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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주 전에 읽고서 뒤늦게 쓰는 감상이라는 걸 감안해주시기 바란다. 이 글에는 2월 초에 썼던 문장도 있다.
0.
사실 읽기 전부터도 내가 재미있게 읽을만한 소설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짐작했었다. 사실 드래곤에는 별 흥미를 못느끼게 된지도 꽤 오래 되었으니까. 드래곤 뿐만 아니라 에픽 판타지 장르에 대한 관심 자체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샀던 건 순전히 북스피어에서 나온 책이었기 때문이다. 마침 반값 이벤트가 열렸다고는 하지만 좋아하는 출판사를 돕자는 핑계가 아니었다면 내가 이 작품을 집을 일은 결코 없었을 게다. 반값 이벤트가 아니라 공짜 이벤트라 해도 마찬가지다.
1.
작품에서 용기사들은 해당 세계관에서 자연 재해급 재앙인 사포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집단으로 묘사된다. 실제로 과거에는 사포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해줌으로서 존경과 신망을 얻었었고. 다만 1부가 시작하는 시점에서는 사포가 습격해온지도 근 400년이 지난 상황인지라 용기사의 권위고 뭐고 다 떨어진 상황이다.
이 지경이 되서도 용기사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영주들이 자신들을 상전으로 모셔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결국 1부 중반에 이르면 용기사들은 왕년의 권위를 되찾게 되는데, 역설적이게도 그것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건 왕년의 적이었던 사포의 귀환이다. 시대가 영웅을 다시 부른다고 해야 할까?
문제는 용기사라는 집단이 작중에서 묘사되는 것과는 달리 그렇게 영웅적이며 존경할 만한 인물들로 보이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은 대단히 봉건적이며 권위적이고 시대착오적이다. 사포가 없기 때문에 영주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노동을 거부하며 영주들에게 공물과 공녀들(여왕 드래곤의 파트너가 될 후보들)을 요구한다. 불만을 품는 영주들에게는 왕년에 용기사들이 수행했던 업적이나 용기사와 일반인들 사이의 '신분차'를 강조하기도 한다. 그나마 1부의 주인공 격인 플라르는 나은 편이고 2,3부로 갈수록 다른 용기사 몇몇도 권위주의적 모습을 벗으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긴 하지만 그래봤자다. 흡사 한국전쟁 참전자 출신 반공주의자들을 보는 기분이라 해야 할까. '구시대인'에 이르면 뭐 별 달리 할 말도 없을 지경이고. (물론 이들은 명백히 부정적으로 묘사되기야 한다)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주인공들을 매력적인 것처럼 묘사하니 스토리인들 궁금할리가.
시대착오적이라는 것에 더 연관짓자면, 혈통주의의 흔적마저 느껴지기도 한다. 용기사의 계급은 오로지 그 용기사의 파트너 드래곤에 따라 결정된다. 용기사 본인의 역량이 어떠하건 '황금 드래곤>청동 드래곤>갈색 드래곤>녹색 드래곤'의 서열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는 점이다. 헌데 이 결정은 오로지 드래곤의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 물론 거기에는 어떠한 설명도 없다. 용기사의 운명은 그저 타고날 뿐이다.
2.
사실 3부까지 다 읽은 후 권말의 서평에서 이 작품을 '페미니즘적 소설'이라고 평하는 걸 보고 크게 놀랐었다. 읽는 내내 그런 식으로는 한번도 생각해보질 못했고, 되레 굉장히 마초적인 소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시리즈의 첫 작품인 중편 「용의 간택」이 1967년에 나온 작품이라는 걸 감안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현대 독자들 역시 같은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수준은 분명 아니다. 소설에서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지위에 오르려 한다는 - 이미 오른데다 그게 당연시되는 것도 아니고 - 정도로 감탄할 수 있는 시대야 이미 지나지 않았나.
더군다나 여성 캐릭터를 묘사하는 방식에서도 못마땅한 부분들이 많이 비쳐지기도 한다. 예컨대 레사. 첫 중편인 「용의 간택」에서만 해도 상당히 정교한 성격을 보여주는 이 캐릭터는 남자주인공인 플라르를 만나면서부터 급격히 단순화된다. 여전히 현명하긴 하지만 성질은 예전같지 않아지고 그렇게 매력적인 면모도 보여주지 못한다. 말괄량이가 요조숙녀로 변하는 수준의 변화가 오는 건 물론 아니지만 상당히 허전해지는 건 사실이다. 그 전까지는 플라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듯 굴다가 성관계를 맞은 뒤로는 갑자기 태도가 돌변하는 것도 그렇고. 말이 관계지 따지고 본다면 세련된 형태의 강간에 지나지 않을 텐데 그런 장면을 두고도 여성주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3.
그러고보면 이 작품이 무려 SF장르라고 이야기되는 모양이다. 번역도 김상훈 씨가 맡았고. 헌데 다 읽고 난 지금도 나는 이 작품이 왜 SF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적어도 국내에 소개된 3부작만 본다면 『퍼언 연대기』는 SF라기보다는 판타지에 가깝다. 이게 SF라면 《영웅전설》 시리즈(특히 가가브 트릴로지 이전)도 SF RPG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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