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초, 『퍼언 연대기』를 읽던 무렵에 읽었던 책이니 사실은 꽤 전에 읽은 책이다. 마땅히 감상을 정리하지 못한 까닭에 비공개 상태로 해놓고서 간간히 한 두 작품의 단평을 추가하곤 해온 정도다. 그렇다고 쓸만한 평가가 이루어진 것 같지도 않지만... 커그에서 테드 창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길래 내친김에 몇 자 덧붙여서 내놓는다.
- 「바빌론의 탑」 (Tower of Babylon)바빌론의 탑 건설기. 기독교인이라면 꽤나 관심 가질만하겠으나, 나로서는 그저 그랬던 작품이다. 물론 탑에 대한 묘사 등, 작품으로서의 완성도는 제법 괜찮은 편이지만 그 이상의 공감은 느끼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 「이해」 (Understand)테드 창 식의 이능력배틀물이라 보면 될까? 호쾌하고 스피디한 전개가 재미있었던 작품이다. 이수영도 그렇지만 기본적인 실력이 있는 작가는 어느 장르에서건 제 진가를 발휘하기 마련이다.
- 「영으로 나누면」 (Division by Zero)
수학 전공자들이라면 꽤 좋아하겠지만 수능 이후로 수학을 완전히 놨던 나로서는 그저 좌절의 대상일 뿐. '천재의 좌절'은 내가 좋아하는 소재이지만, 묘사되는 재능을 이해할 수 없어서야 아무 소용이 없다.
- 「네 인생의 이야기」 (Story of Your Life)이 단편집에 실린 작품들 중에서도 압도적인 걸작이다. 내가 편집자였어도 이 작품을 표제작으로 올려놓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언어학 전공자에게 읽히면 색다른 감상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하긴 하지만, 그보다 나를 감탄케 했던 건 이 작품에서 테드 창이 주인공의 정서를 전달하는 솜씨였다. 1인칭과 3인칭을 번갈아 사용해가며 정교하게 절제된 슬픔을 끼워넣는 수완은 정말 혀를 내두르게 한다.
'뻔한 이야기이기에' 외려 완성미가 돋보이는 단편이란 것도 놀랍다. 모든 소설이 다 그렇지만 '뻔함'이라는 건 단편의 독 아니던가. 그런 걸 외려 장점으로 삼아버린 재주란 참... 김보영의 단편 「0과 1 사이」(링크)는 이 작품을 읽은 후 쓴게 아닌가 싶을 정도. 사실 이건 일전의 『U, ROBOT』 작가 간담회 때 직접 물어보려다가 괜한 오해를 주고 받게 될까 싶어 관뒀었다.
- 「일흔두 글자」 (Seventy-Two Letters)골렘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바빌론의 탑」을 읽을 대도 그랬지만 과연 이게 SF가 맞는지 고민하게 만들었던품이기도 하고.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판갤의 베로스란 작자에게만큼은 절대 읽히고 싶지 않은 작품.
- 「인류과학의 진화」(The Evolution of Human Science)
이게 소설이긴 한 건가? 단편보다 더 짧은 엽편이라는 장르도 있다고는 하지만 이건 대체...
- 「지옥은 신의 부재」 (Hell Is the Absence of God)
천사 강림으로 인한 신의 은총이 죄다 신도들에게 신체적·정신적 변화를 - 신심 깊은 장애인으로 만들어버리거나 반대로 장애를 낫게하는 등 - 이끌어낸다는 이야기. 기적에 매달리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성인 컴플렉스'라는 단어로 나를 뜨끔하게 했던 작품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4월 4일자 근황에서도 다룬 바 있으니 딱히 언급하진 않겠다)
결말은 제목 그대로라 딱히 예상하고 말 것도 없었다. 다만 이영도가 「행복의 근원」이라는 단편에서 '행복의 근원은 불행'이라고 주장했던게 생각나서 조금 재미있었다는 정도. 궁금해할 사람들을 위해 덧붙여두자면, 발표 자체는 「지옥은 신의 부재」 쪽이 3년 정도 이르지만 번역본을 기준으로 하면 「행복의 근원」 쪽이 9개월 정도 이르다.
-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소고 - 다큐멘터리」 (Liking What You See: A Documentary)
김상훈 씨는 애초에 이 단편의 제목을 '얼짱신드롬 - 다큐멘터리'로 번역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이 중단편집이 처음 번역되서 나올 무렵에야 얼짱이라는 '신조어'가 한창 유행일 때였으니까 그런 생각을 했을 법도 하지만, 지금 와서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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