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2'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0/02/19 『한국 근현대사와 기독교』
  2. 2010/02/15 《원피스》 (1)
  3. 2010/02/13 《판타스틱스》
한국 근현대사와 기독교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류대영 (푸른역사,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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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학(神學)은 교양일 수 있을까?

경제학이나 정치학을 공부하기 위해 반드시 그 학문의 전공자가 될 필요는 없다. 철학이나 정치학을 '교양 삼아' 공부한다고 해서 말리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다만 그것을 왜 배우려 하느냐는, '질문'을 받을 뿐이다. 말하자면 신학이나 종교학이 아닌 여러 세속 학문 분야에 대해서는 비전공자로서 해당 학문을 공부하는 행위에 대한 반발이 생기지 않는다. 그것이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하나의 '교양'임이 인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형이상학에 속한다고 '간주되는' 학문들, 특히 신학에 대해서는 이러한 관대한 태도를 찾아보기 어렵다. 특히나 비신앙인으로서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장애물과 마주해야 한다. 공부에 들어가기 전에 예상했던 바와 맞지 않는 부분도 비신앙인을 곤혹스럽게 하지만 이는 어느 학문에서건 비전공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직면하기 마련인 문제라고 이해할 수나 있다. 무엇보다도 그 비신앙인을 괴롭히는 부분은 '믿지도 않으면서 그걸 배워 뭐에 써먹겠느냐'는 냉소어린 시각이다. 세속 학문식으로 말하자면 '전공 중심주의'를 넘어서는 '전공 근본주의'를 전공자(신앙인)도 아닌 비전공자들이 부리는 셈이다.

나는 신에 대한 영역이 비단 해당 신앙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믿는다. 그 어떤 문제이든지간에 이 땅의 인간과 무관할 수는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신앙과 신학, 종교도 예외는 아니다. 방식은 다를지언정 신에 대한 물음이 듣고자 하는 것은 결국 인간과 세계, 신에 대한 관계이다. 신앙은 인간의 세계관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그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과 세계에 기여하고자 하는 방식을 규정한다. 투철한 신앙인일수록 자기 신앙에 근거하여 세상의 모든 일을 해석하고, 신앙을 자기 행동의 근거로 삼기 마련이다. 함석헌이나 장준하의 예가 그것이다.

탁월한 사회 운동가이자 한 종교의 독실한 신자였던 그들의 세계관에서 기독교 신앙과 사회 운동에 대한 신념은 분리되지 않는다. 그들은 기독교 신자로서 사회 운동에 헌신했고, 운동에 대한 근거를 신에 대한 믿음에서 찾았다. '주께서 나의 정의로움을 보증하신다'. 사회운동가이자 신앙인이었던 그들에게 그만큼이나 큰 격려가 있었으리라 생각하기는 어렵다. 기독교의 신은 그 두 사람에게 비신앙인들은 갖지 못하는, 사회 운동에 대한 가장 강력한 동기를 선사한 셈이다. 물론 이러한 사례는 분명 기독교 신앙인 전체에 적용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칸트의 발언을 생각해라. 그는 신앙이 인간으로 하여금 보편 윤리를 실천하고 나아가 보편 윤리 자체가 되고자 하는 의지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그 또한 유효하다고 이야기했었다.

신앙이 세계관을 구성한다면 거기에서 비롯된 신학과 종교는 보다 현실적인 영역에서 신앙인과 사회를 연결시킨다. 종교는 그러한 신앙인들이 모인 사회 공동체로서 하나의 사회적 기능을 담당했고, 신학은 신의 섭리가 지상과 관계맺는 방식을 학문의 형식으로 이해하고자 했던 노력을 보여준다. 신앙인들이 비신앙인들과는 고립된 세계에서 살지 않았듯이 비신앙인들 또한 신앙인들에게서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2. 한국 근현대사와 기독교, 한국 기독교사와 근현대

나는 종교를 신화나 의례와 연결시켜 해석하는 엘리아데의 종교학 이론에 단 한 번도 매력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보다는 마르크스나 트뢸치가 종교현상의 본질을 훨씬 깊게 통찰했다고 믿는다. 종교의 진면목은 신화나 의례, 혹은 상징을 분석하기보다는 정치-경제-사회와 만나는 지점을 관찰하면 더 잘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어느 때부터인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역사를 공부하면서 나는 순결하게 고유한 종교의 영역이 있다고 믿지 않게 되었다. (책을 내면서, 5p)

『한국 근현대사와 기독교』는 한 종교의 역사를 세속적인 관점에서 증명하려 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의를 갖는다. 이 책은 '기독교사'를 이야기하고자 하지 않는다. 이 책의 제목부터가 기독교 대신 '한국 근현대사'를 앞세우는 점을 상기해보라. 그것은 종교를 정치·사회·문화적 맥락에서 탈락시키지 않으려 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물론 저자의 글이 완벽하진 않다. 종교의 사회 공동체적 성격과 그 긍정적인 면을 강조하려다 보니 군데 군데 빈 부분이 있는 건 사실이다. '기독교'를 이야기하는 제목과는 달리 실제 지면은 거의 개신교, 그 중에서도 특정 종파의 내용에 치중된 점도 눈에 걸린다. 그러나 종교와 사회와의 관계를 비추고자 한 원칙 자체는 책 내용 전체를 일관한다. 그 의의를 무시하기란 어렵다.

딴에는 신앙인 내부에서 기독교사를 이 정도나마 세속적인 시선에서 바라본 책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복된 일일지도 모른다. 얼마 전에도 어느 노 학자가 전후 남한 지역에 개신교가 빠르게 자리잡은 상황에 대하여 "기독교가 풍류도 등 한국 고유의 전통 사상과 합치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따위의 황당한 분석을 내놓았던 사정을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텍스트에서는 가장 비세속적이고 가장 신앙적인 상황조차도 당대의 정치·사회·문화적 상황과 밀접하게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해낸다. 개신교는 구한말에 처음 소개될 때부터 서구 근대 문명을 상징하는 가치 체계로 이해되었고, 근대적 가치관에 대한 조선인들의 이해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1900년대 초 선교사들이 발행했던 신문에서 상당한 지면을 종교적 내용이 아닌 '계몽'에 할애하였다는 점은 당대 개신교가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자 했는지를 보여준다.

1900년대에 평양에서 수행되었던 '대부흥운동'는 종교적 목적과 세속적 이해가 결합된 흥미로운 사례로서 제시된다. 수많은 비신자가 개종을 하고 많은 수의 신자들이 성령을 체험하는 등의 현상이 일어났던 이 자리만큼이나 종교적인 자리는 드물다. 그러나 조선인 참가자들은 영미권에서 일어났던 부흥회와는 사뭇 다른 반응을 보였다. "기독교에서 죄란 신 또는 인간과의 관계에서 맺어진 법이나 계약을 어기고, 그 결과로 신이나 인간과의 관계가 파괴되는 현상을 말한다. 그런데, 부흥운동 기간에 한국인 개종자들이 보였던 회개는 거의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것이거나 개인의 행위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3장 20세기 초 한국 교회부흥현상에 관한 재검토, 120~121p)

죄의 개념에 대하여 당시 대중은 다분히 세속적인 이해를 보여주지만, 그리 놀랄 아니다. 대중이 기독교를 접하기 전에 몸에 베였을 유학적 세계관은 본래 대단히 현세지향적이며 공동체지향적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형이상학적 죄라는 개념이 전하는 신을 통한 개인적 차원의 구원이라는 테마는 당시 대중에게 상당히 낯설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적 세계관의 보급은 종래의 유교에서 죄로 규정하지 않았던 항목들을 죄로 볼 수 있게 하였고, 이것이 '대부흥회'라는 현상으로 나타난 셈이다.

대부흥회라는 행사가 선교사들을 비롯한 교인들의 철저한 계획하에 기획되었고, 그 기독교 세계관의 보급 또한 대부흥회같은 거대한 종교 체험이 아니라 거기에 자극받은 한국 교인들의 사역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분석 또한 주목해볼만 하다. 신의 역사함은 이렇게 인간의 힘을 통해 이루어진다.

초기에는 사회운동의 수단으로서 수용되었다는 점에서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수용사는 맥을 같이한다. 이러한 상황이 갈리고 기독교와 사회주의가 반목하기 시작한 것은 1900년대 초반, 특히 1906년과 1920년대를 기점으로 한국 기독교가 급격히 계몽적 색채를 잃으면서부터이다. 이후 사회주의가 기존에 한국 기독교에 의해 수행되었던 계몽을 수행하게 되면서 사회주의자들에 의한 종교 비판이 이루어졌고, 여기에 기독교 내부에서 다양한 반향이 이어지면서 기독교 진영은 다양한 정치적 색채를 가진 집단으로 구분된다.

초기 북한 정권과 기독교 목사들과의 유착 관계는 한국 기독교와 한국 사회주의의 관계를 보여주는 특이한 사례로서 유념해볼만 하다. 김일성 자신이 남긴 회고록에 따르면 김일성은 본인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 집단에서 자랐고,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도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이러한 성향은 초기 북한 정권의 종교 정책으로도 이어졌다. 건국 당시에는 북한 정권에 여러 기독교(주로 감리교 계열) 목사들이 참여하였고, 이어진 반종교 정책도 러시아나 중국의 사례에 비하면 '비교적' 온건했다. 북한의 종교 정책은 '신앙은 인정하나 (국가에 반하는) 종교는 금지한다'로 요약된다. 신앙 자체는 인정하나 신앙인들의 반국가행위는 처벌하겠다는 것이다. 이후 북한은 기독교와의 유착 관계를 정리하고 '주체사상'의 길을 걷지만, 이 주체사상 또한 기독교 교리에서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음이 지적된다.

북한 정권을 적그리스도로서 규정하는 보수 기독교의 선언에만 매몰된다면 김일성 정권의 성격에 대해 명확하게 짚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보수 기독교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신학적 판단만이 아닌 세속에 대한 그들의 입장에서도 찾아야 한다. 기독교 좌파, 기독교 우파, 그 안에서도 나뉘는 복음주의 좌파와 복음주의 우파 등의 구분은 신학에 대한 이해 이전에 세속에 대한 그들의 가치관 차이에서 비롯된다. 

오늘날의 한국 기독교 진영은 그 가치관에 따라 신학을 서로 다른 방식에서 이해하는 집단의 집합에 가깝다. 기독교 진영은 기독교 좌파라 칭할만한 기독교 사회주의자부터 극우적 근본주의자까지 다양한 입장을 보인다. 심지어 '복음주의'조차도 기독교 근본주의자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복음주의는 다양한 비종교적 요소와 결합하여 복음주의적 여성주의, 복음주의 좌파 등 다양한 진영을 형성해낸다. 성경이라는 권위에 의존하기는 매한가지면서도 그 적용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를 보이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가 보수적인 집단이라고 말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그리 타당한 분석이 아니다. 

이러한 분화 현상은 성경이라는 권위 자체가 수천년에 걸쳐 축적된 다양한 견해의 집합에 가깝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성경의 독자들이 성경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기도 하다. 신학적 해석의 차이보다는 성경 읽기를 유도했던 당대 상황에 대한 고민들이 그러한 다양한 성경 읽기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3. 신앙인의 세계와 비신앙인의 세계는 다르지 않다.

맹자는 "하늘이 보는 것은 우리 백성들을 통해서 보고, 하늘이 듣는 것은 우리 백성들을 통해서 듣는다."고 하였다. 요 임금이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고 순에게 양위했다는 고사에 대해 한 말이다. 『맹자』「만장장구」에 그 기록이 보인다. 전승에 따르면 당시 모든 사람들이 양위를 환영하며 순 임금을 따랐다고 하는데, 맹자는 당대의 통념이었던 장자 승계와 대치되는 이 고사를 '하늘이 시킨 것'이었다며 지지한다. 물론 맹자에게 하늘은 곧 백성과 동의어가 된다.

유일신 신앙에 대해 대단히 냉소적이었던 유학자들의 하늘(天) 관념은 물론 기독교의 유일신 세계관과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백성의 뜻을 '하늘'의 뜻과 동일시했던 세계관 자체는 대단한 시사점을 준다. 섭리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가 서로 다르지 않다는 점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이해할 때 비로소 종교적 세계관과 비종교적 세계관이 하나가 된다.

신앙이 사회 공동체나 사회 담론에서 일정 영역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이상, 비신앙인 또한 신에 대한 물음을 끊임없이 던져야 한다. 신앙을 이해하기 위해 자신의 비신앙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단지 신앙인들과는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할 뿐이다. 그것은 우리 세계를 보다 잘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으로서 우리 자신에게 기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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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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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피스》

도서/만화 2010/02/15 18:48
낭만적 무법자들에 대하여

《원피스》는 해적 만화라고 합니다. 초장부터 해적왕의 죽음으로 시작했고, 주인공인 루피부터 하여 해적이라 자칭하는 캐릭터들이 한둘이 아니지요. 그런데 우리의 주인공 해적들이 '해적'으로 불리는 이유는 그리 명확하지 않습니다. 루피 일당이 새로운 마을에 도착했을 때를 생각해보세요. 그 때마다 항해사인 나미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식량이나 물을 '구입'하는 일입니다. 여의치 않을 때는 '수렵' 활동을 통해 이를 해결하고요. 세상에 물품을 돈 주고 사는 악당도 있습니까? 겉으로만 본다면 루피 해적단은 해적단이라기보다는 그냥 평범한 선원들처럼 보이지요. 한마디로 말해 원피스의 주인공 해적들은 우리가 아는 해적, 즉 소인배적 약탈자로서의 면모를 거의 드러내질 않습니다. 

비단 루피 일당만이 아닙니다. 루피 일당에게 우호적인 샹크스 해적단, 흰수염 해적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이 민간인을 괴롭히는 장면은 거의 전무하고, 심지어는 일반 마을 사람들과 공존하는 모습마저 보이지요. 물론 원피스의 무대가 이런 낭만적인 반역자들만 가득찬 세계는 아닙니다. 버기 해적단이나 클리크 해적단같은 소인배적 악당들도 명백히 존재하지요. 그러나 루피 일당은 이런 현실적인(?) 해적단과 어울리기는커녕 오히려 반목하고, 심지어는 토벌(?)하기까지 합니다. 어떻게 보면 해군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하는 셈인 거죠.

루피 일당이 이런 악당 토벌을 의식적으로 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루피 일당 자신은 의적질(?)을 한다는 의식 자체가 없어요. 그냥 내 '동료'가 괴롭힘당하는게 보기 싫으니 때려눕힌다는 식일 뿐입니다. 하지만 루피 일당의 의적질이 '동료'만을 구원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동료의 아픔을 씻어내기 위해서는 그 동료와 아픔을 공유했던 수많은 사람들까지 함께 구원해야 합니다. 결과적으로는 그 동료와 마찬가지로 불합리한 폭력과 터무니없는 억압에 신음해야 했던 민중까지 구원하게 되지요. 루피는 거의 본능 레벨에서 정의를 구현하는 자인 셈이지요.

따지고 보면 루피만큼이나 희안한 캐릭터도 없습니다. 흔히 이영도 소설을 두고 캐릭터가 작가의 장기말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불평하는 독자를 꽤 많이 봅니다만 원피스의 독자들이 루피에 대해 그러한 불평을 하지 않는다는게 신기할 정도에요. 따지고 보면 후치나 미 그라시엘, 정우의 기계새가 수행하는 정도 이상으로 작가의 뜻을 대변하는 캐릭터인데요.

루피는 살아있는 캐릭터로서의 성격을 거의 보여주지 않습니다. 눈물짜는 과거들을 가진 다른 동료들에 비하면 이상할 정도로 과거에 대해 알려진게 없고, 특별히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도 없습니다. 소년만화의 주인공으로서 으레 보이기 마련인 특징들(바보 속성, 식탐 등)을 보여줄 때를 제외하면 루피는 늘 '동료!'라는 단어를 입버릇처럼 내밀면서 악당을 거꾸러뜨리는 캐릭터일 뿐입니다. 부패와 폭력에 억압된 자가 보이면 달려가서 악당을 두들겨팬 뒤 구원해주는 영웅이자 대속자이지만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때론 '정의'(justice)라는 가치에 대한 상징 외엔 아무것도 아닌 인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여담이지만, 그 때문에 루피가 고잉메리호의 처분을 두고 우솝과 반목하는 장면을 볼 때 굉장히 생경했었습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제게 루피는 살아 움직이는 캐릭터가 아니었습니다.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 곧 정의의 구현에 대한 수단이자 상징에 불과했지요. 그런 캐릭터가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고 편견을 가지는 걸 보니 참 낯설더군요.)

루피의 목표, 곧 해적왕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루피 해적단이 지금까지 걸어온 여정을 보면 추측 가능합니다. 루피는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민중을 구원하면서 동료들을 얻으며 또다시 다른 민중을 구하러 가는 모습을 보여왔습니다. 의도하진 않았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그랬지요. 그리고 루피의 동료들은 루피가 구원했던 민중을 대표하는 자로서 루피와 함께 합니다. 즉, 루피가 - 세계 정부는 가져다주지 못하는 - 정의와 평화를 상징한다면 루피의 동료들은 그러한 정의에 희망을 거는 자들을 상징한다고 봐야겠지요.

따라서 루피 일당이 선장에 대해 보여주는 절대적인 신뢰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겁니다. 설령 본인이 의도하진 않았다고 해도 루피는 자신들을 괴롭히던 억압을 구축하고 정의를 실현해주었습니다. 루피와 함께 여행을 하고, 루피가 해적왕이 되면 그러한 정의로운 세계가 구현되리라고 믿는 거죠. 그 캐릭터들은.

모험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루피가 대적해야 하는 악(惡)의 규모가 커지고, 루피가 구원해야 하는 사람들의 규모도 커지지다. 처음에는 시골 마을에 앉은 껄렁패들이나 두들겨패는 정도였지만 나중에는 부패한 국가 권력(쵸파 영입 에피소드)이나 국가에 대한 반역자(알라비스타 왕국 에피소드), 심지어는 세계 정부 전체에까지 확장됩니다.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혁명군의 활동과 궤를 같이하게 되는 거죠.

듣자하니 작년에 오다 에이이치로가 "루피에게 두 명의 동료가 더 생길 것"이라고 했는데, 아마 루피는 그 동료들을 얻기 위해 드럼 왕국이나 알라비스타 왕국보다는 훨씬 큰 무대에서 훨씬 많은 민중을 구원해야 할 겁니다. 그러면서 해적왕의 길을 걷겠지요. 말하자면 해적왕이란 세계 정부를 대신하여 세계에 평화와 정의를 가져다줄 새로운 질서를 상징하는 존재입니다. 이로서 루피네가 해적, 곧 무법자로서 띄는 성격이 분명해지지요. 무법자란 본디 법과 무관하게 움직이는 자이고, 그로서 안정된 체제를 위협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부패한 권력 그 자체의 입장에서 본다면 최악의 '악당'인 셈이고요.

세계 정부가 선한 집단이 아니라는 사실은 시리즈 전체를 통해 상당히 자주 암시됩니다. 아론 해적단 같은 무뢰배들을 제대로 청소하지도 못했고, 와포루 국왕 같은 악당 군주도 세계 정부의 한 축을 차지하지요. '버스터 콜'의 사용이나 세계 정부 고위 간부들, 귀족들이 보여주는 행패 등은 참으로 여러가질 시사합니다. 흰수염 해적단이나 샹크스 해적단 등은 이런 부패한 구질서에 저항하는 일종의 레지스탕스입니다. 따지고 보면 이들이 그냥 '무뢰배'에 불과한 '젊은' 해적들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것도 당연하죠. 

원피스라는 만화가 처음부터 이랬을까요? 그건 모르지요. 하지만 저는 적어도 드럼 왕국 에피소드나 알라비스타 왕국 에피소드를 기점으로 원피스라는 만화가 완전히 달라졌다고 생각합니다. 그 에피소드들을 기점으로 원피스의 주인공들이 대적해야 하는 상대들의 규모 자체가 완전히 달라졌고, 작가가 간간히 던져주던 설정이나 문제 처리 방식도 그 전에 비해 상당히 묵직해졌습니다.

그 전까지의 에피소드는 대체로 이런 식의 전개로 진행됩니다.

1. 독재 권력의 폭압에 신음하는 민중(혹은 동료) 제시
2. 루피 일당의 등장
3. (루피 일당의 동료 영입)
4. 루피의 악당 정벌
5. 무대 이동

하지만 드럼 왕국 에피소드를 기점으로 4번과 5번 사이에 '새로운 질서 확립'이라는 순서가 들어갑니다. 루피 일당이 와포루 국왕을 쓰러뜨리자 드럼 왕국에 '새로운' 국왕이 즉위함으로서 새로운 질서가 확립되는 모습이 분명히 제시되었고, 알라비스타 왕국에서는 처음부터 '혁명군'이라는 존재들이 제시되었지요. 그 전까지의 원피스 세계에서 민중이란 그저 폭압에 신음하는 존재였을 뿐입니다. 이어지는 하늘섬 에피소드에서도 억압자인 갓 에넬에게 저항을 하는 민중들이 제시되었고, 갓 에넬의 실각 후 다시 새로운 질서가 확립됩니다. (물론 새로 즉위한 왕은 예전의 그 인물이지만, 루피 해적단과의 활동을 거친 뒤의 그 왕국은 예전의 왕국으로 되돌아갔다고 보기가 어렵지요)

따라서 최근의 원피스는 단순히 소년만화라고만 보기 어렵습니다. 소년 만화라는 틀 안에서 부패 권력과 민중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만화라고 봐야지요. 『브이 포 벤데타』같은 작품보다는 덜 직접적이지만 충분히 그 기능을 소화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청소년 소설이라는 틀 속에서 묵직한 주제를 던지고 했던 어슐러 K. 르 귄 같은 작가들을 떠올리게 하는 면도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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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피스》  (1) 2010/02/15
청춘도로로  (0) 2009/01/11
Posted by 최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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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 진짜로 연애하기까지.

여기 한 쌍의 연인이 있다. 남자는 이제 갓 스물이 된 청년으로,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심취한 생물학도이다. 상대는 자신이 공주라고 생각하는 열여덟 살 처녀이다. 이웃 사이인 두 젊은이는 서로를 사랑하지만 서로를 증오하는 양 집안에서는 이들의 사랑을 반대하여 두 집 사이에 높은 담을 쌓았고, 연인은 부모의 눈을 피해 밤에만 만나 사랑을 이어간다.

이러한 구도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을 떠올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관객들이 이 오래된 로맨스를 떠올릴 무렵 연극은 관객의 기대를 가장 완벽한 방식으로 깨버린다. 그 시발점은 연인의 두 아버지이다. 이들은 관객들에게 새로운 사실을 폭로한다. 두 아버지는 서로 둘도 없는 친우였으며, 가문의 갈등은 사실 두 자식을 연결시키기 위한 연극이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연극이 필요했을까? 그 대답은 두 아버지가 폭로에 이어 부르는 노래에 나온다. '애들은 말릴수록 불타오르는 법'이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연극은 《로미오와 줄리엣》을 비롯한 전통적인 로맨스를 완벽하게 뒤집는 반(反)로맨스가 된다. 

그러나 이 젊은이들이 순진한 피해자만은 아니다. 연극 자체는 두 아버지가 꾸몄지만 이 두 젊은이는 자신들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한다. 그들 자신이 바라왔던 연극이기 때문이다. 기실 '비운의 연인'이 되고자 하는 욕망은 이들의 등장 장면에서부터 암시되었다. 여자주인공은 처음 등장할 때 스스로를 공주라고 이야기하며 어머니의 유품이라는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들고 나온다. 여주인공 스스로도 자신이 채소가게의 딸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는다. 다만 공주가 되고자 하는 바람이 너무 클 뿐이다. 세상을 모험 소설과 로맨스 소설로 배운 소녀답게도.

남자 주인공은 한 술 더 뜬다. 소녀가 관객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그는 뒤편 무대에 앉아있지만, 그의 시선은 연인을 향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 대신 그의 시선을 잡는 것은 손에 잡은 책, 아마도 셰익스피어의 로맨스이다. 관객을 향한 자기소개에서는 아니나 다를까 자신이 얼마나 낭만적인 청년이며, 사랑에 대한 열정에 차 있는가를 떠들어댄다. 처녀 또한 그랬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 없다.

두 젊은이에게 셰익스피어의 희곡과 모험 소설은 세상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틀이다. 이들이 세계를 문학의 무대와 연결 짓는다면 그 자신들은 문학의 주인공과 동일시하려 하는 게 당연하다. 즉, 이들이 바랐던 것은 연애가 아니다. 문학의 주인공들이 벌이는 로맨스를 그들 자신이 재현하길 바랐을 뿐이다. 기사도 소설의 이상적인 기사 아마디스 경을 흉내 내고자 편력 여행을 떠나는 기사 돈 키호테처럼. 

따라서 이 젊은이들에게 상대가 누구인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밤중에만, 그것도 담장을 한 가운데 두고서 몰래 이루어지는 연애가 지속 가능한 것은 두 아버지의 설명대로 '장애물이 있기 때문'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확하게는 이 '연애'의 상대방이 누구인가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연극은 '사랑에 빠진 사람'을 연기하고자 하는 두 1인극 배우가 결합일 뿐이다. 따라서 담장과 어둠은 장애물이기보다는 차라리 도움물에 가깝다. 햇빛 아래 서로가 서로를 '명확하게' 확인되는 순간 로미오도 줄리엣도 없었다는 진실 또한 폭로될 것이기 때문이다.

두 젊은이의 전적인 협력(?) 하에 이 극중극은 성공을 거두고, 두 아버지는 그 다음 단계를 생각한다. 그 다음 단계는 더 이상 불필요해진 위장극을 끝내면서도 두 '연인'의 욕망을 증폭시켜야 한다. 이에 두 아버지는 납치극과 구출극을 계획하게 된다. 거짓으로 납치시킨 줄리엣을 로미오가 구하게 한다는 시나리오가 노리는 바는 사실 명백하다.

흥미로운 대목은 이 연극에 동원되는 연출가와 다른 두 배우들이다. 두 아버지에게 연극을 제안하고 직접 실행하는 '악당'은 극의 시작부터 무대의 안팎을 넘나들며 연극 내외의 상황에 관여하던 '작가'이다. 연극의 연출가로서 재등장한 작가는 자신과 함께 납치극을 연기할 배우 두 명을 고용하는데, 공교롭게도 셰익스피어 전문 배우인 이들은 두 아버지를 연기했던 사람과 같은 배우들이다. 결국 이들 두 배우는 주인공 커플의 거짓 연애를 조성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사랑이 극대화되는 현장에 참여하게 된다.

구출극이 수행되는 과정에서 마트가 보여주는 검술은 매우 형편없어서, 그 자체로 코미디가 될 정도이지만 그게 구출극의 결말에 영향을 주지는 못한다. 오히려 불안요소는 따로 있다. 납치되었던 줄리엣이 악당에게 반해버린 것이다. 구출극이 성황리에 끝난뒤 담장이 걷힌 것도 사태를 악화시킨다. 햇빛 아래서 드러난 연인의 모습은 각자가 상상했던 로미오와 줄리엣보다는 물론 훨씬 못했기 때문이다. 두 젊은이의 감정은 급속도로 악화된다.

악화일로를 걷던 두 사람의 관계는 악장의 재등장으로 인하여 파국을 맞는다. 두 아버지에게 대금을 받으러 온 악당이 가짜 납치극의 진실을 마트에게 고한 것이다. 분노한 마트는 결투를 신청하지만 자신의 현실조차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환상을 쫓는 어린 아이가 악당을 상대하기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는 연극 - 곧 세계 - 전체를 관장하는 작가이자 냉혹한 현실을 보여주기도 하는 '어른'이기 때문이다. 결국 두 사람의 결투는 간단하게 악당의 승리로 끝나고, 줄리엣은 악당을 좇아 마트를 떠나고 만다.

여기서부터 연극은 반로맨스를 넘어 성장극으로 변화한다.

좌절한 마트는 일자리를 얻어 고향을 떠나고자 한다. '성장을 위한 여행'이라는, 영웅 서사시의 오랜 테마가 재현되는 셈이다. 이 때 마트는 또다른 등장인물, '요정'에게 일자리를 의뢰한다. 극중에서 가장 신비한 존재인 요정이 드디어 극의 전개에 개입하게 되는 순간이다.

요정은 극중에서 가장 신비한 존재이다. 극 시작 부분부터 무대 안팎을 누비고 다녔다는 점에서는 악당과 비슷하지만 그 비중이나 역할은 악당만큼 명확하지 않다. 기껏해야 꽃가루를 뿌리거나 춤을 추고, 악당이 두 아버지에게 납치극을 제안하며 부르는 겁탈송을 흉내낸 어설픈 노래를 부르려다가 혼나는 정도가 전부이다. 굳이 요정이 극의 전개에 기여했던 부분을 찾는다면 두 젊은이의 만남을 가로막는 담을 상징하는 막대기를 들고 있었다는 정도다.

악당(작가)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보면 요정이 상징하는 바에 대해 유추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악당이 주인공들에게 현실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줬다면 요정은 그 주인공들의 환상을 조장할 무대를 마련하거나 악당을 모방하는 모습만을 보여주었다. 현실의 모방, 그것은 물론 환상이다. 따라서 마트가 요정에게 일자리를 부탁하며 말을 거는 장면은 마트가 비로소 자신이 얽매였던 환상과 허구를 직시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접촉을 통해 밤의 요정은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고, 마트에게 악당이 고했던 '낮의 진실'과 대적할 힘을 가져다준다. 그것은, 연극이다.

요정의 인도 하에 마트가 만나는 극단이 왕년에 납치극에 가담했던 바로 그 배우들 - 곧 두 아버지 역을 맡았던 배우들! - 이며 그 배우들에게서 배우는 희곡이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마트에게 거짓 사랑을 불어넣고, 그것을 연기하게 했던 이들이 다시 한 번 연극을 하게 하는 셈이다. 물론 이때의 연극은 그전의 연극과는 다르다. 연극이 현실의 모사라는 점은 그것을 연기하는 배우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아는 법이다. 그 연기를 통해 마트는 진짜 사랑과 연출된 사랑을 구분할, 현실과 환상을 구분해낼 힘을 얻게 된다. 그리고 마트의 연극은 악당에게 이끌려 도시로 향했던 루이자의 앞에서 공연된다.

마크와 헤어진 뒤 악당은 자신을 찾아온 루이자에게 마트와 비슷한 접근을 한다. 세상이 모험 소설의 무대와 같으리라 믿고 자신에게 낭만적인 사랑을 기대하는 처녀에게 책 속의 사랑이 아닌 자신만의 사랑을 찾으라고 조언하는 것이다. 루이자가 이 충고를 받아들이는지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두 사람은 마트의 공연을 보게 된다.

공연이 끝난 뒤 마트는 악당과 재회하고, 루이자 앞에서 다시 한 번 결투를 벌인다. 물론 관객은 이번 결투의 결말을 알고 있다. 지금의 마트는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고, 자신의 진실한 감정을 분별할 줄 알게 된 ‘청년’이다. 그가 바라보는 현실은 악당이 전하는 냉혹함과는 또 거리가 멀다. 결국 마트는 결투에서 승리하고, 악당이 가졌던 가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되찾는다. 마트는 목걸이를 루이자에게 돌려주지만 루이자는 목걸이를 목에 걸지 않는다. 더 이상 줄리엣을 연기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은 자신이 누구를 사랑하는지를 안다. 재회한 연인은 서로에게 다시 한 번 사랑을 고백하고, 길었던 결혼식도 막을 내린다.



자투리 평
  1. 이 리뷰는 1월 14일에 본 공연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거의 한달 만에 올라온 셈이지만, 개요 자체는 이미 오래 전에 써두었다.
     
  2. 이 리뷰는 르네 지라르의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중 『돈 키호테』와 『적과 흑』에 대한 분석에서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리뷰의 대상이 된 두 소설을 읽지 않았다고 해도 충분히 읽을 수 있는 글이니 비평에 대해 관심이 많은 이들이라면 읽어보는게 좋겠다.
     
  3. 리뷰는 이 뮤지컬이 마치 심각한 정극이었던 것처럼 써놨지만, 실제로는 유쾌한 러브 코미디였다. 중간 중간 나오는 '겁탈송'이나 채소밭 노래도 상당히 유쾌했었고. 하지만 내용 자체는 연인들이 보기엔 조금 아슬아슬했다고 생각한다. 마트의 첫 번째 결투 뒤에 비극으로 끝내버렸다면 완성도는 더 높았으리라고 생각하지만 그랬다간 관객이 하나도 안 들어왔겠지.
     
  4. 리뷰에서 쓴 내용이 전부 연출자의 의도와 부합하리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특히 배우들이 모두 1인 2역을 맡았던 구조는 다만 극단의 인원 부족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인력, 소품 등 여러 가지가 열악한 상황에서 연출할 수 있는 최대한을 뽑아낸 것은 분명하다. 상당히 정교하게 짠 극이다.
     
  5. 배우들의 연기 수준을 따진다면 악당(극중에서는 엘가로) 역을 맡았던 분의 연기가 단연 압권. 아버지/배우 역할을 맡았던 배우들도 코미디 연기를 상당히 잘 해냈다. 주인공 커플의 연기는 다소 쳐지는 편이었는데, 연기력보다는 여주인공이 극중 설정보다는 상당히 나이 들어 보인다는 게 크지 않았나 싶다. 분명 마트 쪽이 연상인 커플인데 막상 모습은 여자 쪽이 훨씬 나이 들어 보이니. 오히려 엘가로와 루이자가 춤추는 장면이 더 연인다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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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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