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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6/02 찰스 디킨스
  2. 2010/06/01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과제)

찰스 디킨스

도서/인명 2010/06/02 20:40

※ 이 문서는 북시 위키(http://www.booksea.pe.kr)의 '찰스 디킨스' 항목의 백업입니다.

Charles John Huffam Dickens(1812.2.7-1870.6.9)

영국의 소설가. 빅토리아 시대에 활동한 소설가 중 가장 유명하며 가장 인기 있는 작가이다. 영미권에서는 그의 작품이 단 한번도 절판된 적이 없을 정도이다. 올리버 트위스트 등 문학사에 남을만한 캐릭터들을 여럿 창조한 인물이기도 하다. 디킨스의 작품을 각색한 영화와 TV판만 해도 최소한 180편 이상 제작되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그의 생전에 연극으로 각색되었으며, 1913년에는 《The Pickwick Papers》의 무성 영화가 제작되었다.

그의 소설 대부분은 당시의 관행대로 잡지 등 정기간행물에 연재되는 형태로 발표되었다. 당시에는 일단 연재할 소설을 완결지은 후 발표하는 게 일반적인 형태였지만 디킨스는 연재와 집필을 병행하였다고 한다. 이 점은 그의 소설에 독특한 리듬을 부여하였다. 즉 중요한 부분에서 그날의 분량을 끊어버리는, 일종의 클리프헹어기법을 썼던 것이다. 조지 기싱이나 길버트 케이스 체스터튼과 같은 비평가·동료 작가들은 그의 숙련된 산문과 영어권의 문학적 교양에서 퍼올려진 독특한 캐릭터들에 경탄하곤 했다. 한편으로는 헨리 제임스나 버지니아 울프같은 작가들이 그의 감상주의를 문제삼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디킨스의 명성은 자신의 체험에 기초한 사회 하급계층의 생활상과 그들의 애환을 생생히 묘사하는 동시에 적절한 유머를 도입하여 사회의 온갖 모순과 부정을 신랄하게 비판한 데 있다. 그는 소설을 통하여 당대에 필요한 사회 개혁을 호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작가로서 인정을 받아 부유한 생활을 하게 된 뒤에는 동전을 구걸하는 빈민가의 어린이들을 지팡이로 쫓아 버리곤 했으며, 소설을 쓸 때 외에는 사생아를 양산하는데 열중했다고 한다.

찰스 디킨스는 자신의 작품을 대중 앞에서 낭독하기를 즐겨했으며, 사실 말년에 디킨스를 유명하게 만들었던 것도 이런 대중 낭독회였다. 디킨스는 한 작품의 낭독과 몸짓을 연습하는데 적어도 2개월 이상의 시간을 들였다. 그러나 정작 낭독회가 끝나고 들어오는 찬사에는 그저 고개를 한번 까닥이는게 전부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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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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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학기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과 현대문학작가론 수업에 제출한 레포트입니다.

세계의 폭력에 저항하는 힘

1인칭 시점의 미학

다니엘 디포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1719)는 출간되었을 당시에는 이 작품을 소설이 아닌 '로빈슨 크루소라는 사람의 조난 수기'로 생각한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당시만 하더라도 1인칭 시점을 채택한 소설이 흔하지 않았기에 생긴 해프닝이다.

소설의 1인칭 시점은 다분히 고백적·회고적 성격을 띤다는 점에서 여타의 시점과 차이를 보인다. ‘등장인물’들의 사건을 ‘묘사’하는 3인칭 화자와는 달리 1인칭 화자는 그 자신이 극중 사건을 경험했던 사람으로서 자신의 ‘기억’을 풀어낸다. 『로빈슨 크루소』의 독자들이 일으킨 착각도 여기에서 유래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3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로빈슨 크루소』를 수기로 착각하는 독자는 거의 없다. 그러나 1인칭 시점 특유의 회고적·고백적 서술이 당시의 독자들에게 선사했을 남다른 충격은, 그 신선함을 잃은 현재까지도 유효하다.

1인칭 서술자들은 3인칭 서술자들이 다가가지 못하는 곳까지 다가가서는 그들이 집어내지 못하던 주인공의 심리와 기억과 감정을 집어낸다. 보다 인간의 경험과 내면에 가까운 서술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성장소설장르에서 유난히 1인칭 시점을 많이 사용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주인공의 내면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두 양식은 서로 닮은 점이 많다.

1인칭 시점의 사용에 익숙한 현대 독자들은 더 이상 1인칭 화자를 실존 인물로 착각하지 않는다. 그 대신 독자들은 ‘실존 인물’의 자리에 자기 자신을 집어넣는다. 주인공의 경험과 자신의 경험을 비교하고, 주인공의 정서와 자신의 정서를 비교하게 된다. 소설이 1인칭 시점을 통해 주인공의 내면을 돌아보듯이, 독자 또한 소설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파멸의 경험

공감

독자들이 박민규의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서 공감할만한 부분을 찾아내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개인들에게 - 그 전 시대에 비하면 - 가혹하리만큼 많은 것을 요구해왔다. 원래는 기계 장비 등의 성능에나 쓰이던 ‘스펙’이라는 말이 어느 순간부터 사람의 ‘성능’을 가리키는 은어로 통용되기 시작한 상황을 보라. 한 사회의 자본주의적 경향이 심화되면, 사람은 가축이나 기계 장비 따위와 하등 다를 게 없어진다. ‘스펙’, 곧 일정한 자격 요건을 갖추지 못하면 사람으로건 인적 ‘자원’으로건 인정받지 못하게 된다.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소재로 삼은 외모지상주의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소설에 나오는 두 여인, 화자의 연인과 화자의 어머니는 '스펙 권하는 사회‘의 가장 큰 피해자들이다.

부부가 나란히 서 있는 풍경은

그래서 늘, 보는 이로 하여금 묘한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배우라는 신념으로 똘똘 뭉친 미남과 그 곁에서 어딘가 모르게 머뭇하던 박색(薄色)의 여인... 작지만 날렵한 아버지와 크고 펑퍼짐한 어머니의 체격 차이도 분명 한몫을 했으리란 생각이다. 이상하리만치 남아 있지 않은 두 사람의 사진도, 그런 부조화(不調和)를 아는 어머니의 <기피>가 가장 큰 원인이었을 것이다.

더없이 희생을 하면서도 그래서 늘 어머니는 숨거나, 가려진 느낌이었다. 아니 언제나 아버지에게 미안해 한다는 느낌을 나는 지울 수 없었다.(47~48p)
원서를 넣었던 곳에서 저는 모두 탈락했습니다. 문제는 성적이 아니라... 면접이었습니다. 그나마 한 곳에서 이유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성적은 참 좋은데... 우리 업무가 대인관계가 중시되는 일이라 말이지... (중략)

고요하던 교무실과, 그중 어느 한 곳의 담당자에게 전화까지 걸던 선생님의 노력도 떠오릅니다. 좋은 애 보내달라고 해서 제가 추천서까지 넣었지 않습니까? 에이, 그래도 보통은 되어야지...(276~277p)

소설 속의 두 여인들은 결코 무능한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어떤 국면에서는 우수하기까지 하다. 화자의 어머니는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남편을 대신하여 온 집안 살림을 감당했고, 화자의 연인은 탄탄한 교양과 성적으로 스스로를 단련시킨 재원이었다. 단지 ‘외모’라고 하는 스펙에서 통과하지 못했을 뿐이다. 시험으로 치면 ‘과락’(科落)인 셈인데, 이 한 과목의 과락은 사회가 그들을 ‘못생긴 여자’로 낙인찍고, 인생의 낙오자로 취급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또한 자본주의 사회 시스템의 본질이다. 다른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더라도 사회가 중요하게 여기는 하나의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여지없이 낙오자의 낙인을 찍는 것 말이다.

경험

소설 속에서 외모 지상주의의 폭력성은 크게 두 명의 여성을 통해 나타난다. 화자의 어머니와, 화자의 연인이다. 연령대는 다르고 작중에서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은 단 한 번도 없지만, 두 여성은 지독한 박색(薄色)이라는 상처를 공유해야 했다는 점에서 서로 닮았고, 동지라 할만하다.

화자의 어머니는 젊었을 때 무명배우였던 사내에게 반해 결혼한 인물이었다. 화자의 어머니가 그 사내에게 반했던 것은 순전히 외모 때문이었다. 소주잔을 내려놓을 때의 우아함, 짜장면을 먹을 때라도 잃지 않았던 품위 따위가 화자의 어머니로 하여금 결혼까지 결심하게 만든 원인이었다. 박색이라는 어머니 자신조차도 외모지상주의에서는 딱히 자유롭지 않았던 셈이다. 하지만 자신의 추모(醜貌)에서 비롯된 열등감은 남편이 연기를 한답시고 한없이 ‘비현실을 추구하는’(47p) 가운데서도 군말없이 수발을 들게 만들었다. 그런 부모의 관계를 화자는 ‘아마도 아버지는 어머니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미남이었고, 어머니는 희망이라곤 보이지 않았던 삼류 배우가 발견한 최고의 숙주였을 것이다.’라고 정리한다.

우연한 기회를 통해 배우로 성공한 남편이 자신과 자식을 내버리는 와중에도 화자의 어머니는 그러한 취급을 묵묵히 감내해낸다.

실은 그때부터 어머니는 서서히 아버지를 포기해 간 것이 아닌가, 나는 생각한다. 확실히 그런 느낌이다. 막연했던 불안이 현실로 드러난 그날 밤까지, 얇게 오이를 썰듯 조금씩, 또 조금씩... 어머니는 아버지를 포기해 갔다는 생각이다. 어느 노래의 슬픈 가사처럼 못생긴 여자는 스스로의 운명을 미루어,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51p)

이 묵묵한 감내는 화자의 연인에게서도 보인다. 화자가 ‘세기를 대표하는 추녀’(81p)라고 평할 정도로 못생긴 그녀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과한 업무와 말도 안되는 취급을 받아가면서도 거기에 단 한 번의 항변도 하지 않는다.

누구 하나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누구도 그녀가 그 자리에 존재함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83p)

그녀 또한 자신에게 가해지는 외모지상주의의 폭력을 그대로 수용하는 모습을 보이며, 스스로를 위축시킨다. 번드르르하지만 무능력한 남편을 수발하던 ‘어머니’와 늘 고개를 숙인 체 묵묵히 짐을 옮기는 ‘연인’의 모습은 분명 닮았다. 소설의 중반부에 이르면 ‘연인’은 화자에게 자신이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는 편지를 보낸다. 이 편지를 통해 독자들은 비로소 ‘못생긴 여자들’이 스스로를 ‘못생긴 여자’로 규정하고 상처 속에 스스로를 몰아넣기까지의 과정을 이해하고 공감하게 된다.

소설에서 적나라하게 묘사되는 ‘못생긴 여자들’의 모습은 비단 소설 속 인물들만의 경험과 정서가 아니다.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주의가 늘 강조되는데도 정작 이야기되지는 못했던, 피해자들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외모 ‘스펙’의 기준이 터무니없이 높은 만큼 그로 인한 피해자들 또한 수없이 많기 마련이다. 기실, 소설 속에서 ‘못생긴 여자들’이 당하는 폭력적인 언어나 상황, 그에서 비롯되는 자기모멸감 따위의 경험에서 자유로웠을 독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소설은 독자가 자기 상처에 함몰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애당초 소설이 독자를 자기 연민의 신파로 몰아넣고자 했다면, 외모 콤플렉스 없는 - 오히려 배우인 아버지를 닮아 수혜자가 됨직한 - 남자를 화자로 설정할 필요가 없었다. 차라리 주인공의 연인이나 주인공의 어머니와 같은 ‘못생긴 여자’가 소설의 화자였던 편이 독자들로부터 눈물을 뽑아내기는 보다 쉽다. 소설은 그러한 쉬운 길을 택하지 않았다.  적어도 신파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주려 했다는 의미가 된다.

화자의 시선은 물론 기본적으로 ‘못생긴 여자들’의 삶에 주목한다. ‘못생긴 여자들’의 삶에 가해지는 적나라한 폭력은 때로는 화자의 어머니, 때로는 화자의 연인에 대한 관찰을 통해 비춰진다. 이 ‘관찰’이란 수사는 상당히 중요하다. 폭력의 피해자들은 물론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적나라한 폭력에 대해 누구보다도 더 잘 알지만, 동시에 그 경험에 얽매이기 쉽다. 폭력의 경험을 넘어 폭력이 작동하는 구조를 파악하는 일은 늘 피해자가 아닌 증인에게 맡겨진다. 소설은 우리에게 ‘못생긴 여자’들을 바라보는 화자와의 공감을 요구한다. 그들을 연민하고 사랑하며 그들에게 그러한 폭력을 안겨준 이들에 대해 분노하는 화자의 시선을 보여준다. 요컨대 소설의 작자가 독자들에게 바란 것은 피해자들끼리의 상처 핥기가 아니라, 폭력의 구조 파악을 통한 굴레 벗기였을 것이다.

폭력의 구조

소설에서 화자의 어머니나 화자의 연인이 외모지상주의의 피해자임은 명백하지만, 그 가해자는 명확하지 않다. 화자의 아버지는 외모지상주의의 수혜자이고, 그 시스템에 편승하여 어머니를 버린 사람이긴 하지만 엄밀히 말해 그 시스템을 만들어낸 사람은 아니다. 화자의 연인이 고백하는 과거 속에서도 현재의 그녀를 만들어낸 명백한 가해자는 등장하지 않는다. 자신들을 조롱하고 비웃던 ‘사람들’이 제시될 뿐이다. 사람들이 큰 의미를 두지 않고 던진 말들이 그리 처참한 피해자들을 만들어낸 것이다.

가해자들에게 그 책임을 묻는다면 그들은 정색할 것이다. 별 생각 없이 던진 한 마디의 농담, 한 마디의 조롱이 그렇게 큰 상처가 되었단 말인가? 그런 말 따위에 꽁해서 상처를 입는 쪽이 소심한 거 아닌가? 그러나 이것이 외모지상주의의 폭력이 발동하는 방식이다. 딱히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사소한 조롱들이 모여 거대한 폭력을 구성해낸다.

외모 지상주의의 피해자들 또한 가해자가 느끼는 정도의 폭력만을 당했다면, 즉 어떤 한 사람이 조롱과 폭언을 퍼붓는 정도였다면 참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폭력이 그런 식으로 발동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가해자 1인의 입장에서는 소소한 ‘장난’이지만, 피해자 입장에서는 그게 단순한 한 명의 조롱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건 그와 같은 폭력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해자가 소수자인 한, 내가 잘못해서 당한 게 아니라는 믿음은 유지할 수 있다. 한 명의 조롱은 조롱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열 명의 조롱은 폭력이고, 백 명의 조롱은 파멸을 가져다주기 충분하다.

우선 사람들은... 또 세상은 저의 상처를 아물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번갈아 끊임없이 할퀴고 찍고 짓누른 것입니다. 저 같은 여자들은 결국 스스로를 마취해야 합니다. (중략) 얼굴이 무기인 그녀들에게도 두려움이 있다는 사실을... 막춤을 추는 그녀들에게도 영원한 사랑의 발라드가 있다는 사실을 세상은 결코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272~273p, 강조는 인용자)
그렇습니다. 진정한 고통은 그것이었어요.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다는 사실... 누구도 날 사랑해 주지 않을 거란 절망감...(274p)
미소 짓던 다수의 시선 앞에 저는 늘 굴복해야 했습니다. 어떤 개인도 세상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자리를 피하고 자리를 피해도 저는 늘 혼자였습니다.(276p)

한 순간의 조롱이나 놀림 따위는 폭력의 축에 끼지도 못한다. 내가 당한 폭력을 어느 누구에게도 호소할 수 없으며, 그 폭력이 부당한 것이었노라고 공감해주는 사람이 없을 때야말로, 진정한 폭력은 시작된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경멸하고 깔본다는 것은 내가 아는 세계 전체가 나를 경멸한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세계의 경멸, 그것은 피해자로 하여감 폭력에 대한 책임을 가해자들이 아닌 스스로에게 묻게 만든다. 폭력을 가하는 세계가 잘못되지 않았다면 내가 당한 고통은 대체 누구의 잘못 때문에 비롯된 것이란 말인가? 결국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자기 모멸, 자기 학대 등의 자기 파괴적인 행태들은 그 기괴한 면모와 달리 실제로는 생존을 위한 가장 처절한 몸부림인 경우가 많다. 자기 주변 세계가 자신을 쓸모 없는 존재, 추한 존재라고 규정하는 감당할 수 없는 사태에 직면했을 때 스스로를 ‘그런 취급을 당해 마땅한 자신’과 그런 자신을 ‘비웃을 수 있는 자신’, 즉 가해자의 일원으로서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는 자신으로 분리함으로서 자신의 부분만이나마 건져보고자 하는 슬픈 몸부림에 가깝다.

작중에서 화자의 어머니는 조강지처 노릇을 다 하고도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사태에 대해서 화를 내지 않고, 화자의 연인 또한 백화점의 동료 직원·상사가 자신에게 가하는 터무니없는 취급 따위를 묵묵히 감내한다. 이들이 그러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들이 결코 무능해서도, 바보여서도 아니다. ‘그런 취급을 당해 마땅한 존재’라는, 가해자의 정의를 스스로가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한 인간이 자신에 대한 경멸을 하나의 수학 공식과 같은 공리(公理)로 받아들이는 과정, 그 잔혹함을 소설은 보여준다.

구원의 경험

스스로를 못생겼다고 규정하며 자신을 상처입히는 사람들이 비단 소설 속에만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이야기했다. 문제는 이들에게 어떤 해결책을 제시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외모지상주의의 전면적인 해체, 가능하다면 그것이 최선의 방안일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이미 스스로 외모지상주의를 뼛속 깊이 받아들인 환자들에게 ‘외모는 중요하지 않다’는 입바른 소리를 해봐야 오히려 동정으로 받아들여질 뿐이다. 그것은 해결책이 아니다. 대신하여 소설은 ‘사랑’을 제시한다.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서 사랑이란 단순히 로맨스 소설을 쓰기 위한 장치만이 아니다. 스스로를 멸시하고 스스로의 가치를 부정하던 이들에게 선사된 사랑의 감정은 ‘너 또한 살아도 된다’는 메시지를 부여한다.

방에 틀어박혀 남편의 배신을 감내하던 ‘어머니’에게 다시 살 힘을 부여한 것은 화자가 전한 사랑한다는 말이었다. 이 때 화자가 어머니에게 했던 ‘아빠도 예전에는 엄마를 사랑했다’라는 말은 물론 화자가 꾸며낸 말이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게 아니더라도 화자가 내뱉은 “죽지마”, 그리고 “사랑해”라는 말은 파란색 필체의 진실성이 담겨 있었다. 당신이 소중하다고, 아버지가 떠나서가 아니라 그 때문에 내가 사랑하던 ‘예전의 엄마’가 사라졌다는 상실감 때문에 슬프노라고 이야기하던 화자의 말은 ‘어머니’를 울게 했고, 다시 삶을 향해 걸어갈 힘을 부여했다. 그 힘이 없었다면 ‘어머니’가 남편의 흔적을 떨쳐내고 재혼하게 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 점은 화자의 연인 또한 마찬가지이다. 소설에서 대체로 말이 없는 ‘어머니’와는 달리 그녀는 사람이 한 인간을 구원하는 방식에 대한 상세한 증언을 제공한다.

그렇습니다. 그 전까지... 저는 한 번도 뜨거운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습니다. 눈물은 더없이 차가운 것이었고, 그때의 제 마음도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알 수 있었습니다. 냉대를 받은 인간의 마음은 차가운 눈물을 흘린다는 사실을... 관심과... 사랑을 받은 인간의 마음만이 더없이 뜨거운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말하자면 당신은 한 여자의 체온을 바꿔주었고, 한 여자를 둘러싼 세상의 기후를 바꾸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달의 뒷면처럼 어둡고 어두웠던 저라는 여자를 바꾸어놓았습니다. 어느새 저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난날의 모든 상처가 사라졌음을... 그리고 이제는 튼튼하게 아물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285~286p)

열아홉 혹은 스물의 시점에서는 ‘세기의 추녀’였던 그녀가 세월이 지나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된 시점에서는 그럭저럭 평범한 얼굴이 되었다는 묘사는 참 많은 점을 시사한다. 링컨이 그랬던가. “마흔을 넘긴 사람은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라고. 잘났건 못났건 한 인간이 살아온 궤적은 얼굴에 담기기 마련이고, 마흔쯤 되면 외모를 통해 그 사람의 인생을 짐작할 수 있다는 말일 터이다. ‘세기의 추녀’가 ‘평범한 동양인 여자’로 변하는 과정은, 단순히 세월의 흐름에 따라 외모가 변한 것이 아니라, 화자와의 만남을 통해 그녀가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러한 자기애가 인상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봐야할 터이다.

화자의 어머니와 연인의 변화를 이끌어낸 것은 외모지상주의 혁파나 개인의 경쟁력 강화와 같은 거창한 수단이 아니었다. 세상에 부정당한 그녀들에게 사랑한다고 해준 것, 그런 사소한 기적들이 그녀들의 변화를 이끌어낸 것이다.

한 인간의 완전한 파멸을 위해서는 그 인간을 둘러싼 세계 전체가 동원되어야 한다. 세계 전체가 동원된 폭력이란 그만큼이나 가공할 위력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만한 힘을 동원하지 않으면 인간을 굴복시킬 수 없다는, 스스로를 포기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설령 그러한 시도에 성공한다고 해도, 어느 누군가가 그에게 ‘당신은 살 가치가 있다’라는 확신을 주는 순간, 그 압도적인 폭력은 예상외로 쉽게 허물어지게 된다. 남아있더라도 예전과 같은 파괴력은 지니지 못한다. 탈출구가 뚫린 포위망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이 소설에서 박민규는 자신의 장점이라고 평가받았던 웃음을 거의 포기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이 소설에서 작가가 웃음거리로 삼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세계의 압도적인 폭력에 짓눌린 ‘그녀’들을 비웃을 수는 물론 없다. 그렇다고 시스템의 억압 구조에 놓여 있기는 매한가지인 가해자들, 평범한 악당들을 조롱할 것인가. 물론 조롱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웃음이 세계의 폭력에 신음하는 자들에게 어떤 위안과 어떤 희망을 줄 것인가. 소설에서도 나오지만 문학과 음악의 세계로 도피했던 여인은 번번히 현실에 끌려나오며 괴로움에 몸부림쳐야 했다. 억압에 대한 대안 없는 조롱과 유머는 그만큼의 공허함을 선사한다. 결과적으로는 피해자들을 더욱 괴롭힐 뿐이다.

박민규의 시도는 이러한 차원에서 시도되어야 한다. 그는 자신의 장기조차 버려가며 억압과 폭력과 사랑을 강조했다. 한 인간을 짓뭉갤 수 있는 억압과 폭력에 저항할 수 있는 힘으로서의 사랑을 제시했다. 그리고 그것이 세계로부터 소외된체 고통하던 사람들에게 얼마나 기적같은 선물일지를 이야기한다.

소설이 시작되는 시점인 1980년대는 한국에서도 자본의 힘이 급격하게 강화되던 시기였고, 자본의 폭력이 본격적으로 강화되던 시기이기도 하다. 비단 외모지상주의만을 지적하지 안허라도 자본이 오늘날의 인간에게 강요해왔던 여러 가지 ‘스펙’들은 사람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인간들을 더더욱 양산해왔다. 이 상황에서 작가는 묻는다. 젊은이들을 백화점 아르바이트 같은 비정규직으로 몰아넣는 자본에는 저항할 수 없더라도, 당신들 주변의 사람들을 돌아보고 그 사람들에게서 인간을 발견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 않겠냐고. 당신이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시선과 언어들이 얼마나 거대한 폭력이 될 수 있는지 실감하고, 거꾸로 당신이 얼마나 사소한 계기로도 기적 같은 구원자가 될 수 있는지 아느냐고 묻는다. 작가는 그것을 호소한다.

스스로를 죽은 자들로 생각했던 왕녀들이 경쾌한 무곡(Pavane)을 배경으로 춤출 수 있느냐의 여부는 결국 독자 당신에게 달려있노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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