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vs 패션

일기/독서 2009/10/14 17:11
이틀 전, 이글루스에서 책과 관련된 논쟁이 터졌다. 평소 이글루스 메인 화면은 거의 보지 않는지라 이번에도 주변 사람들의 포스팅을 통해서 전해 들었는데, 사실 처음에 그 소식을 접할 때만 해도 별로 관심 줄만한 주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주제인즉슨 '독서 vs 패션'. 도서 갤러리에서만도 일주일이 멀다 하고 터져나오는 떡밥 아니던가. 이번에 필시 누가 만들어낸 떡밥에 순진한 도서 밸리 사람들이 다발로 낚인 일이리라고 짐작했다. 

그런데 본문을 봤더니 그게 전혀 아닌 거다. '독서 vs 패션' 논쟁에서 내게 익숙한 구도는 보통 패션(이 아니라 술, 자동차, 영화 등 어떤 취미라도 좋다)을 좋아한다는 사람이 독서 커뮤니티에 난입하여 '책 읽어봐야 남는게 뭐냐?' 하는 식으로 따지고, 거기에 멋모르는 사람들이 낚이는 식이었다. 이번에는 정 반대의 구도라고 했다. 좀 희안한 일이다 싶어서 문제의 글을 직접 찾아봤다. (고백하건대, 처음에는 도서 밸리에서 일어났던 일이리라고 짐작했다가 한참 해맸었다. 결국 패션 밸리에서 찾아냈지만.)

문제의 글을 처음 열어봤을 때의 감상이란, '아 또 이 사람인가'. 나도 들어서 이름자 정도는 아는 사람이었다. 세기말 영문학 교수 전설인가 뭔가 하는 '소설'을 실화인양 자기 블로그에 연재했다가 엔젤하이로 위키나 찌질열전 등에서 사정없이 까였던 양반 아닌가. (현재는 관련된 글이 거의 다 지워졌지만) 관심병 환자인줄은 알았어도 나르시시즘까지 있는 줄은 몰랐었는데.

대충 사건을 요약해보면 강남 쪽의 식당에서 허름한 차림으로 『양들의 침묵』을 읽다가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패션 센스와 독서 취향에 대한 흉을 들었고, 거기에 욱해 패션 밸리에서 패션에 대한 독서의 우월함을 역설하며 내친 김에 자기 책장까지 인증했다는 모양이다. What the...

'디스이스게임'에 실린 원사운드의 만화(부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 블로거 말도 일정 부분은 옳다. 누구건 취미 생활에 쓸 돈과 시간은 한정되기 마련이고, 그 한정된 재화를 어떻게 쓰느냐는 전적으로 개인의 몫이다. 그로 인해 개인 간에 발생하는 차이를 우리는 취향이라고 부른다. 좋지 않은 뉘앙스로 쓰이는 말이긴 하지만 '취향 좀 존중해주시죠?'라는 유행어가 의미하는 바가 뭐겠나. 하지만 자신의 취향이 존중받을만하다고 생각한다면 마땅히 상대방의 취향에도 같은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자신의 취향이 비난받았다고 상대방의 취향을 비난한다면, 대체 비판자와 비판 대상 사이에 뭐가 다르다는 말인가?

단순히 수집가 마냥 책장을 장식하기 위해 책을 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책을 읽기 위해서 사고, 그 책을 통해서 그 전에 느끼지 못했던 무언가를 얻기를 바란다. (그것이 말초적 즐거움이건, 새로운 깨달음이건.) 적어도 그 책을 읽기 전보다는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책을 보고, 구입한다. 결국 책은 그 자체의 목적이 아니라 수단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기에 책이 아닌 다른 매체를 통해서도 그 '무언가'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취존중'은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당초의 논쟁거리였던 책과 패션 두 가지만 놓고 본다면, 나는 이 두 매체가 상호보완적인 기능을 한다고 생각한다. 독서란 기본적으로 자기 세계에 천착하는 행위이다. SF팬덤 쪽에서는 '경이감'이라는 용어를 통해 소설을 통한 인식의 확장을 이야기하지만, 결국은 이 또한 자기 인식, 자기 세계의 깊이를 더한다는 의미일 뿐이다. 책을 많이 읽을수록 성격이 괴팍해지고 점점 외곩수가 되어간다는 '편견' 또한 이런 점에서 비롯되었을 테고.

반면 패션은 자기를 드러내는 행위이며 다분히 사회적인 행위이다. 타인을 신경쓰지 않으면 옷을 고르지는 않는다. 결국 '적절한' 옷을 고른다는 건 자기 주변의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가늠하고, 조율한다는 의미이기 마련이다. 적어도 그걸 신경쓴다는 증거는 될 수 있다. 쉽게 말해 일상 생활에서 입는 옷과 소개팅 때 입는 옷과 장례식 때 입는 옷이 다 다르지 않느냐는 말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스타일의 옷을 마련하는게 새로운 책을 사는 것에 비해 비난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나는 위에서 인용했던 만화에서 시사하는 바가 대단히 크다고 생각한다. 독서 vs 패션? 대체 왜 그런 걸 구분한단 말인가. 책 좋아하는 사람은 옷 잘 입으면 안되고, 옷 잘 입는 사람은 책 읽으면 안된다는 법이라도 있지 않은 바에야, 둘 다 잘 하면 그만이다. 어느 한 쪽에 함몰되어버려서야, 아깝지도 않은가?



P.S.

여담이지만 이 논쟁에 대한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문제의 블로거가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독서량이 그리 많지 않거나 적어도 책 관련 커뮤니티에선 활동한 전력이 없는 사람이리라고 짐작했다. 독서에 익숙한 - 다시 말해 좋은 책들이 주는 '경이감'에 익숙한 - 사람이라면 이런 논쟁에서 특정 책을 거론하며 자신의 취향을 뻐길 리 없고, 독서 커뮤니티에서 숱한 고수들을 만나본 사람이라면 이런 논쟁에서 자신의 책장을 인증하는 한심한 짓을 저지를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애당초 독서 많이 한 사람 같으면 이런 논쟁을 일으키지도 않고. 

문제의 포스팅과 책장 인증을 보고서는 내 짐작이 거의 맞으리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올해 5월 말에야 귀국한 사람이니 장서량 자체가 적은 점이야 이해한다 쳐도(배송료가 워낙 비싼 통에, 해외로 나갈 때는 자기 책을 거의 가져가지 못하는 게 현실이니까) 시바 료타료나 댄 브라운 소설을 역사 카테고리로 분류하는 수준이란... 그 외에도, 차마 할 말은 아니긴 하지만, 자칭 영문학도이며 긍지있는 독서가임을 자부하는 사람 치고는 장서 수준이 대략 난감했떤게 사실이다. 패션에 대해 운운하기 전에 그 좋아한다는 독서부터 좀 충실히 하라고 말하고 싶은게 솔직한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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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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