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판타지 팬덤 생활에 대한 회고」라는 글을 썼었다. 따로 공개했던 적은 없고, 그냥 나 혼자 보기 위해 썼던 글이다. 제목이야 판타지 팬덤 운운이지만 실은 내가 이제껏 몸담아왔던 인터넷 커뮤니티 거의 대부분에 대한 글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일반 도서 커뮤니티인 '도서 갤러리' 정도를 제외하면 내가 소속감을 느낄 정도의 애착을 보였던 커뮤니티는 모두가 장르문학 커뮤니티였으므로. 쓴 나도 종종 내용을 잊어버릴 때가 많은「작가들에 대한 가쉽」정도를 제외하면 예전 글을 잘 뒤져보지 않는 성격이지만, 요즘 하도 험한 꼴을 많이 당해서 그냥 일부러 찾아봤더랬다.

문제는 제게 좋은 '후원자'는 있었을 지언정 좋은 '조언자'는 없었다는 겁니다. 주변의 친구들 중에는 독서 취미를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고, 어른들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당시 기껏 중학교 1학년에 불과했던 제가 독서 일정의 하나부터 열까지 다 스스로 통제해야 했다는 거죠. 좋고 나쁜 걸 구분하기이전에 어떤 책이 존재하느냐의 여부도 잘 모르는 소년이 뭘 알겠습니까. 초등학생 시절에는 무턱대로 서점 전체를 뒤져다가 마음에 드는 책을 집어오는 식으로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책 한 권 사는데 3,4시간은 기본으로 걸리는 무식한 방법이었지요. 그다지 효율적이지 않은 방법이라는 건 그 때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어요. 어떤 책이 좋다고 말해주는 자료는 거의 구할 수가 없었으니까.

(중략)

그리고 이듬해 초에 저희 집에도 인터넷이 설치되었습니다. 속도도 느린 모뎀으로 접속을 하고, 제가 야후 코리아에서 가장 먼저 검색해본 단어가 '판타지'였습니다. 장난 삼아 한 거였죠. 헌데 판타지 소설 관련 사이트가 100개도 넘게 쏟아지더군요. 경악했고, 경이로웠습니다. 자발적으로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집단이 있다는 걸 처음 깨달은 순간이었지요.

이 글을 읽으며 떠올렸던 사실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무렵의 내게는 책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눌 사람들이 정말로 절실했다. 두번째 문단의 마지막 문장을 보면 그게 좀 더 명확해진다. 나는 그들이 판타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집단이기 때문이 아니라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집단이기 때문에 반겼다.

거기에서 떠오른 두번째. 굳이 판타지가 아니라 하더라도 상관 없지 않았을까. 어쨌든 당시의 나는 장르를 막론하고 책에 대해 이야기나눌 사람들 자체가 필요했다. 심지어 나는 내게 전혀 생소한 장르를 배워 익혀서라도 그 '책에 대한 이야기'에 끼려고 했다.  그러니 처음부터 꼭 '판타지'일 필요는 없었다. 추리나 SF, 호러였어도, 심지어 로맨스였어도 결과가 크게 달라지진 않았을 거라는 이야기다. 어쨌거나 당시의 내게 중요한 건 독서가로서의 '생존'이었으니까.

판타지라는 장르 자체에는 유감이 없다. 그랬으면 사실 이런 글을 쓰지도 않았을 거다. 판타지는 그 자체로도 정말 매력적인 장르이지만, 내게 책 정보 찾는 법을 가르쳐준 은인이기도 하다. 지금의 내가, 적어도 10년 전 중1 때처럼 어떤 책을 읽어야할지 몰라 헤매지 않는 건 오롯이 판타지란 장르의 공이고 그 판타지를 통해 만났던 수많은 독서가들의 공이다. 그런 장르를 미워하기란 불가능하다.

문제는 그 팬덤. 10년간 변한 건 나만이 아니다. 팬덤도 변했다. 그것도 내게는 썩 불유쾌한 방향으로. 지금에 와서 내가 왕년에 판타지 팬덤에게서 느꼈던 경이감을 얻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 나보다 윗세대에 해당하는 판타지 팬덤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거의 다 사라졌고, 그와 동시에 하이텔 환동, 워터가이드, 드라클 등에 이르는 장구한 역사 동안 팬덤들이 축적해왔던 성과들도 거의 대부분 소실되었다. 앞에서 선도해줄 선배 세대 팬덤도, 곁에서 함께 감상을 공유할 동료 팬덤도 거의 없다. 딱히 선도하는 이들까지 바라지는 않겠다. 하지만 내가 즐겁게 읽은 작품에 대한 감상을 나누고, 공감을 얻을 이들 정도는 바라도 되지 않을까. 그렇지만 요즘 장르문학 커뮤니티의 대부분은 정말 종류를 불문하고 책 이야기만 해줘도 감지덕지할 판국이니...

이런 상황에서도 굳이 장르문학 커뮤니티들에 관심을 가져야 할까?

가만 곱씹어보면 인터넷 커뮤니티 활동을 그만둔다고 해서 딱히 잃을 게 많지도 않다. 기왕 말했듯이 내가 최근 들어 활동하던 커뮤니티 중에서 나와 성향이 맞아보이는 이는 정말 드물고, 그런 이들은 대부분 굳이 그 커뮤니티를 찾지 않는다 해도 접촉할 방도가 따로 있기 마련이다. 휴대폰 번호를 교환했건, 서로의 블로그를 찾아주건.




슬슬 매트릭스에서 떠날 때도 되었다는 이야기다.
Posted by 최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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