였다. 포스터는 희극과 비극의 구조 차이에 대해 설명해주면서 그러한 결말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조악하게 요약하자면, 디킨스가 이 소설을 비극으로 썼음에 따라 소설의 슬픈 결말은 이미 결정되었다는 것이었다. 디킨스는 포스터의 조언에 동의했고, 이 소설의 결말은 지금 우리가 아는 방식대로 처리되었다.
[편집]자전적 요소
작가라면 누구나 자신의 작품에 자전적 요소를 넣지 않았는가 하는 의심을 받기 마련이지만, 디킨스의 경우는 상당히 유념해볼 필요가 있다. 『데이비드 카퍼필드』는 디킨스의 자전적 요소가 가장 많이 들어간 소설 중 하나이다.
끝없는 법정 재판과 변론에 대한 『황폐한 집』의 장면들은 디킨스 자신이 법정 기자로 일하던 시절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디킨스의 아버지가 빚 때문에 감옥에 간 적도 있었으며, 이 점도 그의 작품 속 법정/감옥 묘사에 영향을 끼쳤다.
이 등장인물들은 때대로 디킨스 주변 인물들에게서 따와지기도 했다. 『황폐한 집』의 해럴드 스킴폴은 작가 리 헌트에게서 따왔고, 『데이비드 카퍼필드』의 미스 모우처는 아내의 난쟁이 발 치료 의사에서 따왔다. 『골동품 상점』의 Little Nell은 디킨스의 처제로 짐작된다. 윌리엄 도리트, 니콜라스 니클비의 아버지, 윌킨스 미카버는 디킨스 자신의 아버지에서 비롯되었고 니클비 부인과 미카버 부인은 자신의 어머니에게서 비롯된듯 보인다. 『위대한 유산』의 핍이 보이는 속물스런 상태는 어느 정도 작가 자신과 관계된 듯 보인다.
유년 시절의 연인 또한 그의 작품 속에 많이 보이는 요소인데, (『데이비드 카퍼필드』의 꼬마 에밀리 등) 이는 디킨스 자신이 유년 시절에 좋아했던 루시 스토힐이란 여성 때문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디킨스는 자신의 유년 시절 경험을 많이 활용하였지만, 그 사실을 상당히 부끄럽게 여겨 자신의 인생사와의 연결점을 잘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그의 유년 시절에 대해서는 디킨스가 사망한지 6년 뒤에 존 포스터가 디킨스와 합작한 평전을 내기 전까지는 알려진 사실이 거의 없었다.
[편집]사회 비판
디킨스의 소설들은 당대 사회에 대한 평가를 담고 있기도 했다. 디킨스는 빅토리아 사회의 가난과 사회 계층 분화 현상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가였다. 디킨스의 두번째 장편 『올리버 트위스트』(1839)를 읽은 당대 독자들은 소설에서 묘사된 가난과 범죄, 런던 슬럼가와 제이콥의 섬의 생활상에 대해 깊은 충격을 받았다. 또한 비극적인 매춘부 낸시를 통해 "불행아" 쯤으로 천대받던 이러한 여성들이 당대의 계급·경제 체제의 희생자임을 독자들에게 호소하였다. 『황폐한 집』과 《Little Dorrit》에서는 빅토리아 시대의 공공 기관 조직들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제기한다. 『황폐한 집』에서는 형평법원의 지루한 소송 과정이 사람들의 삶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드는지 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였고, 《Little Dorrit》에서는 무능하고 부패한 특허청과 무분별한 시장 투기 양측에 대한 비판을 제기한다.
[편집]문학적 기법
디킨스는 자신이 고발하고자 하는 추악한 사회적 진실과 대비되는 '이상적인' 등장 인물과 상당히 감상적인 장면들을 종종 활용하였다. 『골동품 상점』(1841)의 주인공 Nell Trent의 이야기는 당대 독자들에게 대단히 감동적인 장면으로 받아들여졌다. 다만 오스카 와일드는 이를 우스꽝스러운 신파로 여겨, 이 작품의 결말을 두고 "꼬마 Nell의 죽음에 웃지 않으려면 돌로 된 심장이 필요할 것이다."라며 조롱하였다.
『올리버 트위스트』에서 디킨스는 독자들에게 잔인한 고아원 생활이나 갱단의 강제 가입 등을 겪는데도 결코 타락하지 않는, 그야말로 비현실적일 정도로 선량한 소년이라는 이상적인 소년상을 제시한다. 후기작에서도 이러한 이상적인 인물들이 소설의 중심에 서긴 하지만(『황폐한 집』의 에스더 서머슨과 《Little Dorrit》의 에이미 도릿), 이러한 이상주의는 디킨스가 행하는 통렬한 사회 비판의 목표를 강조하는 수단으로서 활용된다. 그의 소설 대부분은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관계되며, 인민의 삶을 조종하는 사회 통제 매커니즘에 초점을 둔다. (가령 《Hard Times》의 공장 네트워크와 《Our Mutual Friend》의 위선적인 특권 계급 등). 디킨스는 때로 놀라운 우연을 활용하기도 한다. 예컨대 『올리버 트위스트』의 주인공은 원래 상류층 가정의 아이였다는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비참한 상태에서 구원받는다. 이러한 장치는 디킨스가 무척 좋아했던 18세기 피카레스크 소설에서 자주 사용하였던 기법이다. 다만 디킨스에게 이는 단순한 플롯 장치가 아니라 선(善)은 결국에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승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휴머니즘의 소산이었던 듯 하다.
[편집]사회 비판/개혁
『두 도시 이야기』는 디킨스 소설 중에서도 가장 잘 팔린 작품이다. 1859년에 첫 출간된 이래 이 소설은 2억부 이상 판매되었고, 오늘날에도 영어권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 중 하나이다.
대영제국이 세계 패권 국가였던 그 당시, 디킨스는 제국의 중심부에서 잊혀지고 소외되었던 이들의 삶을 부각시켰다. 그의 저널리즘이 위생이나 구빈원과 같은 특정 이슈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긴 했지만 그의 소설은 계급 불평등에 대한 여론을 바꾸는데 크게 일조하였다. 디킨스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착취와 억압을 묘사하였고, 이들의 고난을 인정하는 수준을 넘어 조장하기까지 하는 공무원들과 공공 기관들을 비난하였다.
이러한 문제 의식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 《Hard Times》(1854)이다. 이 작품은 디킨스가 산업화 사회의 노동자 계급을 다룬 유일한 장편 길이 소설인데, 이 작품에서 디킨스는 공장주들에게 조종당하는 소외된 사회 계층을 그려내기 위해 신랄한 비평과 풍자 모두를 사용하였다. 그 노동자들이 진짜 사람이 아니라 자신들이 작동시키는 기계의 부속물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그의 작품들은 특히 언론인과 정치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하위 계급들이 겪는 압박을 알리는데 일조하였다. 한 예로 《The Pickwick Papers》의 감옥 장면들은 악명높은 감옥, Fleet Prison이 폐쇄되는데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카를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디킨스를 비롯한 빅토리아 시대 영국 소설가들은 "전문 정치인, 정치평론가/기자 및 윤리학자들 전체가 해왔던 것보다도 더 많이 정치사회적 진실에 대해 이야기해왔다." 디킨스의 소설들이 누린 이례적인 인기는, 단순히 스토리와 캐릭터를 짜내는 능력만이 아니라 빅토리아 사회 대중들에게 거의 무시당하고 있던 사회적 정의를 직면시켰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다만 그의 소설들이 19세기 영국에 대한 생생한 묘사를 제공하긴 하지만 빅토리아 사회의 세계사적 위치에 대해서는 다소 부정확하고 시대착오적인 묘사를 제공하기도 했다. 디킨스가 사망하는 1870년까지의 10년 동안, 영국 소설에서는 사회적·철학적으로 비관적인 견해들이 더욱 강화되었다.
[편집]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캐럴』은 디킨스의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많이 영화화된 작품이다. 이 간단한 교훈담은 크리스마스에 대한 이미지를 다시 만든 소설이기도 하다. 실로, 이 소설이 다른 크리스마스물을 능가했던 점은 단순한 인기 뿐만이 아니라 크리스마스에 대한 서구인들의 인식 자체를 바꿔놓았다는 점에 있다.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경구만 해도 이 소설이 대중화시킨 것이다.
어떤 역사가들은 이 책이 크리스마스의 중요성을 부각시킨 소설이며, 영미의 청교도적 사회 속에서 이교도 문화라 하여 짓눌렸던 축제 문화를 복권시킨 소설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역사가 로널드 휴튼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크리스마스 문화는 중기 빅토리아 사회에 『크리스마스 캐럴』이 성공함에 따라 형성된 것이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크리스마스는 공동체 및 교회가 중심이 되는 공적 행사였으나 디킨스는 크리스마스를 가족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후한 축제로 생각하였고, 그 견해가 확산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에 덧붙여 디킨스는 서구에서의 축제 문화에 다방면으로 영향을 끼쳤다. 가족 모임, 계절 음식과 음료, 춤, 놀이 등. 디킨스 개인으로 본다면 『크리스마스 캐럴』은 작가의 명성을 회복시킨 작품이기도 하다.
[편집]후대에 대한 영향
디킨스는 토마스 하디와 조지 기싱과 같은 빅토리아 시대 소설가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다만 그들의 작품들은 빅토리아 시대 종교 단체들에 대해 직면하고 도전하려는, 디킨스에 비해 보다 진보적인 자발성을 보인다.
최근의 소설가 중에서도 디킨스에게서 영향을 받은 작가들은 많다. 예를 들자면 앤 라이스, 톰 울프, 존 어빙 같은 작가들이 그러하다. 유머 작가제임스 핀 가드너는 심지어 다소 놀림조로 『크리스마스 캐럴』의 "정치적으로 공정한 버전"을 쓰기도 했으며, 어느 라디오 방송에서는 다소 애정어린 패러디물인 《황폐한 유산》이 방송되기도 했다. 매튜 펄의 소설 『최후의 디킨스』는 찰스 디킨스의 미완성 유작인 Edwin Drood가 사실은 완결되었었다는 가정 하에 나온 스릴러물이다.
디킨스의 생애가 TV 미니시리즈나 원맨쇼로 다뤄진 적은 있지만 할리우드계의 주목을 받은 적은 없다.
[편집]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에 대한 입장
[편집]유태인
폴 발레리는 《The Independent》에서 페이긴이 디킨스의 소설 전체에 나오는 989명의 캐릭터들은 물론이고 영문학 전체를 통틀어봐서도 가장 그로테스크한 유태인일 거라고 평가하였다. 페이긴은 『올리버 트위스트』에서 나오는 유태인으로, 런던에서 소매치기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운영하는 인물이다.
이 인물은 디킨스가 기자 시절에 취재하기도 했던 유태인 범죄자 아이키 솔로몬(Ikey Solomon)에서 비롯되었으리라 짐작된다. 문학 작품에서 유태인이 다뤄지는 방식에 대해 연구했던 나디아 볼드먼은 페이긴에 대한 묘사가 유태인을 악마나 짐승와 같은, 본질적인 악으로 보던 이미지에서 비롯되었을 거라고 주장하였다.
이 소설은 1~38장에서 페이긴을 257번에 걸쳐 "유태인"이라고 부른다, 다른 인물들의 인종이나 종교는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특기해볼만하다. 1854년에, 《Jewish Chronicle》에서는 왜 "유태인만이 이 대문호이자 억압받는 자들의 강력한 벗의 '동정하는 마음'에서 제외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글을 싣기도 했다. 디킨스가 1860년에 내놓은 집을 구입했던 데이비스의 아내 엘리자 데이비스는 디킨스에게 페이긴의 묘사를 항의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에 더하여 엘리자는 디킨스가 "멸시받는 헤브라이 사람들에 대한 비열한 편견을 조장"하였으며, 그가 유태인들에게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다고 비판하였다.
디킨스는 엘리자의 비판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디킨스는 『올리버 트위스트』의 출간을 정지시키고는 작품에서 페이긴을 "유태인"이라고 부르는 부분을 수정했다. 다음 작품인 《Our Mutual Friend》에서는 - 발레리의 평가에 따르면 - 페이긴의 대척점에 섰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선량한 유태인인 Riah (히브리어로 "친구"를 의미한다)라는 캐릭터를 집어넣었다. 이에 데이비스는 디킨스에게 감사의 표시로 희랍어 성경 한 부를 보냈다.
[편집]인도인
세포이 항쟁 당시 디킨스는 제자 윌키 콜린스와 함께 이를 규탄하는 《The Perils of Certain English Prisoners》를 썼었다. 이 책에서 디킨스는 인도인들이 영국군들을 전멸시키고 여자와 아이들을 대량 학살하였던 칸푸르 대학살 등을 거론하며 세포이 항쟁 참가자들을 이중 염색자 내지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악한들이라며 규탄하였다.
이 책들은 세포이 항쟁에 대한 영국 작가들의 시각에 상당한 영향을 끼쳐, 영국인들을 희생자로, 인도인들을 악한으로 여기게 하는데 일조하였다. 이 책을 같이 썼던 윌키 콜린스는 2장을 통해 디킨스의 극단주의에서 살짝 비껴나와 영국의 인종주의를 풍자하기도 했다.
현대에 와서는 디킨스가 당시 인도에서 군복무중이던 아들의 위치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거라는 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 자신이 영국군에 대한 비판을 쏟아낼 경우 아들의 상관들의 심기를 건드릴 거라 우려했다는 것이다.
[편집]그 외
이누이트에 대한 그의 견해는 위에서 이야기했던 프랭클린 사건에서 자세히 드러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