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작품만을 읽고서 장르 전체를 판단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도 드물다. 그러나 한 작품을 더 읽음으로서 이미 안다고 생각했던 장르에 대한 견해 자체가 바뀌기도 마련이다. 시어도어 스터전의 말을 빌린다면 "90%의 쓰레기"가 아닌 작품을 읽었을 때 생기는 현상이다. 당연히 내게도 그러한 예로 들 만한 작품이 여러 개 있다. 『어스시의 마법사』, 「오딘의 비애」, 『옥스타칼니스의 아이들』 등.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역시 『끝없는 이야기』를 능가하는 충격을 주었던 작품은 없다.
내가 이계 진입이라 하는 소재 - 혹은 하위 장르 - 를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건 물론 판타지 소설을 처음 접하면서부터였지만, 그 소재에 대해 딱히 좋은 감정을 가져본 적은 거의 없었다. 사실 그럴 만도 했다. 내가 한창 판타지를 읽어 내리던 시절 주변에서 접할 수 있었던 '이계진입물' 중에는 쓸만한 소설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창작되던 '이계진입물'들을 싸잡아 '독자들이 대리만족할만한 요소들을 좀 더 첨가시킨 먼치킨물' 이상으로 보지 않았고, '이계 진입'이라는 소재 자체에 대해서도 호의적이질 못했다. 『끝없는 이야기』를 읽기 전까지는 그랬다는 이야기다.
『끝없는 이야기』의 도입부는 흔한 '이계진입물'과 크게 다를 게 없다. '우연히' "끝없는 이야기"라는 소설을 읽게 된 바스티안 발자타르 북스라는 소년이 책속 세계의 위기를 해결할 영웅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과연 책 속으로 들어간 소년은 세계를 구하고, 그 대신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권능을 부여받는다. 여기서 '무엇이든'이라는 건 말 그대로의 의미다. 현실 세계에서는 뚱뚱하고 작고 힘없는 소년인 바스티안도 이 세계에서는 잘생기고 훤칠하고 힘센 외모를 가질 수 있고, 바스티안이 만들어낸 이야기들은 그 세계의 현실이 된다. 그 뒤 바스티안이 벌이는 활약상. 여기까지가 소설의 전반부이며 사실 작품 내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엔데의 진면목은 오히려 그 뒷부분에서 발휘된다.
바스티안이 갖게 된 힘은 물론 강력하지만, 그만큼의 대가도 뒤따른다. 바스티안이 현실화한 이야기들은 서로 뒤엉켜서 예상치도 못했던 결과를 낳고, 그 후폭풍은 바스티안에게 몰려온다. 그러나 더욱 무서운 대가는 바스티안이 권능을 발휘할수록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어버리게 된다는데 있다. 자잘한 기억부터 시작해서 바스티안이 사랑하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 종내에는 자신의 이름까지. 자기 자신을 잃고 그 환상 세계에 함몰되는 것이야말로 권능의 가장 큰 대가이다. 그 뒤로는 바스티안이 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해 현실로 돌아가기까지의 여정이 그려진다. 여기에는 화려한 재미가 없다. 그러나 여운을 길게 남긴다.
이러한 서사가 남기는 메시지는 매우 간단하고도 명료하다. 환상의 나라는 잠시의 피난처나 성장을 위한 발판이 될 수 있지만, 결국 영원히 안주할 공간은 아니다. 현실의 인간은 현실 속에서 현실과 부딪쳐야 한다. 이토록 정교하고도 매력적인 환상세계를 창조한 작품이 말하는 게 결국은 '현실로 돌아가라'라는 거라니. 현실과 환상세계와의 접점을 다룬 작품에서 충분히 나올 만한, 어쩌면 장르의 특성을 가장 잘 살린 작품 아닐까. 소위 '이고깽'이라 하는 장르에 속하는 작품들과는 명백히 구분될 만한 작품 아닌가 말이다. 내가 최근 들어 '장르나 소재 자체보다는 그걸 어떻게 쓰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주장을 펼 때마다 늘 이 작품을 거론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여기까지가 두 번째 읽었을 때까지의 감상이었고, 몇 해 뒤에 이 작품을 다시 손에 들었을 때는 약간 달라졌다. 여태의 감상 자체가 달라졌다는 뜻은 아니다. 작품의 새로운 면에 주목하게 되었다고 봐야 한다. 바스티안 발자타르 북스야말로 내가 여태 접한 작품 중 가장 부러워해 마땅한 주인공이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떠오른 거다.
이 작품 내에서 바스티안이 들어가는 환상의 세계는 "끝없는 이야기"라는 책 속의 세계이다. 바스티안이 이 책을 덮었을 때 - 모험에서 돌아왔을 때 - 흐른 시간은 고작해야 반나절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바스티안은 창고에 숨어 책 한 권을 읽었을 뿐이다. 그러나 바스티안이 경험한 독서를 '고작' 책 한 권을 읽었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느 누가 바스티안만큼이나 '책 속에 빠져들어' 봤겠는가. 독자라면 누구나 바스티안처럼 되길 바라고, 작가라면 누구나 바스티안 같은 독자를 가져보길 바라지 않을까. 그러니 바스티안을 그리워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P.S.
『끝없는 이야기』를 처음 읽었을 때는 그렇게 높은 평가를 하지 않았었다. 당시 내가 읽어낼 수 있었던 건 이 작품이 '평범한 이고깽물'과는 뭔가 다르기야 하다는 것 뿐이었고, 결국에는 '이고깽물'을 혹평할 만한 근거로 쓰일 만한 작품을 알게 되었다는 선에서 만족했을 뿐이었다. 내가 이 작품을 이처럼 좋아하게 된건 그로부터 적어도 2년 뒤다. 그 때서야 나는 『끝없는 이야기』를 읽어낼 여유를 갖췄던 셈이다.
P.S.2
이 작품을 읽은 뒤에 엔데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보려 했던 적이 있다. 물론 1순위는 어렸을 때 이미 읽었던 『모모』였고. 워터가이드에서 당시 절판 중이었던 『거울 속의 거울』인가가를 당시 대학 강사 생활하던 모님이 제본하여 뿌렸을 때(물론 복사비는 내야 했지만) 나 역시 받으려 했지만 서울 사는 사람 한정이어서 결국 수령해지 못했던 적이 있다. 내 대신 책을 받아주셨다가 결국 책 두 권을 떠안게 된 모 님께는 늘 죄송하게 생각했었는데, 작년엔가 수년 만에 뵈었을 때 여쭤보니 다핻히도 이미 선물용으로 쓰셨다고 했다.
그 이후에는 『자유의 감옥』이라는 중단편집을 사서 읽어봤지만 『끝없는 이야기』에 비하면 아무리 생각해봐도 별로. 지금 읽으면 또 어떨지 모르겠지만 지금 감상 같아서는... 이 외에 『짐 크누프』를 비롯한 다른 책들은 소개문만 읽어봐도 아동 서적이라는 느낌이 너무나 짙게 풍겨나오는지라 차마 건드리고 싶지 않다. 이러니 엔데는 나에게 『끝없는 이야기』와 『모모』의 작가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P.S.3
가만 생각해보면 내가 『끝없는 이야기』를 읽게 된 계기 자체도 작품 자체의 가치와는 무관했다. 이름 자체는 워터가이드에 올라왔던 '벌거지 팬터지 목록 2.0'을 통해 알고 있었지만 - 이름이 꽤 멋지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 읽어볼 생각을 하게 된 건 누군가가 워터가이드에 『끝없는 이야기』 번역본 선택에 대해 올렸던 질문글을 본 뒤였다. 당시 어느 답변자가 저자인 엔데와 초역자인 차경아 사이에서의 인연에 대해 거론하며 차경아역을 추천했었는데, 그 사연이라는게 퍽 인상깊었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의 미담이 나로 하여금 엔데라는 작가의 팬으로 만든 셈이다. 그러고보면 '가십거리'의 기능이라는 것도 꼭 그렇게 무시할만한 건 아니다.
이때의 경험은 내가 거의 처음으로 '외국 판타지'를 읽게 만들면서 한편으로는 '번역본'과 '가십거리'에 대하여 그리 집착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리플로 장문의 썰을 풀어내던 그이의 모습이 그렇게 부러울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훗날 내가 '판작안'과 '작가들에 대한 가십거리'를, 그리고 '북시 위키'를 만들게 되는 단초를 제공한 원흉(?)이랄까. 하지만 작품 자체는 정말 좋았고, 탈도 많기야 했지만 '판작안' 등의 기획도 결국 내가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으니 딱히 그에게 악감정은 없다. 아니, 악감정 가지는 쪽이 이상한 거던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